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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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1-2 복의 근원

설날입니다. 한국에서는 고향을 찾고 가족을 찾는 대 이동이 있는 시기입니다. 따로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입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여인들에게는 벅찬 시기이기도 하지만, 모처럼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스토리, 근황, 기쁨과 고민을 듣고, 이야기 꽃이 피어납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소중한 명절입니다. 오늘 가족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한국 방문 중에 있는 아내 써니는 시댁과 친정의 명절을 돕느라 바쁩니다. 시댁인 저희 집 쪽은 어머니만 홀로 계십니다. 11년 전에 캐나다로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께 아들이 넷 있는데, 첫째는 미국에, 둘째인 저는 캐나다에, 셋째는 일본에, 떠나서 뿔뿔이 흩어졌고, 막내만 한국에 남아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막내 동생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지요. 막내 제수씨까지 조카를 데리고 여기 왔으니, 지금은 어머니와 막내 둘만 있습니다. 명절 기분이 나겠습니까? 썰렁할 것입니다. 어머니께 참 죄송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참 엉뚱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누구나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데, 가족들이 함께 살지 않는 시대를 삽니다. 산업 사회가 된 이후부터, 문명의 발달, 교통의 발달로 이동이 쉬워졌습니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공부하려고, 직장을 찾아서 상경도 하고, 이사도 합니다. 심지어 다른 나라까지 이민도 합니다. 사실 그 이유도 가만히 보면 모두 가족들을 위해서 입니다.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함께 행복하게 살려고 그렇게 헤어지고 멀리 떠납니다.

그런데 세월이 훌쩍 지나고 나면, 더 이상 가족들은 예전 가족이 아닙니다. 함께 산 시간이 별로 없기에 서먹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다르게 살아왔기에 불편하기도 합니다. 헤어져 살아온 생활에 익숙해져서, 흩어져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은 참 약해졌습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의 가족은 해체된 가족입니다. 각 방 시대, 대화도 별로 없습니다. 서로의 생활에 대해 잘 모르고, 별로 관심도 없습니다. 한 집에 있어도 각자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다음 세대가 되면 아마 사촌이나 이모 삼촌 등이 없는 사람이 많을 거이고, 있어도 별로 만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문화가 너무 다르고, 함께 생활한 적이 없어서, 서먹할 뿐입니다. 가족은 해체되고 있습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에 극도의 외로움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서구 유럽에서부터 애완 동물을 집안에 키우는 문화가 생겨났습니다. 집 바깥에 있던 동물들이 집 안으로, 심지어 안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아직 덜 문명화된 지역, 대가족 혹은 식구가 많은 지역 사람들의 경우에, 동물들이 집 밖에는 있어도, 집 안에는 없습니다. 문명 사회에서 애완 동물이 집안에 들어오게 된 것은 외로움과 상관이 있을 것입니다.

외로울 때 인간은 누군가를 찾습니다.
그렇게 외로움 때문에 누군가를 찾을 때, 나의 필요를 위해 만나기에, 쉽게 상처를 주고 받고 헤어집니다. 인간에 대한 실망과 상처는 애완 동물과 주고 받는 사랑으로 해소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소중한 가족은 점점 해체되어 가고 있습니다. 괜찮은 것인가요?
하나님은 이런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먼 곳으로 이사하게 하신 이야기에서 주님의 뜻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결코 가족을 해체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가족을 계획하신 분, 만드신 분이고,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혼자 있는 것보다 함께 있는 것을 보고 흐뭇해 하시고, 서로 사랑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때로 가족 간에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고, 상처를 주고받고 깨어질 때, 무엇보다 근심하고 아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동생 아벨을 쳐 죽인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며, 사랑 없는 잔인한 형 가인에게 탄식과 분노를 나타내십니다.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요셉 이야기에서 잘 나타납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요셉은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가 가족과 생이별한 채 남의 집 종살이로 외롭게 살아갑니다. 아비지 야곱은 큰 아들들이 가져온 요셉의 옷에 묻은 피를 보며, 짐승의 밥이 되었다고 통곡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야곱도 죽은 요셉을 조금씩 잊었을 것입니다. 형들은 물론 더 쉽게 잊었을 것입니다. 요셉도 이집트에서 그저 세월을 보냅니다.

이렇게 상처 받은 채 깨어진 이산 가족이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은밀히 일하셨습니다.
이집트와 가나안에 7년 동안의 풍년이 지나고 이어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자연과 기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디자인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총리대신으로서 풍년 때에 곡식을 충분히 준비해 놓은 요셉은, 가뭄으로 먹을 것이 떨어졌기에,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온 사람들이 바로 형들임을 알게 됩니다.

요셉의 가슴은 벅차 오릅니다. 원수를 갚게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렇게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 은혜에 놀라 가슴이 감동으로 벅차 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사랑하십니다.
비록 연약하고 실수와 잘못이 많아서 상처를 주고 받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때로 원수처럼 갈라서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고, 상처를 주고 받았으면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다시 회복되고 화해를 경험할 때,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가족을 돌보시고 세우시는 든든한 울타리이십니다.

한편 우리는 성경에서 가족 관계를 깨는 것 같은 말씀을 듣습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이런 말씀들도 우리의 가족 관계를 깨고 해체시키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시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가족 사랑은 미숙하고 비뚤어져 있고, 상처를 주고 받을 때가 많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잘 모르기에 사랑의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하고 아프게 합니다. 이기적이고 배타적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우리의 가족 사랑이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백 배나 받을 것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뺏으시려는 분이 아니라, 더 주시려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새로운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오랜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옮긴 아브라함 가족은 낯선 나라에서 위축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의 여행, outreach를 통해서 아브라함 가족을 축복하십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너를 통해서 땅에 있는 민족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너는 복의 근원, 축복의 통로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넓히십니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시야를 넓히고 지경을 넓히십니다. 갈대아 우르의 한 족장이 아니라, 많은 민족을 품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하십니다. 방어적이 되기 쉬운 보잘것없는 가정이었지만, 가나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방백’이라고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은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보다 탁월하거나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흔들리는 사람이었고, up and down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 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그의 가족을 남다른 가족이 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가족이 해체되어 가는 시대에, 자녀들과 미래에 대한 염려가 큽니다. 더더욱 외로운 경쟁의 시대에, 누구나 방어적이 되고 이기적이 되어갑니다. 열심히 가족을 사랑하지만, 우리의 가족 사랑은 사실 문제가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물질은 물려줄 수 있어도, 살기 좋은 사회와 세상은 물려주지 못합니다. 돈과 성공은 올 수 있어도 외로울 것입니다. 그것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반항, 저주가 따를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도 부르십니다.
세상을 치유하시기 위함이고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안전한 성 안에 머물지 말고 믿음의 여행, outreach를 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보이는 안전 장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족을 진정으로 안전하게 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백,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 받게 될 것입니다. 복을 받을 것이고, 그 복을 나눠주는 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가족, 자녀들의 인생에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 라는 수식어가 붙도록 기도하고 축복하십시오.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흔들립니다. Up and down이 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으려고 안전해 보이는 성 안에 머물러 있으면, 언젠가 그 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의 뿌리가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소중한 가정과 사회가 황폐해져 가고 있습니다. 무너지고 버려진 인생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회복을 위해 일할 사람을 주님은 찾으십니다.

이사야 61장의 말씀처럼, 주의 성령이 임한 사람, 그래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가 되는 사람,
그래서 뿌리가 튼튼한 가정을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오래 전에 황폐해진 곳을 쌓으며,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곳도 세울 사람, 황폐한 성읍들을 새로 세우며, 대대로 무너진 채로 버려져 있던 곳을 다시 세울 사람, 황폐한 인생과 가정들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금년에 여러분을 outreach로 초대합니다.
outreach를 통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여러분 가정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도록, 시야와 지경을 넓히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으신 자연으로의 outreach,
소외와 고통이 있는 사람들에게로, 혹은 선교 현장으로 outreach 해 보십시오.

무엇보다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십시오.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서먹한 사람들에게 outreach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여행을 할 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하십시오.
‘사랑이 없이는 여행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 없이 멀리 outreach 할 때, 어디든 아름다운 흔적을 남길 수 없습니다.
피해를 주기 쉽고, 지나온 자리에 좋지 않은 냄새를 놓게 됩니다.

교회를 통한 우리의 만남과 교제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에게 outreach 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다가가는 여행에서도 사랑 없이는 하지 마십시오.
사랑 없는 교제는 상처를 주기 쉽고, 더 차가운 개인이 되고 맙니다.

사랑으로 서로에게 다가갈 때, 그 outreach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가족이 됩니다. 저의 간절한 희망은 교회가 extended family,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가족 해체의 외로운 시대에 상처 입은 개인 개인이 친구를 얻고 소속감을 얻는 장소, 마음을 열고 아픔과 기쁨을 나누는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족에 대한 주님의 뜻이고 희망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자, 믿음의 여행을 하십시오. 사랑으로 여행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넓히실 것이고, 또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브라함과 그 가족에게 복을 주시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신 것처럼,
여기 있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리고 가족들에게 복을 주소서.
많은 사람들, 가정들 가운데서, 복의 근원,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주님이 손수 심으신 의의 나무가 되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황폐된 곳을 다시 세우고, 상처 입은 시대를 치유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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