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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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에 관한 예화 모음



고집센 아이

일곱 살 된 어느 남자 아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가 소아과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오는 날에는 의사들이 모두 치를 떤다고 합니다. 병원의 온 방을 돌아다니면서 서류를 흩어놓고 바닥에 던지고 전화통을 주물러 댑니다. 어떤 때는 가구에 온갖 크레파스로 칠까지 해놓는다지요? 그럴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이런 아이가 가끔 있지요?

어느 날 아이의 신체검사를 하던 중 충치가 있음을 발견하고 논의 끝에 그 동네 병원 중에서 아이를 잘 다룬다고 소문난, 연세가 지긋한 의사 선생님께 보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미리 연락받은 그 의사 선생님이 단단히 전투 준비를 갖추고 진료실에 들어섰습니다. “의자에 앉거라. 꼬마야” 의사가 말합니다.

잠시 자기의 적을 노려보던 이 아이의 말입니다. “나를 의자에 앉히면 옷을 다 벗어버릴 거예요.”, “그렇게 하려 무나” 아, 그러자 이 꼬마가 팬티만 남기고는 옷을 다 벗어버립니다.

“얘야, 이제 의자에 올라가 앉거라.” “아직도 앉으라고 그러세요? 그러면 정말 옷을 다 벗을 거예요”, “그래? 그렇다면 벗으렴.” 이 아이가 씩씩거리면서 정말 팬티까지 벗어버립니다. “자, 이젠 네 말대로 다 벗었으니 의자에 앉거라.”

이때 아이의 표정이 변합니다. 그러더니 아무 소리 없이 의자에 앉아 고분고분 치료를 다 받습니다. “이젠 옷을 주세요.” 의자에서 내려온 아이가 말합니다. “미안하다. 오늘은 네 옷을 병원에 보관할 테니 내일 찾으러 오렴” 이 선생님의 아이 훈련이 이렇게 계속됩니다.


결국 팬티 하나만 얻어 입고 벗은 채로 엄마와 함께 병원을 떠난 그 다음날, 다시 선생님을 찾은 그 엄마가 땅에 코가 닿을 정도로 인사하며 감사했다지요?

백화점이나 공공장소에 갈 때마다 엄마에게 졸라대고 그 때마다 원하는 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몽땅 옷을 벗어버리겠다고 자기 엄마를 협박(?)하던 이 아이의 못된 버릇이 고쳐진 겁니다. 이처럼 유별나게 고집이 센 아이는 자기 부모까지 조정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요. 이것을 단호한 훈련과 대결로 물리쳐야 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습니다.

이 대결에서 부모가 꼭 승리하십시오. 그래야만 장차 아이의 그 고집이 변해서 정직한 성공을 위한 활력소로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 심


의심하면 마음속에 갖가지 망상이 생긴다. 의심은 암세포처럼 성장하여 생명을 파괴하고야 자신도 죽는다. 의심은 지독한 고집쟁이여서 쉽게 생각을 해방시켜 주지 않는다. 의심은 의심하는 대상이 없어지면 없어질 것 같지만 또다시 의심의 대상을 만들어 내는데 선수다. 사형수가 되어 감옥 생활 25년이나 되었다.

“교도관님, 저도 죽기 전에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는 수감 생활을 통하여 변화가 되었다. 모범수로 감형되어 무기 징역을 살고 있으며 교도소 내의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지금도 좋은 일 많이 하고 있는데 무슨 좋은 일을 하시려고요?”

“오늘 신문에서 스물여덟 살 두 남매를 둔 아버지가 급성 신부전증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제가 마음에 감동이 되어 장기 이식을 하고 싶은데요.”

“그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기수가 복역 중 형 집행 정지를 받고 장기 이식을 해 준 사례가 없고 법으로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원이 깊으면 이루어지듯 간절한 그의 소원은 검사로 이어졌고 검사결과에서도 이식수술 적합판정이 나왔다. 무기수에게 형집행정지가 한 번도 내려지지 않았지만 법도 선한 마음 앞에서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병원에 입원하여 정밀 검사를 하였다. 좋은 일에도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 교도소 직원들은 그를 감시하며 따라다녔다. 환자는 신문에서 사진을 볼 때에도 왠지 자신을 닮은 것 같았는데 실제 병원에서 얼굴을 보니까 자신을 많이 닮은 것 같았다. 수술을 받기 위해 침대에 누워 대기하였다.


마취제를 맞았다. 주마등처럼 지난 일들이 스쳐갔다. 아내에 대한 의심이 결국 살인까지 이른 것이다. 그는 첫 아들을 낳았지만 반가워하지 않았다. 자식을 제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아내를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교회에서 성가대를 같이 하다 아내를 만났다. 처음 의심병이 들어 온 것은 늦은 저녁 골목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부터이다. 어떤 남자의 팔짱을 끼고 가고 있었다. 교제한 지도 3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분명 순명이었다. 그는 내색을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그 길만이 순명이를 자신의 아내로 차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심은 결혼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더 커지게 되었다. 그의 계산으로는 첫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날짜가 맞지 않았다. 의심의 끊은 쇠밧줄처럼 끈질겼다. 결혼하면서 처가에서 개인병원을 차려 주었다. 의심을 하였지만 그래서 헤어질 수 없었다. 의심의 무게는 현실의 해택을 내팽개치지 못했다. 장인은 병원장이며 같은 교회의 장로였다. 그는 의심이 마음을 지배한 후 신앙에서 떠난 지 이미 오래지만 장인 눈치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심은 아내에 대한 정을 삼켜버렸다. 공허한 마음은 결혼 전부터 가깝게 지냈던 후배 지혜에게 기울어졌다. 아내는 자주 만나는 지혜와 남편의 관계를 의심을 하였다. 술을 먹고 집에 갔다.

“당신 이렇게 살 바에는 이혼해요. 나를 볼모로 삼지 말고, 깨끗이 이혼해. 이혼하면 병원이 당신 것 되지 않으니까 그렇지, 비열하게 그렇게 살지 말고 이혼해요.”

“난 이혼 못해, 이혼할 바에는 차라리 죽겠어.”

“사랑도 없으면서 왜 이혼을 못해요. 늘 나를 의심하고 있지 않아요.”

“당신이 의심할 일을 하고 다니니까 그렇지.”

“뭘 의심하게 하고 있어요.”

“내 입으로 말할까?”

“말해 봐요.”

말다툼은 끝이 없었다. 싸우는 소리에 깬 둘째 아이가 울었다. 아내는 아이를 재우러 갔다. 그러나 그는 잘 수가 없었다. 계속 술을 먹었다. 자다가 깬 아내는 그에게 또다시 따졌다.

“이렇게 살려고 그렇게 쫓아다니며 결혼하자고 했어요. 나도 따르던 남자들 많이 있었어요.”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아내의 목을 졸랐다. 아내는 쓰러졌다.


아침이 되어 아들이 물었다.

“엄마 왜 일어나지 않아.”

“응, 깊이 잠들었어.”

그는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딸과 함께 죽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주방에 가서 비닐을 가져왔다. 비닐로 말 못하는 딸의 얼굴에 씌웠다.

“아빠, 왜 그래요.”

“저리가 임마, 너와는 상관없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냐? 우리 가족일이니까 너는 상관 마.”

“아빠, 엄마 깨워야지?”

“엄마, 그래 엄마는 네 엄마 맞다.”

딸은 몸부림쳤다.

‘너도 살면 안 돼, 나와 함께 죽어야 해. 엄마 없이 아빠 없이 어떻게 살 거야. 오빠는 내 아들이 아니니까 상관없지만 너는 같이 죽어야 해.’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아들은 아버지 손을 붙들었다. 세 살 먹은 아들은 내동댕이쳐졌다.


“선생님, 깨어났어요.”

간호사가 흔들었다. 수술은 잘 되었다. 입원실에 환자의 아내와 아들딸이 찾아 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애 아버지는 할머니가 키웠어요. 할머니는 돌아가셔 가족이 없는데, 선생님이 가족도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셔서.”

“뭘요, 제 죗값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간호사가 찾아 왔다.

“이상하네요. 선생님과 환자가 너무나 일치해요. 혹시 선생님 가족은 아닌지?”

자세히 보니 환자의 아들딸도 많이 닮았다. 환자를 만났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뭘요.”

환자의 얼굴을 보았다. 혹시 아들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전도지를 받았다.

“저 교회 나갑니다.”

“그래도 읽어 보세요.”

전도지에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20:27)”라고 고딕체로 써 있었다.♥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콩트집 하늘바구니, 의심 중에서-



고집불통 양떼


필요한 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뿐 이었는데, 나는 말씨름을 벌였습니다.

필요한 건 그저 들어주는 일뿐이었는데, 입을 크게 벌리고 떠들었습니다.

일요한 건 참는 마음뿐이었는데, 주도권을 잡으려고 뛰어다녔습니다.

하나님께 드렸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어떻게든 내가 바꿔보려고 했습니다.


"충고는 필요 없어요."

"내가 다 알아서 할 수 있다니까요."

"목자 따위는 없어도 괜찮아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


  *맥스 루케이도, 길을 버리고 길을 묻다. 좋은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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