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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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를 무론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임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대로 각 사람을 판단하시고 보응하십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보응은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판단은 공정하십니다. 인간의 판단하는 기준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근거를 두고 하시기 때문에 사람과 같이 외모를 보고 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행할 바 자세를 가다듬도록 하겠습니다.

   1. 심판의 기준과 원리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6절).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위는 바로 하나님의 심판 집행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면 이것은 '아무도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본 서신의 주제와 모순된다는 오해를 낳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각각 그 행한 대로 판단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 전반에 흐르는 사상입니다(참조, 전 11:9; 마 16:27). 그러나 우리는 율법 시대의 행위와 은혜 시대의 행위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율법 시대에 있어 행위는 바로 구원의 근거이긴 하지만 원인은 될 수 없었습니다. 율법 시대에도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참조, 엡 2:8). 반면에 은혜 시대의 행위는 구원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외적 증거로 나타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참조, 약 2:17). 이를 바탕으로 해서 주님은 알곡과 가라지는 행위의 열매로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구원을 얻는 자는 '참고 선을 향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7절)을 구하지만 그렇지 아니하는 자들은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배척하고 불의를 좇는'(8절) 것입니다.

   2. 심판의 대상
   하나님의 심판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이나 그렇지 못한 이방이나 할 것 없이 죄를 범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이것은 '각 사람의 영에게',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라',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는 표현 등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했으므로 심판을 받지 않으며 이방인들은 그렇지 못하므로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심판의 대상에서 자신들을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바울은 분명히 지적합니다. 그 좋은 증거가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 분이시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들었습니다(11절). 즉 하나님은 인간의 외적인 특권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3. 악을 행한 자에게 하시는 보응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한 각 사람의 영에게는 '환난'과 '곤고'를 주십니다(9절). 여기서 '영에게'라는 말은 보편성을 강조한 말이므로 '영'을 환난과 곤고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영'은 흔히 사람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참조, 롬 13:11). 그리고 환난은 외적인 육체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범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의 한 형태입니다. 또한 곤고는 내적인 마음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평강이 상실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범죄하거나 불순종함으로써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감당하기는 힘든 고통이 주어질 때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살펴보아 지체하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얻을 수 없습니다.

   4. 선을 행하는 자에게 하시는 보응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의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과 존귀는 세상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활 후 승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광과 존귀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참조, 요 17:22). 그리고 평강은 육신의 안락이나 감정의 평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변화된 후 단절되었던 하나님의 교제를 다시 회복하는 가운데 얻게 되는 참 평화를 의미합니다(참조, 레 26:6; 살후 3:6).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성도들이 행하는 선행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신자가 믿음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결국 선행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증표입니다. 성도들이 선행으로써 믿는 자의 본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풍성한 축복을 보상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II
   하나님의 심판 원리는 행한 대로의 보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판결에 대하여 억울함을 느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어떻게 했는가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이 말은 유대인에게 충격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심판이 자신들에게는 생득적으로 면제되었고 이방인에게만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원리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원리입니다. 본문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두 종류의 사람은 서로 다른 행동을 하였고,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 원리에 의해 서로 다른 하나님의 보응을 받게 됩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은총의 대상과 보응
   1) 은총의 대상은 참고 선을 행하는 자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여기서 '참는다'는 것은 소극적으로 고난을 당하기만 하는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고난을 무릅쓰고 의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여기서 '선'이라는 것은 롬 2:1-3에서 사도가 책망했던 타인의 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도 선으로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선을 행하는 자, 즉 그러한 자만이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참조, 마 24:13; 골 1:23; 히 3:14; 계 2:10).
   2) 은총의 대상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여기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영광을 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참조, 고전 6:20). 또한 '존귀'라는 것은 귀한 것 또는 보배(참조, 벧전 2:7)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존귀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썩지 아니함'은 이슬과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이 세상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의 것을 의미합니다(참조, 빌 3:8-14; 골 3:1-14; 엡 4:22-24). 이와 같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은 모두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소속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은총의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은 영생입니다.
   '영생으로 하시고', 가끔 영생을 영원히 사는 것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이는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온전한 이해는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요한 사도가 요 17:3에서 바르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차원이 아닙니다. 전존재를 통하여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은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 삶을 통하여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합니다. 참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의존하고 그분께만 속되기를 구할 때 하나님은 그와 관계를 맺으시며 늘 함께 하십니다.

   2. 진노의 대상과 보응
   1) 진노의 대상은 이기심에 얽매인 자입니다.
   '오직 당을 지어', 여기서 '당을 짓는다'는 것은 '이기심에 얽매인다'는 의미입니다. 이기심이라는 것은 자기중심주의를 말하며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아야 하는 인간의 본분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섬기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을 거부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아서 자신을 주관코자 하는 사람입니다.
   2) 진노의 대상은 불의를 좇는 자입니다.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여기서 '진리'와 '불의'는 대칭 개념으로 드러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선포하면서 그 의는 예수를 믿으므로 찾아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고 말했습니다(참조, 롬 3:21, 22:5:8). 그러기에 하나님의 의는 예수 자체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도 예수를 의미합니다(참조, 요 1:1-3; 14:6). 따라서 본문에서 진리를 좇지 않는 것과 불의를 좇는 것은 같은 것으로 결국 예수를 믿고 다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거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3) 진노의 대상에 대한 보응은 노와 분입니다.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여기서 '노'는 외부에 표현된 것으로 진노가 실현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2:9의 환난과 곤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분'은 마음속에 있으면서 아직 표출되지 않은 것을 가리킵니다. 결국 하나님을 거역하고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 임하는 것은 최후의 심판 날에 실현될 진노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는 분을 품으심, 즉 싫어하심입니다(참조, 히 10: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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