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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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

이계윤 목사 / 2003 / 페이지 수: 2

“하필이면 왜 내가 장애의 몸을 가지게 되었나요” “우리 아이는 장애 아이가 아니죠? 분

명히 시간이 지나면 치료되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하소연은 절규가 되어 날마다 나의 귀

에 들려오곤 한다. 누가 이들의 이 아픔의 깊이를 알겠는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장애로 인한 아픔이 너무도 크기에 장애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장애가 없는

사람도 장애를 바라볼 때에 동정의 눈빛으로 혹은 부정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기가 쉽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장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말씀합니다.

‘믿음의 조상’이 탄생하게 된 배경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

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결혼을 하자마자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면 상황은 어

떻게 되었을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배경에는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아내 사라가 있었다. 아들을

낳을 수 없다(Disability)는 것은 여인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으로 불리(Handicap)한

사건이다. 하나님은 사라의 태를 닫았다. 하나님은 사라를 여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는

장애인으로 만드셨다. 사라는 아들을 통해서 대를 잇고, 축복을 전해야 하는 당시의 상황에

서 심각한 낙인(Stigma)을 받고 살았을 것이다.

사라의 장애. 하지만 아브라함은 사라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

절된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사라를 아내로서 사랑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

지 못하는 아내 사라를 노엽게 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

한 아브라함의 가정에 하나님은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통해서

는 이러한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내의 몸종 하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지 않았다.

불가능(disabled)하다고 하는 장애인 사라를 통하여 가능케(Abled)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장애인 사라를 통해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이 순전히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바울 “약할 때 강함 주신 하나님” 고백

우리는 신약의 인물 바울을 잘 안다. 바울을 빼놓고서는 신약을 이해할 수 없고, 신학의

기초를 세울 수 없다. 사도 바울,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인

나 바울” 이것이 바울의 정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

요,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요, 가말리엘 문하생이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

은 이렇게 기억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이러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

자가를 위하여 쓰레기로 취급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빛을 만난다. 그리고

그는 실명한다. 시각장애인이 된 바울은 아나니아를 통해서 눈을 뜬다. 그러나 그는 일생동

안 시각장애인이 되었던 그 후유증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안질이었다. 바울은 하나

님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를 사도 바울은 자랑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려고 했다.

“내가 약할 때에 내가 참으로 강합니다. 내가 안질로 인한 고통이 있기에 더욱 하나님의

의지합니다. 이러한 약함이 있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의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

력이 내 몸에 흐릅니다. 이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

다. 부한데 처할 줄도 알고 가난한데 처할 줄도 압니다. 일체의 모든 비결을 배웠습니다.”

시력 장애인 바울,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더욱 위대한 일을 하셨다. 장애, 이는 인간적으로

불행한 사건이다.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고통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성경은 장애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한다.

이 뿐만 아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난 수많은 장애인인들을 보라. 바디매오가 시각장애

인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을 만났겠는가? 삭개오가 척추장애인이 아니었다면 뽕나무 위로 올

라갔겠는가? 사마리아 사람이 한센씨 병을 앓고 있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겠는

가? 예수님을 만났던 장애인들은 그가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다.

장애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 최고의 축복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오늘도 장애우 만지시는 하나님

역사는 이렇게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40세가 된

앉은뱅이(지체장애인)는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 기적을 행한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베드

로와 요한은 이 장애인을 치유함으로 감옥에 갇혔지만 이 사건 때문에 세간에 매우 유명해

졌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끝에 무사히 풀려났고, 더욱 능력 있게 자연스럽게 복음

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은 장애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장애를 통해서 일하서는 하나님!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에도, 초대교회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장애를 통해서 일하신다. 지금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

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장애를 통해서 장애 자녀를 통해서 보여주실

것이다. 더 이상 장애로 인한 절규의 목소리를 그쳐야 한다. 예수님을 만난 수많은 장애인

들 통해서 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장애를 가진 우리를 통해서 일하고 이 시간 계시기 때문

이다.

<이계윤 목사 /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

* 출처 : 온누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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