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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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디모데후서 4장 5,6절]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Kosta 집회를 마치고 나면 많은 유학생이 강사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코스타를 준비하는 사람들, 참석한 사람들의 동일한 고백이 있습니다. 그렇게 부러워 보였던 강사들의 모습이 갑자기 없어지고 그 강사들을 소위 ‘Star’로 만드신 하나님의 모습이 보인다고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복음의 본질입니다.

한국교회를 보면서 무엇이 보이나요? 만나 교회를 보면서 무엇이 생각나나요?


요즘 부쩍 많이 생각하는 것이 한국교회입니다. 참 좋은 일을 많이 하는데, 선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인데 동네북이 된 것처럼 얻어맞습니다. 아픈 것은 교회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가장 아프시고 치욕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너무 부자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교회는 가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여야 합니다. 교회의 십자가는 모양이 아니라 희생과 고통이 보여야 합니다. 누군가 자조적인 말로 밤에 시내를 내려다보면 십자가 천지인데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특히 제가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 터키에 버려진 교회 터들을 보면서 느낀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박해 때문에 세워졌던 작은 교회들이, 누군가의 순교의 피 위에서 꽃 피웠던 희생 때문에 세워진 교회들이,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되면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초대교회를 순례하며 만난 터들은 그 작았던 교회의 터가 아니라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누구의 기념교회로 거대하게 만들어졌던 터들입니다.

그 거대한 건물과 권력을 가지고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십자가의 사랑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권력으로 말미암아 폭력의 희생자들을 만들어 낸 것이죠.


제가 대학교에 다니던 때, 거의 매일 데모하는 현장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저도 학창시절 강당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한 주간 단식하며 투쟁하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5.18 광주에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반공교육을 받았던 세대들에게 그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이 불순한 자들이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 생생한 비디오테이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싸워야 했습니다. 진실을 아는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고, 잘못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학교에는 소위 “민중신학”이라는 것이 있어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진실이 드러나고, 그들의 피와 희생으로 소위 민주화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실망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피를 흘렸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바보같이 싸웠던 사람들에게 “권력”이 들어간 것이죠.

권력은 많은 사람의 순수성을 가져가 버렸고, 그들이 그렇게 싸웠던 기득권 세력들과 같은 부패한 모습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보면서, 아니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주춧돌을 놓았던 교회가 오늘날 손가락질 받는 것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문제의 본질이 “진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왜곡하는 것들 때문에,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십자가의 복음과 진리를 잊어버리고, 가진 것을 누리려고 하고, 섬기라고 주신 것들을 가지고, 섬김을 받아야 마땅한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나온 일들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부활절은, 그 십자가의 진리가 살아 있지 않는 한 어떤 기쁨도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진리가 사라져버린 것에 우리가 축하할 진정한 승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부활절 메시지와는 아주 안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부활의 기쁨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아니 죽음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나누는 이유는 부활의 삶을 산 사람만이 오늘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산 사람만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권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고백을 끊임없이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 순종이란, “무엇을 했느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복음에 사용되었느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가 받아야 할 영광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믿다가 멋지게 사명을 다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이유가 무엇일까요?

디모데도 예수를 믿었으면 멋지게 이루고 싶은 일이 있을 텐데, 왜 신중해야 하고, 왜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전도자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만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고, 그것이 순종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패배자가 있을까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을 생각해 보세요.

아니 아주 가까이 지난주에 “울지만 톤즈”라는 영화를 통해 소개한 이태석 신부를 생각해 보고, 몇 년 전에 여러분에게 소개했던 “그 청년 바보 의사”를 생각해 보세요.

모두 너무나 좋은 성품과 달란트를 가졌는데, 그렇게 젊은 나이에 하나님이 왜 더 사용하지 않으시고 데려가셨느냐는 말입니다.

얼마 전에 탤런트 선우은숙 씨와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하고 났더니 가야 할 교회가 만나 교회이고, 그래서 교회와 저를 다 조사를 해 보았답니다. “담임목사”가 뭔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담임목사를 “주지 목사”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미 책도 보고, 설교도 듣고 교인이 다 된 상태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부르셔서 이미 마음을 움직여 주셨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시키는 대로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봉사하는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태석 신부를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았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좋은 사람을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는지 말입니다. 저는 그 부분에 대하여 너무나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가진 음악적 재능, 선교사로서의 탁월함과 믿음을 가지고 얼마나 귀한 일을 했고, 또 더 할 수 있는데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얼마나 아쉬운 일입니까? 하지만, 그분의 삶이 실패가 아니라 그분의 죽음이 복음에 사용되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그분의 재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과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일어난 일을 과연 비교할 수 있을까요? 그분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복음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스데반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은 유명한 스데반의 설교와 그 말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결과입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입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초대 교회의 역사는 스데반의 죽음과 그 박해로 말미암아 두려움으로 흩어졌던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복음이 세계로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실패인가요? 아니면 그의 삶이 복음에 사용되었나요?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 서신으로 디모데 전서를 보내고, 얼마 후에 보낸 서신입니다. 앞서 보낸 디모데전서를 통해 목회자로서 살아가야 할 제반 규칙과 규정을 전했다고 하면, 디모데후서는 복음 사역자로서 갖추어야 할 영성과 인품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의 말씀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노목회자인 사도 바울이 자신을 승계할 디모데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복음전파에 전력하라고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라며 권고합니다. 또한, 자신은 생사를 초월하였음을, 그날에 부활할 것을, 또한, 그같이 의로운 자도 모두 부활할 것을 단언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평생을 전도에 바쳤습니다. 그래서 유언과도 같은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전도가 그만큼 소중하다는 사실과 전도의 사명은 죽음도 깰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6절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에서 전제는 구약시대 제사법 중의 하나로 제물을 태우기 전에 포도주를 제물에 먼저 부어 향을 내는 제사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전도하면서 생을 마감하겠다는 뜻을 자신의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제단에 바치겠다는 비장함으로 전달합니다. 그런 사도 바울의 생애를 생각하며 생각나는 단어가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은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 살고자 하는 방식과 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순종은 나를 부르신 이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거창고등학교를 만든 전영창 선생님은 기독교 정신의 토대 위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직업을 선택할 때 기준 10계명을 만들었습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


선택의 기준이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통해 진리가 지켜지고 변화가 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순종하기로 한 순간, 순종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순종에는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먼저, 순종은 순종할 대상이 온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듯이 우상을 순종해서는 안 되죠.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했지요? 이 말은 법도 순종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순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보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겸하여, 아니 타협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흔히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범하는 타협이 무엇입니까? “알면 믿고 순종하겠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합리성의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순종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믿음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기 전에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 믿음으로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이경숙 전 숙대 총장이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처음 학교를 맡아 참 힘들던 때, 설상가상으로 노조가 파업을 시작했고 마지막 40일째 고비에서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답니다. 목사님이 기도하던 중에 생각난 말씀이 있다고 하면서 노조원들을 잘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무리 생각해도 이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이죠. 노조원들이 배가 고파야 흩어질 텐데 어떻게 그들을 먹이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자신의 생각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더랍니다. 기도하며 묵상하는데 그들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서실에 전화를 해서 파업하는 노조원들에게 피자와 치킨을 시켜서 배불리 먹이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러면 안 된다고 하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도 모르니까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빨리 먹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겁니다. 노조원들이 음식을 먹고, 이 상황에서 먹을 것을 주는 총장이라면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하고는 파업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았다고 말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내가 죽으므로 내 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서서 하시는 일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또한, 순종하는 방법도 중요합니다.

지금 교회학교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김지영 전도사의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의 일이랍니다. 동생 소풍날이 다음 날이라 부모님께서 자신에게 소풍에 싸갈 과자를 심부름 시켰답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동생이 좋아하는 과자가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만 사왔습니다. 물론 나중에 부모님께 꾸지람 받게 되었답니다.

아주 짧은 이야기인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순종의 방법인 것 같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사울 왕도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자기 뜻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한 일들이 많습니다. 유명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말이 거기에서 나온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진멸하라는 물건들을 숨겨 놓았습니다. 그렇게 핑계합니다.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없이 많이 ‘비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비전을 가장한 우리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순종의 의미가 살려면 행하는 방법이 하나님의 뜻 또는 순종하는 대상의 뜻에 합당한지, 늘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순종하는 우리는 기도로써 확인해야 합니다. 즉, 늘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순종이 어렵습니다. 무조건 순종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순종할 때는 온전한 순종을,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 앞에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 앞에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판단 앞에 내 판단을 버리는 것입니다.

전장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팔을 내리고 나팔 소리대로 후퇴한 군인인 것처럼 온전한 순종은 명령 그대로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순종이 바로 믿음입니다. 분명히 온전한 순종에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순종의 역사가 나와 있습니다. 아니 순종하지 않았다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기적의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던 당시 홍해를 건널 때는 열린 바다사이를 걸어서 건넜으면 됐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요단강을 건너야 할 때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언덕까지 넘치는 강물에 믿음으로 발을 물에 담글 때 물이 멈추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똑같은 물이 갈라지는 역사이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경험하게 된 원인은 “순종” 했다는 것입니다.

‘물이 언덕까지 넘칩니다. 우리는 건널 수 없습니다.’ 했다면 아마도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은 요단강 건너편에 있을 것입니다.


열왕기서에 나오는 유명한 기적의 사건이 있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면 낫는다고 하는 선지자 엘리사의 말에 나아만 장군이 순종하였기에 어린아이와 같은 피부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순종하지 않았다면 나아만은 문둥병으로 계속 살아야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이 행하신 최초의 기적이야기를 보세요. 물을 항아리의 아귀까지 채워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하인들이 순종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혼인 잔치의 물이 포도주가 되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또 하나의 기적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고, 가라 하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고넬료의 가정은 성령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사건이 당시 상황에서, 환경에서 그들의 경험에서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아십니까?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순종하면서 일어났던 일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경험했던 일들을 말입니다.

정말 꿈같은 일들이지 않습니까? 아마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또 다른 순종을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죽지 않고, 내 속에 사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기대감이 없을 것입니다. 매 순간 두려움으로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순종이다!”라는 말이 이해가 가시나요?

순종하는 자에게 “이겨놓고 싸운다!”라는 말이 이해가 가시나요?

순종하는 자에게 “중간 결산하지 말아라!”라는 말이 이해가 가시나요?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본성과 행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작자 미상의 이런 시가 있습니다.

“ 그러자 예수님께서 우셨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곁에 둘러앉히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주린 사람은 행복하다.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통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에서 보상이 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이 말씀을 글로 적어 놓고 싶습니다.”

그러자 야고보가 말했다. “그걸 갖고 우리끼리 시험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빌립이 말했다. “이 말씀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참고 서적이 있습니까?”

……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바리새인 하나는 예수에게 앞으로 하실 수업 계획서를 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가르침의 최종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우셨다.


혹시 이 제자들처럼 이렇게 주님이 하신 말에만 집착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자신을 낮추고 순전히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습니까?


부활을 믿는 자만이 죽음을 기다립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기대를 해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잘 사는 나라들에서 종교가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뉴질랜드, 호주, 캐나다 같은 곳에서 신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50%를 넘어서고 있다고 합니다.

캐나다의 어떤 장로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여기가 천국인데 자꾸 어디를 가라는 것이냐고.”

여러분이 만족하는 것들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시나요?

여기에 만족하는 사람이 어떻게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갈 수 있나요?

여기에 만족하는 사람이 어떻게 순종할 수 있나요?

여기에 만족하는 사람이 어떻게 손해를 감수할 수 있나요?


사도 바울이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기에, 그의 삶이 불행했나요?

그는 가장 성실하게 삶을 살았던 사람, 어쩌면 치열하게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후회함이 없기에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권면할 수 있지요.

오늘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믿음의 특권입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이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 부활의 주님을 믿기 때문에 여러분이 순종할 수 있는 특권,

마땅히 죽을 수 있는 특권,

마땅히 헌신하고 피 흘리고, 손해 보고, 바보처럼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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