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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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회개와 번민의 시로서 작자인 다윗이 지난날의 범죄를 생각하며 애통해 하는 내용입니다. 그 범죄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 관한 일이라 하겠는데 그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악한 일이었습니다(참조, 삼하 11:2-27). 때문에 그 범죄의 결과가 본문의 서두에 기록된 것처럼 육체의 괴로움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욥처럼 범죄함 없이도 환난을 당하거나 질병에 시달릴 수도 있지만 죄를 범한 죄인들을 회개케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육체에 질병을 주시는 방법이나 대적을 들어 사용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징벌에 대한 신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육체의 쇠약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사람은 남녀노소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질병에 걸릴 소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놓인 인간의 건강이란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큰 용사였고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용사라도 자신의 육체를 통해 권고하시고 질책하시는 하나님의 책망 앞에서는 어쩔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고통에 접한 그는 왕으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겠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노력은 무용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9절의 말씀인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다'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반대로 '세상에는 모든 소원이 없다'는 역설적 표현이며 주께만 의지한다는 참회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키 한자도 더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말씀에(참조, 마 6:27) 비추어 볼 때 이 고백은 지극히 마땅하며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계속 이어지는 '나의 온갖 탄식이 주 앞에 감추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의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뇌를 적나라하게 내어 놓는다는 뜻이며, 그 구체적인 예로 10절의 신체적 고통의 상태, 즉 '심장이 뛰고, 기력이 없고, 보통 사람이 갖는 활기에 찬 눈빛이 이미 떠났다'고 병의 상태가 중함을 구체적으로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이러한 솔직한 고백과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함을 의지하는 탄식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외면치 않았습니다.

   2. 이웃들로부터 버림받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습니다.
   다윗은 환락과 열락의 날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주위에 그와 더불어 희희 낙낙했던 많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중에 있게 되자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라고 한탄할 만큼 그는 외롭게 버려졌습니다. 여기서 '상처'란 몸의 아픈 부위를 가리키는 육신적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마음이나 영혼의 아픔 등의 의미 잘 갖기도 합니다. 먼저 육신적 의미로의 상처란 자신에게나 남에게 별로 좋게 보여지지 않는 것으로 경우에 따라 악취가 나기도 하며, 통증으로 인해 고통스럽기도 하기 때문에 남에게도 이러한 상처는 당사자보다는 그 정도가 덜하겠지만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사랑을 나누었던 사랑하는 자나 친분을 나누었던 친구나 친족들이 그를 떠나는 것이며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질병의 고통을 감당하시며 치료하시며 감싸시는 동정의 하나님이요 상처에 가까이 오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십니다(참조, 사 53:4; 마 8:17). 그리고 영적인 의미로의 상처란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과 죄로 인한 고통의 복합적인 영혼의 아픔을 말합니다. 육체적 상처란 잠시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나마 고통을 약간은 덜 수 있겠지만 이 영적인 고통은 물리적으로나 남의 도움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울 수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도움밖에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맡기는 방법밖에는 그 근본적 치료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악의 상처를 지고 주님은 상함을 당했고 찔림을 당했기 때문입니다(참조, 사 53:5).
 
   3. 대적들의 공세에 침묵으로 대응하셨습니다.
   원수 마귀는 우리의 생명을 빼앗고 해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올무라는 것은 목을 매는 밧줄로 대개 사형을 집행하는 데 사용되어 집니다. 여기에 한번 걸리게 되면 빠져나오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마귀는 성도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결정적인 올무를 우리 주위에 많이 만들어 놓습니다. 이 방법이 여의치 않으면 차선책으로 우리 몸과 영혼에 상해를 주기 위해 궤계를 도모하거나 모함 등을 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의 방법이란 지혜롭게 생각하며 인내하고 동요치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만이 신앙인으로서 분별 있는 행동이며, 결국 그 궤계나 비열한 모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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