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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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2장 22절-24절

제    목 : 정탐꾼의 믿음


사건 개요


라합의 도움으로 여리고성에서 무사히 탈출한 두 정탐꾼들은 추격자를 피해 사흘 동안 산속에서 숨어 있다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여리고성에 대한 정탐 결과를 보고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자신들에게 붙이심으로 그 땅의 모든 거민들이 이스라엘로 인해 간담이 녹고 있다고 자신에 찬 보고를 하였다. 과거 모세가 보낸 12명의 정탐꾼들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역사적 배경     


이스라엘은 가나안 진입을 위해 두 번 정탐꾼을 보냈다. 첫 번째는 모세가 바란 광야에서 각 지파의 대표 12명을 보낸 것이다(민13:1-3). 그런데 이때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든 정탐꾼들이 부정적인 의견을 냄으로 말미암아 결국 이스라엘은 40년이란 세월을 광야에서 방랑하는 심판을 받게 되었다. 두 번째는 바로 싯딤에서 여호수아가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낸 것이다. 그런데 이때 여호수아는 두 사람을 남들이 알지 못하게 가만히 보내었다(수2:1). 혹시 그들이 부정적인 보고를 함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소용를 일으킬까봐 염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호수아가 보낸 두 사람은 첫 번째 정탐꾼들과는 달리 매우 희망적인 보고를 하였다. 그들의 판단의 근거는 이스라엘을 매우 두려워하는 여리고 거민들의 태도였다. 이는 출애굽부터 광야까지 행하신 하나님의 기적과 승리가 이미 가나안 거민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마르나 문서에는 가나안의 왕이 외부의 침입자에 대해 이집트의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는 내용이 발견된다. 이런 고고학적 자료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사건의 역사적 실제성을 보여준다.


구속사적 의미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은 모세가 보낸 정탐꾼들과 달리 승리의 확신에 가득찬 보고를 하였다. 바로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비로소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승리의 원동력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전투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에 있는 것이다. 이는 현시대에서 세상과의 전투에 임하는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세상과의 영적 전투도 개인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 성령의 능력을 요청하는 기도의 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본문을 통해 정탐꾼들은 라합의 충고를 잘 들었음을 알 수 있고,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사명을 무사히 완수해서 이스라엘 진영에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모든 것을 보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보고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온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으므로 가나안의 모든 거민은 간담이 녹을 정도로 크게 놀라고 두려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들을 보낸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10명이 부정적으로 보고하고, 2명이 신앙의 안목으로 긍정적으로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속의 정탐꾼들은 전적으로 신앙적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정탐꾼들의 이러한 신앙적 유산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한 시민으로서, 한 병사로서 그리고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하나의 정탐꾼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의 신앙만큼은 대단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늘나라의 한 시민이요, 하나님 나라의 군사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야 하는 특별한 사명자인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앙은 어떠했으며 그들의 신앙을 본받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1. 겸손해야 할 복음의 정탐꾼


[해석]

본문 22절에 보면 ‘사흘을 거기 유하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두 정탐꾼들은 라합의 충고를 충실히 따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리고 성에서 요단 강까지의 거리는 불과 13km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거리는 도보로는 3시간 남짓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거리를 무려 3일 동안이나 숨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라합의 충고를 충실히 들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길에서 두루 찾다가’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직역하면 ‘모든 길을 수색하다’입니다. 여리고의 병사들이 이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병사들은 이 정탐꾼을 체포하기 위해, 그리고 정탐꾼들이 이스라엘 진영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모든 길을 차단하고, 모든 길을 샅샅이 뒤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탐꾼들은 라합의 충고를 따라 길이 아니라, 산에 숨어 있었습니다. 만일 정탐꾼들이 혹시라도 여리고 병사들이 돌아가지는 않았을까 하고 산에서 내려와 길로 들어섰다면 틀림없이 발각되었을 것입니다. 이로써 라합의 충고는 참으로 적적한 것이었으며, 또 정탐꾼들이 그 충고를 충실히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일은 인간적인 자존심의 굴레에 얽메이지 않습니다. 만약 두 정탐꾼이 라합의 도움을 우습게 여기고, 라합의 충고를 무시했다면, 여리고 정복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큰 사역은 아마도 수 년 뒤로 연기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정탐꾼들은 비록 사회적으로는 무시당하는 기생이었지만, 분명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알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있는 가나안 여자였기에, 그녀의 도움과 충고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의 성실한 겸손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처럼 사회적으로는 무시당하는 자일지라도 신앙적으로 훌륭한 도움과 충고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아는 성실한 겸손이 필요합니다.


2. 사명감이 투철해야 할 복음의 정탐꾼


[해석]

본문 23절에 ‘고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에 해당하는 원어 <사파르>는 ‘조사하다, 쓰다, 수를 세다’를 뜻하는 것으로, 곧 보고 겪은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여 샅샅이 보고했다는 뜻입니다. 이 두 정탐꾼의 보고의 핵심은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는 내용인데, 이러한 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여리고성을 정탐하는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은 분명 분주하게 움직였을 것입니다. 정탐꾼들이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보고하는 모습을 표현한 단어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파르’라는 단어는 분명 정탐꾼들의 성실한 임무수행이 없이는 사용될 수가 없는 단어입니다. 여리고 성을 대충 정탐했다면, 그와 같이 세밀하게 보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정탐꾼들은 여리고성을 지리적으로만 세밀히 탐색한 것이 아니라, 여리고성의 거민들의 심리상태까지도 정탐한 철저한 사명의식이 있는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적용]

정탐꾼의 사명은 적진을 정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탐꾼을 보낼 때는 그러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적절한 사람을 선발해서 보내야만 합니다. 분명 본문의 두 정탐꾼들도 그러한 임무에 적임자였기에 정탐꾼으로 선발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정탐꾼들입니다. 여리고와도 같은 이 세상에 복음을 위한 정탐꾼으로 보내진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은 이와 같은 사명을 똑바로 깨달아 본문의 두 정탐꾼들처럼 철저하게 사명감당을 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하는 복음의 정탐꾼


[해석]

본문 24절에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붙이다’의 히브리어 ‘나탄’은 주로 ‘주다, 양도하다, 위임하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의 손 안에 넘겨 주셨으므로’라는 뜻입니다. 두 정탐꾼이 이처럼 여호수아에게 자신 있게 보고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라합의 정보(9, 11절)가 크게 작용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순전히 여리고에 대한 정탐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적용]

오늘날 우리들의 주변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인간적인 관점으로 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만 구원이 있음을 보고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본문 속의 정탐꾼들은 바로 그러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모범적 신앙을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사에서조차도 인간적 관점에서가 아닌 신앙의 안목으로 보고, 판단하는 기본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자세야 말로 세상을 이기는 힘이요, 세상을 하나님에게도 인도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나팔을 힘차게 불어야 할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에게 이들 정탐꾼들의 모습이 훌륭한 귀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는 진리의 말씀을 실천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 안목으로 매사를 대하면 조그마한 어려움에 봉착해도 쉬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이 인간의 생리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정탐꾼과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대한다면, 반드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정탐꾼의 믿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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