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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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양원목사는  한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목회자요, 순교자였던 손양원목사의 전기를 쓴  안용준목사는 "사랑의 원자탄"이란 표현으로 손목사의 감화력을 표현하였 다.

  

  손양원 목사는 1902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26년 3월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하여 부산 감만동 교회의 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한 이래 1932년, 34년 2년간 남부민 교회를 시무한 기간을 제외하고 1939년 애양원교회에 부임할 때까지 개척 전도에 전념하였다.

 

   1939년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고 설교 때마다 주님의 뜻이 아닌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은 망하다고 주장하였다.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43년 만기 출옥이 가까웠을 때 담당 검사가 목사에게 "덴꼬(轉向)"해야만 나간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옥중에서 가정에 보낸 서신은 옥고중의 그의 신앙적 수용 자세를 보여준다.

 

 하늘에 어찌 두 해가 있을 수 있고

 일국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있으랴

 우주의 주인공이 어떻게 둘 되겠으며

 십자가의 도외에 구원이 또 어디 있으랴

 세상에는 주인도 많고 신도 많으나 여호와

 이외에 다른신이 내게 없구나

 석가도 유명하고 공자도 성자이나

 오직 내구는 홀로 예수뿐이니

 내 어찌 두신을 섬길 수 있으며 예수님 이외에

 속죄자 어디 있으랴.이신을 위하여 아까울 것

 무엇이며,이주를 버리고서 내가 어디로 가랴

 

 (손동희저,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p.89) 

 

  1948년 10월 19일 여순 반란 사건으로 두 아들이 총살당했을 때 손 목사가 장례식 끝 부분에 고백했던 마지막 인사는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한 편의 복음과도 같은 것 이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 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


  여순 반란이 진압된 후 두 형제를 죽인 자 중의 한명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그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애양원 교회는 한센병자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애양원 한센병자 수용소는 미국남장로 교회 선교회의 전도 사업의 일부분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9명으로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1천 명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의 한센병자 수용소가 되었다. 손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36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할 때까지 이곳에서 환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으며 잠자리도 같이하며, 사랑을 말로써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실천하였다. 

 

  1950년 6·25사변으로 남한의 대부분이 공산군에게 점령되자 교회도 문을 닫고 피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피난하지 않고 교회에 남아 계속 교회 종을 치게 했으며, 자신이 강사가 되어 계속하여 교회에서 특별 집회를 했다. 집회의 주요 내용은 '잘 죽자'라는 것이었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왔다.


  교인들이 "목사님, 왜 피난을 가시지 않는 겁니까?"라고 묻자, 손 목사는 "나는 원래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 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하며 피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제직들만 보냈다. 손 목사는 마침내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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