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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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과 신앙  (창11:1-9 엡2:13-18)   


    지난 금요일(9일) 밤 11시 월드컵 개막식에 이어 새벽 1시에는 독일과 코스타리카 개막전이 벌어졌다. 7월10 새벽 베를린 폐막전 까지 31일간 대 역전은 올림픽보다 길다. 어떻게 세계가 축구라는 한 경기를 가지고 이렇게 열광할 수 있을까? ‘잠 못 이루는 6월’이라는 표현대로 개인의 생활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정치에도 영향을 끼친다. 한국의 좌익들에게는 영 불만이다. ‘6.15’라든지 ‘평택’이라든지 ‘FTA’라든지 정치투쟁을 벌여 관심을 끌어야겠는데 온통 축구에만 관심이 쏠려서 장사가 안 된다는 애기다.
하나님은 월드컵을 어떻게 보실까? 생각해보신 적이 있는가? 함께 생각해 보자.


1.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그래도 ‘나은 일’로 보실 것이다. 이 세상에는 전쟁도 많고 갈등도 많다. 그런데 [전 세계가 한 자리에 모여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전쟁보다 훨씬 낫다는 애기다. 온갖 차이를 가진 나라들이 그런 차이를 접고 [함께 한다]는 것이 좋은 일이다. 또 모여 하는 일이 운동=축구를 한다는 것이 좋은 일이다. 축구에는 경제적 차이가 문제가 아니다. 두뇌의 차이도 문제가 아니다. 사상의 차이도 문제가 아니다. 종교적 차이도 그렇다. 경제 두뇌 사상 종교를 다 뛰어넘어 축구공 만큼이나 둥글게-하나로 엮어지니 좋게 보신다.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그는’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축구가 그리스도처럼은 아니지만, ‘둘로 하나를 만드는’ 역할을 좀 한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는’ 역할도 좀 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하여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중국이 서울에 왔다. 러시아가 서울에 왔다. 국교가 수립되었다. 양국간에 막힌 담이 허물어진 것이다. [하나됨] [화평]은 정말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원하시는 것이고 이 일을 위하여 아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다. ‘둘’ 곧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국가와 국가 간에, 인종과 인종 간에,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다.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2002월드컵 때는 일시에 600만명이 응원을 나와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도대체 한국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고 4강 신화를 만들어 냈다. 그 때는 정말 하나가 되었다.전라도와 경상도가 수도권과 강원도가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 열기가 지나간 다음에는? 여전히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가 아니면 참된 가까움은 없다는 진리!
이번 월드컵을 만약에 북한도 보게 된다면? 한국팀이 뛰는 것을 북한 인민들이 보게 된다면? 좋을 것이다. 남과 북의 인민의 마음이 그만큼 가까워질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폐쇄적인 마음도 조금은 개방적으로 넓어지지 않을까? 거기엔 [폐쇄적 민족주의]는 없다.



2. 하나의 바벨탑을 보실 것이다. 하나님은 월드컵의 긍정적인 면을 보실 뿐 아니라 어두운 면도 보실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면 작당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기 쉽다는 것.
창11:1-9에 보면 노아 홍수 이후에 함 셈 야벳으로 인하여 다시 인종이 퍼지면서, 그들이 바벨탑을 쌓았다는 말씀이 나온다. 창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언어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우리는 우랄-알타이어 계통이다. 민족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언어계통이 골상학과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언어를 계속 추적해 올라가면 한 연원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이 된다. [마=엄마][빠=아빠]는 그러한 공통적 언어일 것이다.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것은 [하나됨]에 매우 좋은 것이다. 창11:7-8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께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왜 [하나됨]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된 언어를 혼잡케 하셨는가? 왜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는가? [하나됨]이 나빠서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다른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창11: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무슨 말씀인가? 사람들이 한 언어를 쓰면서 함께 살면서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하나님을 떠나는 것’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자기들의 힘] 커진 힘을 가지고, ‘하나님은 필요 없다’ ‘하나님이 누구냐?’ ‘우리는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할 것이란 말이다. 그 [시작]이 무엇이었던가? 창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기술과 문명의 발달)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바로 이 대목이다. 하나님과 겨루려는 마음이 보인다)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사람을 유혹하고 있다. 실상은 특정 소수가 다수를 노예로 잡는 것인데) 하였더니. 이것이 시작이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일의 시작.  고대 올림픽이 그쳤듯이 근대 올림픽도 월드컵도 그칠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인간 내재적인 죄, 하나님을 떠나고-대적하는 마음 때문이다.
인간이 함께 모여 힘을 낼수록, 거기에는 하나님을 떠나는 경향을 띄게 된다는 것이다.



3. 우리가 할 일. 기도할 일이 있다. 먼저 한국대표팀이 잘 하도록 기도할 일이다.
선수 각개가 뛰어나도 팀웤이 안되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 반면에 선수 개인이 약해도 팀웤이 잘되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 23명의 대표팀이 발표되고 몇 차례의 평가전이 있었다. 잘 하는데 약간 손발이 안 맞는 데가 있었다. 갑자기 합쳐놓은 팀이니까. 약간 모자라는, 간발의 차이가 더해져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2%가 모자랐다. 그것이 채워지도록 기도하자.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도록 기도하자. 2002월드컵 때는 홈그라운드였고 사기가 충천했다. 그것이 큰 힘이 되었다. 실력 이상으로 뛴 것이다. 바로 그라운드의 기적이었다. 우리 선수들의 실력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실력 이상으로 뛰는 무엇이 작용해야 한다. 기적이다. 자기 체력이나 몸이나 실력을 가리지 않고 오직 목표를 향하여 신들리듯이 뛰어야 한다. 바로 이 [신들리듯이]라는 표현에 기적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기도할 것이다. 우리 대표팀에는 기독교인 선수가 많다. 우선 기술위원장이 이영무 목사이다. 주장 이윤재 골키퍼를 비롯하여 박주영 이영표 안정환 이천수 송종국 김동진 조원희 김두현 정경호 이호 김영광 12명이다. 23명중 절반이 넘는 수이다. 베스트 11에도 절반이 넘게 포함돼 있다. 이들이 지난 2일 출국하기 전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들에 의하여 골이 생기면?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골 세레모니]를 통하여 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자.
우리 선수들이 부상 당하지 않도록 기도하자. 마음에 부담을 덜고 가볍게 날도록 기도하자. 강한 유럽 팀과 남미 팀과 맞설 때 마치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처럼 잘하도록 기도하자.
축구공이 둥글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팀을 사랑하시니 다들 잘 싸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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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과 산 영 **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15:47-49)

  요즘 뉴스는 월드컵 축구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국내 방송사들이 월드컵 방영 권에 수백억대의 돈을 지불하고 그 것을 만회하려고 광고를 비롯해 모든 방송을 월드컵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월드컵을 스포츠로 즐기기보다 영혼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런 축제 속에서도 고통은 여전합니다. 4월4일 동원수산 원양어선 선원들이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무장단체에게 피랍되어 아직도 석방을 위해 협상 중에 있고, 지난 목요일은 나이지리아에 나가 있는 대우 건설 직원들이 “니제르델타 해방기구”의 무장단체에 피랍되었다가 풀려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사람이 피랍되었다는 뉴스만 나오면 2004년 가나무역상사 직원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피랍되어 참수당한 기억 때문에 참담합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김선일씨를 살해한 알카에다 2인자로 알려진 알자르키위가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죽고 죽이는 참혹한 현실을 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체포하려던 말고의 귀를 베어 버리자 (마26: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지구촌의 한 쪽에선 지진과 기근으로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입니다. 왜 인간들의 삶은 이렇게 불공평할까요? 성경은 인간 문제를 창세기 3장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하고 타락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러나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아담과 하와는 그 순간 몸은 살았으나 영이 죽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인정하지 않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 일락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육체는 살아 숨쉬고 있지만 그의 영은 죽어 있는 것입니다. (딤전5:6)“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그러므로 월드컵 축구를 스트레스를 풀고 즐거운 마음을 갖는 도구로 사용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더 받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인류 사회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육체는 살았으나 영이 죽은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살기 때문에 전쟁도 미움도 스트레스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문화 속에 살아가는 기독교인들도 교회를 다니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스트레스 받고, 고통 중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엄 부스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현대 크리스천들의 위기는 성령 없는 신앙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는 기독교, 회개 없는 용서, 거듭남이 없는 구원, 영생 없는 천국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요일2:16-17)“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부스의 지적은 영이 죽은 상태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감격과 기쁨이 없다면, 사명과 비전이 없다면, 생기와 풍요로움이 없다면, 평안과 행복이 없다면, 천국과 영생의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영혼이 잠자고 있던지, 병들어 있던지, 불신자처럼 죽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세상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눅7: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영이 잠자고 있거나 죽은 사람들은 무감각합니다. 삶의 목적도 비전도 없이 이 세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먹고, 마시고, 입고, 물건사고, 육체를 편하게 하는데 집중합니다. 영혼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영이 죽어있던 중세시대에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개혁신앙을 가졌던 크리스티안 게르버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사람들은 쾌락과 방종의 길을 걸었다. 농노들은 동물처럼 살았고, 부자들은 벤치에 앉아 먹고 마시고 즐겼으며 매일 이렇게 할 수 없는 이들은 주일에 그 짓을 했다. 사람들이 아침까지 춤과 술에 빠져 있었고 더욱 논쟁과 주먹다툼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타락의 반작용으로 하나님을 떠나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을 만들었는데 영이 죽은 인간의 노력은 실패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영이 죽은 사람은 절망에 빠집니다. 2차대전 때 독일의 나치들은 유대인들을 대량학살 했지만, 일제도 수천 만 명의 사람들을 죽게 하였습니다. 일제는 2만 여명의 포로를 잡아다가 4-5년 동안 수용소에 가둬놓고 일을 시켰는데 그곳에서 8,000명이나 죽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후 연구를 해보니까 그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들은 영양실조나 병 때문이 아니라 절망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개혁자 슈페너는 1675년에 '경건의 열망'이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이 책은 침체 속에 있던 수많은 독일교회와 잠자는 영혼들에 각성의 불을 지폈습니다. 슈페너는 이 책에서 잠자는 교회를 향해 여섯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목회자와 함께 정기적인 성경공부를 할 것. 둘째, 만인제사장직 회복. 셋째, 지적 신앙이 아닌 사랑의 실천적 신앙을 가질 것. 넷째, 교회 공동체에 연합할 것. 다섯째, 끊임없는 경건훈련. 여섯째, 회개와 영적 각성에 힘쓸 것을 제시하였습니다. 얼마 후 이러한 '경건의 열망'은 경건주의 운동 선언서가 되었고 그 불길은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자가 병원에서 간암판정을 받았습니다. 남은 삶은 6개월, 그는 과거를 되돌아본 후 그동안 사이가 불편했던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화해했고, 또 남은 가족들이 먹고 살만큼의 재산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교회에 헌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재검진을 받는 날 의사가 깜짝 놀라며 “지난번 검진은 오진이었습니다. 간암이 아니라 경미한 질환이었습니다. 다행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오진에 대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은 “감사합니다. 저는 간암 판정 받은 후 제 인생은 가장 인간다웠으며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살겠습니다.” 부자는 육체를 위하여 살던 삶에서 영적 삶으로 바퀸 것입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미국의 지성 다니엘 웹스터에게 물었습니다. 이제까지 당신의 마음에 품었던 생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웹스터는 한 마디로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품은 것입니다.’
  옛날 어느 왕이 변방에 근무하던 한 신하에게 사자를 보내어 출두 명령을 내렸는데 그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첫째 친구는 가장 친한 친구였고, 둘째 친구는 그 다음 좋아하는 친구였으며, 셋째 친구는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이 틀림없이 자신에게 벌을 주려고 자신을 오라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혼자 가기가 무서워서 친구들에게 동행을 부탁했습니다. 첫 친구는 쌀쌀하게 거절했습니다. 둘째 친구는 왕궁 문 앞까지는 같이 가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셋째 친구는 "가고 말고, 자네에게 무슨 죄가 있나. 함께 가서 왕을 만나기로 하세."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 죽음에 대한 비유로 첫 친구는 '재물'이며, 둘째 친구는 '가족'으로 기껏 해야 죽음을 애도해 줄 뿐이고 셋째 친구는 그가 가졌던 '믿음의 삶'으로 죽은 뒤에도 영원히 함께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006.6.11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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