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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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관한 예화 모음



성령의 임재, 교회의 시작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50일 가량 지난 후 일입니다. 오순절날 성령께서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이후로 '교회시대'가 시작 되었습니다. 성령은 교회의 주체이며 창시자가 되십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강력하게 임했던 날이 성령 강림절입니다.

마가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속 됩니다.


성령이여, 홀연히 임하소서

- 웨슬리 듀엘-


오 주여, 홀연히 임하소서.

주의 성전이 오늘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약속하신 말씀대로 임하소서

우리가 기도 드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라도 속히 임하시옵소서.

오, 축복의 성령이시여,

우리가 그처럼 필요한 부흥을 주시옵소서

오 성령이시여, 우리 마음에 주의 빛을 비추시고

주님의 거룩하신 불길로 우리에게 임하소서

주여, 간구 하옵나니 속히 임하시어

우리를 정결케 하옵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오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우리가 심히 곤고하여 주님 앞에 이렇게 엎드렸사오니

지금 홀연히 임하시옵소서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에 임하소서!

기도 하옵나니 홀연히 우리에게 임하시옵소서!



성령의 사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인 천국이 아니라 누가복음 17장 21절에 기록된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처럼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천국,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천국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의 이중성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영적 천국은 “오직 성령 안에서”라고 밝힌 것과 같이 성령의 임재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 가꾸어지고 이루어지는 천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고달프고 피곤한 이 세상에서도 부족하지만 천국생활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성령의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성령과 연합된 생활을 하게 되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이는 성령이 우리의 주인이 되고 우리를 지도하고 가르치며 보호하고 인도하는 영적인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길들여진 사람이 되면 마음의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곧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의인은 우리의 삶을 대신하는 표현으로 우리의 성별과 성결,신앙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면 죄와 타협할 수 없고 세상의 타락에 끌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로운 생활입니다.


반면 평강과 희락은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적 축복을 의미합니다. 여기 평강과 희락은 우리가 조성하고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선물로 받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 말씀과 같이 지혜를 구해서 얻는 것처럼 평강과 희락도 하나님이 주시고 우리는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평강과 희락을 사모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감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면 평강과 희락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성령의 사람만 되면 자기 능력보다 몇 갑절 유능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 훨씬 더 보람된 삶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 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도 만나 주신 성령님


1960년대의 겨울은 매우 추웠다. 가난해 난방도 방한복도 변변치 못했다. 농경사회에서 초등학생도 주요한 노동력이었다. 땔감하기, 물 긷기, 소 먹이기, 청소, 심지어는 빨래까지도 했다.


4학년 그해 겨울, 약 300m 거리의 공동우물에서 물을 긷기 위해서 키보다 더 큰 물지게에 물통 둘을 달고 우물로 갔다.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 언덕배기 집으로 향했다. 물통의 바닥이 땅에 부딪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물지게와 물통 사이의 줄을 야무지게 움켜쥐어야 했다.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주님이 저 먼 곳,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지 아니하고, 내 고향에서 태어났으면, 그리고 2000년 전에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요즘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틀림없이 물지게 지고 고생하는 나의 물지게를 대신 지어 주셨을 터인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물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날아가고 있었다. 신기해서 반복하여 물 긷기를 다섯 시간 반이나 반복했다. 그런데 똑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해가 질 무렵 교회로 갔다. 마루에 무릎을 꿇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무슨 뜻입니까?’ 조용히 하나님께 물었다. 마음에 들리는 깨달음이 있었다.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다. 예수님은 인격이시다. 너는 시(時), 공(空)의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성령은 제한이 없으시다. 오늘 성령께서 너와 함께 하셨느니라.’ 머리를 교회 바닥에 쾅 부딪쳤다. ‘나 목사 될래요.’ 그 이후 나는 목사가 되었다. 물지게를 함께 져 주시던 성령님이 목회라는 물통을 대신 져 주신다.

윤대영 목사(부천 처음교회)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 이유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하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은 삶과 성령을 받지 않은 삶은 큰 차이가 난다.

성령을 받은 삶은 자동차로 친다면 엔진이 가동되고 연료가 가득 차 있어서 시동만 걸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준비된 상태를 말한다. 요즈음엔 노래방과 영화까지 나오는 네비게이션이 장착된 차들이 많다. 전혀 지리를 몰라도 원하는 목적지까지 빠르게 갈 수 있는 놀라운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은 삶은 엔진도 가동이 안 되고 연료가 떨어진 상태다. 만약 자동차가 움직일 수 없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고철덩어리와 다름이 없다. 차가 자리만 차지할 뿐 움직일 수 없다면 그것은 조만간 폐기처분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과 지식으로 출렁이는 소프트웨어를 가진 뇌가 아니라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경주할 수 있는 법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영국이 낳은 청교도 신앙가 존 번연 목사님이 국왕의 명을 어긴 죄로 감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옥사장이 번연 목사님께 윗사람 모르게 옥문을 열어주면서 집에 가셔서 사모님과 식구들을 잠깐 뵙고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목사님이 되돌아오기에 왜 오셨냐고 묻는 옥사장에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호의는 고마우나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이 나라 국왕이 직접 감옥을 시찰하면서 존 번연 목사님을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옥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셨기에 목사님도 살고 나도 살았습니다. 이제 제가 언제 목사님께 가시라 오시라 하지 않을테니까 목사님의 마음에 비쳐오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시고 싶을 때 가셨다가 오시고 싶을 때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많습니다.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결코 내 고집이나 방법대로 생활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생활하십시오. 양심에 비쳐오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심에 비쳐오는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행동하십시오.

기도: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 내가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읽을 때에 밝히 깨닫게 하소서. 또한 깨달은 말씀을 사람들에게 나누고 지도할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하셔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용되게 하소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지혜롭게 행하라


서든 세미나리 역사학 교수인 Timothy Beougher 교수의 일화입니다. 부커교수가 목회를 할 때 한 강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강사님은 전도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데 전도에 대해서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전도에 대한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고 전도에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를 해주면된다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부커교수는 그 설교를 듣고 너무 화가 났습니다. 전도는 모든 성도들이 해야하는 사명이며 성도의 본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커교수는 설교가 끝나고 그 강사의 넥타이를 잡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였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에게 다가가야 합니까? 성령께서는 좋은 해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커교수는 이 강사가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이렇게 물었습니다.

“강사님, 혹시 강사님 스케줄 중에 두 주 연속으로 비어 있는 주가 없습니까?” 그 강사는 다음에 또 초청할 것을 기뻐하며 자신의 스케줄을 이리저리 뒤적거렸고 “언제 언제 스케줄이 비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부커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그때 강사님의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그 강사는 밥을 먹다가 포크를 든 손을 떨면서 당황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스케줄이 없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직접 설교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좀 심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부커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제가 가서 두 가지 설교를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한 가지는 십일조와 헌금에 관한 것입니다. 청중들에게 이렇게 설교하겠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은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이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와 헌금에 대한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그 소명과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 주면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는 봉사에 관해서 설교하겠습니다. 봉사의 은사가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교사같은 직분으로 헌신할 필요가 없고 그것 때문에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봉사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 주면 됩니다.”라고요. 그렇게 말하자 강사로 오셨던 분은 자신의 메시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솔직히 인정하며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만약에 부커교수가 화가난 상태에서 강사의 멱살을 쥐고 “당신이 강론한 것이 잘못된 것이요!”라고 했다면 아마도 그들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커교수는 성령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구하였고, 성령님은 지혜로운 방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내통했을 때,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나가 비유로 다윗의 잘못을 지적하고 다윗의 회개를 이끌었던 것과 같이 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화가 나는 상황에서 어떻게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까?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지혜를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8: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에 대한 이중적 태도


‘하나님을 추구함’이란 책으로 유명한 에이든 토저 박사는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을 홀대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는 “만약 신약교회에서 성령을 제외시킨다면 그들이 한 일의 95%가 중단되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렇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교회의 위원회로 대치시키고, 인위적인 프로그램을 양산한다. 교회의 주인이신 성령은 그냥 구호로만 벽에 걸려 있다. 그분께 결재 받는 일은 결코 없다. 성령을 단지 손님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독일 뤼벡교회의 낡은 벽에 붙어 있는 돌 판에는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하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하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 이는 한국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호소요 경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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