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성경본문 : 요 20:24-31

제    목 : 의심 많은 도마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알렉산더 대왕이 어느날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든지 내가 줄터이나 구하라'고 했더니 디오게네스는 '지극히 작은 것(The least portion of immortality)이라도 좋으니 영원한 것이 있으면 좀 달라'고 했답니다. 그때 알렉산더 대왕이 '그것은 내가 줄 수 없노라'고 했더니 그는 다시 '대왕이여 한 순간의 행복도 보장받을 수 없는데 무엇 때문에 세계를 정복하려고 광분하고 있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과연 알렉산더 대왕은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발을 굴렀다고 하지만 미친듯이 술을 마시다가 폭 고꾸라져 33살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디오게네스는 과연 인간의 불안이 무엇인지를 파악한 사람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기뻐할 큰 명절을 부활절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두려움과 불안의 근원적인 이유는 죽음의 문제에 있는데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부활 영생의 첫 열매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라는 것도 바로 죄의 값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요한 까닭도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사 피 흘러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 형벌을 대신하여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지 않았다면 육신을 입고 오신 성탄절도 다 무의미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믿지 않는 신자가 있다면 그는 집사든 장로든 참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물론 구원도 못받은 사람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참다운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의 인간 집단에 불과합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와 전도를 케리그마(Kerygma)라고 하는데 그 복음의 중심 메시지는 바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사건과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 사건은 기독교의 두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확실하게 전달해 주지 않으면 아무리 구제 사업을 많이 하고 사회 참여, 정치 참여를 잘 한다해도 그것은 교회가 아니며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제대로 심어주지 않습니다. 대신에 십자가의 사건을 우리 인류에게 희생과 봉사의 모범으로만 가르치고 부활은 단지 사회가 변화되고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만 합니다.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살고, 이 나라가 사는 참된 비결은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를 바로 전해 죽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너무 영적이고, 내세적이고 개인 구원을 강조하기 때문에 부패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참된 신앙이 없이 생명을 살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바로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까지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교회 다니고 예수를 믿는 것 같으면서도 부활 신앙이 없는 기독교인들과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고 기사와 이적도 보았으면서도 실상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시체나 살펴보고 향유나 발라 드리려고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막 16:16에 보면 천사가 그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리라", 또 막 16:11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여인들이 "말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14절에 보면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게서 나타나서 "저희의 믿음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저희가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도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완강히 거절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요 20:25에서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도마는 철저한 회의주의자였습니다. 어떤 성경 학자가 도마를 분석한 것을 살펴보면 도마는 우울한 기질의 소유자, 판단이 느린 자(요 14:5), 비판적인 사고방식의 사람, 한편으론 용기를 가진 자(요 11:16), 그리고 참된 마음을 가진 자로서 한번 확신을 가지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심많고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도마이지만 예수님은 '너같은 인간 하나 없어도 큰 지장 없다'하고 던저버린 것이 아니라 친히 못 박혔던 손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를 내보이면서 믿게 해주셨습니다. 결국 그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


요 20:27에 보면 예수님은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시면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손을 내밀어 만져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눈으로 보고 확신을 갖게 된 줄 압니다. 그리고 28절에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참으로 귀중합니다. 금은 보화보다 귀하고 세상의 그 무슨 보화보다 귀중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믿음이 없으면 죄사함도 구원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소중히 여기고 귀중히 보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귀에게 속아서 함부로 불신의 말이나 부정적인 말을 해선 안됩니다. 꿈에라도 불신앙의 생각이나 말을 해선 안됩니다. 마치 굶주린 자가 적은 곡식 한움큼이라도 소중히 여기듯이, 무인도에서 마지막 남은 성냥개비를 귀중히 여김같이 적은 믿음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그 믿음을 키워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나이아가라(Niagara) 폭포는 일초 동안에도 엄청난 양의 물이 떨어지면서 천둥치는 것 같은 광음을 냅니다. 그런데 그 위에 안전한 철교가 놓여져서 많은 사람들이 건너 다닙니다. 어떻게 그 다리를 놓았을까요? 먼저 연날리기를 해서 가는 실을 넘겨 보내고 그 다음에 굵은 줄을 연결하고 그 다음에 로프를 연결해 건너게 하고 그 다음에 굵은 케이블 선을 연결해서 결국 튼튼한 철교를 놓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실같은 연약한 믿음이라도 놓치지 말고 꼭 붙잡아서 키워 나가면 엄청난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미국이나 지구의 반대쪽 남미에도 전화로 연결하면 바로 앞에 앉은 사람처럼 이야기하며 의사 소통을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줄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가 있고 믿음의 줄을 통하여 응답이 들려오고 축복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선줄에 노끈을 연결한다든지 비전도체가 끼워지면 교통이 두절되고 마는 것같이 불신앙, 회의는 위험하고 해로운 것입니다. 특별히 부활 신앙을 믿는 믿음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영생도 구원도 받을 수가 없고 모든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17-19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하며 35절에 "왜 부활을 못믿을 것으로 여기느냐"고 했습니다. 곡식의 씨앗을 땅에 뿌리면 죽어 썩었다가 다시 사는 것은 믿으면서 왜 몸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까? 도마처럼 보아야 믿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은 공기나 전파처럼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영의 세계는 믿음을 가진 영의 눈으로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2.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철두철미한 회의주의자요, 비판주의자였던 도마였지만 주님의 은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본 다음에 그는 즉시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우리는 이 고백에서 여러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최고의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나 훌륭한 선생님 정도로 안 것이 아니라 '주님이 되시고 하나님이 되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창조주가 되시고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 아닙니까? 이 부활 신앙을 가진 후 의심많던 도마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전에 인도 마드라스(Mardras)에 갔더니 그곳까지 와서 오랫동안 전도하다가 이교도들의 창에 찔려 순교했다는 곳에 도마의 기념 예배당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둘째, 측량할 수 없는 기쁨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당황하고 갈등과 슬픔 속에 잠겼던 도마가 너무 기뻐서 극도의 기쁨을 감추지 못한 표현의 고백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고백입니까.


 셋째, 구원받을 주관적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의 주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My Lord, My God)이라고 한 것은 바로 나의 주님이 되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객관적인 주님으로서만 믿어선 구원받지 못합니다(마 16:16;롬 10:10;고전 12:3). 나의 구세주로 믿고 마의 입으로 고백해야 구원받습니다.


 넷째, 회개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완고한 고집을 부리며 의심했던 자신을 회개하면서 그 죄를 고백한 것입니다. 비록 못자국,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진 않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고 말씀을 듣고서야 의심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다섯째, 열렬한 충성의 고백입니다.


 과거에는 완악하고 교만해서 의심했지만 이제는 '겸손한 자세로 자기의 몸과 마음과 목숨까지 바쳐 충성하겠나이다' 하는 충성의 고백입니다. 사실 도마는 이 고백대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하기까지 충성했던 것입니다.


 여섯째, 찬양과 경배의 고백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옷자락을 보았을 때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하면서 창화하는 것과 같이 너무도 놀라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모습입니다. 계 5:12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고 한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와도 같은 것입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자요 전에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라고 찬양한 천사들의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고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한 신앙 고백에서 우리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보지 못하고도 믿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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