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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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목사의 짧은 이야기 긴 감동Ⅱ

제1부 모두가 축복받는 용서

1. 용서받아야 할 인간

어느 날 존 웨슬레는 사람들에게 용서에 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에 그 자리에서 설교를 듣고 있었던 아주 거칠고 난폭하기로 소문난 한 장군이 웨슬레 앞에 나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러나 나는 죽어도 나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사람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때 웨슬레는 그 장군에게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장군님, 그렇다면 장군님은 앞으로 죽어도 죄를 짓지 마셔야 합니다.”


또한 존 웨슬레가 길을 가다가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웨슬레는 그 친구가 오랫동안 어떤 사람과 원수로 지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웨슬레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아직도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가?"

그러자 그는 “그럼!"하고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습니다.

웨슬레가 이제 그만 그를 용서하고 화해하기를 권면했지만 그 친구는 죽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좋네. 그럼 계속해서 그 사람을 미워하게. 하지만 자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네. 앞으로 자네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을 짓을 해서는 안되네. 혹시 그 상대가 자네처럼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일줄 누가 알겠나?"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로새서 3: 13


2. 모두가 축복받는 용서

존경받는 그리스도인이었던 아브라함 링컨(Lincoln, Abraham) 대통령은 언제나 그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수모와 욕을 안겨주는 정적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람들에게 “여러분, 우리는 고릴라를 보기 위해서 아프리카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의 스프링필드에 가면 오리지널 고릴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라며 링컨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스프링필드가 링컨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고 링컨의 생김새가 고릴라 같았기 때문에 빗대어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링컨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내각을 조직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부장관 자리에 바로 이 사람을 임명하였습니다. 모든 참모들은 링컨의 이런 개편에 충격을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모들이 링컨에게 어떻게 당신의 적을 그런 중요한 자리에 앉힐 수 있냐고 물었더니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이 적이 아니지 않소. 나는 적이 없어져서 좋고, 그가 나를 돕게 되었으니 내가 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서 좋지 않소. 내가 이 사람을 용서하고 중요한 자리에 임명한 것으로 인해서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잃었단 말이오?”

복수는 복수하는 사람과 복수 당하는 사람 모두를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용서는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를 축복합니다. 복수를 해서 승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용서함으로 링컨은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언19: 11


3사람을 변화시키는 용서

어느 날 영국의 웰링턴 제독이 자기의 병사 가운데서 구제불능인 병사 하나를 사형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너를 가르치려 했지만 너는 그 가르침을 받지 않았고 다시 너를 징계하여 고치려 했지만 그 징계도 너의 삶을 돌이키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너를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지만 너는 끝까지 반성하지 않았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너를 사형하는 길이므로 사형을 집행한다.”

이때 그 병사의 친구가 갑자기 뛰어들어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웰링턴 제독님, 하지만 제독님이 저 병사에게 안한 것이 꼭 한가지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저 친구를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친구의 말에 제독은 마음에 감동을 받아 사형을 취소하고 그를 용서했습니다. “용서한다. 내가 조건 없이 너를 용서한다.”

그 다음부터 이 병사는 완전히 달라져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용서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 35


4. 아내의 기도

제 아내는 저보다 마음이 넉넉하고 관용이 많은 것 같습니다. 때로는 많은 인간관계를 통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을 텐데 저는 한번도 아내가 남을 비판하거나 욕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은 어떻게 남에 대해 흉을 보거나 하지 않소? 싫은 사람이 한 명도 없나보오.”

“왜 저라고 없겠어요. 저도 사람인데요. 하지만 싫은 사람이 있거나 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생기면 먼저 하나님께 그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합니다.”

어느 날 외출을 하고 돌아왔는데, 아내가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는 지난번 아내와 나눈 대화가 생각이 나 ‘누구를 위해 기도할까’하고 살며시 다가가서 기도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 제 남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립보서 4:5


5. 토마스 모어의 최후 진술

‘유토피아’(Utopia)를 저술한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사형 언도를 받고 마지막 재판관 앞에서 최후 진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모어, 당신은 최후의 진술을 할 수 있소.”

“재판관님,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천국에서 당신과 친구로서 만나고 싶다는 것이오. 당신은 지금 내게 사형을 집행했을지라도 스데반을 죽인 사울이 하나님을 만나 바울이 되어 스데반과 함께 천국에서 만난 것처럼 나도 당신을 만나길 기대합니다.”

재판관은 토마스 모어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봅니다.

“어찌, 당신은 내게 그런 호의적인 말을 하오. 난 당신에게 사형을 내린 사람이오.”

그러자 토마스 모어는 “주님이 내게 그렇게 대해 주셨기 때문이라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일서 4:11


6. 하나님의 긍휼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우화적인 이야기를 담아 놓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기 직전에 먼저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그 천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천사인 ‘의의 천사’라는 이름을 가진 천사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창조하고 그 세상에서 가장 으뜸 되는 피조물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의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그 인간들은 온갖 불의로 이 세상을 더럽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천사인 '거룩의 천사'라는 이름의 천사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거룩의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셔서는 안됩니다. 그 인간들은 이 세상을 더러움으로 가득 채워 놓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번째 천사인 ‘빛의 천사’를 불러 또 다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빛의 천사는 “하나님, 절대로 인간을 창조하셔서는 안됩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을 어두움으로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번째 천사인 ‘긍휼의 천사’를 불러서 또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긍휼의 천사는 다른 천사와는 전혀 다르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 이 세상은 불의하고 더러워지고 어두움에 잠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불의와 더러움과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저는 기어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과 긍휼로 돌보시며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상대하고 싶지 않은 그 사람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향해서 다가오시고 기다리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디도서 3: 5

7. 반으로 줄어드는 고통의 비결

미국 인디애나 주의 어떤 시골마을에 브레인 튜머(brain tumor)라는 병을 앓고 있는 15세 소년 브라이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병은 뇌종양과 비슷한 것으로 브라이언은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수술을 받은 후에 그는 방사선 치료 때문에 머리가 다 빠졌지만 조금씩 회복되어 학교에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학급에 20명 정도 되는 시골학교였는데 드디어 브라이언이 학교에 가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브라이언이 학교에 오기 전, 반 친구들은 그가 머리털이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오리라는 것을 알고 서로 연락해서 중요한 결정을 했습니다. 그 결정은 그들의 사랑하는 친구인 브라이언이 자존심을 다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브라이언이 고통 속에서도 당당히 학교에 계속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반 아이들 전체가 머리를 모두 밀기로 한 것입니다.

브라이언의 수업 첫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보니 브라이언 뿐만 아니라 반 학생들 모두가 머리를 밀고 앉아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머리를 깎은 이유를 알아차린 선생님은 교단에 서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친구들도 같이 울었습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나눌 수 있는 최대의 위로는 바로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린도후서 1: 7


8. 이심전심(以心傳心)

미국에서 아주 괴팍한 성격을 가진 여류 문학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주 큰 사업가였는데 이 여인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늘 집안에서 글만 썼습니다. 그녀의 인생에서 유일한 위로는 글쓰는 것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랑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귀한 외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에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그 충격으로 더욱 고립되어갔고 깊은 슬픔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부유해서 별별 치료를 다 받아보고 여행도 떠나 보았지만 그녀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녀는 글쓰는 일에도 더 이상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그 여인의 병이 치료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아들과 같이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죽은 친구의 어머니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생을 외부세계와 단절하고 살았던 이 괴팍한 여류 문학가가 처음으로 문을 열어서 이웃을 받아들였을 때 그녀는 회복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궁금해서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그 죽은 친구의 어머니가 무슨 말을 했기에 갑자기 당신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냥 나를 끌어안고 울더라고요. 나도 같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회복되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냥 같이 있어 주고 같이 울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린도후서 1: 4


9. 주를 향한 무디의 순종

이 이야기는 D. L. 무디(D. L. Moody) 목사님이 하나님께 얼마나 순종하는 마음을 갖고 그의 일생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어느 날 무디 목사님이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이자 동역자인 R. A. 토레이 목사님과 함께 시카고의 높은 빌딩 위에 올라갔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높은 곳에서 시카고 전경을 내려다보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여보게 토레이, 나는 하나님이 여기서 뛰어내리라고 명하시면 지금 당장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네.”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무디의 말에서 주님을 향한 깊은순종과 애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신명기 1: 36


10. 절대적인 순종

어느 날 한 청년이 성 프란시스 형제회에 가입하고자 수도원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형제회 위원들에게 수도원에 들어가 함께 수도하며 전도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위원들은 이 열의가 가득한 청년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고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프란시스는 마지막으로 그 청년에게 한가지 과제를 주었습니다.

“젊은이, 저기 배추가 한 포기 있는데 저 배추를 한 번 거꾸로 심어 보겠는가?”

프란시스가 이런 엉뚱한 과제를 준 이유는, 청년이 상식에 맞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에 합하지 않는 요구라 할지라도 영적인 스승의 지시에 그대로 순종하는 자질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지배했던 가장 중요한 가치관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 16


11.말 없는 순종

영국 런던에는 영국 성공회에 속해있는 성 바울 대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이 세워진 경위는 이렇습니다.

1600년 후반에 런던에서 대화재가 일어나 런던 시내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때 런던 시민들은 물론이고 영국 국민 전체가 침체되어 절망과 낙심에 빠졌습니다. 이런 상황이 닥치자 영국 여왕은 국민을 위하여 새로운 용기를 북돋아 주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멋진 예배당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여왕의 이런 마음을 알게된 영국의 한 유명한 건축가는 자신의 평생 사역으로 그 일을 자원했습니다. 그 건축가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랜(Christopher Wren)입니다. 이런 뜻깊은 의미의 성당이 건축된다는 소문이 영국 전역에 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성당의 일꾼이 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그 성당은 무려 35년간에 걸쳐서 세워져 드디어 1710년에 성 바울 대성당을 헌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은 여왕이 그 성당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했습니다. 특히 이 성당을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했던 크리스토퍼 랜은 여왕의 반응이 몹시 궁금했습니다. 여왕은 그 완성된 성당을 보자마자 입에서 “정말 놀랍군요”라는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말 한마디에 크리스토퍼 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35년간의 모든 수고가 가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성당은 나의 설계와 감독 때문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 열망을 가지고 35년간 그대로 따라준 이름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에베소서 6:5


12.피난처인 예수님

제가 미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기내를 돌아다니는 꼬마 한 명을 발견했습니다. 대여섯 살 정도 된 아주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였는데 아빠는 미국 사람이고 엄마는 한국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그 여자아이는 아주 활달한 성격 탓인지 비행기 복도에서 춤을 추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쳐다보고 만져 보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도 와서 얼굴을 만지더군요. 순식간에 이 여자아이는 비행기 안의 마스코트가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 아빠도 잊어버린 채 뒷좌석에 탄 사람들과 웃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며 여기 저기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명랑하던 아이가 순간 기류가 이상해지고 비행기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쏜살같이 엄마의 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고통받으면 가야 할 품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감당하기 힘들고 어려운 고통을 만날 때 달려갈 수 있는 품이 있고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사랑과 긍휼이 풍부하신 하나님 앞에 나와 자신의 심정을 내어놓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 -시편 144: 2


13.나보다 한 수(手) 위이신 하나님

제가 전도사 시절, 용인의 어느 시골 교회에서 부흥회 초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와 말씀을 준비하였고, 드디어 부흥회를 인도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비가 와서 예배실 이곳 저곳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여러분, 비가 곧 그치도록 기도합시다. 여호수아가 하늘을 향해 태양아 머무르라 했을 때 태양이 머물렀던 것처럼 우리도 열심히 기도하면 이 비가 그칠 것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비가 멈출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라고 믿음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비는 그칠 기미도 보이지 않고 기도하면 할수록 더욱 거세게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러다 비가 더 오면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중간에 기도를 슬쩍 바꿨습니다. “여러분, 비가 계속 오더라도 부흥회에 지장이 없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살짝 도(度)를 낮춰 기도 드린 것입니다.

기도가 끝난 후, 설교를 막 시작하려는 데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비가 그치기는커녕 더욱 세차게 몰아치고 있는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성전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교회 전도사님과 성도님들도 이 광경에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그때가 농번기라 동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지니까 비를 피해 성전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밤 그 마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 응답되지 않아도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모든 것이 선하게 응답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 28


14.피할 수 없는 하나님

제가 수 년 전 어떤 한 교회에서 새생활 세미나를 인도했을 때 일입니다.

사흘째 되는 저녁에는 도덕적인 자유에 대한 강의로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인간과 인간,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에 대한 중요성을 설교하였습니다. 그때 집을 가출한 한 자매가 저의 설교를 들었는데 여러 해 동안 자기 부모를 원망하며 멋대로 인생을 살았던 자매였습니다. 그런 인생을 살았던 자매에게 인간 사이의 화목이 중요하다는 저의 설교는 그녀의 마음에 찔림을 주었습니다.

그후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가 나오지 않았고 자기의 죄악된 생활을 회개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집으로 돌아가 부모와 화목할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고민만 하다가 교회 출석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래도 양심에 찔림 때문에 다른 교회로 출석을 하기 시작했는데 제가 또 그 교회에 나타나 우연하게도 똑같은 도덕적 자유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제발 그 내용만은 설교하지 않기를 바랬던 그 자매는 그 설교를 듣고 더욱 괴로워져 다시 교회 출석을 중단하고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방황하던 중 그녀의 친구가 불광동 수양관에서 열리는 젊은이들을 위한 수양회에 초대하여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강사로 저를 또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자매는 같은 설교를 들으며 마음에 찔림으로 번민하면서도 집회는 끝까지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수양회에 돌아와서도 끝까지 용기가 없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 낙심 중에 세월을 보냈습니다.

1년이 지난 후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자매는 새생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다시 저의 강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발 그 설교만은 안 하길 기대했지만 그녀는 또 한번 그 말씀을 듣고는 결국 더 이상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았습니다. 비로소 그녀는 하나님께 항복을 선언하고 자기의 인생을 완전히 맡긴 후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씻음 받았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그 자매에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녀는 오랜 세월 원망했던 부모를 찾아가 눈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후 그 집안이 모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 자매가 저에게 전화로 그 기쁨을 알려주었을 때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분은 어느 곳에 있든지 우주를 뒤져서라도 우리를 찾아 오셔서 “거기는 바른 길이 아니란다. 바른 길은 여기 있으니 이 길로 돌아오라. 그리고 이 길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이사야 30: 21


15.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영국의 유명한 찬송 작가인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는 서른 두 살이 되었을 때 인생이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느낀 나머지 이런 인생을 계속 살기보다 차라리 인생을 포기하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에 뛰어내릴 작정으로 마부에게 테임즈 강을 향해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표정을 수상하게 여긴 마부는 청년을 내려놓고는 그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가 강에 투신하려는 순간에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이 청년을 향해 이렇게 격려하고 돌아갑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가 이런 일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 용기를 가지고 굳세게 사십시오.” 그 마부 때문에 그의 첫 번째 계획은 실패합니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음독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웃집에 사는 사람이 우연히 그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가 아직 숨쉬고 있음을 확인하고 해독제를 먹여서 살려 냈습니다. 두 번째 자살에도 실패한 그는 ‘내가 이래서는 죽을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하여 이번에는 면도날을 가지고 손목의 동맥을 끊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놀랍게도 면도날이 부러지는 바람에 세 번째 시도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네 번째는 꼭 성공하리라 결심하며 목을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목을 매단 순간 또 이웃집 사람이 와서 매달려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곧 끈을 풀어 병원으로 데려가 살렸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어렴풋하게 ‘아, 나는 죽을 수도 없는 운명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적인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폐해져 정신병 징후에 시달렸고 계속해서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사랑했던 이웃들의 배려와 손길을 통하여 교회로 초청 받았고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에게 가장 도움을 주었던 분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찬송가405장)을 작사했던 존 뉴톤 목사님이었습니다. 존 뉴톤 목사님은 그의 친구가 되어 늘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며 상담해주고 격려하면서 그의 믿음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목사님처럼 시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양육해준 목사님을 따라 그도 자기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위해서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쓰여진 찬송시 중에는 찬송가가 되어 전세계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는 곡이 무려 67곡이나 됩니다. 그 중 우리 찬송가에 세 곡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샘물과 같은 보혈은”(190장)입니다.

그가 쓴 찬송시 중 그가 죽지도 못하고 다시 살아난 자리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했을 때 쓴 찬송시가 있는데 “주 하나님 크신 능력”(80장)입니다. 한국 찬송가는 곡조에 맞추다보니 원 작사자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지 않는데, 가사를 다시 번역하면 이런 내용의 찬송시입니다.


“하나님은 신기한 방법으로 섭리하시는 도다.

그분은 경이롭게 일하시니 바다에 그분의 발자취를 남기며

폭풍우 위로 걸어가시는 도다.

저 깊고 깊은 생각 위에 내가 알 수 없는 신묘한 기술로써

자신의 밝은 계획을 높이 세우고 그 분의 주권 적인 뜻을 이루시는 도다.

내 부족한 판단으로 주를 판단치 말지니 은혜로우신 그 주님을 의뢰할지라.

그분의 오묘한 섭리 뒤에 자신의 미소짓는 얼굴을 숨기시는 도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시편 18: 19


16.불행이 곧 행복

배 한 척이 파선하였는데 선원 중 한 명이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 극적으로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인도에서 살아나기 위해 땀흘려 나무를 모아 거의 한달 만에 살 수 있는 조그마한 오두막집을 만들었습니다. 이 오두막집이야말로 무인도에서 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피난처이자 안식처였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깊은 숲에 들어갔다가 해질 무렵 다시 자기 오두막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자신이 애써 지은 오두막집이 불 길속에 휩싸여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이 고독한 섬에서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이자 안식처인 집이 불타는 광경을 보면서도 그는 어떠한 대책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큰 좌절과 쓰라림으로 무너져 내려 그 자리에 그냥 멍하니 주저앉았습니다.

땅거미가 진 후 그는 나무 잎사귀들을 모아 해변가에 가서 임시 잠자리를 만들어 잠을 청했습니다. 오랜 날들을 땀흘리고 애써서 만든 하나밖에 없는 안식처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절망적인 가슴을 안고 깊은 고통 속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새벽녘쯤 갑자기 인기척 소리가 들려서 잠을 깼는데, 눈을 떠보니까 놀랍게도 배 한 척이 도착해 사람들이 막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영원히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갈 줄 알았던 그는 배와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고 기쁨의 소리를 지르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그들은 이 섬 앞을 지나가다가 불타는 집을 보고 ‘누군가 구조 요청을 하고 있구나’하고 이 섬에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집이 불타는 것은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이 불행한 사건 뒤에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한 극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내재되었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느니라 -잠언 5: 21


17.종된 자의 삶

교회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모두 자기가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종 의식은 교회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장관도 대통령도 모두 국민의 종이라는 사상은 기독교 사상에 근거한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민의 종노릇을 해야지 지배자가 되려고 하면 독재가 되어 나라가 잘못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주의 종을 잘 섬겨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그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이것은 유교적 영향을 받은 우리 한국 사회 구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말 때문에 목사를 ‘주의 종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호칭에서 ‘주’에는 ‘님’자가 안 붙고 ‘종’에만 ‘님’자가 붙어있어 늘 부담스럽게 들립니다. 사실 정확한 호칭으로 맞는 것은 ‘주님의 종놈’(?)입니다.

종은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인 것처럼 목자가 양을 섬기는 것이지 양이 목자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제직들은 종으로서 교우들을 잘 섬기도록 세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종은 종으로서 잘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18.섬길 수 있는 자만이 다스릴 수 있다

미국의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은 예수님을 알기 전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거듭난 후 교도소 전도자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쓴 책에 미국 의회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순간은 인도 캘커타의 고인이 되신 테레사 수녀가 미국 국회를 방문하여 연설했던 때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연설 때 연설자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테레사 수녀가 연설을 마치자 그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더랍니다. 오히려 침묵만이 감돌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숨막히는 감동과 전율이 그들의 가슴과 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박수를 칠 여유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테레사 수녀가 던진 한마디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 -빌립보서 2: 3, 4


19.황금률

어느 날 나의 일상 생활 속에서 ‘황금률이 진리다’라는 것을 체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쯤,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이 반말하는 것이 화가 났습니다. “아빠, 이리와, 이것 좀 줘”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녀석들이 건방지네. 왜 우리 아이들은 무례하고 건방질까?’하는 생각에 “너 뭐라고 했어? 왜 아빠한테 반말해?” 그랬더니 단번에 “왜 못해?”라고 되묻습니다. 그때 황금률이 생각났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그래서 순간적으로 전락을 바꿨습니다.

“아니에요. 미안해요 사실을 내가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러자 “뭔데요? 아빠”하고 되돌아 왔습니다. 남을 높이며 대접하면 나에게 높이는 대접이 돌아오고, 남을 무시하는 말을 하면 나에게 무시하는 말이 돌아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누가복음 6: 31


20.하나님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감리교 운동의 창설자인 존 웨슬레(John Wesley)는 그 당시 영국과 세계에 신앙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신앙의 무대에 강력한 라이벌로서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신학적인 입장에서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고 설교에 관한 한 사람들은 조지 휫필드를 더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외부에서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웨슬레에게 찾아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천국에 가서 조지 휫필드 목사님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웨슬레 목사님은 뜻밖에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마 만나지 못할걸요?” 질문을 던진 사람이 “그렇지요. 목사님께서는 조지 휫필드 목사님의 신앙관으로는 천국에 못 간다고 생각하시는 거지요?” 그러자 웨슬레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말을 오해하셨군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종인 조지 휫필드는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보좌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감히 그 분 곁에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웨슬레는 신학적인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는 큰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립보서 2: 3


21.섬기는 기쁨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여행하는 중에 어느 한 자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자살하고 싶은 괴로운 심정을 테레사 수녀에게 고백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묻는 그 자매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자살하기 전에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세요. 딱 한 달만 내가 일하고 있는 인도의 캘커타에 와서 나의 일을 좀 도와주신다면 그 다음에 당신이 어떻게 해야 될지 말씀해 드리죠.”

그 자매는 테레사 수녀의 말대로 캘커타 슬럼가에 가서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돕고 섬겼습니다. 그들을 위해 몸 바쳐 일하다 보니까 그녀의 마음에 삶에 대한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 자매는 그들을 돕고 섬기는 데서 순수한 환희를 느꼈고 한 달 후에는 테레사의 다른 조언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그 곳에 머물러 일하면서 테레사의 좋은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사도행전 20:35


22.함께하는 삶

인도의 성자 선다싱의 일화로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어느 날 그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네팔 전도에 나섰을 때, 친구 한 사람과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 길가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행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그들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그 행인을 도울 여유가 없었습니다. 같이 가던 친구는 그냥 가자고 했지만 선다싱은 그 사람을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었습니다. 친구와 한참을 다투다가 결국 친구를 먼저 가도록 하고 그는 추위에 떨면서 쓰러져 있던 행인을 들쳐업었습니다.

얼마동안을 걸었을까요. 한참동안 행인을 업은 채 산길을 걸어가다 보니 먼저 떠났던 그 친구가 길에 쓰러져 죽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친구는 혹독한 추위 때문에 자신의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고 죽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다싱은 자기가 들쳐업은 사람의 온기 때문에 오히려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체온이 얼어붙은 추위를 녹여 무사히 산을 넘어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12


23.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선행

바그다드라는 중동의 어떤 왕국에 어린 왕자가 강에서 놀다가 그만 거센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었습니다. 왕은 자기의 군대를 총동원해서 사랑하는 아들을 찾기 위해 며칠간 혼신의 노력을 다했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강 하류를 샅샅이 수색해도 왕자를 찾지 못한 왕은 자기 아들이 죽은 줄 알고 크게 낙망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러 주간이 지난 후에야 왕자가 어느 깊은 강의 바위 위에서 살아있는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왕은 놀랍게 살아난 왕자에게 어떻게 살아 있게 되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왕자는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강 위를 떠내려가다가 다행히 강 한복판에 우뚝 솟은 바위에 걸려서 바위 위로 올라올 수가 있었고 아침저녁으로 빵이 들어있는 가죽 주머니가 떠내려와 그것을 먹고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빵이 들어있던 가죽주머니에는 “모하메트벳 핫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사람을 수색해 보았더니 강가에 정말 그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가죽에 빵을 담아서 강 하류로 떠내려보냈던 것입니다. 왕이 그에게 그렇게 한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선행을 하라, 빵을 물위에 던지라. 그러면 그대에게 어느 날 반드시 보상되리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속담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자기가 물위로 떠내려보내는 이 빵 조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한 선행이었지만 이것이 기대하지 않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도서 11:1


24.섬김의 자부심

테레사 수녀와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순결한 인격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특별히 그녀의 질투 없는 삶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테레사가 한 어린아이의 고름을 만지며 치료하고 있을 때 함께 살고 있던 한 분이 이런 질문은 던졌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이나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혹은 높은 자리에 사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생기지 않나요? 당신은 이런 삶에 만족하십니까?”

이러한 질문에 테레사는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마가복음 9:35


24.값진 선물

어느 전도자가 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걸인에게 돈을 주려고 주머니를 뒤지며 걸인 앞으로 다가갔지만 마침 그의 주머니에는 동전이 한푼도 없었습니다. 차마 그냥 지나치기에는 그의 마음에 있던 연민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손을 내밀어 걸인의 손을 따뜻하게 쥐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죄송합니다. 마침 제게 준비된 것이 없군요. 그러나 추위에 차가워진 당신의 손을 잡아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용기를 내어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새 생활을 시작해 보십시오.”

걸인은 전도자의 말에 눈물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나에게 적선한 모든 이들보다 더욱 값진 선물을 주셨습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 3, 4


26.되돌아오는 소리

어떤 바보스러운 사람이 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의 고민은 어느 누구도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바보는 계속 고민하다가 자기의 인생을 비관하게 되었고 답답한 마음에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산도 자기를 아는 체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얼마나 비관했는지 산에 올라가서 큰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너를 싫어한다.” 그랬더니 산울림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너를 싫어한다.” 바보는 산울림에 놀라서 산에 오른 한 사람에게 왜 산이 자신을 싫어하는 지 물었습니다. 그 분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큰소리로 이렇게 외쳐 보십시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바보는 그의 말을 듣고 다시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소리가 다시 메아리로 들려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27.천국에서의 만찬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에서 식사하는 풍경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음식이나 환경이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천국과 지옥에서 먹는 음식은 모두 같았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긴 젓가락을 쓰는 것도 같았습니다.

밥 먹는 시간이 되자 드디어 천국과 지옥의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에서는 밥을 먹으려고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각자 자기 입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긴 젓가락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 서로 짜증을 내며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그 긴 젓가락으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다정하게 먹여 주면서 식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보기에도 너무도 평화롭고 즐거운 식사시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할 때 행복의 기초가 세워짐을 말해 줍니다.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누가복음 14:15



28.우스꽝스러운 비극

미국에서 역사상 제일 지독한 구두쇠로 알려진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1916년에 죽은 그 할머니의 이름은 히티 그린(Hity Green)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할머니는 얼마나 돈을 쓰지 않고 인색하게 굴었기에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었을까요?

그 할머니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필요해서 써야 하는 것, 예를 들면 음식이 차면 데워서 먹는 것조차 전기가 든다고 일평생을 그냥 차갑게 먹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이 다리를 다쳤는데도 조금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병원 비용 때문에 계속 미루다가 결국 절단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더 우리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하는 것은 할머니가 남긴 유산이 1억불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삶이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구두쇠처럼 억척스럽게 돈을 모은 것이 아니라 할머니는 많은 돈이 있으면서도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산 것입니다.

가끔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이런 할머니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도리어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더 불우한 이웃을 위해 구제의 손길을 펼치는 것을 보게 되지요. 어쩜 우리들도 이와 같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말할 수 없는 축복과 사랑을 가졌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구두쇠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 않습니까?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32


29. 3등석에 탄 사람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요 이동 수단으로 역마차를 이용했습니다. 역마차 크기는 작아도 좌석이 세 칸으로 나뉘어 있어서 1, 2, 3등석 세 종류의 승차권을 판매하여 운행했다고 합니다. 그 때만해도 지금처럼 반듯한 도로가 아니라 포장되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에 한참 달리다보면 고장이 나서 몇 번씩 정차하여 수리를 해야 했습니다. 그 순간 어느 좌석에 앉았느냐는 역마차를 탄 사람들에게 무척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야말로 1 ,2 , 3등석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1등석에 앉은 사람은 고장이 나도 아무 관여하지 않고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2등석에 앉은 사람은 고장이 나면 마차에서 내려 마차가 수리될 때까지 서서 구경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3등석에 앉은 사람은 고장이 나면 즉시 내려서 마부와 함께 마차를 수리하는데 참여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부들은 출발하기 전에 누가 3등석에 앉았는지 눈여겨보곤 했답니다. 왜냐하면 3등석 승차권을 가진 사람들이 일꾼의 역할을 제대로 해줄 때 역마차가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가복음 10:44


30.그리스도인의 참된 교제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Francis)가 세운 공동체는 중세기에 가장 유명한 공동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응집되어 있기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임을 매우 흠모하며 들어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도 인간 관계의 위기는 언제나 있듯이 이 공동체 안에서도 인간 관계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의 사랑이 점점 식어가고 서로 냉담해져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원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여러 가지의 제안들이 나왔습니다. 한 사람은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좀더 예배를 드리자.”

어떤 사람은 큰 소리로 이렇게 주장합니다.

“우리 수도원의 신앙훈련이 약화되었다. 좀더 강력한 훈련을 시작하자.”

또 다른 한편에서는 “수도원의 규칙을 강화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얘기가 오가는 동안 프란시스는 조용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한 사람이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프란시스는 단순히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다 쓸데없는 일이네. 문제는 내 안의 교만이야. 내 안에 아직도 교만이 있단 말이야.”

그 다음날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한 필의 말밖에 없어서 프란시스가 말을 타고 다른 제자들은 걸어서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프란시스는 자기 뒤를 따라오는 제자들 중에 레오나르도라는 형제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는 귀족 출신으로 버릇없이 자라서인지 수도원안에서도 늘 대접받기를 원했습니다. 사실 수도원의 불화 원인도 그 형제 때문이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이 레오나르도 형제가 앞서가는 자신의 뒤통수를 불쾌하게 째려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말 위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형제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러자 성령께서 그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 레오나르도 형제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맞소. 나는 말 탈 자격이 없어요. 당신이 말을 타야 하오.” 프란시스의 말을 들은 레오나르도는 그 자리에 엎드러지고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며 통곡했습니다. “맞습니다. 선생님. 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 형제가 말을 탄 프란시스의 뒤통수를 째려보면서 하던 생각을 성령께서 프란시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일을 통하여 놀랍게도 사랑이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이 공동체가 복음을 위해 영광을 나타내는 놀라운 공동체로 더욱 쓰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 수도원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의 복음 증거는 강력했으며 그 가운데 영적인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7: 23


31.사랑의 사귐

1772년 영국 런던에는 영향력 있는 설교자인 존 길(John Gill) 목사님이 사역하는 매우 잘 알려진 교회가 있었습니다. 존 길 목사님은 평생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그 교회 후임자로 시골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존 휘세트(John Fawcett) 목사님을 초빙하였습니다. 작은 마을의 목회자였던 존 휘세트 목사님에게는 다시 올 수 없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초빙을 복음을 통해 영국 전역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로 여기고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교인들과 교회를 떠나는 일이 마음 아프긴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에 순종하여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짐을 마차에 싣고 뜰을 나서는데 교인들이 찾아왔습니다. 떠나는 목사님을 감히 붙잡을 수 없었던 교인들이 눈물을 애써 참으며 목사님을 배웅하러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모님이 갑자기 “여보, 작은 교회지만 복음 안에서 참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교인들을 두고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요?”라며 울먹였습니다.

사모님의 말을 들은 목사님은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목사관으로 뛰어들어가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잠시 후 그는 자기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어 찬송시 한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525장이 되었습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한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안에 하나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하는 중 위로를 나누네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안에 교통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 1


32.화합의 요건은 온유

공동체가 하나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건은 바로 온유한 태도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인격으로 인하여 우리 개인과 가정, 직장, 교회가 큰 상처를 받고 관계의 화합이 깨어지게 되는 겁니다. 남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는 내 스타일은 “뒤끝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빌리선디 목사님께 찾아와서는 “나는 화를 잘 내는 것이 큰 흠입니다. 그렇지만 오래가지는 않아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자매님, 당신의 화는 오래가지 않지만 당신이 성냄으로 인해서 누군가의 마음에 남겨진 그 상처는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 1-3


33.중보자이신 예수님

빌리 그래함이 한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어느 전쟁 중에 통신병이 중요한 연락 사항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통신 수단이 두절되어 명령을 전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끊어진 전선을 연결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데 시간도 급박하고 연결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이 급박한 절대 절명의 상황 속에서 통신병은 양쪽의 전선을 자신의 양손으로 붙잡아 자기의 생명을 걸고 마지막 메시지를 아군 지원부대로 무사히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생명을 마쳤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잡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를 붙잡아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신 중보자의 모습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로마서 5: 10


34.사랑의 희생

유명한 화가가 된 알버트 뒤러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해서 학비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를 만나서 학교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의논하던 중에 친구가 이런 제의를 했습니다. “뒤러야, 우리 두 사람 모두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으니 네가 먼저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라. 그러면 나는 식당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널 도울게. 그리고 네가 공부를 마치고 나서 나를 지원해주면 우리 둘 다 공부를 할 수 있지 않겠니?”

두 친구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뒤러의 친구는 식당에 가서 그를 위해 열심히 일하여 매월 꼬박꼬박 학비를 보냈고, 뒤러는 친구의 도움으로 미술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뒤러는 자기의 학비를 벌기 위해 많은 희생을 한 친구의 도움을 생각하며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그 친구는 식당 한 구석에서 절친한 친구 알버트 뒤러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친구 뒤러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러나 하나님, 저의 손은 이미 식당 일로 인하여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으니 제가 할 몫까지 뒤러가 모두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기도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있던 알버트 뒤러는 자기를 위해 희생한 친구의 손을 바라보는 순간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즉시 붓을 들어 사랑하는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하였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그 유명한 뒤러의 “기도하는 손”입니다.

성숙함이 없는 사람은 결코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줄 수 있다는 것은 가장 거룩한 것이므로 주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도행전 20: 35


35.이기심을 극복한 희생

빅톨 위고가 쓴 유명한 소설 ‘나인티 쓰리’라는 책에는 아주 인상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란서 혁명 직후에 숲을 지나가던 병사들이 우연히 배고픔에 지친 어머니와 세 아이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병사들 중 한 상사가 빵 한 덩이를 그들에게 던져주자, 어머니는 지체하지 않고 빵을 세 조각으로 똑같이 잘라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옆에서 바라보던 한 젊은 병사가 빵을 주었던 상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여자는 배가 고프지 않은 모양이죠?” 그러자 상사는 “그게 아냐,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이기 때문이지.”

어머니의 사랑이 이기심을 극복하게 하여 희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36.마땅한 권리를 포기한 성도

중국의 유명한 성도인 윗치만 니(Wachman Nee)가 간증한 내용입니다.

어떤 마을에 예수를 믿는 한 성도가 살았는데 그의 논에는 항상 물이 풍성하게 고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 마침 심한 가뭄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루 밤새에 자기의 논에 고여있던 물이 다 빠져나가고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보았더니 바로 옆에 있던 이웃집에서 자기 논의 물을 밤새도록 빼내어 간 것입니다. 그 성도는 그 물이 자기 논에 고여 있던 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물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행동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튿날 아침, 이웃을 찾아가 따졌습니다.

“왜 당신은 나의 논에 고여 있던 내 물을 다 빼내어 갔습니까?”

그의 주장에 변명할 여지가 없었던 이웃은 못내 사과를 하며 빼내어 갔던 물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논에 나가보니 물은 또 다 빠져나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이웃을 찾아가 다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러한 일이 몇 번씩이나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성도는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여 물을 찾아왔는데도 마음이 도대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당한 일을 하는데 왜 저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까?”

그의 기도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너는 왜 정당한 일만 하려고 하느냐? 나는 네가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길 바란다.”

“하나님! 그렇다면 도대체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 준 것처럼 너도 그 사람을 대하여라.”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 의미를 몰라 여러 번 계속 물으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마음에 큰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그날 밤 그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튿날 새벽이 되기도 전에 일찍 나가서 이웃사람이 자기 논에서 물을 빼내어가기 전에 미리 자기 논의 물을 이웃의 논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는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다시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9


37.유대교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한 유대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왜 당신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유대인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라며 강한 어투로 대답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의 대답을 통해 기독교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서 낮고 낮은 이 세상에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친히 인간의 몸으로 오셨음을 믿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유대교와는 틀리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했습니다. 그 유대인은 결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실 수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또 다른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에는 당신들이 믿지 않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 반면에 유대교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잖아요? 기독교는 열심히 전도하니까 그렇게 믿는 수가 증가할 수 밖예요. 그러나 우리는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만 믿으면 되지 다른 민족까지 믿을 필요가 뭐 있습니까?”

그 때 전 다시 한번 유대교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그들만의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왜 그들이 복음으로 인해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지체이며 가족인 사실을 외면하면서 배타적이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後嗣)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에베소서 3:6


38.예수 안의 참 기쁨

어느 추울 겨울날 밤에 술이 잔뜩 취한 한 남자가 교회의 문을 소란스럽게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따라 교회를 지키는 사찰 집사님도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사찰 집사님은 취중에 소리를 질렀습니다.

“누구시오?”

“난 신도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왜 신도가 되기를 원하시오?”

“저에게 슬픔이 많아서 기쁨을 찾고 싶습니다.”

“기쁨을 얻고 싶은 사람이 하필이면 왜 예배당에 오셨소?”

“예수님이 기쁨을 주신다고 해서 왔습니다.”

이때 사찰 집사님의 대답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런 양반 여기에 안 계시오.”

예수님이 없는 교회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마음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 4


39.선택한 기쁨

A. W. 타겟(A. W. Target)이라는 사람이 쓴 ‘창'이라는 단편 소설 가운데의 내용입니다.

어느 작은 병실에 두 남자가 입원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이고 또 한 사람은 디스크 환자였습니다. 디스크 환자는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지만 폐암 환자는 하루에 한시간 정도는 자리에 일어나서 창 밖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병세로 보자면 폐암말기 환자의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왜 그런지 늘 기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디스크 환자가 창 밖을 보고 있는 폐암 환자에게 도대체 밖에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지긋이 눈을 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와 백조가 한가로이 떠있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여인들과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이 보이네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디스크 환자의 얼굴은 갑자기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폐암 환자의 얼굴에 늘 기쁨이 있는 까닭이 그의 침대가 창문 곁에 있기 때문이고, 자기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폐암 환자가 죽어서 나가면 저 창가의 침대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폐암 환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신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스크 환자는 비상벨을 눌러서 의사를 부를까 하다가 침대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갑자기 옆 침대가 조용해졌고 고통받던 폐암 환자는 그의 기대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어 있는 자리에 병원의 허락을 받아 드디어 창문 곁 침대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옮기자마자 그의 있는 힘을 다해서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 밖에는 회색의 콘크리트 담벼락뿐이었습니다.

그는 그제야 폐암 환자의 기쁨이 환경 때문에 생긴 기쁨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기쁨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쁨을 창조적인 상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 -고린도후서 7: 4


40.기쁜 삶의 창조

헬렌 켈러는 듣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못하는 3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설리번 선생의 도움으로 마음의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설리번 선생이 헬렌 켈러와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선생님, 갈색이 어떤 색깔이에요?”

“헬렌의 머리 색깔과 같단다.”

“제 머리 색깔이 아름다운가요?”

“헬렌의 마음처럼 아름답고 곱단다.”

설리번 선생님은 상상력과 마음의 눈으로 주변의 세계를 따뜻하게 감지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를 통해서 헬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아름답게 느끼는 기쁨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고백한 기쁨은 그녀의 유명한 자서전인 ‘마이 스토리’라는 책에 “나는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했습니다”라는 구절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자서전의 절정을 이루는 부분을 보면 아주 감동적인 글이 있습니다.

“내가 사흘만 눈을 떠 볼 수 있다면, 첫째 날 나는 내 인생에 참된 사랑을 일깨워 준 고마운 사람들을 먼저 만나서 그들의 얼굴을 정말 오래오래 지켜보고 싶다. 그 다음은 천진 난만한 아기들을 보고 싶고 그리고 나에게 더없이 신실한 친구였던 개 라이오네스의 모습을 보고 싶다. 저녁 무렵에는 숲 속을 거닐고 싶다. 둘째 날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동트는 광경을 바라본 다음 박물관과 미술관을 방문하고 싶다. 그 곳에서 인류 역사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싶고 위대한 미술 작품이나 조각품을 감상하고 싶다. 저녁에는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춤을 보고 싶다. 그리고 셋째 날에는 일찍 일어나 동트는 새벽의 여명을 한 번 더 지켜보련다. 그 다음에 거리로 나가 사람들이 걷는 모습,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행복한 사람들의 표정도 보고 싶고 또 고통스러운 아픔의 표정도 보고 싶다. 그 후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뉴욕 시내를 구경할 것이다. 가난한 슬럼가도 가보고 싶고 또한 아름다운 공원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셋째 날 저녁에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은 극장에 가서 희극을 관람하면서 한없이 웃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과 기쁨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사도행전 2: 28


41.관용에서 나오는 진정한 기쁨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월남에서 부상당하여 돌아온 군인들을 위한 대대적인 위문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프로그램의 총 책임자인 감독은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인 밥 호프(Bob Hope)를 이 공연에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밥 호프는 너무나 바쁜데다가 선약이 있어서 갈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밥 호프가 없는 위문 공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감독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위로해 주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라며 여러 번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밥 호프도 끈질긴 감독의 부탁에 “그러면 제가 한 5분 정도만 얼굴을 보이고 내려와도 괜찮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주최측에서는 그렇게만 해줘도 고맙겠다고 해서 밥 호프는 그 위로공연에 출연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공연 당일, 5분을 약속하고 올라간 밥 호프가 얘기를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은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밥 호프는 5분이 지나도 끝낼 생각을 안하고 10분, 15분, 25분이 넘었는데도 공연을 계속했습니다. 밥 호프는 거의 40분 동안 공연을 하고 내려왔는데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감독은 5분을 공연하기로 하고 40분을 하게 된 경위와 눈물을 흘리는 이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의 물음에 밥 호프는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앞줄에 있는 두 친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감독이 나가보니까 앞줄에 상이(傷痍) 군인 두 사람이 열심히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팔을 잃어버렸고 다른 한 사람은 왼팔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오른팔을 잃어버린 사람은 왼팔을, 왼팔을 잃어버린 사람은 오른팔을 사용해서 두 사람이 함께 박수를 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며 밥 호프는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저 두 사람은 나에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 팔을 잃어버린 두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함께 기뻐해 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된 기쁨을 배웠습니다.”

슬픔 많고 고통 많은 세상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원한다면 이웃들의 허물을 덮고 그들의 삶을 세워 관용하는 정신을 배워야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베푸셨던 동일한 관용을 구하여 이웃에게 베푸는 삶이야말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줄 것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히브리서 13: 16


42.희극배우 그리말디의 거짓된 기쁨

어느 날 프랑스 파리의 정신과 병원에 한 청년이 우울증을 호소하면서 찾아왔습니다. 의사가 상담을 하다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렇게 방안에만 계시지 말고 밖에 나가서 그 유명한 희극 배우 그리말디의 쇼를 보십시오. 그 쇼를 보고 나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그 청년은 의사의 권고에 아무 대답도 안하고 조용히 병원을 나서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선생님, 내가 바로 그 희극 배우 그리말디입니다.” 그리말디는 무대 위에서 순간적으로는 기뻐할 수 있었지만 그의 생활 가운데서는 지속적으로 기쁨을 유지시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순간적인 기쁨보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기뻐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순간적인 평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평안을 지켜 가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서 4: 9


43.기쁨의 원천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과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이 어떻게 다른가를 이렇게 비교해 보았습니다.

“캄캄한 시골길에 한 농부가 등불을 켜고 마차를 몰고 간다. 불행히도 이 농부는 마차에 켜 놓은 등불 때문에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을 보지 못한다.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즐거움은 그것이 고급한 즐거움이든 저급한 즐거움이든 간에 이 농부가 마차에 켜고 다니는 등불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 등불 때문에 밤하늘에 무수히 빛나는 아름다운 별빛을 보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상 즐거움으로 인해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실 뿐 아니라 기쁨의 근원이 되시고 원천이 되시는 분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8


44.고통을 동반하는 기쁨

생물의 영역 속에서 지능이 높은 동물일수록 고통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인지 어느 철학자는 인간의 위대성은 인간의 고통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설화입니다. 한 여인이 현실 세계의 삶을 마치고 사후 세계로 가기 위해서 그 경계를 짓고 있는 스탁스 강 앞에 섰습니다. 그 때 웨이론이라는 요정이 나타나 여인에게 말합니다.

“스탁스 강을 건너기 전에 미틀스 계곡의 물을 한번 드셔보셔요.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잊는 물이라면 마시겠어요.”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기쁨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전 이 세상의 모든 실패의 기억들을 지우고 싶어요.”

“그러면 당신의 모든 성공의 기억들도 함께 망각하게 됩니다.”

“저는 빨리 세상의 모든 상처를 잊고만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모든 사랑도 망각하고 말 것입니다.”

여인은 요정의 마지막 말에 조용히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렇다면 저는 그 샘물을 마시지 않겠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설화를 통해 인생의 법칙을 배웁니다. 인생 속에 고통과 실패,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동시에 기쁨과 성공,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1-4


45.염려가 부르는 죽음

중세 유럽에서 콜레라가 한참 유행할 때, 한 농부가 마차를 몰고 성을 향해 가는데 갑자기 어느 부인이 마차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 부인은 농부에게 성까지 태워 줄 수 없냐고 부탁했습니다. 농부는 부인의 부탁에 승낙하여 함께 성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가다보니 분위기가 좀 야릇하게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마차를 세울 때는 몰랐는데, 태우고 나서 부인을 보니 부인이 계속해서 소름끼치는 묘한 웃음을 자신에게 흘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농부가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콜레라 여사입니다.”

“왜 제 마차에 타셨습니까?”

“저 성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러 가기 위해서 지요.”

“그렇다면 부인을 태워 줄 수 없으니 지금 당장 내리시오.”

“지금 날 태워 주지 않으면 당신부터 죽이겠소.”

“그러면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합시다. 내가 당신을 성까지 태워 줄 테니 다섯 명만 죽이시오.”

그래서 꼭 다섯 명만을 죽이기로 약속한 후 농부는 콜레라 부인을 태우고 성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에 도착해보니 천 명도 넘는 시체들이 성 앞에 즐비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농부는 화가 나서 “부인,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다섯 명만 죽이기로 했는데 이것이 웬 시체들이오?”

“나는 아직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저 사람들은 뭡니까?”

“저 사람들은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레 겁먹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 6


46.염려를 이기는 처방

한 풍자적인 기독교 작가가 어린이를 위하여 쓴 ‘참새와 물새의 대화’라는 동화내용입니다.

어느 날 물새가 참새에게 “참새야, 저 아래 땅위에서 허덕거리며 걸어다니는 인간들의 모습을 봐. 저 아우성치며 허우적거리면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꼴을 보란 말이야”라며 말을 걸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참새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물새야, 아마 쟤들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모양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신뢰한다면 들에 핀 한 포기의 풀보다 더욱 소중히 여기시는 나의 존재를 깨닫고 허우적거리거나 삶을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이 염려를 이기는 첫 번째 처방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6:26


47.쓸데없는 걱정

옛날 오래된 학교에서는 종을 치는 종치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종을 치다가 노이로제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왜 그렇게 행복하지 못한 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종치는 사람은 매우 고통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종을 36,000번 쳐야 합니다. 매일 이 학교에서 10번씩 종을 치는데 계산해보면 일주일에 70번, 한 달이면 300번, 일년이면 3,600번이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다 끝내려면 앞으로도 10년을 더 쳐야 합니다.”

그 대답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보다 못해서 이런 지혜로운 충고를 했습니다.

“형제님! 하루에 10번씩만 종을 치시고 한번에 한 번씩만 종을 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34


48.주둥이 보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도 수없이 변합니다. 눈을 뜨고도 코 베어간다는 세상 말도 있듯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은 곧 삶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이것저것 궁리를 하지요. 그들의 궁리 끝에 생겨난 것이 바로 보험입니다.

자동차를 많이 타다 보니 자동차 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 자동차 보험에 들게 되고, 요즘은 비행기를 타는 기회가 많아지다 보니 항공 보험에까지 듭니다. 그리고 건강을 보장받기 위해서 의료 보험에 가입하고, 힘들게 장만한 보금자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택 보험에도 듭니다. 또한 도난, 화재 등 여러 가지 상상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갖가지 보험에 듭니다.

유럽의 유명한 축구 스타들은 그들의 발이 생명이라고 발 보험까지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손 보험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다른 이들처럼 하나쯤은 보험에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보험을 들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주둥이 보험(?)”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시편91:2


49.성숙한 자의 겸손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어떤 학생이 졸업 여행으로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어느 산 속에 있는 정자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한 노신사를 만나 수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수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공부했는가를 묻는 노신사의 질문에 학생은 기세 당당하게 “수학을 정복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학생이 노신사에게 “수학을 어느 정도까지 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그 노신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나는 겨우 수학에 대하여 이해하기 시작했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노신사와 대화를 계속하면서 학생은 그 분의 수학 지식이 비범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생은 ‘도대체 이분이 어떤 사람인가’하는 놀랍고도 궁금한 마음에 “도대체 선생님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노신사는 “내 이름은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라네”라고 대답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이름은 아주 유명한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수리학자의 이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1:2


50.부족한 겸손

두 명의 단짝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크리스천이었지만 다른 사람은 불신자였습니다.

어느 날 불신자 친구가 크리스천인 단짝 친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친구를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곰곰이 친구가 있을 만한 곳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교회당이 떠올랐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크리스천 친구가 자주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장 교회당으로 달려가 교회 문을 열어보니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전 부족한 놈입니다. 저는 매일 잘못을 저지릅니다. 용서해 주셔요.”

불신자 친구는 그 소리가 나는 앞자리로 조용히 갔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 친구의 기도를 듣고는 그를 시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이 부족한 놈아!”

“뭐라고? 너는 뭔데? 내가 부족하다고?”

크리스천 친구는 하나님께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고백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자신을 진정으로 부족하다고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골로새서 2:18


51.무디의 겸손

D. L. 무디(D. L. Moody)가 미국의 한 도시에서 전도대회를 열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모 신문사의 한 기자가 무디에게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무디는 전도대회로 너무나 바쁜 나머지 그 인터뷰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신문 기사마다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는 혹평의 글들이 실렸습니다.

무디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이런 거짓된 기사를 싣다니 말도 안돼”라며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화를 내야 할 무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동료 한 사람이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기사마다 공개적으로 선생님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화나지 않으십니까?”

“제가 화가 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기자는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쓴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나는 그보다 더 교만한 사람입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편 37:11


52.하나님의 음성

저의 인생에서 가장 크게 절망했던 때는 대학 입시에 실패했던 스무 살 때였습니다. 그때 저희 아버지는 집을 나가버리셨기 때문에 어머니와 동생 여섯 그리고 조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살림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나마 살던 집에서 쫓겨나 수원 팔달산 토굴에서 살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사느니 다 함께 죽어버리자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고 제 삶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밤 집에 가기 싫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제 발길이 우연히 교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저의 마음에 막연히 가졌던 신앙에 대한 동경과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물밀 듯 찾아들었습니다. 그렇게 밤은 깊어갔고 피곤해진 저는 교회의 종 탑 작은 마루방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새벽녘쯤 갑자기 환한 빛이 들어오면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저는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종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제 마음에 이런 목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를 위해 일하라.”

저는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하나님을 믿으면 새로운 미래가 찾아오려나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는 내가 처한 상황에서 절대로 절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날 새벽 교회 종 탑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은 저의 삶에 새롭고도 분명한 관점을 주었습니다.

몇 년 후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다가 여섯 명의 동생을 책임져야할 장남이었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제 아내는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극심한 반대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며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결혼한 후에 들은 얘기인데, 아내가 새벽기도 중에 계속해서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저의 아내는 문제가 일어나면 주님이 책임지시기로 했다면서 어떤 어려움도 견뎌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부부를 한번도 실망시키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좌절하지 말고 사람들의 훈수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삶이 고달프다고 느낄 때 주님 앞에 엎드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여인 드보라가 불가능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 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신명기 4: 36


53.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의사였다가 기독교 작가로 변신한 크로닌 박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광산촌에서 계속 의사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산촌에는 억울하게 오해를 받아 그곳으로 쫓겨온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쫓겨온 데다가 월급마저 아주 적었지만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항상 생글생글 웃으며 여유 있고 자신 만만하게 일했습니다. 그리고 병원 진료시간이 끝났는데도 제일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더 하곤 했습니다. 그런 간호사의 모습을 본 크로닌 박사는 안쓰러워서 간호사에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가진 가치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그것을 아실 텐데 말이야.”

이 간호사는 이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간호사의 답변은 신앙적으로 헌신되어 있지 않던 크로닌 박사의 마음에 화살처럼 꽂혔습니다. 그녀의 그런 마음이 불편한 환경에서도 당당하고 빛나는 삶을 살게 한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곳에 사느냐, 무엇을 하느냐, 얼마나 내 상황이 불편한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17: 15


54.좋은 미래를 보는 눈

‘성공을 만드는 소중한 사람이’의 저자, 지그 지글러는 세계적인 기업 경영 강연자이면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직장 여성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이 여성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직장에 대해서 수많은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녀는 나쁜 대우와 괴롭히는 직장 상사, 좋지 못한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쭉 나열하면서 지글러에게 상당한 동정을 기대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지글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가씨의 환경이 앞으로 더욱 나빠질 것 같습니다. 앞으로 큰 일이 닥칠 위험이 있습니다.”

지글러의 동정을 기대한 여인은 무척 실망했습니다. 지글러는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아가씨는 직장과 동료들을 싫어하고 있죠?”

“맞아요. 저는 직장이 너무 지긋지긋하고 동료들은 꼴도 보기 싫어요.”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가씨가 직장을 싫어한다면 직장도 아가씨를 싫어할 것이고, 아가씨가 동료들을 싫어한다면 동료들도 아가씨를 싫어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누가복음 6장 31절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황금률이라고 하는데 아가씨의 삶이 바뀌려면 직장을 좋아하고 동료들을 좋아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지글러의 말을 듣고 있던 그 여성은 펄펄 뛰면서 말했습니다. “좋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좋아할 수 있습니까?” 지글러는 백지 한 장을 주면서 직장과 동료들의 좋은 점을 작은 것이라도 써보라고 주었습니다. 아무런 반응 없이 멍하게 종이만을 쳐다보고 있는 여성에게 지글러가 다시 물었습니다. “직장에서 월급은 받으시죠? 월급 받는 것이 싫습니까? 좋으면 종이에 적으십시오. 휴가 때 쉴 수 있어서 좋지 않습니까? 이것도 좋으면 쓰십시오. 또 다른 좋은 점이 있으면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세요.” 그 여성은 한참 생각하다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는데 직장이 저희 집에서 가까워서 출퇴근하기가 편해요.” 그녀는 한 가지씩 좋은 점을 생각하며 쓰다가 보니 좋아하는 것이 스무 가지가 넘었습니다. “직장에 좋은 점이 이렇게 많은데도 맘에 안 드십니까?”

지글러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충고를 하였습니다.

“아가씨가 다니는 직장이 무지하게 좋아질 것이라고 상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주변의 동료들과 아름답고 소중한 관계가 될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주변의 환경과 사물과 사람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좋게 보이기도 하고 나쁘게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보는 눈을 가지십시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민수기 14: 9


55.삶의 자부심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워싱턴 시를 지나가다가 한 흑인 청소부가 있는 대로 욕설을 퍼붓고 짜증을 내면서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곁에 조용히 다가가 “이보게 젊은이,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맡기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없겠나?”하며 등을 두드리며 계속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이 청소를 할 때에는 베토벤이 음악을 작곡하듯,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듯, 괴테가 작품을 쓰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게나.”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제2부 항상 처음처럼, 항상 마지막처럼

1.항상 처음처럼, 항상 마지막처럼

어느 날 저는 설교 준비를 하다가 결혼 초기에 주 앞에 드렸던 기도문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그 기도를 주 앞에 드렸습니다.


“하나님, 서투른 아마추어 같은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처음 보는 하늘이듯 그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처음 만났던 그 감격으로 주님을 보게 하소서.

내가 처음 사랑했던 그 여인을 처음 그렇게 바라보던 그 눈초리로 그렇게 내 아내를 보게 하소서.

처음 들어서는 예배당이듯 그 설레임으로 예배당 안에 앉게 하소서.

처음 내 마음속에 그 구원의 메시지가 내 심장을 사로잡던 그 감격으로 처음 그 설교를 듣는 그 심정으로 설교를 듣게 하소서.


오 주님, 마지막 단두대에 올라 서 있는 사형수 같은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마지막 보는 하늘인 것처럼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마지막 보는 아내인 것처럼 그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소서.

마지막 보는 예배당인 것처럼 그 예배당을 바라보게 하소서.

마지막 듣는 설교인 것처럼 그 설교를 듣게 하소서.”


우리가 축복 받는 것에 익숙하면 우리는 그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 감격을 상실합니다. 감사를 망각합니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이 쌓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2.만족할 줄 모르는 하녀

영국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유명한 부자인 컨글튼 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컨글튼 경이 집에서 쉬고 있는 데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 말고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만약 5파운드가 생긴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

이 말은 들은 컨글튼 경은 그 하녀에게 다가가 정말 소원이 그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녀는 놀라면서 “그럼요, 주인님. 정말 그렇고 말고요.” 그래서 컨글튼 경은 일하는 하녀의 등을 두들겨 주면서 “내가 자네 소원인 5파운드를 줄 테니 이제부터는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게”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하녀에게는 혼자 그냥 중얼거린 한 마디의 넋두리가 정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5파운드를 하녀에게 주고 난 후 오후에 컨글튼 경이 정원으로 나가서 산책을 하는데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구, 이럴 줄 알았으면 10파운드라고 말하는 건데. 정말 아까워라.” 그 하녀는 자신의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불평했습니다. 이 하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떤 일에든지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서 5:10


3.폭풍우 속의 평안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반 학생들에게 평화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이 그린 그림 중에서 두 작품이 우수한 작품으로 뽑혔습니다.

한 학생이 그린 그림은 쳐다보기만 해도 평안을 느끼게 하는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풍경이었습니다. 마을 앞에는 잔잔한 시내가 흐르고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삽살개 한 마리가 초가집 마당에서 한가로이 졸고있는 광경이었습니다.

그 그림은 슬쩍 보기만 해도 아주 평화스러워 보이는 반면에, 또 하나의 다른 그림은 아주 다른 평안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폭풍우가 무섭게 몰아치는 높은 벼랑의 모습이 이 그림의 배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깎아지는 벼랑의 틈바구니 속에 깊이 패어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어미 새의 품안에서 새록새록 잠들어 있는 아기 참새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평안은 전자의 평안이 아니라 후자의 평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6:33


4.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을 쓴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은 전세계에 큰 신앙의 감동과 영향을 남긴 분이십니다. 그분의 간증 속에 실린 감동적인 한 토막 이야기입니다.

코리 텐 붐은 그의 가족 모두가 유태인들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독일에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 생활을 했습니다. 라벤스브룩이라는 참혹한 수용소에서 가족들은 모두 죽고, 독일의 패전으로 코리 텐 붐만이 기적적으로 살아 나오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이 여인의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한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자기를 핍박하고 가족들을 잔혹하게 죽인 독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담을 주셨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명에 순종하여 독일 마을과 도시를 찾아다니면서 간증집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집회로 인하여 죄책감 가운데 사로 잡혔던 수없이 많은 독일 사람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었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번은 코리 텐 붐이 독일의 시골 도시에서 말씀과 간증을 모두 마치고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데, 그 사람들 중에 어떤 한 사람이 그녀의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감옥에서 자기 언니 벳시가 죽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죄수들을 못살게 괴롭혔던 라벤스브룩의 수용소 간수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는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 간수를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주님께 속으로 몇 번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안 돼요.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할 수 없어요. 저 사람만은 안돼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정할 때마다 계속해서 ‘사랑하라. 그것은 명령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그녀는 하나님의 명령을 깨달아 ‘하나님, 저는 그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사랑할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라면 해보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느새 그 사람이 자기 눈앞에 다가오자, 그녀는 사랑의 감정 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고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에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넉넉한 감정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녀는 그 간수를 솔직히 사랑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기로 결단한 순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 8


5.참된 사랑

그리스도인들을 무섭고 끔찍하게 박해했던 시대에 한 성도가 순교하기 직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나에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사랑의 숨결을 뿜어낼 것입니다.

나를 구타하십시오. 나는 신음소리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의 가슴을 녹일 것입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들은 용서를 알게 됩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들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들은 주님을 닮아갑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 7,8


6.사랑의 확인

서로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어도 그 사랑이 확인되지 않으면 애인도, 부부도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아주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는 결혼 첫날밤에 신부에게 이러한 선언을 했습니다.

“나는 낯간지럽고 간사하게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은 결혼한 첫날이니까 오늘밤에 딱 한번만 하겠다. 이 한번은 평생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말은 들은 신부는 매우 기막혔지만 지혜로운 여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모르는 문제가 나한테 한가지 있어요.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예요. 다른 문제는 없는 데 이상하게 어떤 얘기를 들으면 자꾸자꾸 잊어버려요. 그래서 당신이 그 말을 날마다 해주지 않으면 나는 그 말을 잊어버릴 거예요.”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사랑의 확인이 꼭 필요합니다.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저희가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심이니이다 -시편 86:17


7.한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

뉴욕 타임스의 베스트 셀러로 소개되었고 우리 나라에도 번역된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존 웨인 쉴레터라는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기 병상에 모여든 자녀들에게 아주 흥미로운 유언을 남겼습니다. 죽음 앞의 고통 중에도 어머니는 의식을 차려 이렇게 자녀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죽은 다음에 내 무덤에는 어떠한 꽃도 가져오지 말아라. 왜냐하면 나는 무덤에 없을 테니까. 나는 육체를 떠나면 곧장 유럽으로 갈 예정이다. 네 아빠가 밤낮 유럽에 데려간다고 약속만 했다가 한번도 가보지 못했잖니.” 그 때 어머니의 임종 앞에 침통한 마음으로 있던 자녀들은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다시 자녀들을 바라보시며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자”라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 바로 지식 있는 어머니라는 표현보다 지혜로운 어머니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입니다. 떠나가면서도 자녀들에게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남길 수 있었던 어머니의 지혜가 아름답습니다.

그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또 하나의 작은 메모를 남겼습니다. 그 메모에는 유언 같은 시가 기록되었는데 그 시가 더욱 감동스럽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 나 때문에 울고 싶다면 사랑하는 아이들아 너희 곁에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울어다오.

너희의 두 팔을 들어 나를 껴안고 싶거든 내게 주고 싶은 바를 네 형제들에게 베풀어다오.

아이들아 나를 만나고 싶거든 내가 알았던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속에서 나를 찾아다오.

너희가 어미 없이 살 수 없다고 느끼거든 나로 하여금 너희의 눈, 너희의 마음, 너희의 친절한 행동 속에 살게 해다오.

사랑은 죽지 않은 것. 그러므로 나를 대신해 내 사랑을 너희 이웃들에게 베풀어다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 30, 31


8.사랑의 넓이

제가 결혼할 당시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 사이에는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다”라는 말이 유행했었습니다. 저는 그 말이 맞다고 믿었습니다. 결혼하면 처음에는 의지적으로 사랑하겠지만 늘 부딪치고 살다보면 사랑의 불타는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그저 정으로 사는 것이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하면 사랑의 애틋하고 달콤함은 금새 사라질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까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아내를 생각하게 되고 한순간도 옆에 없으면 못 살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주야로 아내를 생각하다보니 저절로 아내 때문에 나훈아가 부른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은 내 사랑아

비 내리는 여름날엔 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엔 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온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내 여인아

잠시라도 떨어져도 못 살 것 같은 내 사랑아”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게 되면 사랑의 대상이 그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내 삶의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모든 사고와 존재의 영역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18~19


9.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

전도를 너무 잘하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평소에도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 받고 전도를 잘하는지 항상 “예수 없이 살 수 없어요”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없이 살 수 없어요”라는 별명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여대생이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굉장히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그 예수 없이 살 수 없다는 얘기 말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목사님. 그보다 더 위대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나 없이 사실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괴로움은 나 자신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나의 존재가 나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나의 삶의 깊이와 불안한 미래를 단번에 아시는 그분은 우리를 필요로 하시고 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인 예수를 대신 십자가에 달아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고도 놀라운 일이다! 만약 내가 창조주 하나님이었다면 벌써 이 세상을 박살내버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다니? 그분은 사랑하시는 것도 나 한 사람밖에는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날 사랑하신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셨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 9


10.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웃 사랑

어느 교회야사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간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 아닌 네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네 번째 박사는 주님께 드릴 예물로 의약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찾아가는 여행 도중 사막을 지나다가 병들어 신음하는 환자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환자를 보고 그대로 지나칠 수 없어 세 명의 박사를 먼저 보낸 후 그는 남아 자기의 식량과 의약품을 사용하여 그 환자를 정성껏 간호를 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고 그 환자가 소생하게 되었지만 그 때는 이미 주님께 드릴 의약품을 다 써버린 후였습니다. 그리고 환자를 돌보느라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여행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 번째 박사는 환자 곁에 엎드려서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는 메시아이신 주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의약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아픈 사람을 그냥 두고 갈 수 없어서 이 사람을 위하여 의약품을 다 써 버렸습니다. 이제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도 없고 몸도 너무 지쳐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주님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경배합니다. 제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그가 기도를 마쳤을 때 놀랍게도 그의 곁에서 신음하던 환자는 주님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 40


11.아가페 사랑

어느 마을에 인형을 무척 좋아하는 제인이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놀러오신 이웃집 아저씨에게 그 소녀는 여러 가지 인형들을 보여주며 자랑했습니다. 인형을 보고 있던 아저씨가 갑자기 소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인아! 너는 이것들 중에 어떤 인형을 제일 좋아하니?” 그 물음에 소녀는 입을 꼭 다물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잠시 후 소녀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아저씨, 제가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 드릴께요. 그런데 한가지 약속을 해주세요. 제가 인형을 보여드릴 때 절대로 웃지 않겠다구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이상했지만 소녀와 약속하고는 인형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소녀는 방안에 들어가더니 코는 주저앉고 팔 다리는 다 떨어져 나간 낡은 인형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아저씨는 그 인형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아! 이 인형을 제일 좋아하는 구나.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무슨 이유 때문에 너는 이 인형을 제일 좋아하니?” 제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냐 하면요, 이 인형은 제가 사랑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이 작은 소녀 제인의 대답에서 아가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3:1


12.사랑의 언어

유명한 전도자인 D. L. 무디(D. L. Moody)가 설교를 마치고 나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어느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설교는 너무 좋았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문법적으로 틀린 부분이 50여 군데나 되는군요.”

그 말은 들은 무디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충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저는 감격스럽게도 지금까지 문법도 안 맞는 엉망진창인 언어로 수천 명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 정확하신 언어로 몇 사람이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셨는지요?”

주님께서는 거창한 웅변보다는 위대한 사랑으로 목마른 이웃들을 찾아가 사랑의 생수를 전달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린도전서 13:1


13.눈물 있는 사랑

한 부인이 신앙 상담을 하기 위해 스위팅 박사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전도 훈련도 열심히 받았고, 성경 암송도 익숙할 정도로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저는 단 한사람도 주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이웃집의 한 자매를 전도하려고 했지만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박사님.”

스위팅 박사는 부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신의 눈에 사랑의 눈물이 메말라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편 126편 6절을 보면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라고 시편기자는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인은 박사의 대답을 듣고 즉시 집에 돌아가 주님께 사랑이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진심으로 회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날이 다 저물기 전에 그녀는 이웃의 자매를 주님께로 인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3


14.사랑의 힘

어떤 잡지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엘리나라는 78세 된 화란 출신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이 할머니의 평생 소원은 담배를 끊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50년간 담배를 끊기 위해 클리닉에도 가보고 약도 먹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노력이라도 하면서 세월을 보내다 보니 할머니는 어느새 78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엘리나 할머니가 79세 된 제이슨이라는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뒤늦게 사랑에 빠져 연애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이슨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말하기를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데 단 한가지 때문에 당신과 결혼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오. 당신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 나와 맞지 않는 거 같소”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이 할머니는 “그래요? 그러면 제가 담배를 끊지요”라면서 그 순간부터 담배를 끊었답니다. 그녀의 50년간 이루지 못한 평생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기사의 마지막 줄에는 “나는 이 경험을 통해서 사랑의 힘은 의지의 힘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라는 할머니의 멋진 고백이 실려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7


15.사랑의 순례

유명한 아시시의 성자인 프란시스(Francis)가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겪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나환자를 만났습니다. 그 나환자를 본 순간 마음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한 편은 그에게 가서 기도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고, 다른 한편은 ‘그에게 병이 전염되면 어떡하나’ 라는 두려움의 마음이었습니다. 결국 두려움의 마음이 이겨 나환자를 그냥 지나쳐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그의 다른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하시고 부담을 주셨습니다. 그는 마음에 생긴 부담 때문에 그 자리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나환자를 그냥 지나쳤는데 그것이 잘못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네가 왜 그를 그냥 지나쳤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그가 너무 더럽게 느껴져서 그 병이 전염될까봐 그랬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때 그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그 더러운 나환자보다 나으냐? 너는 이전에 그 나환자보다도 더 더렵혀진 죄인이었다. 그런데 난 그런 너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했단다.”

그 순간 그는 나환자보다 더 추하고 더러운 죄인이었던 자신에게 주님이 찾아와 사랑으로 받아주셨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나환자에게 돌아가 그에게 입맞추고 축복을 합니다. 이때부터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는 알베르나의 산록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끊임없는 사랑의 순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생(生)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에 “나의 사랑, 나의 전부이신 예수여!”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로마서 15:7


16.모두 소중한 아들

저는 예전에 다른 목사님들로부터 이런 예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들을 다섯이나 둔 어떤 사람이 아들이 하나도 없는 친구와 만나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었답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하나도 없는 친구가 “자네는 복도 많구려. 아들이 다섯이나 되니 말이야. 그 중 하나만 내게 줄 수 없겠나?”라고 물었습니다.

아들 다섯 둔 사람은 웃으면서 “그래, 그렇게 하지. 우리 사이에 그것이 문제인가? 다섯 아들 중 하나를 줄 테니 자네 아들로 삼아 잘 키워보게나”라며 엉뚱한 친구의 요청에 대답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들 다섯 둔 사람은 아내에게 친구와 만나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펄쩍 뛰며 “말도 안돼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라며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친구와 약속한 것이니 지켜야 한다고 우기며, 다섯 아들이 잠자고 있는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어떤 아들을 줄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명씩 쳐다보면서, 첫째 아들은 장남이라서 안 되겠고, 둘째 아들은 다섯 아들 중에 제일 똑똑하고 지혜로우니 안 되겠고, 셋째 아들은 제일 잘 생겼을 뿐더러 자기를 쏙 빼 닮은 아들이라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넷째 아들을 보니 그 아이는 늘 몸이 약해서 아플 때가 많았는데 준다고 생각하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막내아들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나면서 도저히 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 순간 그는 하나님께서 여러 명도 아닌 단 하나뿐인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다시금 깊이 깨닫게 되었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로마서 8:32


17.아버지의 마음

시골에 사는 어떤 아들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가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못내 걱정스럽고 안타까웠습니다.

“아들아, 나는 네가 꼭 다시 돌아오리라고 믿는단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한결같이 기다리고 있을 게다. 혹시 일이 잘못되어 네게 어려움이 생기면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오렴. 혹시 아버지가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의심일랑 일체 하지 말거라. 어디서나 네가 붉은 단풍을 보게 되면 바로 그 심정으로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아들을 그렇게 보낸 후 몇 해가 지나갔습니다. 아들에게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지만, 아버지는 가을이 되면 더욱 간절하게 집밖으로 나와 서성이며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 해에는 유난히도 단풍이 일찍 지고 없었습니다. 그것을 본 아버지는 안되겠다 싶어 가족들에게 홑이불을 단풍 색깔로 물들여 나뭇가지에도, 지붕에도, 돌아오는 아들이 볼 수 있는 곳 어디에든지 덮어두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들은 아버지가 계신 고향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걸어오면서 단풍나무며 지붕이며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인 홑이불이 덮여 있는 것을 보고 애타게 자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로마서 5:20


18.아버지라는 이름

제가 처음 교회에 나왔을 때 가장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분들이 기도할 때마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혈육의 아버지가 계신데 굳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뭘까? 그래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았지만 북한이 고향이신 어르신네들은 “아바지시여!”라고 부르짖는 것이 너무 촌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제 마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절대적인 신이시니까 좀더 거창하면서도 그분의 위엄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로 표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제게 기도를 시키면 언제나 “창조주이시며 모든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라고 거창한 서두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실 때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은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듯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땅에 친히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나의 죄를 지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혈육의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 그 이상의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셨던 하나님! 그 순간 ‘아버지’라는 단어만큼 가장 제 마음을 대신 할 말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저 역시 “나를 사랑하신 아버지!”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15


19.사랑이 기초가 되는 지식

집을 지을 때 기초공사가 잘 되어야 튼튼하듯이 지식을 쌓는 데에도 기초공사가 필요합니다. 이 말의 뜻은 지식에는 바로 사랑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 쌓기는 때때로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그런 예가 있습니다.

어떤 감옥에 간수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죄인들을 대하면서 그들이 죄를 짓는 이유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지식은 바로 삶의 목표이며 신념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수감되어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는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문맹(文盲)이었습니다. 그를 본 간수는 아는 것이 힘이고 배워야 산다는 신념에 따라 시간이 나는 대로 젊은이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젊은이는 꺼려했지만 간수의 끊임없는 설득에 의해서 글을 배우고 지식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식을 쌓는 동안 세월이 흘러 젊은이는 출감하게 되었습니다. 간수는 기뻐하며 세상에 나가 지식을 풀어 쓸 기회가 왔다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이는 다시 교도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의 죄명은 문서위조죄였습니다. 이렇듯 사랑이 없이 쌓여진 지식은 때때로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전서 8:1


20.제 아내가 되어주셔서

저는 지금도 총각 시절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납니다. 저의 모습은 젊은 청년답지 않게 늘 몸이 약했거든요. 그래서 ‘어떤 여자가 이런 나를 좋아하겠는가’라는 생각에 결혼에 대해서 늘 비관적이었고 그 때문에 장가는 당연히 못 갈 줄 알았습니다. 더욱이 전도사 시절에는 빈혈이 심해서 1년에 한 두 번씩은 설교 도중에 쓰러졌다면 말 다한 거지요. 그 뿐 아니라 그런 빈약한 모습을 그 당시 처가 식구들이 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저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식구들이 모두 두 손들고 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게 시집을 와 주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정말 제 아내가 되어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첫날 밤 아내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좋아서 입이 벌어지고 황홀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평생동안 아내를 업고 살아도 모자랄 판에 요새는 봐도 그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과 우리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놀라운 은혜를 받았어도 처음과 달리 그것에 익숙해지면 그것을 은혜나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호세아 13:5-6


21.입술의 범죄

고대의 로마시대에 기독교를 몹시 미워하고 박해하던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기독교도인을 불러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죽음을 앞에 둔 기독교도를 조롱했습니다. “도대체 너가 믿는 주라고 하는 목수 나사렛 예수는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

그의 조롱에 앞에 서 있던 기독교도는 주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그 황제의 영혼을 주께 드리면서 황제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나사렛 예수는 그의 하늘나라의 목공실에서 폐하를 위하여 관을 만들고 계십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하나님을 망령되게 말하던 황제는 그 자리에서 그 인생의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12: 36, 37


거짓말하는 죄

어느 교회의 주일학교 어린이가 엄마에게 질문을 합니다.

“엄마, 도적질하는 것과 거짓말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쁜 거예요?”

엄마는 이 아이에게 “그야 물론 도적질하는 것이 더 나쁘지”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생각은 엄마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엄마! 아니에요. 엄마는 틀렸어요. 거짓말이 훨씬 더 나빠요. 왜냐하면 도둑질은 돌려 줄 수가 있지만 거짓말은 돌려 줄 수 없잖아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0: 16


22.명예의 탐심

한 마을에 존 부스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한 형과 비교를 당하며 자랐으며 부모님께 야단을 맞을 때면 늘 ‘나는 못나서 그렇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형은 매사에 일을 잘 처리하는 모범생이었고 나중에 아주 훌륭한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항상 그런 형에 대하여 많은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았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나도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늘 가득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아주 유명한 사람을 죽이면 나도 유명해 지겠지?’ 그래서 그가 죽이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링컨 대통령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주저함 없이 링컨 대통령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한 시대가 낳은 훌륭한 위인을 죽였던 그 청년의 죄의 동기는 바로 명예에 대한 탐심이었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누가복음 12: 15


23.죽음을 부른 소유의 욕심

톨스토이가 즐겨하던 이야기 중에 어떤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농부가 왕에게 엄청난 제안을 받았습니다. “네가 하루 동안 밟고 걸어 다니는 땅은 모두 다 네 것으로 주겠다.” 이 농부는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뛰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동안에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좀더 많은 땅을 밟아야 하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밤늦게까지 전력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많은 땅을 차지하고 나서 자신이 시작했던 출발점에 도달했을 때, 모든 힘을 다 쏟아 버린 나머지 쓰려져 죽고 말았습니다. 소유에 대한 욕심이 너무나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어리석거나 우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디모데전서 6: 9


24.거짓 부부

아주 오래 전 전도사 시절에 어느 부인과 면담했던 내용입니다. 그 부인은 남편이 월남전에 참전한 기간동안 홀로 남아있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다른 남자와 만나 불륜의 관계를 가졌던 여인이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월남전에 있던 친구가 고국으로 먼저 돌아왔다가 친구 부인의 불륜을 알고 이 부인의 부정한 생활을 남편에게 폭로하였습니다.

월남전에서 돌아온 그 부인의 남편은 무섭도록 냉정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 이 문제를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처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같이 정확하게 회사에 출근하고 집에도 정확하게 퇴근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정과 자녀를 향한 경제적인 책임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아주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아내와는 절대로 대화를 하지 않았고 마치 아내가 없는 것처럼 무시하며 한 집안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겉으로는 부부였지만 속으로는 전혀 남남이었던 것입니다. 그 부인의 마음과 몸은 날이 갈수록 병들어 갔고 남편과 이혼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상담을 요청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 나의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지 아니함이니라 하셨다 하라 -예레미야 35: 17


25.너 자신을 아는 것

소크라테스 시대에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꼽힌 소피스트들은 마치 자신들이 모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이런 오만하고 교만한 지식인들을 보면서 소크라테스는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작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내가 저들과 다른 점이 한가지 있다면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우스개 소리로 만일 수학 선생님 같으면 “네 분수를 알라”, 국어 선생님 같으면 “네 주제를 알라”, 지리 선생님 같으면 “네 자리를 알라”, 미술 선생님 같으면 “네 꼬라지를 알라”라고 했을 것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전서 5: 5


26.어리석은 자존심

미국인 선교사인 모르갠 박사는 인디언 마을들만 찾아다니면서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디언 마을에 대해서만큼은 상당히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숲 속을 지나가다 우연히 길을 잃은 인디언 청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르갠 박사는 친절하게 “젊은이! 길을 잃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인디언 청년은 자기들의 생활 터전인 숲 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이 너무나 창피했습니다. 더욱이 백인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더욱 자존심이 상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뇨, 난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단지 내 오두막집이 없어져서 찾고 있소.”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언12:15


이동원 목사의 짧은 이야기 긴 감동Ⅱ.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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