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가정 교육론

2014. 2. 20. 23:30

가정 교육론


 

가정은 인간 형성이 이루어지는 최초의 중요한 교육의 장으로 기독교적 신앙 인격의 형성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성서의 가정 교육관 : 가정은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기 훨씬 전부터 형성된 가장 작은 단위의 신앙 공동체로 특히 구약시대의 가정은 종교 교육의 가장 중요한 장이었다.


히브리 가정에서의 자녀 교육의 특징은 비형식적이고 통제적인 그리고 구전, 종교 의식등을 통한 교육으로 말할 수 있다.


초대 교회 형성 전까지의 가정은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서 신앙을 훈련하는 장이 되어 왔으며 초대 교회에 이르러서는 예배외 성도의 교제를 위한 모임의 현장, 그리고 신앙적 양육의 책임이 주어진 곳으로 인식되었다. 즉 성서에서의 가정은 종교적 훈련의 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가정의 교육적 의의 : 출산,경제,휴식,교육이라는 4대 본래적인 기능을 가진 가정에서 교육적 기능은 개개인의 인격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는 기능을 말한다. 또 개인이 속한 사회나 사회적 집단의 관행을 배우는 것을 사회화라 한다면 가정은 최초이면서 가장 중요한 사회화 기관이다.


가정 교육은 가족 구성원간의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며 가정에서 배우는 것이 곧 생활화되고 습관화되므로 전인 교육의 현장이 바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맥락에서 기독교교육이 진정으로 가능한 현장은 가정일 수 밖에 없다(H. 브쉬넬).


* 가정 교육의 방법 : 가정이 살아 있는 교육의 현장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 내용과 교육 방법을 동시에 숙고해야 한다. 김정환 교수의 [전인 교육론]에서는 가정 교육의 방법상의 특색을 가정 구성원의 사랑과 신뢰가 바탕이 되는 교육,지정육의 조화로운 성장을 도모하는 교육,아동의 잠재적 가능성을 키워주는 개성 교육,부성과 모성 상보의 교육, 효과가 지속적이고 후에 나타나는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다. 브쉬넬은 기독교 가정의 가장 중요한 교육 방법을 부모들의 신앙의 생활화와 아동의 구체적인 경험을 통한 신앙체험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신체적 양육,처벌, 놀이,성경 해석,대화,기도를 들고 있다.


* 현재 기독교 가정 교육의 문제 : 급속한 변화가 내재된 산업화 사회는 전통적인 가정관과 가정구조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가정내의 교육의 포기와 더불어 교육 전문 기관에의 전적인 의뢰라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교육전문기관인 학교가 가정 교육 기능중 자녀들의 사회화 그리고 성인들의 정서적인 안정화 기능을 대신할 수는 없으며 가정 교육에 있어서 부모 어느 한편에로의 전적인 의존은 교육의 왜곡을 낳을 수 밖에 없다. 또한 대중 매체는 가족간의 대화와 상호 이해를 단절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가정 교육의 부재현상은 기독교 가정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현상이다. 가정 예배의 상실 그리고 현대적인 자녀 교육의 이론은 이러한 기독교 가정 교육의 내용과 본질을 약화 분열해 나가고 있다. 자녀의 신앙 인격의 형성은 부모들이 가정에서 종교적인 의식을 생활화하고, 뚜렷한 신앙적인 목표를 두고 의도적,무의도적으로 자녀를 향해 부단히 간섭해 들어갈 때 가능한 것이다.


* 기독교 가정 교육의 과제 : 기독교 가정에서의 자녀 교육은 부모들의 책임이요 하나님의 명령이다. 현대 가정이 지니는 조건들 안에서 보다 이상적으로 올바르게 교육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세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기독교 가정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부모와 교회의 새로운 인식이다. 가정을 신앙 인격 형성에 중요한 그리고 집중적 행위가 행해질 교육의 장으로 인식할 때 바른 신앙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둘째는 부모들의 투철한 기독교적 자녀관이, 즉 주 안에서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련하고 훈계하는 자로서 부모들 스스로의 자리를 매기는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


세째는 교회가 가정교육을 적극 지원하여 교회 교육과 가정 교육의 깊은 유대를 형성해야 한다.


성서 부부학


 

다윗을 유혹했던 밧세바는 영어이름이 Bathsheba로 표기된다. 그 이름에 적당히 띄어쓰기를 하면 Bath she ba가 될 수 있다. [(다윗이) 그녀가 목욕하는 것을 봐] 가 된다. 이래서 이름을 잘 지어야 되는건지 모른다.

언젠가 시내에 나갔다가 [에바다 산부인가]란 간판을 본일이 있다. 가만보니 그 이름이 재미있다. 반복해서 발음을 해보라[애(아이) 받아]가 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실제 성경에서의 에바다는 [이는 열리리라(마가복음 7:34)]는 뜻이다. 열려야 탄생될 수 있는 생명을 염두에 두고 이른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한동안 재미있게 웃은 일이 있다. 이런 따위를 영어에서는 word play 라 한다.


교회의 기초는 가정

그 가운데는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깊은 의미를 담아내거나 이해를 돕고 기억을 쉽게 해주기 위한 것도 많다.

예를들면 R C Miller란 학자는 성경의 수평적 이해를 다섯개의 C즉 창조(Creation) 언약(Cobenant) 예수 (Christ) 교회 (Church)완성 (Consummation)으로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천국이 4개의 H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첫번째의 H 는 마음(Heart) 두번째 H 는 가정 (Home) 세번째 H는 교회 (House of God) 그리고 마지막 H 는 천국 (Heaven)이라 할 수 있다.


여덟쌍중 한쌍 이혼

하지만 우리는 이 H 가운데 세번째와 네번째의 H는 많이 강조하면서 첫째와 둘째의 H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 왔다.

또한 마지막 H 가 첫째의 H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도 쉽게 간과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천국은 심령가난의 마음부터 시작되엄아다.


그리고 두번째 H (가정) 가 온전하지 않고는 세번째의 H(교회)는 흔들리고 만다.


왜냐하면 교회의 기초는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네개의 H가 균형잡혔을 때 우리는 완성된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두번째 H(가정)에 대해서는 지나칠 만큼 무신경했다.


그 결과 교회안에서도 결혼한 독신녀와 결혼한 독신자들이 많다. 심지어 합법적인 매춘행위가 행해시조 있다는 경고의 소리도 그다지 지나친 소리만은 아니다.


최근들어 결혼한 부부들의 여덟쌍에 한쌍골로 이혼율이 늘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고아수출 세계1위라는 오명을 못벗어 던지고 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가?

한마디로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이다. 어찌보면 성경은 가정으로 시작해서 가정으로 끝나는 책이라 해도 옳다.


창세기 첫부분은 가정의 시작으로 요한계시록 마지막은 최종적인 가정이 이루어지기 위한 혼인예식과 가정에 대한 묘사로 끝나고 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묘사로 구약시대를 마감한다.


그리고 신약의 첫번째 책이 마태복음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출생의 이야기로 신약시대를 열고 있다. 뿐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번째 이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였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가정적인 용어로 채색시켜 놓았다.


제 기능 회복 노력을

결국 성경으로 돌아갈때 4H는 더 이상 불구로 남지 않게 된다.

동시에 가정회복의 출발점은 언어를 고치는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무심히 쓰는 말이 [우리 집에 놀러오실래요?] 이지 [ 저희 가정에 들러주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House는 있는데 Home 은 없다]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입술에 [집] 보다는 [가정]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러워질 때부터 가정은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된 것이다.


어머니와 자녀 상담


 

상담이란 심리학적 기술이나 사람의 마음을 약간 아는 어떠한 지식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고 우리를 받아 주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감격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게 될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상담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이냐,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느냐 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말에서 사람이라는 말 속에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이란 [살]이란 말과 [암]이라는 말이 합쳐서 된 복합명사입니다. [살]이란 우리의 육체,살덩어리를 말합니다. 어렸을 땐 보드랍고 젊을 때는 팽팽하며 늙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살입니다.


2년전에 미국의 어떤 사람이 사람의 살덩어리를 값으로 따진다면 얼마나 되겠는지 계산해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낳으시느라 수고하신 것,키우시면서 사랑 주신 것, 교육을 위해 쓴 물질적인 것,옷 입히고 먹인 것등 18세 까지 모두 합해서 통계를 내보니 우리나라 돈으로 자그만치 1,50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시골에서 황소 한 마리에 50만원이라니까 황소 20마리에 해당되는 엄청난 값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살덩어리만도 이렇게 비쌉니다. 그러니 집에서 아이들 듣는데 돈 없다고 하지 마십시요. 아이 한 명이 1,500만원이니까 자녀를 가진 부모는 모두 부자입니다. 나는 아이들이 넷이니 항상 6,000만원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늘 아이들에게 [너는 돈으로 따져도 1,500만원이나 가는 굉장한 사람이야.그뿐인가 생각할 수 있는 마음과 영적 은사 그리고 믿음 등을 따지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하단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사람의 재산은 놓으면 놓은대로 가만히 있고 땅은 땅대로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딸의 재산은 자꾸 크고 배우고 깨달으며 나중에는 하나님을 그 마음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굉장한 사실입니다.


[암]이란 두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자기하고 똑같은 후손을 번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짐승을 말합니다. 소나 닭을 보고 여자 소,남자 소 하지 않고 암소,숫소 또는 암탉,수탉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쓰이면 [어머니]란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머니들에게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암'이란 말이 어머니가 아기를 낳아서 젖을 못 주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1938년 일제치하에서 자랐는데 그때만 해도 아기에게 젖을 줄 수 없어 걱정하는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를 할 때였습니다. 아내가 첫 아기를 낳았는데 건강한데도 젖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집사님이 나무를 하나 가져 오셨는데 그 나무는 논에다 물을 댈 때 물이 흘러가도록 통나무에 흠을 파서 도랑처럼 만든 것으로 이것을 도끼로 쪼개어 불을 피워서 미역국을 끓여 먹으면 젖일 잘 난다고제 아내에게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젖이 안나는 어머니들은 쌀을 잘 씻고 쇠붙이에 닿지 않게 나무 방망이로 찧어서 깨끗하게 씻어 죽을 정성스럽게 쑤어서 여기에 설탕을 넣어 젖과 비슷하게 만들어서 아기에게 주었는데 그것을 '암죽'이라 불렀습니다. 암죽은 [어머니의 죽]이란 뜻입니다. 이렇듯 우리나라 말에서 사람이란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온 살덩어리]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그 어머니로부터 태어나셨고 그 어머니는 또 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듯이 이렇게 자꾸자꾸 거슬러 올라가면서 인간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살덩어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형제나 친족을 살붙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갖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가장 좋은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맺은 좋은 관계로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과 잘못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될 수 없고, 하나님과는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데 사람들과 나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성립될 때 사람들과도 바람직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생활,이것이 바로 진실한 크리스챤의 생활이며 상담의 목표이기도 한 것입니다.


상담을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이라 생각하면 인간관계 중에서 우선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이란 말을 하나로 줄이면 삶이 되는데,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우리가 바로 사는 것이 신앙이고 올바른 삶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상담의 목표이며 원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상담의 목표는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나는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나와 다른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그것부터 생각하려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은 자기와 자기와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가라]하면 가고 [먹자]하면 먹는데 왜 나와 나와의 관계가 잘 안되는지 이상합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이것이 잘 나와 있는데 로마서 7장 21절 이하에 사도 바울은 고민하고 걱정하기를 [내 속에는 두개의 법이 있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는 반면 또 하나의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우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결심해도 살다가 보면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수가 있습니다.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괴롭다. 두 마음이 싸우는 것을 내가 어떻게 고칠 수 있겠는가?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을 따라가고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을 못하게 하는 마음이 다른 한편에 있습니다. 기도하고 결심을 해도 무엇인지 반대로 끌고가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죄의 힘입니다. 이 죄의 힘을 이기는 것이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 내 결심으로, 내 힘으로 안되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통해서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담이란 이렇게 갈라지려는 마음과 역행하려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고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상담이 다루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나와 나와의 관계가 잘 안될까요?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이브에게 에덴 동산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먹고,쓰고,사용하라 하셨는데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이브에게 다가와서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함께 먹었기 때문에 둘 다 죄인이며 둘 다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혹의 내용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에덴 동산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무엇이든지 하실 수가 있는데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의 이름이나 짓고 먹으면 먹고 쓰라면 쓰는 것이 고작이니 하나님처럼 만들어 보고 하나님처럼 전능해지고 싶었습니다.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되고 싶었습니다. 따먹고 나니 눈이 밝아지긴 했는 진리를 찾는 눈, 하나님의 뜻을 밝히 보려는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벗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는 것 밖에는 더 나아진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만이 그러한 유혹을 받고 그들만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합니까? 성경의 역사를 보면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처럼 돼보겠다는 것을 비롯하여 이런 유혹이 종종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과학자들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아기를 만드는 것까지 하려고 하는 무서운 세상입니다. 기독교인들도 혹 하나님처럼 되고싶어 하고 있지 않은지 또는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하고 있는지 진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아침에 세수할 때,거울 앞에 가서 제 모습을 비쳐 봅니다. 여러분도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보십시오. 우선 제일 위에 있는 머리칼을 보고 머리결은 보드라운지 또한 색깔은 마음에 드십니까? 이마를 볼 때 좁으면 어떻고, 넓으면 어떻고 이렇듯 말이 많은데 적당한 멋이 있습니까? 눈썹도 올라간 사람,처진 사람 등 여러가지입니다. 저는 눈썹이 올라갔는데 어렸을 때도 눈썹이 반달같이 생겼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썹 모양을 마음에 들게 하려고 화장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눈을 보면 시력이 좋은 사람,안경을 껴야 하는 사람,눈이 작은 사람,눈썹 사이가 너무 넓은 사람,좁은 사람 등 가지각색입니다. 코를 보아도 콧구멍이 너무 들리면 들창코,코 끝이 너무 뾰죽하면 매부리코 등등 말이 많습니다. 입술이나 귀,목에 대해서도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내 얼굴이고 내 모습이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고치고 싶은 것이 더 많습니다. 나쁜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다 좋은 것 같아도 살다보면 약점,결점,부족한 것등 모두 고치고 싶은 것 투성이입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마음에 드는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이것을 고쳐야 하고 저 사람은 저것을 고쳤으면 좋겠고, 고치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얼굴을 보며 자기 스스로 못마땅해 하고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모두 못 마땅한 것 투성이입니다. 자기 얼굴을 볼 때 하나님께서 세계의 40억 인구 중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얼굴로 주신 것을 감사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부족한 것을 서로 보충하라고 짝지어 주신 내 남편,내 아내를 감사하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자녀들의 잘 하는 것 보다는 못하는 것을 더 많이 보게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 중 밤잠도 자지 않고 공부를 하는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젖혀놓고 공부만 하기 때문에 공부를 잘 하지만 노래는 형편없이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지 재능만 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잘하는 것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얼굴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내 아내,내 남편, 내 자녀,내가 사는 집 등 나의 모든 조건을 있는 그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변화가 오며 자신이 생기게 됩니다. 비록 돈이 없어도, 못 났어도 자신이 생기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장점이나 단점을 다 받아들일 때 남의 결점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심리학자들은 [수용]이라 부르는데 이는 [얼굴을 받아 들인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자기 얼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누가 받아주겠습니까?


선을 볼때,상대방이 마음에 들어 사랑하고픈 마음이 생기게 되면 다 좋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것 저것 들추어 내며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고 보려하기 때문입니다. 키가 작다고 할 때도 큰 사람에 비하니까 작은 것이지 그 사람에게는 알맞은 키이며 그 사람은 최선을 다해 큰 것입니다. 사람의 생긴 그대로 다 받아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며 내 마음이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내가 나 자신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타인과의 관계도 올바로 맺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몇년 전 제가 아주 시골의 탄광 근처에서 목회를 할 때 조그만 단칸방에서 등잔불을 켜고 살았습니다. 한숨만 크게 쉬어도 꺼지는 등잔불 밑에서 설교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허름한 집일망정 불평하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만족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세 가지 마음을 주셨는데 그 첫째는 어버이의 마음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소꼽놀이 하는 것이나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 자기도 어린 아이면서 엄마,아빠의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다 자기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배운 것으로 그 마음이 자라서 진짜 엄마,아빠가 되어 고통을 무릅쓰고 아기를 낳고 희생적으로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버이의 마음은 부모들이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였는가에 따라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화가 나면 밥을 안 먹거나 자기 머리를 벽에 부딛치기도 하며 심지어는 옷을 찢는 경우도 있는데 어린이들은 부모들의 이런 것을 그대로 닮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자녀들의 행동에 미치는 부모의 영향은 이처럼 큰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신앙생활을 자녀들이 그대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의 잘못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가 지는 것입니다.


어버지의 마음에는 비판하려는 마음과 양육하려는 마음의 두가지가 있습니다. 비판하려는 마음이란 좋다.나쁘다,된다,안된다 등을 판단하는 마음인데 화가나면 이 마음이 자꾸 나옵니다.


국민학교 아이들의 학부모의 경우를 볼 때 수,우,미,양 가로 매겨진 성적표를 받아보고 성적이 나쁜 경우에는 마구 야단을 칩니다. [이 바보야,이것을 공부라고 했니!...] 한참을 야단하고 난 다음에는 이상하게도 자기 신세 한탄을 합니다. [아이구,내가 저 녀석을 위해서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입고 뒷바라지를 해 주었더니...]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고 나면 현장에 없는 아버지를 끌어 들입니다. [네 아비를 꼭 닮았으니 네가 무슨 공부를 잘 하겠니....] 이러한 야담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몇천번을 듣게 됩니다. [그래,나는 아버지를 꼭 닮아서 공부를 못하는데 왜 나보고 공부 잘하라는 거야?] 하면 화를 내고 반항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저주하고 폭언하고 비판하는 말은 곧 잊어버릴 것 같아도 머리 속에 나쁜 말은 나쁜 말대로,좋은 사람은 좋은 말대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시험볼때 잘 생각하고 심각하게 풀어야 할 문제가 생기면 머리속에 녹음된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나면서 [에이, 내가 공부는 해서 뭘해] 하는 마음이 생겨 그냥 되는대로 하고 맙니다. 기쁘고 즐거웠던 소리, 은혜받은말도 평생 잊지 못하지만 가슴을 쑤시고 상처를 주고 저주하던 목소리도 항상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정신 분열증에 걸리면 귀에서 왕왕거리는 소리 때문에 자꾸 떠든다고 하는데 전문가들은 이것을 [마녀의 소리]라고 합니다. 마녀의 소리로 자녀의 머리 속에 기억될만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비판할 때도 아이에게 자꾸 손가락질을 하게 됩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선생님이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야단치는 것을 보면 사랑이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또 화가 나면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그 말이 아무리 자비롭고 잘 되라는 말이라도 아이들은 큰 소리로 야단치는 어버이를 싫어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자꾸 깎여 나가고 조금 있던 믿음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양육하는 마음은 떠받들어 주고 싶고,일으켜 주고 싶고, 뭔가 자꾸 채워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양육하는 마음은 잘 한다.못한다고 하지 않으며 아이의 입장을 변호 해주면서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도와주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주면 더 잘할 수 있는지 아이에게 물어봅니다. 그 아이의 키에 맞게 허리를 구부려 시선을 마주치게 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부모나 양육하는 어버이의 마음은 평등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은 부모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속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똑같이 닮은 모습,복잡한 형상이며 그 자라나는 과정 또한 신비롭기만 합니다. 자녀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양육하는 마음, 어버이의 마음으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어른의 마음이 있습니다. 어른의 마음이란 양심이 명하는 그대로 결정하고 따라가는 마음,생각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국회의원 선거 때에도 혈연,지연 관계로 인해 아는 사람에게 표를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뽑는 마음이 어른의 마음입니다. 상담에 있어 심리학적 지식이 없어도, 어려운 책을 읽지 않았어도 괜찮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어버이로서,형제 자매로서 내 사랑하는 이웃,내 피를 나눈 형제에게 말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말에는 방향이 있습니다. 풍향계가 바람의 방향을 따라 움직이듯이 말에도 방향이 있습니다. 강아지나 고양이가 예쁠때 머리에서 꼬리를 쓰다듬아 주면 털에 윤이 나고 기분 좋아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쓰다듬어 주면 털이 부스스 일어나며 기분 나빠합니다. 털을 쓰다듬는데도 방향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쓰다듬어 줄때도 이마로부터 정수리로 쓰다듬어 줍니다. 이처럼 무엇이든지 방향이 있듯이 사람의 말도 방향을 잘 타지 못하면 말이 사람의 가슴 속에 들어가 독소가 되어 상처가 되고 해를 끼치는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려는 마음이 다 사라지고 복음을 받아들인 마음도 일그러집니다. 말의 방향은 참 중요합니다. 특히 예수를 믿는 사람은 복음을 증거해야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말을 많이 하므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잠언10;11).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15:22)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이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잠15:28)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언25:11) 고 했습니다. 이처럼 말은 해야 할 것이 있고 안해야 할 것이 있으며 방향에 있어서도 해야 할 사람과 들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전,산에 기도하러 가실 때 세 제자에게 기도하라고 하시고 가셨는데 내려와 보니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하려 했으나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잠이든 것을 아시고 비판적 마음으로 야단치시지 않으셨으므로 제자들은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잘못한 아이에게[할래,안할래?] 란느 식으로 묻는다면 야단맞는 아이의 대답은 뻔한 것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하는 대답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깨달아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셨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만일 제자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핑계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들어야 할 말이며 예수님이 하실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지도자가 할 말을 백성이 하고 백성이 할 말은 지도자가 하면 선생님이 할 말을 제자가 하고 목사가 할 말을 평신도가 하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나고 질서가 파괴되며 감정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말은 신앙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했던 말들을 한 번 기억해 보십시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가 난다고 어떤 말을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한마디 때문에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예수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 깨닫게 하는 말씀 한 마디 한마디가 중요한 것입니다. 말로써 의견을 나타내는 것은 누구나 잘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보다 말 잘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말씀이 되어야 하고 그 말속에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속에는 감정이 있어 기분이 나타납니다.


요즘 제가 나가는 교회의 교인 한 사람이 잘 나오지 않아 제 아내보고 가서 권고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목사님께서 자매님이 교회를 잘 안나오셔서 걱정하세요 목사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왜 안나오세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저요? 이젠 기분 나빠서 안 나갈래요.전요 기분 나쁘면 천당도 안가요.저를 기분 나쁘게 한 사람 천당가면 전 안가겠어요]이렇게 말하면 서로에게 상처가 됩니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기분 나빠서 천당에도 가지 않겠다고 말하면 그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기분내키는대로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가갈 때 성전 미문 앞에 앉은뱅이 거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돈이나 던져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단 한번만이라도 일어나 보았으면 하는 한맺힌 소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일년이 가고,십년이 흘러 포기하면서도 어떻게 한 번 일어나 볼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돈 던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제3의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제3의 거듭난 입으로 말하며 제3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그 가슴 속에 있는 근본적인 소원임을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손을 내밀었더니 그가 벌떡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혀가 말을 해서 소리를 내게 되니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슴이 되었습니다. 몸이 일어나니 그 마음도 변화되고 새 사람이 되어 새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침을 받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상담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증거하는 힘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상담입니다. 멀리 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전에 내 슬하에 있는 자녀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십시오. 이 말씀이 자녀들의 공부 문제, 절망, 갈등 등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게 됩니다. 믿음을 심어주며 하나님을 역력히 볼 수 있는 지혜도 줍니다. 비판적 어버이의 마음은 되도록 억제하고 양육하는 어버이의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자녀하고 말할 때도 허리를 숙여서 자비와 사랑이 담긴 마음으로,가슴을 활짝 열고 뭔가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대하도록 하십시오. 적절한 말 한마디가 사랑을 불러 일으켜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하나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일상으로 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부르짖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동력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상담입니다. 말 한마디라도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노력할 때,여러분의 자녀들은 새로이 변모할 것입니다. 가정문제도 해결되고 사회문제도 세상의 모든 문제도 모두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상담은 내 말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말씀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절이란 무엇인가?


 

예절에서 실질적인 것을 간단하게 몇가지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예절의 규정은 1) 몸을 닦고, 2) 사람과 사귀고,3)사회에 처하고,4) 神과 富를 섬김에 있어서 이치에 합당하게 하는 것 이것이 예절의 근본 理가 됩니다. 즉 이것은 지나칠까 조심하고, 모자랄까 근심하며, 힘써 중정(中正)에 합치도록 하는 노력의 행동화를 의미합니다.

서구적 예절의 뜻은, 전통적인 제어와 관습 안에서 사람과의 접촉을 교절한 것,그래서 동양의 예절은 혼자 있을 때에도 신을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지 못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사생활이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이때는 사람 앞에서 하는 것 같이 행동이나 말조심,몸조심을 안해도 좋으므로 개방사회,개방시간을 가질 수 있고 신을 생각지 않는 것이 서양 예절의 범위입니다. 이러한 대개의 뜻이 동양과 서양 예절의 다른 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혼자 있어도 삼가한다는 것이,혼자 있을 때는 그냥 내버려 둬도 좋다는 서양과는 다르다는 이점을 우리가 지적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절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으로는 (1) 마음가짐 (2) 말씨 (3) 몸가짐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 잠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할까?

우리 신변의 어려운 사람 앞에서,모셔야 될 어른 앞에서,체면을 지켜야 할 사람 앞에서,제일 먼저는 손위 어른,아버님,어머님,시아버님,시어머님,할머님,할아버지,시할머님,이러한 분들 앞에서 어떻게 마음가짐을 가져야 되는냐? 첫째로,희로애락을 억누르는 일입니다. 이것이 동양 예절의 근본사상입니다. 그래서 동료간끼리는 앉아서 무슨 기쁜 일이 있을 때는 화기롭게 [하하하]하고 큰 소리로 웃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른 앞에서나 체모를 차려야 할 바깥 사람이 계실 때에는 그렇게 웃지를 못합니다. 이 말은 웃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의 적극적인 표출을 삼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기쁠 때 기뻐하고 노여울 때 노여워하고 슬플 때 슬퍼하면서도 일면 억누르는 태도, 이것이 교양이요.이 자체가 바로 예절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단적인 것을 몇가지 더 표현해 드리면, 어른 앞에서 내외가 서로 부르질 못합니다. 결혼한 여자의 경우, 시아버님,시어머님,시할머님,시할아버님이 계신 앞에서

[여보,당신은 오늘 바쁘세요?]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옛날의 우리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부르긴 불러야 되므로 남편 곁으로 슬며시 가서 작은 소리로 [저좀 보세요]그럽니다. 그렇다해도 시아버님,시어머님이 다 압니다. 그렇지만 [여보!]하고 큰 소리로 부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데 - 부엌이나 마루나 건넌방으로 건너 간다든지 해서 거기서 마음놓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놓고 얘기하는 것은 시할아버님,시할머님,시부모님께서 눈치를 채도 좋습니다. 다만 그 앞에서 희로애락의 적극적인 표출을 삼가는 것 뿐이지 내가 기쁠 때 기뻐하지 않는 목석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은 아니지요. 또 하나,좋은 실예가 되는 것으로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벗겨졌을 때입니다. 마루 위에서는 시아버님,시어머님이 손자가 귀엽게 노는 것을 보고 계신데 엄마가 부엌에서 일하시다가 보니 아이가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납니다. 그러면 그 며느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예절에 맞는 행동인가?얼른 가서 부둥켜 안도

[아유 가엾어라 우리 강아지! 여길 이렇게 다쳤으니 이걸 어떻게 허나 어유 피까지 나오고...]

이렇게 하지를 말고 부엌에서 작은 소리로

[일어나! 일어나! 이리 와, 이리 와]

하면서 손짓을 합니다. 그러면 시할아버님, 시할머님이

[아,어서 가 일으켜 주어라]

말씀합니다. 그때는 일으켜 줘도 괜찮은 허락이 내린 것이니 벌떡 일으켜 안아가지고 부엌으로 들어옵니다. 부엌에 들어와서는 [어유 가엾어라 얼마나 아팠니?]


엄살을 떨어도 좋은데 시부모 앞에서는 그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시부모가 예절 차리고 교양있는 시부모 같으면 내버려 두질 않습니다. [아가! 그 뭘하고 있느냐?애기가 넘어졌구나,어서 가 일으켜 주어라] 그러시는 분이 시아버님,시어머님이십니다. 또 어떤 시아버님,시어머님은 얼른 뛰어 내려 와서 손자를 손수 일으켜 데리고 가셔서 닦아주고 약 발라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적에는 며느리 되는 사람은 모른척 해버립니다. 소위 이러한 방법이 희로애락의 표출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제,여러분은 신신공부를 하셨고 또 여기 계신 대부분의 자모님도 고등교육을 받으신 분들만 계신 것을 잘 압니다만 불행하게도 여러분의 시부모님은 옛날의 유교사상,불교사상이 약간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 교육가들의 얘기를 들으면 우리나라 사람의 지금 기본 사상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20% 정도의 유교영향, 15% 정도의 불교영향,7-8%정도의 기독교 영향을 받은 것이 한국 사람의 현재 사회적인 의식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이것이 한국사람이 美를 보는 것, 생활양식 하는 것, 몸가짐을 하는 것,걸음을 걷는 것. 물건 하나 장식을 하는 것. 등이 그러한 사상이 지배를 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 기독교계에 계시지만, 아무래도 이 사회가, 우리의 사회 전체가 옳다고 하는 기준은 유교의 영향이 들어가 있고,불교의 영향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구식사상을 가진 시아버님,시어머님이 앉아계신대 그 앞에서 요새,신식으로 교회를 다니고 ,대학을 나오고 고등교육을 받고 학교 선생 노릇을 하고 하는 며느님의 태도가 왜그런지 마음에 안듭니다. 그래서 찌뿌드둥하게 보고 있고 그저 뭐 말은 못하고 밖에 나가서 선전은 못하지만 내외분이 혼자 있으면


[거 며느리가 사람은 성격이 착한데 도무지 어른 모실줄 몰라...] 한탄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마음을 가지신듯 하시면 여러분이 물론 기독교인으로서의 행동은 다 하셔야 되지만 그 시부모님의 뜻을 맞춰드리는데 약간 마음만 쓰면, 사람의 감정이란 간사한 것이어서 곧 부함이 돼서 시아버님,시어머님이 나를 귀한 며느리로 위해주는 때가 곧 오고야 만다하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외끼리도 얘기를 할 때, 큰 소리로 얘기 하지 않습니다. 가령 둘이서 자기 자녀에 대한 어떤 못마땅한 점에 대해 얘기를 할 경우, 시아버님 시어머님이 계신데 며느리가 큰소리로.

[내버려 둬요.여보! 왜 그리 자꾸 그래요! 그러면 애가 자꾸 버릇이 나빠져요]

이렇게 큰 소리를 어른 앞에서 하는 것은 어른 대접이 근본적으로 아니다 라고 어른의 감정은 거기에 숨어 있습니다. 이럴 때는 시아버님,시어머님이 계시므로 조용조용하게

[내버려 두세요.괜찮아요 뭐 어떨라구요. 너무 그렇게 걱정마세요]

이정도로 부부가 얘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부를 때도 크게 못 부르고,말도 크게 못하고, 웃는 것도 크게 못 웃고 그러나 웃을 때는 웃어야 되고 기쁠 때는 기뻐해야 되고 슬플 때는 슬퍼해야 됩니다.그러면서도 그 슬픔과 그 기쁨이 표출해서 적극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그것이 곧 교양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령, 무슨 잡수실 것,고기,혹은 별미,진미가 생겼다 했을 때 우선 시아버님,시어머님께 갖다 바치고 남편,자녀 생각은 안하는 그런 태도로 상에 놓아 시부모님께 드립니다.

[이웃에서 잔치가 있다고 뭘좀 가져왔군요]

그러면 원래 교양이 있는 부모-교양이 없는 부모같으면 자식의 예절주의를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교양이 있는 부모는

[아 그것 두었다 애비 주고, 애들 주거라. 아 우리 늙은이가 뭘 그걸 먹겠니]

그러면서 하나,둘 정도 접어들고 내놓는게 교양 있는 부모입니다.

그러니까 교양 있는 부모 노릇하기도 어렵지만 교양 있는 며느리,아들 노릇하기는 한층 더 어렵습니다. 아랫사람의 위치가 언제나 어려운 걸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에도 마음을 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2. 바른말씨 사용에 대한 예(例)

요새 와서 사귀는 젊은 남녀,결혼을 했거나 아니했거나 상관이 없습니다만 가령 대학생 남녀가 어쩌다 데이트를 몇번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는 '이분이 장래의 내 배필감'이라 정하고 말도 함부로 하게 되어

[어디가? 오늘 바빠?]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장래의 배필로 생각지 않게 되면 이름을 부릅니다. 가령 [복희씨][철수씨]이렇게 이름을 부르고 심지어 더 서먹할 때는 붙여 [김철수씨][이복희씨]이런 식으로 서로 부르다가 ' 이사람은 내 배필감이다' 정하여 남 안보는 데서 은밀한 애정표시도 가한 사이아 되었을 때면 남의 앞에서 하는 말이 대개 이렇습니다.

[자기 오늘 바빠?]

이 [자기]라고 하는 말은 벌서 16-17년에 새로 생긴 말이 됩니다. [자기]라는 이 말의 출처는 원래 [이몸]이라고 하는데서 파생이 되었습니다. 가령,[김철수]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3자인 그[김철수]가 지금 이 자리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정희]라는 사람하고 [김철수]에 대해 얘기를 합니다.

[김철수씨 그분 인품이 참 좋더군요.재산 모두를 자기 자녀들이 아닌 불우이웃 돕기에 써달라고 기탁했대요]

이럴적에 제3자를 [김철수]로 부르고,다시 되짚어서 내가 그를 호칭할 때 [자기]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우리말의 바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남녀가 서로 상대를 보고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어법상 크게 틀린 일이므로 사용을 삼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런 허물없는 젊은 남녀의 경우,상대방 호칭을 어떻게 부르면 되겠습니까? 우리 조상은 이럴 때 처소격 대명사인 [거기-You),[여기 = I]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거기,오늘 바쁘지 않아?]

[응 나? 오늘 바쁘지 않아]

[여기도 오늘 바쁘진 않은데...]

이래서 [거기][여기]로 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허물없는 남녀의 대화로서 [거기][여기]가 통하는 것이지 옛날의 귀한 양반집 자제들은 깍듯한 말씨로 [도령께서] [낭자께서]라는 존칭어를 썼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반드시 이성을 썼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반드시 이성간의 호칭은 [000씨]하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때는 또 아주 친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자끼리도 서로 [하오]로 통했고 여자끼리도 그랬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떻게 해서 요새 이토록 많이 변했는지 요즘에는 남녀가 대개 반말 아니면 [해라]로 통합니다. 강의를 들으시는 여기 어머님들께서도 아드님, 따님이 계시거든 [거기][여기]가 우리 조산이 줄곧 수천년동안 쓰던 말이니 국어 사전에도 없는 [자기]라는 틀린 말을 쓰지말도록 바르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또 한가지,시조부모님 앞에서 시부모를 칭하는 말입니다. 나보다 더 높은 직계존속 앞에 덜 높은 직계존속 즉 나의 시아버님,시어머님을 시할아버님,시할머님 앞에서 어떻게 말을 하느냐? 예를 들어 시할아버님,시할머님이 손자며느리에게 이렇게 물어올 경우,

[응접실에 애비 있니?]

이 말은 응접실에 너의 시아버지가 있는지 알아보아라 하는 말입니다. 또 그쪽에서 며느리를 부를 때는 자녀가 있거나 없어도 [아가]로 부르나 나이가 40-50이 지나면 [아가]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어미야]하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었어도 소생이 없었으면 늙었어도[아가]로 부르다가 환갑이 지나면 [며늘아]이렇게 부릅니다. 이 호칭은 달리 붙일 호칭이 마땅치 않을 때에 붙이는 마지막 호칭이며 보편적으로는 [어미야]라고 부릅니다.


[어미야! 응접실에 가서 애비 있나 보아라]

여기서 [어미야!] 라고 부른 것은 손자에 대한 [어미]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자칫 착각과 혼동이 올 수가 있습니다.(시아버님을 애비라고 부르시면서 손자며느리인 나를 어미라고 부르면 혹 항렬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에게 대해선 손자를 생각해서 [어미야!]부르는 것입니다.


[아비,응접실에 있나 보아라]

물으셨으므로 [네]하고 대답한 후 시아버님을 찾아 보고나서 시할아버님,시할머님께 이렇게 보고를 드립니다.

[애비는 지금 응접실에 없어요]그럽니다. 자기 시아버님을 보고 [애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절입니다.

[그러면,부엌에 가서 에미 있나 보아라]

여기서의 에미는 물론 시어머님입니다.

[네,에미는 부엌에 있어요.조금아까 보았어요]

그럽니다. [그럼 가 오너라 해라]그러면 가서 [어머님,할아버님께서 부르세요]이렇게 말을 합니다. 설령 자기 시아버님이 듣고 있어도 시할아버님이 앞에 놓인 어떤 것을 보고

[이것 어디서 났니?]

물으면

[애비가 주었어요]애비라고 합니다. 시아버님이 아무리 옆에 있어도 시아버님을 시할아버님 앞에선 [애비]라고 해야 됩니다.

이것은 참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령 어느날,가족회의에서 [말을 제대로 쓰는 법에 대한 강연을 들으니까 우리 집안의 호칭이 안된 것 같다. 우리 집안의 호칭을 앞으로 고치자]

하는 가족회의를 한번 거치시면 어려워도 될줄 믿습니다.


3. 바른 몸가짐에 대해서

어른 앞에서의 몸가짐,특별히 체면차려야 할 분 앞에서의 에절 갖춤에는 구용(九容)이라 해서 다음과 같은 아홉가지가 있습니다.

(1)口容止

입은 다물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벌써 3,000년 전,중국 주나라 때 세워진 예절입니다만 오늘날에까지 동양이나 서양에서 똑같이 통합니다. 5.16혁명 전,정치가(장면)씨의 정치고문으로 있던 서양인 [웨디카]씨가 동.서양 예절을 상호 비교하는 저술작업을 한바 있는데 이 아홉가지 구용을 번역하면서 감탄한 것이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예절이 너무나도 잘 부합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외구에서도 예절을 가르칠 때, 여기 구용에 있는 내용과 똑같이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2) 目容端

눈이 흰동자만 나오게 되는 경우를 삼가라는 뜻입니다. 가령 누가 [00씨]하고 뒤에서 불렀을 때,자칫 머리만 젖혀 힐끗 쳐다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태도는 실례가 되며 반드시 뒤로 돌아서서 정면으로 쳐다보고 아는척을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응접실에 훌륭한 그림이나 글씨가 걸려 있으면 그것을 바라보고 감상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간혹 여성들은 얌전한척 하느라고 다소곳하게 제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보고싶은 그림을 슬쩍슬쩍 곁눈으로 잠깐씩 훔쳐봅니다. 이렇게 비스듬히 사물을 보게 되는 경우,눈의 흰동자가 보이게 되어 종종 본의아니게 실례를 범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3)手容恭

어른 앞에서 손의 자세를 공손히 가지라는 뜻입니다. 바람직한 자세는 즉 왼손으로 오른손의 마디를 잡고 오른손 엄지 손가락이 배꼽 아랫전에 닿도록 하면 팔은 약간 구부러지는 정도가 되는데 이것이 어른과 대면할 때의 자세입니다. 어른께서 말씀을 하실 경우에는 혹은 옷고름 맨 곳에 두고 다소곳이 고개 숙여 있되 어른이 새로 말씀을 시작하실 때,잠깐 쳐다보고 내가 말씀드릴 때 잠간 쳐다보는 정도로 하여야 되며 너무 빤히 쳐다보거나 전혀 고개를 수그리고 있거나 하는 태도는 예절에 어긋납니다.


(4) 頭容直

다소곳한 곳은 좋아도 그밖에 아무 각도로도 구부러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어른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채 말씀을 드리거나 머리를 갸웃거리는태도를 삼가라는 것입니다.


(5)聾容

어른 앞에서 목청을 돋구지 마라. 큰소리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 氣容熱

군자는 숨소리,기침소리,재채기,한숨쉬는 소리도 삼가한다는 뜻입니다.


(7) 立容德

어느 다리든지 한 다리에 체중을 싣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어른 보는 앞에서라면 잠깐 서 있는다 해도 꽂꽂이 두 다리로 서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도 바지를 입었을 때는 괜찮지만 스커트를 입었을 때에는 발 뒷굼치 길이가 땅에서 15cm 이상 떨어지지 말도록 가르친다고 합니다.


(8) 色容粧

얼굴빛을 온화하게 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항상 그 낯빛을 부드럽게 가지면 집에서 기르는 짐승조차도 그것을 알아보고 반응이 벌써 다릅니다. 인간관계에서는 하물며 더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9) 足容重

발의 모습은 무겁게 가져야 된다는 뜻입니다. 어른 앞에서 발을 까불거나 건들건들하는 버릇,괜히 길 가면서도 돌뿌리를 톡톡차는 일 등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이런 행동은 전혀 경박해 보이므로 삼가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상의 내용이 어른 앞에서 갖춰야할 [아홉가지의 몸가짐]즉 구용이라 해서 옛날부터 우리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예절입니다.


외국 청소년의 실태


 

약 한달전에 저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복지국가인 덴마크에서 그 나라 국민들과 같이 생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덴마크 정부에서 우리나라 학생을 초청해서 그 학생들에게 덴마크의 농촌개발과 청소년들의 학업실태,생활실태 등을 견학시키고 공부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학생들을 인솔하여 지도교수로 함께 갔었습니다.

저는 약 10년 전에도 덴마크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만 이번에 다시 그 나라에 가보고는 놀랐습니다.


우선 덴마크가 10년전에 비하여 엄청난 사회복지시설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잘 산다고 하는 이 나라가 물질적으로 더욱 더 엄청난 발전을 해온 것입니다.


흔히 그 나라와 그 사회가 어느 정도로 잘 사느냐 하는 문제를 볼 때에는 의료보험 제도나 퇴직수당 혹은 교육제도 등을 두고 말합니다. 덴마크는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의료보험 제도가 발달되어서 누구든지 병이 나면 한푼의 돈도 지불하지 않고 병원에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으며 약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3년 전에 의료보험 제도를 폐지해 버리고 나라에서 그 제도를 인수하여 덴마크 국민이면 누구나 다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고 합니다. 퇴직수당이나 실업보험 요금도 과거에는 보험제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폐지해 버리고 국가에서 인수하였습니다.국민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직장에서 어떠한 종류의 연금에 해당하는 보험을 불입했든지 간에 만 65세가 되면 연금을 받으며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정부로부터 지급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육제도를 볼 것 같으면 유치원에서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등록금이나 수업료를 내는 것이 없어진지 이미 오래 되었고 모든 교육은 국가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외국 유학생이 그 나라 대학에 입학하는 경우 역시 등록금이나 수업료를 안내는 것은 물론 대학교로부터 한 달에 3백 달러씩(약 18만원)용돈까지 지급 받습니다.


또한 가장 가난하다고 하는 농민이나 노동자들이 사는 수준을 보면 더욱 놀랍습니다.농촌의 농민들이나 도시의 노동자들 중에 집집마다 자기용이 없는 가정이 한 집도 없으며 어느 집을 가든지 카페트가 깔려 있어서 아마 카페트가 싸서 그렇게 많이 깔아 놓았나 보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나라 돈으로 2평에 50만원에서 70만원까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상당한 값이 나가는 데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카페트를 깔고 자가용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생활이 어떠한가 대강은 짐작이 갈줄 압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나라가 잘 살게 되었는지 그 비결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덴마크의 기후는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좋지 않습니다. 여름석달 동안은 햇빛을 볼 수 있지만 나머지 아홉달 동안은 아침부터 밤까지 안개가 끼거나 구름이 덮여 있어서 해를 구경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하자원이 많이 묻혀 있는 것도 아니며 땅조차도 황무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어서 농산물 생산품의 삼분의 이 정도가 외국에 수출됩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두고 볼 때,그 나라 국민성이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역사적으로 연구해 본 적이 있습니다.내가 연구한 바로는 그 나라의 선조는 바이킹이라는 해적단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해적단들의 후손이 잘 살게 되었는지를 연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덴마크의 자연적인 조건만으로는 잘 살 수 없었으나 그 나라에 기독교 사상이 들어옴으로써 커다란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노략질하고 사람 죽이는 일을 밥 먹듯 하는 해적단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자 그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러한 일이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기독교 사상으로 인하여 그 나라가 부흥되고 그 민족의 민족성이 개조되었던 것입니다.


100년 전에 덴마크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전하고 막대한 배상금뿐 아니라 지금의 독일 북부의 영토인 슬레스벅 홀스타인이라고 하는 지역을 독일에 넘겨주어야만 했습니다. 곡창지대를 독일에 준 덴마크는 경제적인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국립은행이 파산했으며 국민들의 원성은 높아만 가서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이웃을 원망하며 국가와 사회를 저주하였습니다. 이런 험악한 상태에서 그 나라가 오늘날과 같은 복지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은 국민운동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당시 덴마크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좋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사회에 부패와 부정이 만연하였으며 퇴폐풍조에 젖어 각 가정이나 청년들은 영.혼.육 모두가 상해 있었습니다. 한 사람도 올바른 신앙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 가운데 있지 못했다고 할 만큼 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훌륭한 지도자가 덴마크 민족을 살리기 위한 국민운동을 벌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새마을 운동과 비슷한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정신운동을 전개한 지도자는 '그룬투비'라는 목사님이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무엇이 이 사회의 원동력이 되며,무엇을 가지고 자녀를 교육시키느냐?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그룬투비 목사는 이 민족을 살리기 위해 한 격문을 내세웠는데 그 격문의 제일 처음 말은 [지옥문에서 돌아서자!]라는 말이었습니다. 타락할대로 타락해서 지옥 문 앞에 선 이 민족이 돌아서야 하는데 어떻게 돌아설 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제창한 안이 국민 고등학교 안이었습니다. 국민 고등학교란 학생이 학교에 입학을 하면 전원 기숙사에 들어가 선생과 학생이 같이 먹고, 같이 자며 토론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새 삶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받는 교육제도였습니다. 오늘날에는 덴마크에는 72개의 국민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는 17-18세의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을 받아들여 교육시켰는데,이들이 무엇을 가지고 그 민족을 살리는 원동력을 받아 갔느냐 하면 그곳의 교과 과정 중 50%를 차지하고 있는 성경을 통해서였습니다. 청소년들을 바로잡는 성경을 통해서였습니다. 청소년들을 바로잡는 데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덴마크나 이스라엘, 폴란드,스위스 등 유럽의 모든 선진국들이 어떻게 해서 그 사회를 올바로 잡았느냐 하면 역시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 민족들을 거듭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민족이 살아나려면 성경 말씀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국민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덴마크가 전쟁에서 패전을 하는 바람에 국립은행이 부도가 나서 경제적으로 파탄에 이를 정도의 악조건과 청년, 성인 할 것 없이 모두 부패와 타락과 퇴폐풍조에 젖어있는 사회를 바로잡는데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 성경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나라 국민들이 하나씩,둘씩 성경의 거울에 자기 마음을 비추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사람들이 변하게 되고 축복을 받게 되어서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사회 복지국가를 이루었던 것입니다.이것은 한 민족이나 한 나라 또는 특정한 지역의 한 종족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는 원리입니다.


오늘날 덴마크에 가면 성경말씀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선조들이 축복을 받아서 후손들도 이렇게 복을 받고 산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선조들로부터 받은 유전들이 행동화되어 있는 몇가지가 있는데 우선 수도권 전철을 타 보면 알수가 있습니다. 코펜하겐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들어오는 전차와 기차가 있는데 이것을 타기 위해서는 매표구에서 자기가 원하는 표를 사 가지고 정류장에 들어갑니다. 이 정류장에는 우리나라처럼 개찰구에서 검사를 하지 않습니다. 기차나 전차를 타서도 표를 받는 사람이나 조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타서 목적지에 이르면 문이 열려서 자기 갈 길로 가 버립니다. 이 광경을 보고는 제가 인솔하고 갔던 학생들의 하는 말이 [교수님,평상시 강의에서 들은대로 정말 없네요.아무도 없네요]라고 감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덴마크의 어떤 청년에게 [아무도 표를 받지 않는데 그냥 타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대답하기를 [아는 분이 한 사람 있죠]라고 말하길래 나는 요즈음 고도로 발달된 T.V나 컴퓨터 등을 설치해 놓고 그 스크린을 통해서 검사한다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100원짜리 차표를 사야 할 사람이 50원 짜리 차표를 사거나 공짜로 탔을 경우,그것을 아는 것은 우리의 양심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양심이 주인이 되는 이 사회,이 양심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준입니다. 덴마크 국민들은 양심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양심에 따라서 산다는 것, 곧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성경말씀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대학교 기숙사에는 무인 판매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거기에는 음료수,초콜렛 담배 등 여러종류의 잡화물들이 있고 그 옆에는 조그만 상자가 있어서 물건을 사고는 그 상자에 물건 값을 넣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에도 물건과 돈이 들어 있는 상자가 그대로 있습니다. 혹시 돈을 내지 않고 물건을 가져가거나 아무도 없을 때 돈 상자를 가져가지 않을까 의심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에게는 양심적으로 살아 온 습성이 몸에 배어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무엇을 했는지 아는 분,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국민적 사상입니다. 기독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기 전에는 이러한 사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늘날 덴마크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목사님입니다. 무슨 행사를 하든지 가장 상석에 목사님을 모시고 그 밖의 내빈들이 아랫자리에 앉게 됩니다. 농촌을 개발할 때에도 그 농촌 지역에 있는 목사님이 중심이 되어서 일을 하며 경축일이나 장례일 등에도 항상 목사님을 모시고 합니다. 이만큼 덴마크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상 속에 젖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어린 자녀들에게 주는 영향을 막대합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부모님이 교역자를 잘 접대하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와 한 사회가 개조되고 변화되며 부흥되는 데에도 기독교 사상이 작용하며 개인적인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지혜가 많은 사람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원자탄을 발명한 아인슈타인이나 심리학자인 프로이드,공산주의 이론을 만들어 낸 칼 막스 등 모두가 유대인입니다. 오늘날 세계 각국에 있는 국가원수의 20명에 가까운 수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어디를 가든지 영리하며 그들이 성공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어떻게 지도하기에 이 민족의 오늘날 이렇게 훌륭한 민족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런 천재들을 배출했는가를 생각해 볼 때,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교육이며 그중에서도 종교 교육이었습니다. 유치원에서부터 가르치는 모든 교과과정이 모두 성경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제 딸이 이스라엘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로 1학년 때에는 창세기, 2학년 때에는 출애굽기를 공부합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이 교재가 되어 시문학,윤리,철학 등을 공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사상을 넣어 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모든 국민의 공통된 과제입니다. 성경과 부모님의 기도를 통해서 아이들은 달라집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 훌륭한 아들을 낳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 유럽에 있는 나라들은 거의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불교나 모슬렘 혹은 짐승,나무 등의 자연물을 섬기는 국가가 많이 있는데 이 나라들은 특징은 대부분이 못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민족은 크게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축복을 베풀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멀리할 때에는 주신 축복이라도 거두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태리의 봄베이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봄베이는 이태리의 남부에 있었던 고도로 발달된 문명도시였는데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멸망한 것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 도시는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서 볼때 그 당시 세계 어느 민족이나 도시가 따갈 수 없을 만큼의 발달되고 호화스런 생활을 누린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벌써 1,900여년 전에 상수도 시설을 갖추었으며 호화스러운 주택과 넓은 광장,요즈음의 사우나탕과 같은 시설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번영하던 도시가 왜 멸망하였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주의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에게 더 열심히 달라붙어 미혹합니다. 봄베이는 마귀의 유혹 가운데 성적 타락으로 멸망했던 것입니다. 그 도시에 가보니 아직도 남아 있는 벽마다 남녀의 성관계를 그런 그림만 있었습니다. 그 당시 어떤 부잣집에는 형제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매일 저녁마다 파티를 열어서 이 사람,저 사람 돌아가며 잠을 자는 문란한 생활을 한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봄베이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진노하셨습니까? 처음에는 이 도시에 지진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집들이 무너지고 약간의 사람들이 죽었지만 이 도시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다음에는 화산이 폭발하여 그 지역의 주민이 하루 아침에 몰살 당했습니다. 화산재가 7m나 쌓인 그속에는 잠을 자다 죽은 사람,목욕을 하다 죽은 사람, 남녀가 껴안고 죽은 사람등 그 시체들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볼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도성일찌라도 그 나라가 하나님을 거역할 때에는 축복을 거두어 가시는 역사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날 축복을 받은 덴마크나 유럽 각국들이 걱정되는 일이 생겼는데 그것은 성으로 인하여 점점 타락해 가는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이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을 할만큼 문화수준이 높은 나라가 되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멀리할 때에는 그 축복을 거두어갈 날이 멀지 않습니다. 로마가 전성할 때에 로마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지만 로마는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푸라기만도 못한 보잘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쓰실 때에는 왕으로도 만들고 그 나라를 흉하게 할만큼의 큰 지도자가 되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또한 세계를 움직이는 나라나 지도자일지라도 하루 아침에 풀잎의 이슬처럼 떨어지게 할 수도 있는 하나님입니다. 유대 민족이 오늘날 그런 석학을 배출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상을 심어주는 교육을 시켰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사람들이 자녀들을 지혜롭게 교육시키는 이유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청소년들을 지도할 때에 일등교육을 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정신이야 어쨌든,신앙이야 어쨌든 일등을 위한 교육을 시킵니다. 국민학교에 들어간 자녀에게 일등을 해서 반장이 되라든가 일류대학에 일등으로 붙으라는 등 모든 분야에서 일등을 따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무엇을 가지고 자녀를 교육시키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그곳에서 자녀를 교육 시키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보고 교과서를 검토해 보 서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국민학교의 성적표에 점수는 없고 대신 국어란에는 [또박또박 잘 읽는다]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충분히 표현한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다른 아이의 미술 성적을 보니까 [어두운 색을 많이 써서 그림을 그린다]라고 써 있었으며 가정통신란에는 [이 아이의 방을 밝게 해 주십시오]라고 써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공부로 판단하지 않고 다른 좋은 점들을 칭찬해 주고 사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제가 어떤 가정집을 방문했을 때 그 집 아이가 엄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엄마,옆집 00은 피아노를 잘 쳐서 피아노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대]하고 사기가 떨어져서 말을 할 때 저는 과연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습니다. 한국의 어머니들 같으면 [그래? 그럼,너도 피아노를 열심히 쳐서 1등해야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자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얘야, 옆집 의 아이는 피아노를 잘 치지만 너는 하모니카를 잘 붙잖니?]하고 격려해 주니까 아이의 얼굴이 금방 환해지면서 자기의 방에 들어가 하모니카를 불었는데 제가 듣기에는 별로 잘 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조그만 것 가지고도 자식을 격려해 주고 칭찬을 해주면서 사기를 북돋아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알맞는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 미술을 잘하는 사람, 공부를 잘하는 사람 등 각각 다른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각 자기 아이에게 알맞는 달란트를 키워주고 격려해 주는 교육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한가지의 달란트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잘 해야 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피아노,바이얼린,남이 가르치면 자기 자녀들에게도 이 모든 것을 가르치면서 1등을 강요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녀들의 천부적인 소질을 게발시켜 주기 보다는 쓸데없는 경쟁심을 유발시키게 됩니다. 우리가 자녀를 교육시킬 때 주의할 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또한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기업이기 때문에 자녀들을 잘 경영해 나가며 가꾸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혜로운 교육방법은 암기식 교육이 아닌 사고능력을 개발하여 지혜를 키워주는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느 학교에서든지 암기식 시험문제는 출제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따로 불러서 격려해 주고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며 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학생들을 지도합니다. 이런 것이 아무 것도 아닌 일 같지만 청년들에게는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지금의 제가 있기 까지는 물론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하심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저는 32살에 지금의 아내와 약혼을 하였는데 결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려면 조그만 방 한칸이라도 있어야 겠는데 그 방을 얻을 돈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돈을 모아서 지금의 불광동 구석지에 방을 한칸 얻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는데 시골의 부모님들을 모시기 위해서는 내가 돈을 보내야 오실 수 있을 만큼 가난했습니다. 그때 조그마한 회관에서 결혼식을 하고 제가 속한 단체의 친구들이 부조금을 걷어 우리의 신혼여행비를 마련해 주고 택시를 태워 주었습니다. 택시를 탄 우리는 돈을 아끼기 위해 기본요금이 나오는 곳에서 내려 만두국을 한 그릇씩 먹은 다음 시외버스를 타고 안양에 가 그 곳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집에 온 기억이 납니다. 저는 부모님들로부터 물질적인 상속은 받은 것 없지만 한가지 넘치게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의 축복을 상속받았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지만 끊임없이 기도하는 분이었습니다. 저희 8남매중 5번째인 나만 겨우 국민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우리 집에서는 지금의 외국유학을 보내는 것과 같은 큰 결단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속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었지만 꼭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이 모든 역경을 물리치고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었으며 타락하지 않고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역경에 처하면 비뚤어져서 사회를 미워하고 잘 사는 사람을 배척하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인데 이 마음을 바로 잡아주는 데에는 성경말씀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린이들을 교육할 때에도 신앙 안에서 간절히 기도해 주고 격려해 주며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어린이들을 바로잡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제가 인솔하고 갔던 한 학생에게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라고 권유했더니 그 학생이 말하기를 [저는 비록 교회는 안 다니지만 나쁜 일을 하고 싶어도 저를 위해서 염려해 주시고 기도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이 떠올라서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어렸을 때, 주일학교는 다녔는데 커가면서 나쁜 친구들을 만나 술 먹고,담배 피우며 주일에는 놀러가고,그래서 지금까지 교회에 안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45일간 같이 생활하면서 꾸준히 전도를 했더니 그 학생이 어머님을 보아서라도 교회에 나가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방황하며 하나님을 멀리 떠난 학생을 바로 잡는데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가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자녀교육에 있어 기도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본을 보인다고 해서 예수님처럼 한 점 흠도 없이 거룩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실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 또 회개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노력 가운데 기도와 찬양과 말씀 속에서 본의 되도록 해야 합니다. 화가 날 때도 예수님 때문에 참고 교만하지 않으며 시기하지 않는 부모님을 자녀들이 보았을 때 예수님을 믿게 되고 이것이 곧 산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자녀교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지만 특히 어머니의 책임은 막중합니다.이것은 유대인 사회를 통해서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을 교육하는데 있어 법을 정하여 모든 책임을 어머니에게 부과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부모 모두가 유대인이면 자녀도 유대인이며 부모중 아버지는 유대인이고 어머니가 외국인일 경우에는 유대인 시민권을 주지 않습니다. 특별 수속을 밟고 개종을 하여야 유대인이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외국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인 경우, 그 자녀는 자동적으로 유대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자랄 때 어머니로부터 그 성격과 사상이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자녀교육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은 이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기일 때, 갈대상자에 넣어져 강물에 떠내려 가다 바로의 딸 손에 건져져서 바로의 궁전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모인 유대인 유모를 통해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유대인의 사상과 하나님을 경외하는마음을 물려 받아 부와 권력이 있는 바로의 궁을 뛰어나올 수 있었고 유대민족을 이끄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지만 유대인인 어머니의 역할이 컸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의 교육정도가 올바로 되었느냐.안되어 있느냐는 그 어머니의 기도가 얼만큼 있었느냐 또는 그 어머니가 가정생활을 통해 얼마나 본이 되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 주고 성경을 교재로 아이들을 교훈하며 아이들의 장점을 살려서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며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키우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바쁘다 할지라도 아이들에게 관심을 써주고 1년에 한두번은 함께 야외로 소풍을 가거나 운동을 하며 아이들을 달래주고 감싸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해 주신 기업이기 때문에 잘 보살피고 지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기업을 소홀히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되므로 없는시간도 쪼개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가지며 그들을 흐뭇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귀한 기업을 잘 보살피고 양육하며 끊임없는 기도와 성경말씀을 통한 교훈을 가슴에 새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훌륭한 자녀들로 키우는데 다같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자녀교육은 무엇이 문제인가?


 

인류 역사의 시작은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 중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에는 인간이 요구하고 있는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불만이 있을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생활은 즐거운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난 후에는 감시하는 대상으로 바뀌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은 인간을 축출하고,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에덴 동산을 탈출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를 멀리 떠난 자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류의 역사는 에덴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은 곧 가정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가정교육은 무엇이 문제인가?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급변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에는 다이아몬드로 가치 있었던 것이 내일은 먼지로 화해버리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의 변화를 새롭게 연구하고 이런 고민스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그런 시기에 있습니다.


최근에 [제3의 파동]을 지은 앨빈 토플러는 책에서 말하길 인류가 겪은 제1의 파동은 B.C.8,000년에서 A.D. 1,650년까지 약 1만년에 걸쳐서 있었습니다. 인류는 농업혁명을 일으킴으로써 현대에 살고 있는 형태의 인간으로 성장 되었다는 것입니다. 1,650년부터 1,950년까지 300년의 기간을 앨빈 토플러는 제2의 파동이 일어난 시기라고 했습니다. 1만년이 300년으로 줄어들어서 그에 특별히 18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산업혁명을 중심으로 공업화를 통해서 인간이 노동을 덜 하고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공업사회를 이룩했습니다. 그후 1,950년 중엽부터 컴퓨터와 대형제트기,인공위성을 비롯한 문명의 이기들이 등장 되면서 인류는 놀라운 변화가운데 1,980년을 맞았으니 1,950년에서 1,980년은 30년입니다. 이 30년간에 선진국은 물론 모든 개발도상국가까지도 인공위성과 컴퓨터등 모든 문명의 혜택을 입어서 고도의 공업국가로 화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1만년 동안 서서히 변화되었던 농업시대의 사고방식이 지금은 불과 30여년만에 전 세계가 고도의 공업화를 이루려는 그런 사고를 가지고 살려고 할 때, 우리는 정신병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싸움은 더 심각해지며 부모오 아이들의 세대간의 차이는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을 이유 없는 반항기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여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현대의 가정을 한 시인은 이렇게 풍자하였습니다.

[즐거운 나의 집이라고 옛 시인은 노래했으나 지금은 정류장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오. 먹기 위해서,잠자기 위해서 그리고 달리기 위해서 정류장에 잠시 들르게 되었네.사무실도 영화도 클럽도 데이트도 더 이상 가족과 즐길 수 없게 되었다오]


이린 詩는 오늘날 현대가정이 정거장화,하숙집화 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을 지켜야 할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은 잃어버리고 한갖 나그네들이 잠시 머물러 가는 정류장으로 화하고 있는 그런 실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단란하게 살았던 풍요한 에덴의 생활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오늘과 같은 가정의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바벨탑을 쌓아 보았으나 거기엔 혼란만이 있었습니다. 인공위성을 만들고 전자회로를 사용해서 에너지를 공급하고 합성식품을 만들어서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있지만 인류의 진정한 문제는 에너지나 식량, 인구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 포드의 재단 책임자인 하친스 총제가 말하기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큰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이며, 지적인 문제이며,정신적인 문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도의 공업화로 말미암아 상품이 홍수와 같이 범람하여 냉장고,세탁기 외에도 기발한 생각으로 만들어진 가전제품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점점 가난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과거에 논밭을 갈며 살았던 선조들이 누리던 그 행복을 전혀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료산업과 의학약품의 발명에 의하여 사망률이 점점 줄어듬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긴 생을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전쟁을 싫어하면서도 전쟁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에너지 문제나 경제개발,공업화 문제가 아니고 도덕적이며 지적이며 영혼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대개 경제문제가 원인이라고 말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담과 이브의 가정이 파산된 것처럼 마땅히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가정이 하나님을 내쫓고 살겠다고 하니까 가정의 붕괴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말하기를 [가정에는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 사랑은 사닥다리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닥다리는 긴 두 개의 장대와 장대를 연결하는 작은 가로 막대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 개의 장대는 사랑하는 두 연인의 관계이며 가로 막대기는 두 연인의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가장 낮은 막대기는 육체적인 사랑이며 가장 높은데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차원적인 것으로 그 안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국가와 사회를 사랑하는 마음 등 모든 것들이 전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수많은 가로 막대기를 거쳐야 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간직하고 있는 사랑이 하나로 연결되어 모든 사건들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요즘은 아버지와 어머니,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그 사이에 있는 많은 문제들이 전부 아이들의 문제로 화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좋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이러한 문제를 제기 시키면서 하나님이 인류를 이 땅위에 보내신 역사와 그 경륜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문제들을 중심으로 인간개발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서구의 문명이 몰락되어 가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얼마 전 신문지상에 미국은 가정생활을 떠나 비가정생활을 하는 인구가 23%에 육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건국 초기의 미국은 500쌍이 결혼을 하면 1쌍이 이혼을 했는데 1,810년경에 와서는 약 110:1로 가속화 되었으며 최근 통계에 의하면 두 쌍이 결혼하면 한 쌍이 이혼한다는 심각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아무리 방대한 자원과 청교도들이 깨끗한 나라로 건설하였지만 가정이 파괴당하는 한 미국은 건전할 수 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베트남 전쟁 때 그 막대한 군비를 투입하고도 패배했으며 최근에는 미국이 세계의 지휘권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카터의 도덕 정치도 빛을 보지 못한 채 백악관의 무대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과거 200년간의 찬란했던 문화와 위력은 사라지고 많은 나라들이 반미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서 그 지도력이 상실과 함께 도전받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물론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두 쌍이 결혼하면 한 쌍이 이혼하는 이들의 파괴적인 가정현상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도 1960년대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국민소득이 2,000불을 육박하고 있어 경제개발이 이룩되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나 문제의 발단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가정들은 과거의 전통적인 가정을 상실했으며 출세와 권력,명예를 위주로 자식들을 교육시켜 부모 자신이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영광을 자식을 통해 해결해 보겠다는 이기주의에 의해 청소년들이 범죄의 집단으로 화하고 있으며 국가는 이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볼때 우리의 가정문제를 선진국에 비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127:1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가정이 파탄되고 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무너진 가정을 생각케 하며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은 타락하기 이전의 건전한 가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의견충돌이 생기고 예의를 벗너나 불만이 싹틀지라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고 서로의 의견을 조정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신 가정은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면 아담과 이브가 먹지 말라고 명령한 실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축출되고 그 죄의 댓가로 아담에게는 종신토록 수고하어야 그 소산을 먹으며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브에게는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시므로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남편을 사모해야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린 저주이며 비극적인 일이지만 더 큰 하나님의 경륜에서 생각한다면 인간이 자식을 낳아 같이 살다가 독립된 인격을 갖추게 되면 결혼을 시켜 분가하는 것처럼, 인간이 에덴동산의 요람에서 사는 것도 좋지만 참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 모진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신 성숙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귀중한 것을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구체적인 실체는 어머니가 아기를 낳고 완전히 성장해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때까지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아버지의 보살핌이 없으면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인간이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특별히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해산의 고통을 주셨고 이 고통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지극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는 말하기를 [여성은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성이 사랑을 하기 때문에 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인류의 문명은 어머니 때문에 지탱되고 있으며 또한 가정의 건전화도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세의 어머니나 사무엘의 어머니,한나의 어머니 그리고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등에 헤아일 수 없이 많은 여성들이 인류의 위대한 인물들을 낳아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능히 이해가 가리라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가치있는 한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하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버를 주실 때,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으라고 분명히 성경에 말씀하셨는데 인간은 땀을 흘리지 않고 댓가를 받으려 하는데서 비극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산업현장에서는 고용자와 피교용자의 항쟁이 그치지 않고 있으며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업에서는 인력이 남아 돌고 있어 심각한 국가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담과 이브의 가정은 파괴되고 땀을 흘려야 한다고 하신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어긴 인간에게는 이처럼 어려운 문제에 당명하게 되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얼굴에 땀을 흘린 댓가로 먹고 살아야 된다고 하셨는데 땀 흘리지 않고 수고하지 않으며 편하게 돈 벌어서 으시대며 살겠다는 인간들 때문에 사회는 혼란의 소용돌이 가운데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땀을 흘러야 살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은 위대한 교훈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어머니의 해산하는 고통에서 이미 증명된 그 숭고한 사랑과 아버지의 땀 흘리는 수고와 노력이 결합되어 하나님을 모시는가운데 자녀들의 교육이 이루어 질때 그 아이는 국가의 재원이 되며 평화의 사도가 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역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를 자기의 소유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으나 성경 말씀중 시편 127:3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식물도 씨앗 속에서 싹이 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 목적이라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태어나 자기 자신을 살려야겠다는 것은 기본적인 인간의 욕망인 동시에 권리며 의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중대한 책임이 어머니에게 주어졌는데 이것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할 때 청소년 자녀들의 범죄는 엄청난 속도로 가속화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국가가 정한 법의 범법행위를 하지 않아서 교도소에 가지 않았을 뿐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이 사회를 산란하게 만들고 병들게 하는 공범자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그 숭고한 사명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녀들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자녀 한 사람을 맡았으면 자기의 최선을 다해서 키워야 합니다. 성경의 달란트를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 가진 자가 장사를 잘해서 열 달란트를 남겨 주인에게 갖다 주었을 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큰 일을 맡기겠다]고 하였습니다.자녀를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거나 과거에 자신이 못다한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 청순한 청소년들의 가슴에 못을 박아 아프게 만들어 놓으니 병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교육할 때에는 진실된 사랑과 따뜻한 훈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어머니는 한 아들을 낳아 흑인노예 해방을 시켰으며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보잘것 없는 유랑민족인 모세의 어머니는 아들을 잘 키워서 민족의 영도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품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세계의 평화와 인류를 위해, 풍전등화격인 국가를 위해,혼란과 흑암 속에 있는 사회의 질서를 위해 그 세대가 부를 때 보내야 할 사람을 기르고 있다는 것을 부모는 새롭게 각성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로 키우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공통된 심정입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눈이 밝아져 선악을 분별하는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고 땀 흘리는 수고를 해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 일이 잘 수행될 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사랑함으로써 참 인간을 만들 수 있는데 나는 못 배우고 나쁜 사람이었지만 너만은 훌륭하게 되라고 할때 자녀들에게는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청소년의 모든 문제의 공범자는 다름아닌 부모들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든,자녀든 한 생활의 일원이며,가정이라는 인류 최초의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각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생활습성과 인격을 갖출 때만이 올바른 인간구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시한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시면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인간에게 말씀하셨으며 참 인간이 되는 길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배우기 때문에 참다운 인간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부모는 분명히 모범적으로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아이들에게 부모의 인격을 완전히 보여서 외모뿐만 아니라 부모의 성격과 인생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닮게 할 때,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식에게 보여주는 참된 인간성이며 올바른 교육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인간의 조건을 요약해서 말씀드린다면


첫째, 인간은 정신적인 존재입니다. 나의 정신력이 약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미래에 다가올 영광도 볼 수가 없으므로 인내력이 약해집니다. 기쁜 일을 당하거나 슬픈 일을 당했을 때, 그후에 올 여러가지 영광스러운 일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을 때, 오랫동안 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신력을 통해서 당신께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만큼 정신력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인간은 지적인 존재입니다. 현대사회는 너무나도 급변하고 컴퓨터의 등장과 더불어 지식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 지식을 어떻게 흡수해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영어,수학시험 잘 받아서 일류대학에 입학한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미치기까지 계속 연구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부모,자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째,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로 태어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사회 속에서만이 성장할 수 있고 사회 속에서만이 인간으로서 자기 실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7-39)는 이 사회적인 명령에 순종하여 살 때 하나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이들을 위한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베풀어질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새롭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네째,인간은 건강을 가진 존재입니다. 과거에는 머리카락이나 손톱 하나 상해도 부모에게 불효라 생각하여 소중히 다루었는데 요즘은 자살하는 사람도 많고 자기 몸에 해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마약,몰핀 등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최고의 걸작품을 아낄 줄 모르는 현대인은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이며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나다운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을 사랑하고 아끼며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온유한 심정으로 살아갈 때 형성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살려고 할 때, 영적인 건강뿐 아니라 육적인 건강도 더욱 좋아지는 것입니다.


다섯째, 인간은 가정적인 존재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서 으시대던 사람도 가정이 파탄되면 이 모두가 허물어지고 맙니다. 인류의 역사가 가정에서 시작되었듯 인간의 모든 출발은 가정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머물러 계셔서 가족상호간에 화목하고 인격을 존중해 주며 서로 돕고 살 수 있는 지상낙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바지하며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역할에 있어 특히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권위와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입니다. 가족이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서로를 키워주며,아껴주고 양보할 때,하나님의 나라가 형성되고 교회가 형성되며 가정이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일류학교를 가고 좋은 옷을 입으며 혹은 명예를 얻어서 사는 것이 잘 되는데 아니라 어떤 세파가 불어와도,누구에게 내 놓아도,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지적,경제적,건강에 있어 빠짐이 없는 온전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챤의 삶에 대한 자세입니다. 해산하는 고통과 땀 흘리는 수고를 통하여 정말 즐거운 나의 집을 만들며 하나님을 모신 새로운 에덴동산을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10대 청소년들을 이해하기 위한 부모들의 자기발견


 

나는 지금 Boy's Town,소년원이라는 곳에서 약 30여명의 불우 청소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중 17세된 승철군의 아버지는 광주에 있는데 가정부로하로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승철군을 때리면서 집 나간 엄마를 찾아오라고 하므로 그는 화가 나서 거리를 방황하다가 우리 전도사님을 만나 소년의 마을인 Boy's Town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약 한달정도 지내더니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습니다. 또 어떤 아이는 광주시내에서 여자들의 핸드백을 날치기하는 것으로 유명한 소위 쓰리꾼으로 하루에 돈을 몇 십만원씩 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왕치라는 사람에게 잡혀 돈을 버는 족족 모두 빼앗기고 소년원에 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소년원을 나오기가 무섭게 문옆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깡패들이 또 데려가려는 것을 우리가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길을 거부하고 우리 소년의 마을에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건전할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소년이 2년만에 중학교,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합력하고 이번에는 대학 예비고사를 치뤘습니다. 그는 대학을 갈 것입니다. 광주 충장로에서 핸드백 날치기로 가장 유명했던 쓰리꾼이 하나님을 믿고 그 삶이 변화되어,어려운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간다는 것에 대해 경이로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디모데후서 3:16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는 말슴이 있습니다. Boy's Town에 있는 불우한 청소년들을 보면 잘못이 원인이 그들에게 있기 보다는 오히려 부모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왜 오늘날 청소년들이 나쁜가?] [왜 청소년들이 비행을 하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왜 불우한 청소년,비행 청소년들이 나오게끔 부모들이 만들어 놓았는가?] 에대한 문제인 [10대 청소년들을 이해하기 위한 부모들의 자기발견]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래의 4가지 사항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우리 청소년들을 사랑하자. 둘째, 우리 청소년들을 잘 알아보자. 셋째, 우리 청소년들을 통제하자. 넷째, 우리 청소년들을 지도해 주자.


이것은 바로 디모데후서 3:16에 있는 말씀과 상통하는데,

첫째,[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청소년 문제나 자녀들을 대할 때 나쁘다. 좋다는 것을 떠나 제일 먼저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교훈과]라고 했습니다. 청소년들을 가르치려면 그들에 대해 잘 알아야만 합니다. 알지 못하고 가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책망과]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들이 잘못할 때에는 통제를 해야 합니다.


네째,[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지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나는 좋은 부모가 못되었으며 왜 내 자식은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부도덕한 행동을 하며 학교에 가려고 하지 않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불평불만을 가지고 방황하는 자녀들의 목을 옭아매어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마귀와 대항해서 자녀들을 올바르게 키워 하나님께로 이끌 자신이 없다면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기도하며 좀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첫째, 우리 청소년을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3:13에[그런즉 믿음,소망,사랑,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을 믿어 달라고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청소년들이 원하는 것은 사랑해 달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부모는 자녀들이 유치원이나 국민학교에 처음 입학을 하게되면 끔찌이도 사랑해 주십니다. 가령 [엄마,아빠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하면 [오,그래, 잘 다녀오너라]하시고,갔다오면 [아이구 예뻐라! 무척 춥지]하시면서 준비했던 간식을 내줍니다. 그러나 중학교,고등학교만 들어가면 [엄마,나 손시려]하면 [아이 이건 다 큰 것이, 징그럽다.저리가라]고 밀어내십니다. 부모들이 마음으로는 청소년이나 자녀들을 사랑할지 모르지만 행동으로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들은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고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니는 자녀 또는 교회 아이들이나 옆집 아이에게 [너를 보면 정말 사랑스럽구나]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내 자녀가[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난 분명히 알고 있어요]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언제 청소년들을 사랑한다고 말로 이야기했고 끌어안아 주었으며 또 언제 자식들로부터 우리 엄마,아빠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았냐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을 사랑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워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 자녀들에게 자기가 난 자식을 미워하겠냐고 반문하겠지만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욕하는 것을 보면 정말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의혹이 생깁니다.


자기 자녀가 저녁 늦은 시간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전화 한통 안걸어 오는 것도 보통으로 생각합니다. 신문이나 방송,텔레비젼에 보도되는 것중 청소년 문제만 나오면 나쁜 녀석들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비행 청소년을 나쁘다고 하니까 나빠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신 그 귀한 생명, 이제 사회와 교회에 갓 들어와서 일하기 직전에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가지고 매스콤에서 [비행이다]라고 하니까 한국에 있는 아들 딸들은 전부 비행 청소년같이 생각하는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데도 신문과 라디오,방송에서 소수의 비행 청소년들만 자꾸 이야기하며 부모들까지도 호응을 하니까 자녀들은 우리 부모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사랑하는 것은 곧 신앙을 가지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청소년 문제의 대부분이 사랑이 없는 가정에서 발생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주려 해도 성경말씀으로 자식들을 키울지라도 부모의 사랑이 없다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사랑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며 기독교는 사랑이고 크리스챤 부모들은 사랑입니다. 한번 나쁘다고 이야기 하려면 열 번, 스무 번 사랑한다고 이야기한 다음에 시정할 점을 이야기할 때 청소년들이 올바로 듣는 것입니다. 청소년은 내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귀한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청소년들이 유치원에 다니던 때나 국민학교에 다니던 때만큼 사랑스럽지는 못합니다. 어딘가 모르게 담배도 한번 피워보려 하고 맥주도 마시고 싶어하며 어른 흉내를 냅니다. 이런 것은 사랑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 없는 애들을,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자기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나를 미워하고 질투하는 적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바르게 행동할 때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은 사랑할 수 없을만큼 밉게 행동할 때 더욱 더 사랑해 주라는 것입니다.


둘째, 청소년들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나에게 권력이 주어져서 대통령이나 보사부 장관이 된다면 제일 먼저 할 일은 대한민국의 부모들에게 청소년을 키울 수 있는 지식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시험을 치겠습니다. 그래서 60점 미만을 맞는 부모는 그의 자녀를 데려다 60점 이상 맞은 부모에게 키우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가 아장아장 걸을 때는 어떻게 키우며, 유치원에 갈 때는 어떻게 하며 국민학교, 중학교까지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나 고등학교쯤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이의 말뿐 아니라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느끼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귀한 생명을 키우려고 하면서 그들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키울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알지 못하고 어떻게 믿겠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너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며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더 알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교회 일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되어가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이들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에는 [얘,나는 구식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잘 모르니까 가르쳐 다오]하고 겸손하게 이야기하면 좋겠는데 대부분의 부모들은 [왜 말대답이 많아, 우리 때는 그렇게 자라지 않았는데]하면서 욕을 합니다.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또 그렇게 반항하는지 모르겠으면 솔직하게 [얘,나는 네가 왜 반응하는지 모르겠으니 나한테 얘기를 좀 해다오.내가 들어서 배운 뒤 토론을 하자]라고 이야기 해야지 무조건 [입 닥치고 들어가 공부나 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생명은 이 세상에 있는 콤퓨터를 다 갖다놓고 사람처럼 만들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귀한 새명 하나를 다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이처럼 기기묘묘하고 심오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무지한 가운데 주먹구구식으로 자녀들을 키우겠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사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히 아시고 정확하게 아시는 것이므로 우리 인간은 겸손하게 한 가지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나는 벌써 다섯이나 낳아서 키웠는데]하시면서 다 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첫째,둘째,세째 아이가 모두 다릅니다. 이것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 집 아이는 이렇게 나쁜데 당신 집 아이는 왜 그렇게 말을 잘 듣느냐고 반문하지만 왜 그런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청소년을 한번 살펴 봅시다. 12-13살이 되면 청소년들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 생리적으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납니다. 마치 컴퓨터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넣는 것처럼 몸에서 호르몬이 분비되어 목소리가 쉰 것처럼 들리는 변성기가 되며 근육이 좀 더 강해지고 얼굴엔 무엇이 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주신 것이므로 핀잔을 해서는 안됩니다. 근육이 나오고 목소리가 변하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청소년들은 갑자기 생기는 현상 때문에 놀라서 거울을 자주 보게 됩니다. 어머니가 문을 열고 딸의 방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까 뭐라고 한마디 하고 나갑니다. 심리적으로 당황하게 되는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뵈만 하면 핀잔을 주고 부끄러움을 주니까 자연 부모와의 대화를 꺼리게 됩니다. 신체의 변화는 자꾸 생기고 생각도 변하는데 부모는 신앙적으로 어긋났다. 누가 이렇게 가르쳤냐고 압력을 넣으니까 아이는 당황하게 됩니다. 학교 선생님은 겁만 주고,부모는 이야기도 잘 통하지 않고 교회 선생님도 가르쳐 주는 것 아니고 자연히 자기 또래의 친구들을 찾아 모이게 됩니다. 서로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친구, 여학생은 여학생끼리 남학생은 남학생끼리 모여 문제해결을 하고자 하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자꾸 하며 허세를 부립니다.


속에 있는 자기의 진짜 생각은 말하지 않고 [얘,넌 머리가 예쁘다][옷을 멋있게 입었구나]라고 말합니다. 집에서는 나에 대해서 알아주지 않고 학교에서도 알아주지 않지만 친구들은 자신을 알아 주는데 그중에서도 옷 입은 것을 알아 주니까 집에 가서 자꾸 옷 해달라고 조릅니다. 남자 아이들은 어깨에 힘을 주고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면서 다른 아이들이 단정하게 걸어 다니면 그들을 시시하게 여기고 알아주지 않습니다. 청소년 사회에서는 집에서 쫓겨나고 학교에서 쫓겨난 청소년들이 영웅시됩니다. 인기 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기들끼리 누가 더 영웅인가를 판가름합니다. 나는 이렇게 한다고 하면 저쪽에서는 요렇게 해야겠다고 합니다. 인기 있는 영웅이 되는 길이란 농도를 짙게 하는 것입니다. 가령 이쪽에서 담배 한번 피우면 저쪽에서는 그 정도밖에 안되느냐 여기서는 술도 먹는다는 식이기 때문에 청소년끼리 모이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서부터 출발했습니까? 집안에서 이와같이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 부모가 친구가 되어 주지 않고 그 당황한 것을 이해해주지 않고 가르쳐주지 않고 오히려 부끄럽게 만들고 당황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집을 나와 엉뚱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버리고 인기 있는 것을 따르기 위하여 자기의 영웅 중 깡패대장을 따르게 됩니다. 가죽 잠바를 입고 칼도 가지고 머리모양도 이상하게 하고 다닙니다. 이런 것이 그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런데에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청소년들을 잘 알아서 지도하지 않으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특별히 크리스챤 가정에 있는 청소년들의 문제는 대강 6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자신을 자기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눈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내 머리칼은 왜 이럴까?]언젠가 제가 외국영화를 보았는데 거기에 나오는 남자 배우의 웃는 모습이 어찌나 좋던지 저도 그렇게 웃었더니 친구들이 저를 보고 입이 찌그러졌다고 해서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시편 139:14-16에 보면 인간들의 특별한 모습은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사람은 절대로 ㅁ나들지 않으시며 각 사람 하나 하나를 일등품으로 만드셔서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외모에 대해 불만을 갖거나 불평하는 것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온 천하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긴 모습 그대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영역에서도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청소년기는 아직 자라나는 과정이기 때문에 자꾸 변하므로 이렇다 저렇다 불평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은 좋은 교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에서 자라난 청소년들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나 대학생들까지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1서 5:13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에 대한 문제는 자녀들과 철저히 토론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만 나가거나 성경만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구원을 얻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어떤 문제에 대하여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그 나름댜로 취급하고 구원의 문제는 별개로 하여 영생에 대한 것을 확실히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른들은 용기를 가지고 청소년에게 사랑으로 도전해서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세째는 청소년들이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뚜렷한 삶의 목표를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말씀 에베소서 5:15-17에 보면 주님의 뜻 안에서 생의 목적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리]


요즈음 10대들은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생명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는 필사의 각오까지 되어 있는 목적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면 그들은 수긍을 하고 잘 듣습니다. 오히려 어른들이 노파심에서 청소년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가 그들이 반항하거나 불만을 사면 어떻게 하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들에게 삶의 올바른 목표를 설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맡겨준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네째는 청소년들이 가족과의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청소년을 어른이나 어린아이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청소년을 만드셨기 때문에 청소년답게 인정해 주고 대우해 준다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정의 기본적 조화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면 자녀들은 가족과의 조화를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와 조화가 잘 될 때,거기에 맞추어 가정의 조화를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지나치게 자식에게 간섭을 한다든가 아버지가 어떤 원칙없이 무절제한 생활을 한다면 여기에서 가족간의 조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소년 문제는 부모들이 가정에서 어떻게 생활했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청소년들이 성숙한 남녀교제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의 성공적인 우정관계를 위해서 친구를 택해 자식에게 사귀라고 했을 때 부모가 택한 친구가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녀를 위해 택한 친구라는 것을 자신할 수 없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나 같으면 [친구는 너희들이 택해라.그대신 나도 네 친구의 부모가 되고 친구가 될테니 나에게도 소개해다오.꼭 네 친구를 데려오너라.크리스마스 때는 우리가 안방을 내어 주고 친구들을 위해 파티를 열어줄테니까 나가지 말아라]하고 말하겠습니다.


우리 연구조사에 의하면 부모들이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여자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2달 전부터 돈을 마련해서 의정부 방면에 방을 얻어 쌍쌍파티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친구 없이는 청소년이 자랄 수 없기 때문에 부모는 자기 자식뿐 아니라 그 친구를 위해서도 부모가 되어 주겠다고 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녀가 교회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도록 힘써 주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 알게 된 친구는 숫자는 적을지 모르나 가장 좋은 친구를 얻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친구는 당시는 좋을지 몰라도 곧 떠나거나 위험성이 있는 친구들이 많으므로 예수님 안에서 만난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면 이들도 잘 따를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서 그 자녀들의 친구를 초대해 저녁이라도 함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잘 차리지는 않았더라도 정성껏 대해 주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올바르게 성장하고 밝게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남녀교제에 있어 소위 데이트를 하고 약혼을 거쳐 결혼하는 것을 우리 사회에서는 건전하다고 이야기합니다.신앙적으로 볼 때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영혼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심, 하나님의 복음에 입각해서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약혼을 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마음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것은 먼저 영혼의 결합이 있은 다음에 마음이 결합하여 완전하게 되었을 때 육체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함께 살다보면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서로 다른 두 영혼이 만나 한 영혼으로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은 크리스챤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되어 있어 생의 목적을 완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정신적, 감정적으로 일치가 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같이 하고 그 다음에 다가올 기대와 감격을 함께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준비가 된 후에야 결혼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청소년이 갖고있는 5가지 문제를 바로 안다면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게 되며 이해하게 됩니다.


세째,청소년들을 통제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13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는 말씀을 가지고 청소년들을 통제하는 것에 대해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청소년은 너무나도 꿈이 많고 그 길이 많아 다 택할 수 없으므로 부모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통제이지 가는 길을 막는 것은 아닙니다.[네가 갈 길을 마음껏 가라. 가장 좋은 길, 최선의 길을 택하라. 그것은 막지 않겠다. 단 너를 파괴하고 위험으로 인도하는 길은 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우리 부모는 나를 사랑하고 내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므로 부모가 이것을 좋지 않다고 했으니까 하면 안된다는 것을 자각하여 부모의 말을 잘 들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부모, 청소년을 잘 알지 못하는 부모가 하지 말라고 한다면 들어주기는 커녕 반항만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먼저 사랑하고 알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마땅히 자식들을 책망하고 통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집안이 시끄러워질까봐 또는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통제는 해야 하되 하나님의 뜻대로 할 때에 밝고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째,우리 청소년들을 지도해 주자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하지말라고 통제만 강요할 뿐 무엇을 하라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굽은 길로 가면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청소년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 이유를 납득이 가도록 충분히 설명한 다음에 좋은 것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좋지 않은 장난감을 갖고 있으면 그것을 빼앗기만 해서는 안되고 대신 다른 장난감을 주어야 합니다. 또한 청소년들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막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집에서 자유스럽게 놀 수 있도록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만드신 이유는 풀이나 동물과 같이 혼자 자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20세까지는 부모 밑에서 아름답게, 섬세하게, 강하게, 행복하게 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계획을 철저히 세우셔서 만들었기 때문에 열두살 때에는 마지막으로 테스트하기 위해서 청소년기를 거치게 하신 것입니다. 이때는 행동반경이 넓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청소년들을 부모에게 맡겨 책임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부모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께서 맡긴 귀한 생명을 키울 때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잘 알아서 나쁜 길로 가는 것을 통제하고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어 훌륭하게 양육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인 인간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10대 청소년들을 주셨습니다.이 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자랑스런 10대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며 이 나라의 장래입니다. 부모들은 그 10대들을 사랑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어야 하며 더 나아가 생각할 것은 부모가 없는 청소년들 문제입니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데 부모가 없는 그 많은 청소년들에게 누가 부모가 되어 주겠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이들의 부모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청소년의 모습으로 오신다면 여러분은 무관심하게 외면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부모가 없는 불우한 청소년과 의롭게 살아가는 청소년을 위해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계실 것입니다. 특별히 크리스챤 부모들은 자기 자식만을 위하고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고 각성해야 합니다. 내 자식이든 남의 자식이든 모두 하나님의 자식이기 때문에 이들을 사랑하고 알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감하게 꾸짖어 복음의 말씀으로 인도합시다.


제직의 가정생활


 

한국에는 집은 있어도 가정은 없다는 말이 있다. 부모와 자녀가 모여 사는 집보다는 정신과 생활이 한데 어울리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영어의 홈(home)이란경건한 청교도들의 후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신앙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생활 신조로 삼은 데서 시작된 말이다.

페스탈로치는 "그리스도교의 특산물은 국가가 아니라 가정이다. 오늘 문명 세계에 있어서 홈(home)이라고 일컫는 것은 특히 그리스도교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1 가정을 제단으로 삼자

예수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제직들은 내가정을 제단으로 삼고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제직들은 가정 제단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고 신앙을 생활화하는 장소이어야 한다. 가정의 제단으로서 가정 예배는 대단히 중요하다. 제직은 가정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킬 책임이 있다.

스퍼젼은 "많은 원수가 있어서 제단의 불을 끄려고 한다. 그러나 그림자 뒤에감추어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의 제단에 기름을 부어 더욱더 이 불길을 일으켜준다. 그러므로 아침마다 성경의 나무를 더하고 기도의 바람을 보태어 제단의불이 영원이 꺼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가정 예배는 가정 화평의 원천이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비결이다. 그러므로제직은 온 가족이 제단 앞에 엎드려 예배하는 경건한 기풍을 만들수 있어야 한다. 예배는 간단히 진행하되 가족들이 교대로 예배를 사회할 수도있고 순서는그 가정의 형편에 적합하도록 할 것이다.


2 가정을 교육의 장소로 삼자

가정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 복잡한 문제가 있다 그 중에도 가족중 어느한 사람이 신자일 때 여러 가지 반대가 있다. 비난과 박해를 견대며 가족을 구원하려면 먼저 믿는 가족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요행 온 가족이 믿을때 그 집의중심은 그리스도임을 인식시켜 크리스챤 가정에 합당한 집이 되도록 훈련되어야한다.

가정의 영적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가정 예배를 드리되 먼저 믿는 부모나 제직이 가족에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한다. 사랑과 화평이 가득한 가정이 되어야 무언의 신앙 교육이 된다. 가족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감화시키는 일은 먼저 믿는가족의 책임이다. 이것은 사실 어느 한 가족만의 힘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므로가족을 위해 매일 기도하여야 한다.


어린이를 양육하는 어머니가 음식에 관심이 있듯이 가족의 심형을 위해 바른영양을 섭취시켜야 한다. 교회 생활을 중심한 가정 생활에 마음을 써서 예배와봉사에 가족을 참사시켜야 한다. 제직인 가족은 그 가정의 교역자임을 인식하고그리스도가 임재하는 가정이 되도록 교육하여야 한다.


빌립보의 루디아는 자기 집을 전도하는 장소로 제공하여 그 집안이 다 세례를받고 빌립보교회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행16:14-15). 가정은 교육과 전도의 두 가지 사명을 지니고 있다. 가정을 전도 장소로 제공되는 것은 특별 축복이다. 초대 교회의 집회는 개인 집에서 시작되었으나(행12:12), 빌립보에는 루디아의 집(행16:40), 에베소에는 아굴라의 집(고전16:16), 라오디게아에는 눔바의집(골4:15)이 전도 장소로 제공되었다.


가정의 그리스도를 중심삼아 신앙 훈련 장소가 되고 교육하는 장소가 되고 복음 전파라는 장소가 될 때 가정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3 가정을 화평의 장소로 삼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의 제물이 되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나누어진 장벽을헐어 버리고 하나로 만들었다. 제직이 된 사람은 한 가정의 화평을 이룩하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 가정을 화평의 장소로 삼으려면 다음 몇 가지에 유의하여야한다.

첫째, 가족의 심령에 천국을 이룩하자. 심령 속에서 사탄을 내쫓고 그리스도를모셔 들여 주님이 심령을 지배하면 개인의 심령에 천국을 소유한 것이다. 구약에 욥의 가정에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가정에 화평을 잃어버리지 않은 비결은무엇인가? 그 마음 속에 기도하는 마음과 성령이 주신 평화가 그 심령에 있기때문이 아니겠는가? (욥2:7-10) 제직은 자기 가정을 화평의 장소로 만들기 위해가족 하나하나의 심평에 천국을 이룩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 가족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자. 가정의 화평은 사랑으로만 이룩할 수있다. 주님은 이웃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하물며 한 가족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할 수 없겠는가? 그러나 가족을 사랑하되 지식을 따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니 (벧전3:7),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에 대한 지식이란 무엇인가?아내의 남편에 대한 지식이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 지식과(골3:18), 아름답게 단장해야 할 지식이다(벧전3:5).


복종이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하라는 것이다. 아내가 복종하면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벧전3:1) 고 하였다. 아름답게 단장한다는 것은 마음에숨은 사랑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는 것이라고 성경이가르치고 있다(벧전3:3-4).


남편의 아내에 대한 지식은 아내는 연약한 그릇임을 알아야 하는 것과(벧전37) 괴롭게 하지 말고(골3:19) 극진히 사랑해야 한다 (엡5:25) 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심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어 천국 가는 동행자가 되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도와주고 위로하고 이해해 주어야 한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예민한 것이 아내이므로 외로와하고 유혹에 빠지기 쉽다.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두어 사랑하되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가정 불화로 인한 난폭한 언사와 행동으로 아내를 괴롭혀서는 가정의 화평을 도모할 수가 없다.


남편은 범사에 아내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딤 2:7)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육적 생활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맡은 청지기로서 범사에 본을 보여야 한다. 주부들은 교회의 집사가 되기 전에 어디까지나 현모양처로서의 사명이 주께서 맡겨 주신 사명이요, 또 십자가임을 명심해야 하며, 또한 남자들은 교회의제직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할책임이 있다. 가정에서 제직으로서의 본을 보이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청소년 문제와 상담자의 자세


 

상담이란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상담이라고 하는 격식을 통해 도와주고자 하는 정신 치료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심리구조를 다루는 감정세계가 얼마나 복잡한가를 이해하기 전에는 상담을 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구체적인 예를 몇 가지 들면서 상담의 배경과 방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즈음은 문제아, 문제 청소년이란 얘기를 흔히 합니다. 그러나 문제아, 문제 청소년이 있기 전에 문제 부모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모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자녀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나는 세상에 나가서 깡패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오는 아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생활하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깡패가 되어 못된 짓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이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흑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혹 육십배,혹은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왜 어떤 씨는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또 어떤 씨는 열매를 백배나 거둘 수 있었겠습니까? 씨 자체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길 가에 떠러진 씨나 옥토에 떨어진 씨나 씨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디에 떨어졌느냐에 따라 열매를 거두기도 하고 못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길 가에 떨어진 씨도 옥토에 떨어지면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문제아는 책임이 없고 문제아의 부모 즉 그 지도자와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겨울이 되면 추워서 떱니다. 어떤 사람이 떠는사람을 보고 [당신은 점잖은 체면에 왜 떱니까? 보기 흉하니 의젓하게 앉아 계십시오]라고 했더니 [누가 떨고 싶어서 떠는 줄 아십니까? 떨리니까 떠는 거니]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추우면 떨게 되고 필요한 체온보다 밑으로 떨어지면 죽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적당한 체온이 필요하기 때문에 추우면 외투를 입고 더우면 밤벗게되는 것입니다. 추워서 떤다는 것은 바깥 공기가 차가와 몸이 자꾸 식어가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근육을 움직여 열이 생기게 하여 기본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떠는 사람보다 떨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죽으라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와같은 원리는 정신적인 조건,심리적인 배경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야만 살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이 땅에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추운 것입니다.떤다는 것은 비정상이고 깡패가 되는 것이며 도둑질을 하는 것입니다. 본인도 비정상임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안할 수가 없습니다. 추우면 떠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추운데 안 떠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고든 울포트의 저서 [개인과 그의 종교](The individual and his religion)에서 말하길 [인간은 그 누구를 사랑해야 살고 그 누구한테 사랑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 만일 이 세상의 많은 사람중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또 내가 사랑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상황 속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2개월 이내에 스카이조프레니아라는 정신분열증에 걸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밥만 먹으면 사는 동물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휘청거리고 방황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워서 살기 위해 떠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옥토에 떨어진 씨가 아니고 길 가에 떨어진 씨,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가 되어서 그런 것이지 그 아이 즉 씨 자체가 나빠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깡패가 왔을 때 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무조건 꾸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담이란 그 사람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을 인정하고 그를 불쌍하게 여기며 하나의 피해자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한 건장한 청년이 내 사무실을 찾아 왔습니다.


[선생님,상담 받으러 왔습니다]

[예,앉으십시오. 무슨 고민이 있습니까?]

[네,저는 깡패입니다]

[아니,깡패가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깡자에 힘을 주셔서 말합니까?]

[아닙니다. 저는 깡패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깡패라고 하면 손가락질하며 비웃는데 어째서 깡패가 된 것이 자랑스럽습니까?]

[내가 집에 있을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 구실을 못할 바에는 일찌감치 나가서 죽으라며 쌀이나 축내는 것이 살아서 뭐하겠느냐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어머니께서도 나를 보기만 하면 너같은 게 어떻게 생겨나서 나를 이렇게 속 썩이느냐,창피해서 살 수가 없다고 밤낮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 구실을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으려고 했는데 이왕 죽을 바에는 못된 짓이나 실컷하고 죽자고 생각하고 깡패가 된 것입니다. 그러고는 몇달을 지냈는데 하루는 어떤 동네 뒷골목을 지나가다 그 동네의 깡패한테 공연히 두둘겨 맞았습니다. 나는 깡패 선배인 형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더니 그 형은 이유도 묻지 않고 나를 때린 깡패를 붙들어다 앞에 앉혀놓고 내가 당한 만큼 때려주었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이 세상에서 사람 취급을 받아보았다고 생각하고 그 순간 그 형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고 결심했습니다. 만일 내가 집에 있을 때 딴 아이한테 얻어맞고 들어왔다면 아버지께서는 "아이구! 지지리도 못난 놈.죽지도 않고 얻어맞고 다녀?"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어머니 같아도 '그렇지 않아도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겠는데 또 얻어맞고 다녀?' 하고 얼굴을 붉히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만큼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너 맞았어!'하더니 나를 때린 사람을 데려다 놓고 내 앞에서 때려 줄때,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 대우를 받았으며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형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형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으며 깡패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깡패가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원래 그 사람 자체가 나빠서입니까? 아닙니다. 원인은 부모님에게 있으며 청년은 추워서 떠는 것 뿐입니다. 긍게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이 그리웠으나 아버지도,어머니도 자기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지 않으니까 죽으려고 결심을 한 것이고,죽기 전에 나쁜 짓이나 실컷하고 죽으려고 생각하다가 깡패소굴에서 형이 자기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왜 깡패가 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겠습니까? 오히려 그 청년에게는 깡패가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부모보다 그 형이란 사람이 낫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깡패란 나쁜 것인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라도 해야 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떨면 보기 흉한 것을 다 알면서도 떠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상담을 할 때, 살인강도나 깡패가 오더라도 이 사람이 왜 살인강도냐 혹은 왜 깡패냐 하는 마음가짐과 생각으로 상담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살인강도이든 깡패든 간에 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따뜻하게 대해줘야 비로소 상담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담자는 경찰이 아닙니다. 경찰은 잘하고 못하는 것을 따져서 판단대로 상벌을 주지만 상담자는 상을 주고 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추워서 떠는 사람에게 따뜻한 난로를 놓아주는 것이 상담자의 임무입니다.


여러분들이나 나도 추우면 떨게 되고 어머니,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키워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깡패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우리는 옥토에 떨어졌기 때문에 순복음 교회에와서 성령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길 가에 떨어졌다면 새가 쪼아먹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감사할 조건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관계라는 매우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유태교 신학자인 마르틴 부버는 그의 저서 [나와 너](Ich und du)]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삶이란 만남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만나야지 혼자서는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인간은 타인에 의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만남 그것이 곧 삶입니다. 그 사람과 내가 참으로 만나면 참 인생이 되는 것이고 어설프게 만나면 내 인생이 어설프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참 만남은 참 인생, 참 삶을 산다는 뜻이고, 되는대로 적당히 만나면 내 인생도 적당히 살다 죽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남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만원버스를 탔을 때, 처음보는 사람과 공간적으로 아무리 밀찰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만남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만남이란 연대 관심을 주고 받는 그 관계를 말합니다. 내가 걱정하고 아끼고 기도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과의 만남, 이러한 인간 관계를 마르틴 부버는 너와 나와의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만남이 있을 때 우리는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 7년 전에 세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영국의 런던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하루는 중학교 때 영어 교과서에 나오는 하이드 파크라는 공원이 떠올랐습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하이드 파크라는 공원이니까 얼마나 훌륭한 공원인가 궁금해서 구경하러 갔습니다. 잔디를 잘 손질해 놓은 것 하며 울창한 나무숲,예쁜 오솔길 그리고 가운데 큰 호수가 있는데 영국의 젊은 남녀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삶을 만끽하고 있는 즐거움에 가득 찬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런 반면 옆 벤취에는 할머니가 한 분 앉아 계셨는데 어깨가 축 쳐져서 죽지 못해 사는 듯한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가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허리를 꾸부정하니 걸어 가시는데 그 표정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삶은 지겹고 권태로운데 왜 젊은 남녀에게는 삶이 신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노인에게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관계가 있지만 이 노인들에겐 삶의 기본조건인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할머니의 무릎에는 개가 한마리 앉아 있었습니다. 개를 얼마나 목욕을 자주 시켰는지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개를 쓰다듬어 주고 귀여워 하고 사랑함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할 수 있는 개라도 없었다면 할머니는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 것도 사랑할 대상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생명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살 수 있으나 반대로 사랑은 받지만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들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되 보통 사랑아 아니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 이웃이 굶어 죽는 것 아니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면 미워해야 할 사람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심리학적으로 볼 때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여대생이 저한테 찾아 왔습니다. 그 여학생은 8년 동안이나 교제해 온 남성이 있는데 언짢은 일이 있어 다투고는 헤어지겠다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그 남자 욕을 하였습니다. 그럴 때, 상담에 서툰 사람은 그 남자와 당장에 절교해 버리라고,잊으라고 쉽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담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여학생은 그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냥 헤어지지 왜 핏대를 올려가면서 욕을 하겠습니까? 상대방을 미워하며 미워하는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행동과 그 행동을 유발시키는 두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理性)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입니다.우리가 매일 자고 깨고 활동하는 이 모든 것들은 이성과 감정의 상호작용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행동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성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 주는 작용을 하며 감정 즉 정서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어 이 두 개의 감정이 건전하게 공존되어 있는 경우에 이성적으로 판단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성과 정서가 같이 움직이면 여러분의 상담 대상이 되는 문제아가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이성의 기능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될 때, 사람이 감정에 우선적으로 지배를 받게될 때,문제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기존 질서의 파괴는 감정이 안정되지 않은 때문이며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감정의 안정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은 인간이 원하는 가장 큰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또 누군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고 싶은 가장 큰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청소년의 가장 큰 문제는 性문제입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가운데 [한국 고등학생들의 성생활]이란 논문의 작성자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7개 학교를 선택해서 3학년 학생들에게 앙케이트를 실시했습니다. 학생중 성경험이 있는 사람은 무기명으로 표시하라고 하였는데 4명중 1명은 성경험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상대가 애인이라기 보다 매춘부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부모,형제,목사 어느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또한 서울에 있는 7개의 여자 고등학교를 선정해서 여학생들에게도 앙케이트를 실시하였더니 성경험이 있는 학생이 11%였습니다. 그보다 더 놀랍고 가슴 아픈 일은 여학생에게 있어 그 상대는 교사라는 것입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 중에 여고 교사가 한 사람이 있는데 이분에게 조사 결과의 사실성 여부를 물어 보았더니 그 선생님의 대답은 여고생들이 남자 선생님에 대하여 갖는 지나친 호기심이 사실상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월간 잡지 신동아 1월호에 보면 '단상 단하'라는 논픽션으로 쓴 여자 중고등학교 여교사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자 고등학교에 남자 선생하고 여학생들과의 관계를 쓴 글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발랄하고 똑똑한 아이들이지만 선생님과 이런 관계에 있는 줄 누가 알겠습니까?


조선일보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에 의하면 한국 여성 가운데 결혼 전에 임신경험이 있는 사람이 25%정도 된다는 통계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근거로 하여 통계를 내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정말 신빙성이 있을까 하여 당국에다 전화를 걸어 보았더니 그 숫자에는 임신하고 결혼으로 연결된 숫자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그 말을 들으니까 다소 마음이 놓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들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청소년 문제는 다른 것이아니고 정신적인 혼란과 갈등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결국 쓰러지기 때문에 여러가지 형태의 사회악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젊은이들의 타락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보스톤 근교의 바닷가에 종종 갔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자유스럽게 뛰어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미국 젊은이들의 개방적인 이성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성에 대한 관념은 우리와 매우 다릅니다. 그들은 상대방의 매력을 중요하게 생각할 뿐 성경험은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결혼 전에 어떤 남자를 어떻게 사귀었든지 간에 결혼 후에는 전혀 문제꺼리로 삼는 법이 없습니다. 한국에 있어서 성은 특히 여성들에게는 절대화 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잘한 것 같이 큰소리 칠 수 있어도 여자는 남자한테 성에 대한 책임을 추궁할 수가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의 첫번째는 정신력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똑같은 환경 속에서 굶기면 남자가 먼저 죽는데 그 원인은 정신력에 있습니다. 남자는 겉으로는 힘이 세게 보이지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한두번 부딪쳐보고는 포기하지만,여자는 마음 먹은대로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두번째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앓아 누워 있으면 아내되는 사람은 일 년이든 이년이든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보필합니다. 그러나 남자는 아내가 오래 누워 있으면 있을 수로록 속상해 합니다. 처음 한,두달은 열심히 보살피지만 한 일년쯤 지나면 소홀해지는 것이 남편입니다. 세번째는 깊은 신앙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훨씬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늘 주님의 뜻을 받들어 진실하게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강합니다. 남자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지만 여자는 얼마든지 혼자 살아갑니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약하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상담시 아내되는 사람은 이러한 남편의 심리구조를 잘 파악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단 부부간에 피치못할 다툼이 있을 때에는 그 다툼의 범위를 부부 외에 다른사람이나 다른 일들과 결부시키는 비약은 삼가해야 하며 또한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 내서 반복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사람은 대개가 자기 약점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으므로 약점을 잔인하게 찌르면 그 사람은 쓰러져 버리고 맙니다. 될 수 있으면 상처 있는 곳은 다치지 말아야 합니다.


상담에 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상대방을 생각하는 측은 한 마음과 상대방을 저극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임하는 정신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일반적 기준에 의한 성급한 윤리적 판단은 삼가해야만 됩니다. 이상과 같은 것을 마음에 새기고 상담에 임하신다면 더욱 더 훌륭한 상담자로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을 확신합니다.


행복을 찾아서


 

세상에 행복해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실제로 행복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한테 '행복하시오?'하고 물어보면 '글쎄요','별로요',하고 대답합니다. 별로 행복하지 않다고들 얘기하기에 그 이유를 알아 보았더니 두 세번 선택을 잘못하면 불행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할때, 그 하는 일 자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며 사명감에 넘쳐서 하는 것이냐 하는 여부에 따라 행복하냐, 행복하지 않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 평생을 일하면서 살게 되어 있는데 무슨 일을 할 것이냐의 선택여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자기가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말고 자꾸 다른 일 하겠다고 생각하면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잘 선택해서 그 일에 소명의식을 느끼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충분히 깨닫고 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밖에 없으나 자기가 좋아서 하거나 자기의 진짜 할 일이 아닌데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자꾸만 하겠다고 애를 쓰면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불행해지는 이유는 가정에서의 생활이 잘 안될 때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남과 더불어 사는데 이 남고 더불어 사는 것 중의 하나가 결혼해서 아내와 남편이 가정생활을 이루는 것입니다. 밖에 나가서 자기 맡은 일을 열심히 해서 훌륭하게 되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 분수에 맞는 마땅한 일을 하고 결혼해서 가정생활이 원만할 때 행복할 수 있는데 이 가정생활이 잘 안되면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결혼생활이 제대로 되는 길이 있느냐는 문제에 대한 답을 '행복한 가정을 찾아서'라는 주제를 통하여 간단하게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내가 여러 사람한테[결혼해서 행복하냐?]고 물어보았더니 마지못해서 했거나 죽지 못해서 할 수 없이 했거나 어영부영하다가 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가정을 이루어서 사는데 이들은 대부분 결혼의 의미가 뭔줄로 모르고 그냥 남들이 결혼하니까, 부모님이 서두르니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혼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결혼하면 행복해질 줄 알고 결혼했다고 대답합니다. 결혼이 뭔지도 모르면서 결혼하면 행복해질 줄 알고 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하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막연한 가정(假定)속에서 결혼했기 때문에 결혼이 뭔지 아는 것 같지만 심각하게 물어보면 잘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결혼이란,한 사람을 잘 선택해서 그 사람과 더불어,남과 더불어 잘 사는 본보기 살믈 사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결혼해서 남과 더불어 사는 것을 터득해서 잘 살고 있으면 그 결혼은 성공한 것이고 결혼했는데도 남과 더불어 잘 살지 못하면 실패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분 나뻐하는 것의 80% 정도는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한데서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돈이 없어 기분 나쁘거나 기침이 나서 기분 나쁜,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닙니다. 남과의 관계가 이상해지기 시작하니까 기분 나쁜 것입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서 기분 나쁘고 불행하고 재수 없다는 기분들이 나타나는 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유발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과 더불어 잘 살아야 그것이 진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남과 더불어 잘 살기 위해서는 본보기 사는 그 삶 즉 결혼생활이 잘 될 때 사회생활도 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생활 17년 동안 큰 것을 딱 하나 배웠는데,그것은 남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저는 무척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는데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고 나니까 하루 아침에 아버지가 세 분, 어머니가 두 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저를 낳아주신 아버지, 장인어른입니다. 결혼하고 난뒤 처가집에 갔더니 장인어른이 저를 낳아주신 아버지보다 더 끔찍이 사랑해 주시는 것을 체득했습니다.나는 장인어른을 아버님이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나는 큰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난 뒤에는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를 낳아주신 아버지보다 더 저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나이 지긋한 사람을 보면 '내가 이 양반 따님하고 결혼을 했더라면 나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텐데'하고 생각하니까 나이 많은 남자분들을 보면 전부 아버지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이 지긋한 분들을 만나면 아버지처럼 대해 드리기 시작했더니 저를 싫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어머니가 두분 되셨는데 저를 낳아주신 분과 장모님이십니다. 저를 낳아주신 어미는 보기만 하면 잔소리를 하셨는데 새로 생긴 어머니는 잔소리도 안할 뿐만 아니라 보기만 하면 맛있는 것을 해주셨습니다. 장모님도 생판 남인데 저한테 잘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나이 지긋한 할머니를 보기만 하면 제 어머니 같았습니다.


제가 그 분 따님하고 결혼했더라면 그분이 저의 어머니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할머니를 보기만 하면 전부 어머니라고 부르며 잘 해드렸더니 모두들 저를 좋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당신을 향하여 어머니라고 할 수가 없다. 여인이여, 주의 말씀을 듣고 이행하는 사람들이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결혼하면 알게 되는 사실이고 결혼 잘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산책을 하다보면 공원에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어요. 옛날에는 무심코 지나갔는데 이제는 그 아이들이 모두 내 아이들처럼 사랑스러워서 꼭 끌어안고 뽀뽀라도 해주고 싶습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이것은 자식을 낳은 뒤부터 알게 된 것입니다. 제가 우리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이 아이를 무척이나 사랑하겠다는 것을 알고 나니 더 귀엽고,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결혼을 잘 하게되면 인생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지며 이것은 결혼관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결혼에 대한 정의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경말씀 창세기 2:24절에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남자가 부모를 떠난다고 성서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결혼생활에 실패하는 이유는 결혼하고 나서도 그 부모를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혼이 완성되려면 마치 출생이 끝날 때는 그 부모의 배에서 나와 탯줄이 끊어져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탯줄을 끊는다는 것은 부모의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결혼도 그 부모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결혼도 그 부모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혼례라는 뜻도 되며 경제적인 독립을 의미하기도 하며 법적으로 결혼신고를 했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본래 떠나는 사건과 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떠남이 없이는 결혼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결혼하고 난 뒤의 심각한 문제중의 하나가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문제인데 이것은 자식이 부모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남자가 장가를 갔으면 자기 부모에게서 떠나 독립하여 새 살림을 차려야 할텐데 맨날 자기 아버지 한테 가서 돈을 타다가 살림에 보탠다거나 아니면 자기 어머니의 음식솜씨를 얘기하면서 반찬투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들도 결혼하고 나서 훌쩍훌쩍 울면서 엄마가 보고 싶다는 것 등은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며 부모를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 아내와 연합한다고 하였습니다. 연합한다는 것은 부모를 떠나 남자와 연합하고 여자와 연합하여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성적 결합 즉 육체적인 결합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의 삼각관계가 잘 균형 잡혀 있는 결혼생활이 진정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마다 이 삼각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싸움과 불만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은 결혼해서 십 년이나 살았는데 떠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정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말씀하시길 우리가 결혼하고 난 뒤 한 삼십년 있으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돌아가시고 우리 집사람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돌아가시니까 떠남은 필요없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나 또 있습니다. 내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도 깨끗이 해야 하십니다. 그러나 또 있습니다. 내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도 깨끗이 해야 말년에 진짜 내가정이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떠남은 내가 죽을 때까지 매번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가정은 연합이 잘 안되는 부부도 있습니다. 이 연합이란 히브리말 속의 원 뜻을 보면 두 사람을 아교로 딱 붙인 것 만큼 그 사랑하는 사이가 완전하다는 뜻으로 아내와 남편과의 사이에 그 누구도 끼어 들어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서로 연합이 안돼 결혼생활에 실패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자식 때문에 남편에게 무관심해지고 아내에게 등한히 할 때 생겨납니다. 심리학자들도 얘기하기를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내가 아기를 갖기 시작할때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아기를 가지면 생리적으로 자기 몸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에게 온 신경을 쓰게 되니까 자연 남편에게는 등한히 하게 되어 남편이 딴 짓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귀가시간이나 여행에서 돌아올 때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벌써 우리 집사람은 제 발자욱 소리인줄 알고 문을 열어 저를 반겨줍니다. 그 다음에 아이들이 쪼르르 다렬 나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이들부터 끌어안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은 조금 기다리라고 한 다음 아내의 볼에다 뽀뽀하고 그 사이 별일 없었느냐는 말을 건넨 후, 작은 녀석 안아주고 그 다음에 큰 녀석을 안아주고는 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 속에서 볼 수 있는 연합의 단면이며 가정교육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경에 결혼과 부부애를 설명하면서 자식얘기가 하나도 없는 것은 우선 부부가 있고 난 다음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셋 중에서 하나라도 삐딱하면 전부 쓰러지게 됩니다.


참 결혼, 행복한 결혼이란 커다란 돌멩이 위에 삼각 널판대기를 올려놓고 부부가 손을 잡고 그 위에 올라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발이 셋이면 좋겠는데 네 발이 올라서니 균형이 잘 안잡혀서 뒤뚱거리게 됩니다. 한 쪽이 되면 다른 한쪽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떠남이 잘 안되면 연합이 안되며 연합이 안되면 그날 저녁에 한 몸 이루는 것 역시 안됩니다. 그러면 저를 낳아 주신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며 다시 결혼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만 잘 되어서도 안되고 셋이 한꺼번에 다 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한 성경 말씀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결혼은 무조건 떠나기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에 한 몸 이루고 나서 둘이 잘 연합해 보라는 것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결혼순서입니다. 요즈음은 한 몸부터 이뤄놓고 그 다음에 연애하다가 취직해서 돈 벌면 결혼하는 것이 현대식 결혼방법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순서는 우선 연합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연합이란 서로 만나서 사귀어 보는 연애기간을 말합니다. 남녀가 처음 만나서 연합연습을 할 때부터 삼각형을 그려 가능성을 타진한 후 시작합니다. 서로 보조를 맞추어 손을 꼭 잡고 걸을 수 있도록 균형있는 삼각형을 이루어 나가다가 교제가 상당히 깊어지게 되면 결혼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성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삼각형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니까 자기 적성에 맞게 그려가면서 점점 키워가다가 나중에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자리잡기 시작해서 결혼생활이 건전해지면 그 삼각형 안에 사는 자녀들도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이 삼각형이 제대로 되고 세가지가 균형이 맞추어지려면 그 어디엔가 하나님이 계셔서 줄을 내려 보내 주셔야 제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저울 위에서 줄이 내려와 잡으면 쉽게 균형어 잡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이 어느 가정이든 하나님을 모신 가정이 진짜 원만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떠나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되며 연합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되고 한 몸 이루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되며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셋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연합하는 것,즉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 이 무엇이라고 완전하게 정의를 내린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에도 사랑의 완전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서 완전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해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질문은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지 내가 어떻게 아나?'(How do I know she loves me?),'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지 내가 어떻게 아나?'(How do I know he loves me?)하는 것입니다. 남녀가 교제하면서도 가장 궁금한 것은 상대방이 진짜 날 사랑하냐는 것입니다. 그이가 날 사랑하는지 혹은 그녀가 날 사랑하는지를 알기 위한 방법 4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헤어져 있을 때 좋은 것을 보면 혼자 못보고 그이와 같이보고 싶다던가,좋은 강의를 들으면 그이하고 같이 들었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몇해 전에 나 혼자 아주 좋은 곳에 여행을 갔었습니다. 안내자가 그 아름답고 웅장한 곳을 구경시켜 주는데 내 마음이 아파서 다 구경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후 삼년 뒤에 아내와 같이 와서 그 아름다운 곳을 보면서 [내가 삼년 전에 혼자 여길 왔을 땐 일부러 보지 않았어오, 이렇게 멋있는 곳을 보면 볼수록 당신 생각이나고, 같이 보면 얼마나 당신이 좋아할까 하는 마음에 안 보았소]하였더니 아내의 감격해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처럼사랑은 좋은 것, 귀한 것을 함께나누고 싶은 마음(Sharing Spirit0입니다. 나에게 그런 생각이 나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그런 생각이 나면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같이 있어도 부담스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리라] (창세기 2:25)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있을 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설 작가들은 사랑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빨개지며 몸둘 바를 모른다고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고 자유스럽게 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결혼 전에 한 아리따운 아가씨를 소개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데이트를 하면서 잘 보이려고 너무 애를 쓰고 긴장을 한 나머지 그날 집을 돌아오는데 기진맥진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아가씨였지만 그 다음에는 다시 보고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난 사람은 만나도 거북스럽지가 않았습니다. 배가 고프면 분식집에 가서 라면 한 그릇으로 때워도 부끄럽거나 어색하지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이처럼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것입니다(Liberating Spirit).


셋째는 먼저 화해하는 마음입니다. 제게 가끔 결혼주례를 서 달라고 찾아오는 남녀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가지를 묻는데 그 중의 하나가 [싸워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남녀는 사랑하는데 왜 싸우냐고 반문하지만 생판 모르는 남남이 만나 같이 사는데 안 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싸워 보지 않은사람은 서로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잘 모릅니다. 싸우고 나면 잘했든 잘못했든 먼저 화해하는 마음(reconciling spirit)-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인 정신 - 인 화해하는 정신이 사랑입니다.


네째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보고 또 보아도 새롭게 보입니다. 매번 보는데도 같아보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제가 아내와 함께 20년을 살았지만 늘 새로와 보입니다. 세월이 흘러 늙어가니까 이마에 주름이 늘고,열심히 일할 땐 이마의 주름 사이에 땀방울이 모여 흐르면 마치 산의 계곡에서 물이 흘러 내리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입니다. 주 안에서 살면서 늘 새로와 보이는 마음(Creating Spirit)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 3년내지 4년쯤 지나면 권태기가 온다고 조심하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는 징조입니다.


이상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될 때 남녀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그 가정이 그리스도를 모신 원만한 생활이 될 때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의 7가지 열쇠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인 필요할까. 점점 파괴돼가는가 정을 회복하기 위해 기독교가정에서 지켜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지난(94년) 4월 27일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주최로 열린 제10회 평신도지도자 주최로 열린 제10회 평신도지도자 초청 세미나에서 양은순교수( 명지대)는 [신자의 성경적 가정생활} 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행복한 가정 생활을 위한 7가지 열쇠를 제시 눈길을 끌었다.


양교수가

첫번째로 제시한 열쇠는 '성숙',남편과 아내과 육적으로는 성숙했으나 영적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해 많은 문제가 생긴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는 것이 아담의 고백이었으나 죄때문에 아담이 하와를 원망하게 된 것처럼 오늘날도 부부간에 서로에게 죄를 전가함으로써 부부사이에 금이 가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미숙한 사람이 성숙해지기 위해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분리된 자는 죽은자다.


두번째 열쇠는 '복종' 양교수는 "피차 복종하라"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의 명령이나 부부사이엔 아니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했을 때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복종은 남편이 꼭 잘나서가 아니라 남편이기 때문에 복종하라는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지 못할 때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세번째 열쇠는 '사랑' 하나님께서 남성을 흙으로 여성을 남성의 갈비뼈로 창조한 것은 남성이 여성을 소중한 존재로 여기도록 한 것이라 양교수는 지적했다. 따라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할 의무가 있고 이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닌 실천적인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은 가장 사랑스럽지 못할 때, 지겹게 느껴질 때 사랑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애기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나와있듯이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 *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받을 자이기 때문 * 하나님의 부탁 * 여성이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네번째 열쇠는 '대화' 양교수는 최근 이혼사유중 가장 큰 이유가 대화의 부족임을 지적하면서 대화는 혈액순환 이라고 강조했다. 혈액순환이 안되면 신체의 기능이 마비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화는 기술이 필요한데 먼저 듣는 기술이 필요하다 상대방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우선돼야 한다. 양교수는 부부간의 대화를 아름답게 이끌어갈 천국방언 4가지를 소개했다. * 미안해야 * 괜찮아요 * 고마워요 * 사랑해요. 괜찮아요 라는 말속엔 용서의 뜻이 포함돼 있다. 우리나라 부부들은 " 사랑해요"라는 말에 매우 인색한편 그러나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아내는 작은 것에 감동하기 때문에 " 사랑해요"라는 말 한마디가 부부간의 대화를 촉진시키는데 큰 촉매제가 된다는 것이다.


다섯번째 열쇠는 '기도' 기도가 없는 가정은 지붕이 없는 집이라고 양교수는 말했다. 기도는 겸손의 표현이며 축복의 통로,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가 하나되어 기도하는 가정을 찾고 계시기에 기도는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끌어가는 귀중한 부분이다.


여섯번째 열쇠는 '말씀' 우리가 매일 가정에서 육의 양식을 섭취하듯 영의 양식인 성경말씀도 가정에서 섭취해야 한다.


일곱번째,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없으면 가정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가정이라는 배를 성공적으로 운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가 가정의 배를 운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행복한 가정생활의 근본적이면서 마지막 열쇠이다.



가정 교육론.hwp




이 글을 공유합시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

본문과 관련 있는 내용으로 댓글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