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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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라이프] 지난 6월 11일부터 시작된 남아공 축구 월드컵이 전국을 달구고 있다. 특별히 대한민국이 첫 번째 상대인 그리이스를 2:0으로 완파하면서 그 열기는 더욱 고조되고 있다. AGB 닐슨 미디어리서치의 집계결과 이날 경기의 시청율이 서울 기준 48%였고 TV를 켠 가족중의 시청비율을 따져 산정한 점유율은 61.3%로 나타났다고 한다. 공중파 방송 3곳 중 한 방송국에서만 독점적으로 중계한 결과가 이정도이고 보면 우리 국민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수 있다. 사상 처음 원정 16강을 목표로 한 한국 팀의 선전이 계속될 경우 한반도는 2002년에 못지않은 ‘대~한민국’의 붉은 함성으로 뒤덮일 것이다.

지금 이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치고 월드컵을 비켜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신앙과 축구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신앙 좋은 성도가 열광적인 축구팬이라 해서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문제는 벌써부터 축구 중계 보느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밤새 중계보느라 예배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성도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월드컵이 열리면 개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기업들이 월드컵 특수를 누리는데 유독 적지 않은 피해(?)를 보는 곳이 교회이다. 그래도 천안함 사건, 나로호 실패 등으로 국민의 사기가 곤두박질 친 현 상황에서 우리 팀의 선전으로 대한민국 국민들 전체의 행복지수가 올라간다면 교회가 입는 이 정도 피해(?)야 얼마든지 즐겁게 감래할 수 있지 않겠는가?

월드컵이 모든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질러놓은 현 상황에서 그렇다면 설교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월드컵이 전 국민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설교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핫 이슈인 월드컵을 적극적으로 설교주제의 중심으로 삼아야 하는가, 아니면 철저히 배제해야 하는가? 사실 이 문제는 전문가들마저 의견이 갈릴 만큼 간단하지 않은 주제이다. 칼 바르트(K. Barth)를 비롯한 말씀의 신학자들은 설교에서의 상황에 대한 고려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만이 유일하기 때문에 어떤 시사적인 문제를 설교에 끌어들이는 것에 반대한다. ‘설교란 삶의 전쟁터로 달려나가는 앰블런스가 아니다!’라는 말은 이들의 입장을 가장 분명하게 함축하고 있다. 반면 밀덴베르그(F. Mildenberger)는 설교를 듣는 회중들은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진단을 기대한다고 주장한다. 즉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건’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분명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되는 월드컵은 일차적으로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문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은 한민족의 운명이나 ‘선악’의 판단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종의 ‘가십성 상황’이다. 허정무 감독이 ‘유쾌한 출정’을 선언한 것처럼 월드컵은 존재나 생존, 선악이 아닌 한때 즐겁거나 우울할 수 있는 ‘유쾌한/침울한 이슈’이다. 우리 팀이 잘하면 계속 살아있는 ‘상황’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급속하게 사그러들게 되어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설교자의 고민은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설교의 근간은 그대로 가지고 가되 도입부나 종결부 혹은 본론전개시 동원하는 예화 정도로 ‘가볍게 유쾌하게’ 사용하면 될 것이다.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 월드컵 경기의 원리를 복음 및 인간의 삶과 연계하는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설교는 ‘시사’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설교는 시사보고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설교는 복음 증거라는 설교의 길을 가야 한다. 하지만 설교가 ‘월드컵’이라는 시간의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 만큼 ‘아는 체’는 하고 가는 게 예의일 것이다. 그걸 넘어서서 무거운 엉덩이로 아예 그 거리에 진을 치고 누워버린다면 그것은 설교가 가야할 길은 아니다.

정인교 박사(서울신대 설교학 교수, 한국설교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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