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반응형

성경본문 : 로마서 14장 13절-18절

제    목 : 사랑으로 행하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행치 아니함이라.' 본문에는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형제 앞에서 식물을 삼가야 할 이유가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이 이유를 '만일'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하여 말하는데 그것은 식물 그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계명에 위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믿음이 약한 자가 삼가는 식물을 믿음이 강한 자가 스스럼없이 먹음으로써 믿음이 약한 자를 근심케 한다면 이는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는 자의 소행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믿음이 약한 자가 하게 되는 근심은 어떤 종류의 근심인가? '조선출'이나 '머레이'(Murray)는 첫째로 믿음이 약한 자는 믿음이 강한 자가 아무리 식물이나 거리낌 없이 먹는 것을 죄짓는 일로 여기게 될 것이고, 이 일로 인해 믿음이 약한 자가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며, 둘째로 믿음이 약한 자도 용기를 얻게 되어 아무 식물이나 먹게 되지만 그는 결국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식물을 대하게 되기 때문에 그 마음에 근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위의 두 가지 측면에서 믿음이 강한 자의 태도는 믿음이 약한 자에게 큰 근심을 안겨 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망케 하지 말라.'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에 대한 경고를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결부시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셨는데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 식물 하나도 절제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러주기 위해서이다.


   (1)   자메이카의 후추에는 여러 가지 향기가 들어 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복음 안에는 이 세상과 천국의 모든 축복의 향기와 재료가 들어 있다. 복음은 여호와의 향기로운 성품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소유한 자는 부유하고도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향기롭게 만들어 준다.    (2)   결혼이란 평생의 기적이요, 나날이 새로워지는 자생(自生)의 경이다. -C. 킹즐리-



   본문은 식물(食物)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을 그보다도 사랑을 강조하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입니다. 즉 식물에 관련된 성도의 신앙 문제에 있어서 사랑이 중심이 되어야지 먹는 음식이 중심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자기의 신앙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 해서 믿음이 약한 자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음식물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먹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서 믿음이 약한 자가 신앙에 상처를 입어 실족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본문을 통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사랑으로 행함'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1) 희생은 '자유의 포기'입니다.

   율법에는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될 식물에 관한 많은 규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신약 시대에 와서 복음을 접하면서도 그 율법적인 생활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이 연약한 자는 믿음이 강한 자와 달리 음식을 가려 먹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 권면합니다. 그 내용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위하여 너의 그 자유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며 그 희생은 때때로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는 것도 포함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진리를 깨달음으로 자유를 얻은 유리 그리스도인들은(참조, 요 8:32) 모든 것을 그 자유에 따라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다 유익하거나 또 덕을 세우는 것만은 아닙니다(참조, 고전 8:23). 그러므로 때로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고 형제를 위하여 우리가 가진 자유를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한한 능력과 자유를 소유하신 분이셨지만 인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를 포기하셨습니다.

   2) '희생'은 주객이 전도된 삶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의 주체는 '나 자신'입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출발하여 그 가치 기준도 '나'에 둡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내가 싫으면 그만이고 그 반대로 남이 아무리 싫어해도 나만 좋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제 더 이상 '나를'주장하지 않습니다. '나'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른 새롭게 변화된 '나'이기 때문입니다(참조, 갈 2:12).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체'이고 나는 '객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몸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찮은 식물에 관한 문제라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기독교의 사랑의 메시지가 깃들어 있으며 그 메시지는 우리에게 형제와의 관계에 있어서'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역설합니다. 그것이 '사랑으로 행하는 삶'입니다.


   2. '사랑으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입니다.

   1) 성도는 모두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순수한 그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였습니다. 따라서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음에 있어서 그 누구를 탓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인간은 절망적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죽음에 처할 인간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그것은 아무 조건 없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입니다. 누구의 권유나 공로에 의지하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성도는 죽음에서 살림을 받았습니다. 영생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랑은 말로나 글로 형용하기 불가능한 그저 무한한 사랑입니다.

   2)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진 성도는 이제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조금이나마 그 빚을 갚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 빚을 갚는 길은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는 것뿐입니다. 온 힘을 다해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 그것만이 빚을 갚는 길이며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본문의 주제인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도 그러한 차원에서의 권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이 강한 자뿐 아니라 믿음이 매우 연약한 자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어느 형제에게든지 최선의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3) 사랑에는 보상이 따릅니다.

   성도가 하늘나라에서 받는 상급의 기준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는가'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고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나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의 지도자 모세가, 초대 교회의 전도자 바울이 그처럼 애쓰고 힘썼던 동기도 따지고 보면 그의 동족과 형제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연유했습니다. 그들의 업적과 사랑의 강도는 비례하고 있으며 또 그에 대한 상급 역시 비례할 것임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랑으로 행하라.hwp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