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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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중략)…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15절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

주님의 구원으로 달라진 정체성 갖게 돼

4차원의 영성으로 세상 다스리고 살아야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었습니다. 마치 눈이 없는 사람이 볼 수 없고, 귀가 없는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것 같이 영이 죽은 니고데모는 영적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담의 자녀들은 이처럼 다 죄 가운데서 영이 죽어서 사망을 상속으로 받아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은 영이 죽었기에 하나님과 대화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르고 무신론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

 

 1. 죄로 인한 아담의 변화


 죄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의 생활은 근본적으로 변화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창 1:27) 사람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간절히 원하지만 죄를 범하여 영이 죽어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그냥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합니까? 성경에 창세기 2장 7절에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했습니다. 또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생령이 되어 죽지 않게 하셨음에도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꾀임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범죄한 아담은 마귀에게 이 땅의 통제권을 넘겨주게 되었고, 마귀의 사람이 되어서 모든 죄악이 가득한 삶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3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아담은 이 이 땅을 마귀에게 양도하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온갖 죄악을 다 범하므로 버림받은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최근 유엔 국제기구가 공동으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에 강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가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훌쩍 넘어섰다고 합니다. 한 해 5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인과 폭력행위로 숨지고, 세계 인구 7분의 1에 해당하는 10억 명이 강력 범죄의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하게 된 것은 아담이 마귀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마귀의 강력한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마귀의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람으로 전락했다가 그 사람이 마귀의 사람이 되고, 결국에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여 엄청난 불행을 이 세상에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하게 된 것은 아담이 마귀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을 누가 다시 구할 수 있습니까? 부모들은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자녀들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지 않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든 최고의 걸작품인 우리 사람들이 반역했다고 그대로 영영 죽여 버릴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고 구제하기 위해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2.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구원하려고 하셨는데 그에 합당한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의 대가인 희생제물로 드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사명은 영적으로 죽어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된 인간을 구원해서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은 3차원의 세계 사람이고, 나는 4차원의 사람이니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물과 성령을 통해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대화가 가능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뭔지 니고데모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자신도 어떻게 거듭난지 모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며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이 바람처럼 와서 내 마음을 살려 놓으셨고, 그 때부터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 보혜사 성령님,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그냥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이 거듭나야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니 니고데모는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태어나야 되느냐고 하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요한복음 3장 10∼12절에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차원이 다르니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59장 2절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려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했듯이 사람이 하나님과 대화가 단절된 것은 죄를 짓고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고 대화를 회복하기 위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원망과 불평 속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놋뱀을 만들어 나무에 달아 그것을 보는 자들에게는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주셨던 예를 이야기 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나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십자가 사건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서 쳐다보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좌우편에 강도 두명이 함께 매달렸습니다. 그때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보며 “주님께서 주의 나라에 임하시거든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시거든 나를 인정해 주시옵소서”라고 요청했고, 예수님께서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 있는 강도는 “웃기는 소리하네? 자기도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하는 처지에 누구를 구원한다 말이냐?”하면서 주님을 쳐다보지 않고 비웃었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예수님의 좌우편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을 때 보고 독에서 해방되었던 것처럼 한 사람은 주님을 보고 구원을 얻었고, 다른 사람은 버림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 은혜를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고 이것이 우리에게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도무지 자랑할 것이 없고,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를 구주라 믿고 쳐다보기만 하면 모두 차별 없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될 것을 알면서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올 수 있는 길을 예수님이 보혈로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이 찬양의 가사처럼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구원의 길을 환히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영원히 살아가야 할 길이요, 진리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가로막은 휘장을 다 찢어 버리셨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믿고 달라진 삶의 정체성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성이 달라진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옛사람이라고 말하고, 믿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옛사람하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의 사람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육신의 사람입니다.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과 대화가 이루어지는 4차원의 사람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육신의 사람으로서 마귀의 종노릇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5∼7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3장 5절∼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은 육신의 사람이고 믿는 사람은 영의 사람인데, 그렇기에 영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은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물질적인 3차원의 세계를 뛰어넘어 영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대화가 이루어지고, 육신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사람 즉,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골리앗과 다윗이 싸울 때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골리앗은 그냥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다윗이 골리앗에게 패할 리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성령으로 난 사람이며,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4차원의 사람입니다. 반면 믿지 않는 사람은 3차원의 사람입니다. 물질적인 세계는 3차원의 세계이나 4차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리시는데, 4차원의 사람이 된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서 성령으로 영적인 세계를 통해서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 4차원의 영적요소


 4차원의 세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위에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신령한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3차원에 있는 사람들은 신령한 세계를 인정 하지 않습니다. 천당과 지옥도 인정 하지 않고, 하나님도 인정 하지 않으며, 영생도 인정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영이 살아났으므로 영의 4차원의 세계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아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이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꿈입니다. 로마서 8장 24∼25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꿈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는 것입니다. 꿈은 마음의 화폭에 그려놓고 늘 바라보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꿈은 적은 꿈도 있고 큰 꿈도 있지만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가는 방향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버림받지 않습니다. 나아갈 방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꿈이라는 것은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을 꿈꾸는 것이 아닙니다. 꿈이라는 것은 정말 꿈같은 것을 꾸는 것이 꿈입니다. 꿈은 자기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꿈이 꿈을 이루어 갑니다. 꿈이 환경을 변화시키고, 이끌어서 꿈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한 과부가 남편이 죽고 빚을 많이 졌는데 엘리사에게 와서 눈물로 통곡을 하며 어떻게 할까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엘리사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가서 그릇을 많이 빌려서 문을 닫고 그 그릇에 너희 기름병에 있는 기름을 갖다 부어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과부가 저희 “기름병에는 한번 먹을 양의 기름 조금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잔소리하지 말고 기름을 갖다 부어라”라고 재차 명령합니다. 이에 과부는 마지못해 아들에게 그릇을 빌려오게 하고, 그릇들을 줄세워놓고 기름을 부었는데 그 조금 밖에 남지 않은 기름병에서 기름이 계속 나왔습니다. 그래서 빈 그릇들을 채우고, 또 채웠습니다. 빌려온 그릇에 기름이 가득차 더 이상 빈 그릇이 없자 기름이 탁 그쳐버렸습니다. 그릇이 적으면 적게 나오고 그릇이 많으면 많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만약 그 과부가 좀 더 큰 그릇을 많이 빌려 왔더라면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기름을 그 가정에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꿈을 꾸려면 큰 꿈을 꾸어야 합니다. 주님은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꿈은 그릇입니다. 꿈을 크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꿈의 큰 그릇을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 다음은 믿음입니다. 로마서 4장 17∼18절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현재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시인하는 것은 감각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눈에 아무 증거 보이지 않고, 귀에 아무 소리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을 지라도 내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그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의 꿈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뜨겁게 사랑해 주시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을 내놓기까지 사랑했으니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숨같이 사랑하시고,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인 것을 알고, 의지하고, 그분에게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 다음이 창조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꿈꾸고, 믿는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그 스위치 버튼을 누르는 것이 ‘말’입니다. 창조적인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건강하다”하면 그 말이 나가서 건강을 만들고, “나는 물질이 풍부하다”하면 그 말이 나가서 물질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닮은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은 하나님과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듯이 우리도 말씀으로 우리의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가 “행복하다. 기쁘다. 즐겁다. 평안하다”라고 말하면 그 말씀이 행복하고, 평안한 세계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반면 “나는 슬프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불행하다”라고 말하면 말이 그대로 와서 괴롭고, 슬픈 부정적인 세계를 만들어 놓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적인 선언이 말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에는 그와 같은 힘과 능력이 있고, 우리도 이 말을 통해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4차원의 사람들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4차원은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로써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리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종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주인 노릇을 하기 위해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이 주신 4차원의 영성을 가지고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됨을 잘 이해하고, 그냥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 4차원의 영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을 이해하면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놀라운 기적의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통하여 죽었던 영을 살리셔서 4차원의 영성을 가진 존재로 하나님과 대화하게 하시고, 3차원의 모든 세계를 다스려 나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땅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사람됨을 잊지 않게 하시고, 삶과 인생속에 하나님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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