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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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 하면 산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0∼11절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 가지고 살면

진정한 부활과 구원의 축복 누리게 돼


 우리는 예외 없이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살려고만 하면 오히려 죽으며,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가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1. 왕의 우상숭배 명령을 거역한 세 청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는 늘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중동일대를 석권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두라평지 위에 커다란 금신상을 세워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려 했습니다. 높이가 60규빗, 너비가 6규빗 되는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으면 자신을 거역한 것이고, 즉시 잡아 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지리라고 공포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으로 잡혀온 포로였지만 뛰어난 자질을 통해 요즘으로 하면 도지사 정도 되는 위치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나라에서 일을 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우상에게는 절을 하지 않는다는 굳은 결심이 있었습니다. 결국 왕의 명령대로 나팔이 울리고 금신상에 절을 해야 했지만 이 세친구는 결심대로 절을 하지 않았고, 이를 기회로 그들을 시기하던 다른 신하들이 왕에게 달려와 그들을 고발했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를 더 주었지만 이들이 거절하자 결국 화가 난 왕은 이 세친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넣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 뜨거운 불 속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처럼 보이는 다른 한 사람과 더불어 걸어다니며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불속에서 나온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며 느부갓네살이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이방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우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결심하고, 시행한 것을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오스왈드 챔버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두려워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기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두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 권세가 두렵지 않습니다. “야훼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2.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을 공경한 다니엘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을 공경한 다른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의 이야기입니다.


 바사와 다리오의 통치시절 유대인 포로가 되어서 끌려온 다니엘 역시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으며 나라의 총리 대신 중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을 시기한 다른 신하들이 다니엘이 하루 세 번 기도하는 것을 꼬투리 잡아 왕의 권위를 위해 왕 이외에 누구에게든지 기도하거나 절하면 죽여야 한다고 탄원합니다. 이를 좋게 여긴 왕이 ‘왕 이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는 사람들은 잡아 죽인다’는 특별한 명령을 포고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에 굴하지 않고 습관대로 창문을 예루살렘으로 열어 놓고 아침, 점심, 저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를 노리고 있던 다른 관원들이 와서 현장에서 잡아 왕에게 끌고 왔고, 왕은 자신이 선포한 법을 번복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굶주린 사자들이 신기하게도 다니엘에게 달려들지 않고 얌전히 있었습니다. 하늘의 천사가 와서 벌써 이 사자들의 입을 막았으므로 사자들이 꿈쩍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음날 왕이 사자굴로 달려가 다니엘을 부릅니다. 그러자 굴속에서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가 왕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도 아니고 왕에게 손해를 끼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왕이여, 하늘의 천사가 와서 나를 보호해 주어서 살아났습니다”라는 다니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왕은 속히 다니엘을 끌어 올리고 다니엘을 참소한 총리들과 모든 신하들을 사자굴 속에 던져 넣도록 명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꼭 살려고 하면 살지 못하나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서 나가면 오히려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이것을 절실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들을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고 청산할 제물로 왔기 때문에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죽으시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8∼39절에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하시면서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실 때 예수님 얼굴에 땀이 물줄기 같이 흐르는데 핏방울이 되어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고통과 아픔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로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게 되었고,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끝까지 참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주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게 된 것입니다.(막 10:45)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공로를 내 것으로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고후 4:10∼11) 실제는 우리는 고통을 당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끌어안고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것은 우리가 당한 것이요, 예수께서 자유를 값 주고 사신 것이므로 다 우리의 것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는 참으로 위대한 진리요 생명입니다. 살고만 싶어 하면 반드시 죽습니다. 우리는 항상 생각 속에 그리스도가 날 대신해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 갈보리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매달리신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매달린 것이다라고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혼자 있을 때라도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당 내 천당’을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깨달아 알고 묵상하고 바라보고 입술로 말하면 그 은혜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죽음을 내 몸에 항상 걸머지고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있으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것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오늘 예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 속에 계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하시고, 꿈꾸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입으로 시인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므로 우리는 하늘나라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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