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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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그릇
어떤 군목이 최전방에서 군목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벌통을 쳐서 꿀을 땄습니다.
아주 좋은 꿀을 따서 부대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광고를 하여 누구든지 빈그릇을
가지고 와서 꿀을 타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군인은 박카스 병을 가지고
와서 꿀을 받아갔고, 어떤 군인은 링게르병을 가지고 왔고, 또 어떤 이는 스페아
깡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군목은 군인들이 가지고 온 빈병에 다 꿀을 가득히 넣어 주었습니다. 박카스병은
박카스병만큼, 링게르병은 링게르병만큼, 스페아통은 스페아통만큼 꿀을 부어 주었
습니다. 그후 항의 전화가 걸려오기를 공평하지 않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이었습니
다.
그랬더니 군목이 대답하기를 "누가 박카스병을 가지고 오라고 했소? 나는 빈 그
릇을 가져오라고 했고 그 빈 그릇대로 채워 줬을 뿐이오."하는 것이었습니다.


깨어 믿음 위에 굳게 서라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外飾)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
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
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벧전 2:1,2.
시기와 비방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하는 것입니다. 시기와 비방을
할 때, 사람들은 문제가 되는 그 사건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습니
다. 여러 가지 주변 것들을 긁어 모아 어찌 되었든 무조건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조금 섭섭한 일을
했다고 해 보십시오. "그래, 그 사람 눈 좀 봐. 냉정하다 못해 독기가
서려 있쟎아."하고 애매한 눈까지 들먹여 그 사람을 눌러 버리려고 합
니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 뒤축이 달걀 같다고 나무라는 식입니다. 그
렇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가 갑자기 형편없는 사람으로 전락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가 낮은 사람으로 전락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낮은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조심하십시오. 깨어 믿음에 굳
게 서서 강건하게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십시오.
"주님, 저희로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비방하고, 판단함으로써
스스로 파멸해가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믿음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기쁨에서 내세의 소망을 품고 사 는 그 날까지 열심히 일해야 하겠다는 사상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쉽게 돈을 벌겠다는 엉뚱한 생각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돈을 벌겠다는 상업적인 발상에서 신앙을 약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구속의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를 복이나 받게 하는 물질의 종교로 인식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부자 되는 종교로 인식하게 만들어 버려 기독교를 구속의 종교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게 하였다.


기도와 믿음
-마틴 루터
종교개혁 당시 강력한 원수들이 온 힘을 합하여
개혁파의 신앙을 뒤집어 엎으려고 하고 무수한 칼날이 칼집에서 뽑혀지려고 할때 루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단은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경건치 않은 승려들은 공모하고 있으며, 우리는 전쟁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써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사람들을 권할 것이다.
그리하면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복되어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급한 것은 기도이다.
이 싸움에 사용되어야 할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뿐이다."
온 세계를 동요시킨 위대한 종교개혁의 큰 능력은 밀실의 기도에서 나왔다.
아우크스부르크의 투쟁의 기간 동안에도 루터는 적어도 하루에 세시간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것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그렇게 하였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
가끔 자동차 안에 열쇠를 놓아둔 채 문을 잠갔다가,후에 문을 열기 위해 고생한 경험이 있다.아무리 고급 승용차라 할지라도 그 열쇠가 없다면,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고,운전을 할 수도 없고,원하는 곳에 갈 수도 없다.

지글러라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그의 저서에서 지적하고 있다.그것은 정직한 사람,원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성실한 사람,신념이 넘쳐 있는 사람,충성된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이런 성공의 공통점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길은 믿음의 기도 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복의 근원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열쇠를 주었다.삶의 놀라운 열쇠를 긍정적으로 사용한다면,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복을 얻을 수 있다.우리 모두 기도하는 시간을 우선 순위를 삼고 생활하자.“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 5:15)”

믿음의 기도는 실패가 없다
아일랜드의 한 청년이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사랑하는 약혼녀가 익사하는 아픔을 당했다.그는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의 늪에 빠졌다.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이 청년은 아픔의 장소를 피하여 캐나다로 갔다.그러나 그곳에 안주하기도 전에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중병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그는 죽고 싶었다.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자기를 향하여 토네이도처럼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 청년은 힘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흐느끼며 부르짖었다.“예수님!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세요.응답해주세요.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고 결단의 기도를 드렸다.그 순간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평화가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이때 떠오른 영감은 뒤에 “시험 걱정 모든 괴로움없는 사람 누군가.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찬송가 487장)라는 유명한 찬송가가 됐다.

그는 고향에 전화해서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그는 중병을 앓던 어머니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치료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이 청년이 바로 조지프 스크리븐이다.스크리븐이 울부짖으며 드린 기도는 어머니를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켰다.이처럼 기도에는 실패가 없다.우리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는 말씀을 믿고 기도해야 하겠다.

믿음과 기다림
존은 열 살 되던 해 크리스마스에 할머니로부터 우표 앨범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다가 왔지만 우표앨범은 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런데다 놀러온 친구들은 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구경하길 원했다. 존은 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할머니에게 받은 우표 앨범...이 건..."
"존, 아직 할머니에게서 우표 앨범이 오지 않았는데, 왜 그런 말을 했니?"
존은 이상한 얼굴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나에게 우표 앨범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받은 것과 같아요."
존의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믿음을 방해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났으나 할머니에게는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었다.
존의 어머니는 왜 할머니가 우표 앨범을 보내지 않는지 마음에 강한 의심을 가지고 아들에게도 이렇게 떠봤다.
"존! 할머니께서는 너에게 약속한 것을 잊으셨나보다."
"엄마, 결코 그렇지 않아요. 할머니께서 잊어버리시다니요."
존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존의 어머니는 아들의 신뢰에 찬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엄마, 할머니께 앨범 고맙다고 하는 편지를 보내면 어떨까요?"
"그래,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구나. 자, 한번 써 볼까?"
존의 어머니는 이렇게 용기를 주었다. 순식간에 편지를 쓴 후 우체통에 넣었다. 존은 할머니를 믿으며 휘파람을 불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 후 며칠 안되어 답장이 날아왔다.
"존에게... 존! 할머니는 너에게 우표 앨범을 사 준다고 한 약속을 잊은 게 아니란다. 너의 마음에 드는 앨범을 구하려고 찾아보았으나 좀처럼 없더구나. 그래서 나는 뉴욕에 주문편지를 보냈단다.
그런데 뉴욕에서 보내온 앨범은 크리스마스가 지나서 도착한 데다 너무 좋지가 않아서 다른 것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여기 3달러를 보내니까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그곳에서 사가지렴. 할머니로부터."
편지를 읽은 존의 얼굴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찼다.
"엄마, 제가 말한 대로지요?"
존은 할머니와의 약속을 결코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그가 믿고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는 노력하고 있었다.

고난을 회피하지 않는 믿음
 
성 구 " 가라사대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막 14:36)
마틴 루터 킹 Jr. 목사님의 자서전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킹 목사님이 '몽고메리 버스 스트라이크'를 주도하고 계실 때 많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테러와 폭파 협박에 시달리셨다. 그들의 테러와 폭파 협박은 너무나 거칠고 험하여서 우직한 킹 목사님도 두려움에 옴짝달싹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목사님이 공포에 사로잡혀서 '이제는 이 일에서 손을 떼어야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그 순간 기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는 기도했다. 그의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다. 지금 혼자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난에 처해 있다는 것을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때 머릿속에서 조용히 확신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 마틴 루터, 정의를 위해서 일어서라. 평등을 위해 일어서라. 진리를 위해서 일어서라. 보라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결코 너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 싸움을 계속하라. " 는 목소리를 들은 마틴 루터 킹 Jr. 목사님에게 고난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의연히 이길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고 한다.


부부의 믿음
한 농부가 부인의 동의를 얻어 더 좋은 말과 바꾸려고 키우던 말을 끌고 시장으로 나갔다.가는 도중에 살진 암소에게 마
음을 빼앗겨 말과 바꾸었다.또 길을 가다가 그 암소를 양과 바꾸었고,조금 더 가다가 양을 거위와 바꾸었으며 또 그 거위
를 붉은 벼슬을 가진 수탉과 바꾸었고 마지막으로 수탉을 썩은 사과 한 자루와 바꾸었다.
날이 저물어 여관방에서 만난 귀족 두 사람이 농부의 사연을 듣고는 “집에 돌아가면 부인이 화가 나서 당신을 받아들이
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했다.그러나 농부는 “참 잘했다고 할 것이오”라고 반박했다.그러자 귀족은 만약 그렇다면 자기
가 가진 금화를 몽땅 주겠다고 했다.
이튿날 집에서 그간의 사연을 들은 농부의 아내는“그러잖아도 식초를 만들기 위해 썩은 사과가 필요했는데 참 잘되었군
요”라고 말했다.결국 농부는 내기에 이겨 부자가 되었다.
부부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배우자의 능력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배우자를 존중하는 것임을 일깨워주는 안데르센
의 동화다.


배울 것은 믿음과 낙천적 사고방식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5:7)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목사님 당신은 낙천적 사고방식을 외치십니다. 당신은 믿음만 가지면 산도 움직일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산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예수 님께서 잘못 말씀하신 건가요?"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야 합니다. 특히 믿음과 낙천적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세상에 문제 없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하는 것이 중 요하다.

나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명심하고 문제들을 처리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 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니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나는 인내를 가지고 있다. 인내의 복음을 믿는 나는 인내로 많은 일을 처리할 것을 확신한다.


한 사람의 믿음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80세 생일 잔치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소감을 말했습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나는 허황된 계획을 꾸민 적도 있었고, 실현 불가능한 꿈을
가진 때도 있었소.
그러나 아내는 한 번도 불평을 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나를 믿어주었답니다.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렇게 나를 믿어준 아내의 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입니다.
당신을 언제나 믿어주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감사는 믿음의 척도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니므이 뜻이니라](살전5:18) 기독교의 신앙은 '감사'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사란 다름 아닌 "창조와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알고 감사하는데 바로 이 감사가 예배의 동기이다. 구약성서에서 감사라는 말은 동사 [야다](감사를 드리다)와 명사[토데](감사를 드림)로 표현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쓰이고 있는 이 [야댜]와 [토데]는 "마음의 샘줄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음에서 샘줄기가 흐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는 [유카리스테오스](감사한 마음을 가지다. 감사를 드리다),
[카리스](감사)라는 말이 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감사라는 말은 또 영어로는 THANKS인데 이 말은 "생각한다"란 뜻을 지닌 THINK에서 나온 말이다. 다시 말해서 감사는 깊이 생각하는 것으로 인생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저절로 나오는 행동인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지를 보면 바로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감사의 표현은 구약과 신약이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주로 구약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서의 감사가 그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신약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구속사적 관점에서의 감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먼저 구약성서에서의 감사는 모든 시편마다 언급되고 있으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주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감사 드림'은 이스라엘의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민족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잇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민족은 감사함으로 성전에 들어갔으며, 예배를 드릴 때에도 감사의 노래를 불었으며, 서원을 드리는 제사를 올리면서도 감사를 하였다. 또한 그들은 감사를 번제 대응으로 하였으며, 야훼의 제단 앞에서 행하는 "재판"에도 감사드림이 따랐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다름 아닌 야훼의 이름에 감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민족의 감사는 바로 신앙에서 온 것이었다. 이스라엘민족은 야훼가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지키는데 신실하게 언제난 감사를 표했다.이러한 감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신들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약의 감사는 신약에서는 조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서의 감사가 구약에서의 감사였다면 신약의 감사는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구속적 감사가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신약에 보면 생전에 예수를 안 사람들은 예수가 행한 일과 그의 인격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예수를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그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도래하는 왕국에 참여할 것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게 된 데 대하여 ◇특별한 영적인 은사에 대하여 ◇ 육적인 음식에 대하여 ◇ 세상데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하여 ◇신앙의 전파에 대하여 ◇ 형제들의 사랑과 신앙에 대하여 ◇하나니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감사했다.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역설했다. 바울이 감사생활을 강조한 것은 감사가 믿음을 온전케하기 때문이다. 감사는 은혜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은예에 감사하게 될 때 교인들은 더욱 더 그 은혜안에서 귿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감사는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며 우리의 미래를 확실하게 해준다. 감사는 또다른 감사의 역사를 경험케 하며 이러한 계속적인 감사는 우리의 영혼을 살찌누게 한다. 우리들이 가진 것 중에서 아무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감사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이밖에도 일반적인 생활에서의 감사(살전5:18)가 있는데 이 감사야말로 긍정적인 신앙생활의 원동령이다. 말세의 특징 중 하나는 감사가 없다는 것이다.

절망 속에서도 가질 수 있는 믿음의 기도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분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로다(시55:22).
기도를 계속하면 당신은 계속 어떤 것을 추구하여 달성시키는 능력도 얻게 된다.
나는 세계 2차 대전 때 한 유대인이 독일의 지하실 벽에 새긴 이 말을 좋아한다.
"햇볕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태양을 믿는다. 비록 느끼진 못하더라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비록 잠잠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것은 기도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했다.


성장하는 믿음을 소유하자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 5: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 6:11,12.
●“...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
는 이것이니라”-요 4:34.

봄이 되면 농촌에서는 못자리를 만들어 볍씨를 뿌립니다. 볍씨는 일정 기간
동안 못자리에서 잘 자랍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라면 더이상 자라지 않
습니다. 그 이유는 못자리가 좁기 때문입니다. 그때쯤되면 농부들은 못자리
에서 모를 뽑아 큰 논에 이양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모는 무럭무럭 자라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내놓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의 초보 단계
에 있을 때는 목사나 선생의 양육을 받으며 자랍니다. 그러나 일정 기간 동
안 양육을 받았으면 모내기를 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을 모내기해
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
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한 것만 너무 좋아한 나머지 늘 피양육자 노
릇만 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신앙은 대체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
므로 어느 정도 양육을 받았으면 피양육자의 단계에서 벗어나 교사로, 직분
맡은 자로 봉사함으로써 성장해야 합니다.
“주님, 저희로 젖먹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지 말게
하옵시고, 성장하는 믿음을 소유하게 하시옵소서.”


믿음의 승리
나폴레옹이 유럽을 침공했을 때 휘하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를 포위했다. 펠드리히 시는 비상의회를 소집하고 사태를 논의했다. 미리 항복하자는 의견이 나오자 한 사제가 일어나 말했다. “우리의 힘을 의지한다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부활절인 오늘의 예정대로 교회 종을 치고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나머지 문제는 모두 하나님께 맡겨버립시다”
그 사제의 말에 시의회 의원들은 모두 찬성하였고 펠드리히 시에는 우렁찬 종소리가 울리고 기쁨에 찬 찬송소리가 퍼져나갔다. 이 소리를 들은 프랑스군 진영에서는 오스트리아의 구원병이 온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여 군대를 돌려 다른 곳으로 퇴각하였다. 펠드리히 시민들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막강한 나폴레옹의 군대를 맞아 승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은 이런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낸다. 당신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믿음으로 감사하는 참된 삶
염려와 근심은 믿음없는 행위이며 소유욕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염려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염려는 세상일의 특징이며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염려하는 자들에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들꽃을 가리키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화려한 영화를 대표하는 솔로몬도 들꽃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들꽃도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이 들꽃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을 입히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염려와 근심이 아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나 헛된 망상이 아니라 내 의지와 욕심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과 원칙에 충실한 삶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후에 광야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도 많이 경험합니다. 그래서 광야길은 힘들 때나 형통할 때나 믿음의 행진이어야 했습니다.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고픔 때문에 모두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그들은 애굽에서 먹던 떡과 고기를 생각하며 불평했습니다.백성들이 원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출 16:3)고 약속하셨습니다.약속대로 하나님은 저녁에는 메추라기,아침에는 만나를 공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필요에 따라 거두도록 하셨습니다.처음에는 많이 거둔 자도 적게 거둔 자도 있었지만 부족함이 없이 각자 먹을 만큼만 거두었습니다. 둘째는 거둔 양식을 다음날 아침까지 두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탐욕에 빠진 자들이 약속을 어기고 다음날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나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적은 것으로도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을 믿고 욕심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상을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상은 눈에 보이는 것,물질의 풍요를 갈망하는 상징입니다. 또한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을 섬길 수 없도록 하나님이 엄히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우상으로 풍요를 상징하는 곡물의 신이었습니다.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자는 믿음으로 살거나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세상이 감사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소유욕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소유하는 것이 많아지면 교만하기 쉽고 자기를 채우면 채울수록 염려가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으면 자기 주변을 가볍게 그리고 단순하게 하십시오. 빈틈이 좀 있어야 여유가 있습니다. 성도는 소유욕에서 생기는 염려와 근심을 버리고 믿음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교육의 바탕은 믿음이다
조선조 영조(英祖)때 이재라는 이름난 학자가 있었다. 이재는 일찍 아버지
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어머니는 이재가 12살 되던 해 시동생인
당대의 정치가 이만성에게 데리고 가 올바르게 키워줄 것을 부탁했다. 며칠
후 이만성은 "공부를 안 해 매를 들어 때렸는데 그만 죽었다"라고 말했다.
이재의 어머니는 슬퍼하면서도 "가르치다 그런 걸 어떡합니까. 괜찮습니다."
락 말했다. 그러자 이만성은 "사실은 죽지 않았고 나를 얼마나 믿고 맡기나
보려고 했다."고 하며 이재를 열심히 키워 대학자가 되게 했던 것이다.

 

두려움의 안경과 믿음의 안경
중세기 종교개혁가 루터의 이야기다. 그의 학창시절에 독일 고학생들은 노래를 잘하면 남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아 학비를 마련하곤 했다. 물론 노래가 너무 엉망일 경우나 창문 안 주인의 성품이 곱지 못하면 무안을 당하고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한번은 루터가 어느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척 열고 바라보더니 냅다 뛰어나오는 것이었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자기 노랫소리가 듣기 싫어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나이는 계속 쫓아왔다. 결국 발이 빠르지 못한 루터는 붙잡혔는데,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돈 뭉치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루터에게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자선가였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길, '나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않다.' 라는 열등의식 속에서 노래를 하다 보니 그 사나이가 뛰어나오는 것도 자기를 해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루터는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갈아 끼면 세상이 다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고 했다.
사실이다. 환경도 중요하지만 그 환경을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고, 그 해석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진다.
미국의 한 신발회사에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두 명의 사원을 시장조사차 보냈다. 그때 한 사원은 보고하기를 "이곳은 모든 사람이 신발을 신지 않으므로 판매 불가능" 하다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다른 한 사원은 "이곳은 아직 아무도 신을 신지 않았으므로 판매가능 무진장"이라는 보고를 띄웠다. 전자의 불가능 사원은 평생을 말단 사원으로 마쳤지만, 후자의 무진장 사원은 그 신발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이것은 능력의 차이라기보다는 가치관의 차이이다.

시련과 믿음의 성취
본문: 단 3:13-18
아이들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병고, 즉 감기에 걸리기도 하고 홍역을 앓기도 하면서 자라는 것과 같이 신자들의 신앙이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시련과 장애물들이 있어서 이것들과 싸워서 이겨야 믿음이 점점 자라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용사가 되고 큰 일도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기도원에 갔었는데 그 곳에 계신 전도사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떤 사람이 큰 목적을 가지고 산 속에 들어가 며칠 동안 울부짖으며 기도하다 소나무를 뿌리채 뽑아냈는데 그 후 응답이 왔다는 간증을 하니까 그 말을 들은 어느 사람이 자기도 문제가 있는데 산에 가서 소나무를 하나 뽑아야겠다면서 산에 올라가서 과히 어렵지 않게 뽑을 수 있는 소나무를 붙잡고 그날 밤 끙끙대다 하나 뽑고서 내려와 하는 말이 "나도 소나무를 뽑았는데 응답이 오지 않는데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믿음은 "믿습니다"하고 고성(高聲) 기도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믿음의 성취는 몇 개의 고비를 넘겨야 응답을 받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성경: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설원이라는 중국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우는 맹수지만 의심이 많아서 머뭇 머뭇하여 실천하는 일이 적은데 , 그렇다면 벌이나 반딧불이 독을 쏘는 것만 못하다"
이 말은 헛된 이론만 숭상하고 실상이 없는 것은 시원치 않는 사상과 말로 실행한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형편에 따라 잘도 인용하면서 실제 행동을 보면 한심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여우는 조그마한 벌 한 마리 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오늘도 행함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산을 옮긴 믿음
미국 알라스카의 스티브라는 청년이 처음 교회에 나갔다. 그날 목사는 마태복음 17장 20절의 말씀을 본문으로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 길 수 있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그의 집 뒷산에는 겨울이면 눈사태가 나서 골치를 앓고 있던차, 그 설교를 들은 스티브는 눈이 확 뜨였다.
그는 자기가 그런 일을 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그 믿음을 얻기 위하여 기도를 시작했다. 이 소식이 설교를 한 그 목사의 귀에 들어갔다.
목사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서 설교는 했으나 아직까지 산을 옮겼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스티브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요, 그리고는 낙심할 것이 뻔한 일이므로 그 목사는 그의 뒷처리를 좀 잘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스티브의 기도는 열흘이 가도 스므날이 가도 후퇴하지 않았다.
목사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40일째 되던 날 스티브는 벙글벙글 웃으며 목사실로 들어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20세기는 산을 번쩍 들어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기계로 옮기시더군요"라고 하고는 새로 생긴 고속도로에 흙이 필요하다고 하며 큰 트럭들이 와서 그 흙을 계속 실어간 산이 거의 다 없어져 가는 것을 보고 왔다고 했다.


믿음의 선언
1812년 3월 12일, 인도의 세람포르에서 화제가 발생했다. 윌리
암 케리와 그의 동료들이 수 년에 걸쳐 갖은 고생을 감수하여
번역한 책들이 삽시간에 연기 속에 사라져 버렸다. 성경 번역을
위한 원고들의 손실은 막대한 것이었다. 새로 주조된 타이프와
중국 금속타자기가 전손(전손)되었다. 애를 써서 편집한 원고,
문법책, 사전들이 사라져 버렸다. 이 때의 손실에 대해 케리는
이렇게 썼다. `인쇄기 외에는 아무것도 건져 내지 못했다. 이것
은 너무 큰 타격이어서 앞으로 오랫동안 성경을 인쇄하지 못하
게 될 것이다. 12개월 동안 열심히 일한다 해도 회복되기는 어
려울 것이다. 재산, 원고 등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상황
은 쉽게 극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원고의 손실
에는 거의 모든 인도 성경과 카나레스 신약 성경과 산스크리트
어로 번역한 2권의 구약 성경과 많은 페이지의 벵갈어 사전과
테루구 문법책 전부와 푼자비 대부분과 산스크리어트어 고급사
전 전부와 그의 언어 사업의 걸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그의 동역자들에게는 믿음의 선언이 뒤따랐다. `틀림없이
하나님께서는 이 좋지 않은 일을 통해서 우리의 이익을 증진시
키실 것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났다.
`그 재해는 영국 그리스도인들의 귀를 열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들은 그 사업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를 보았다. 그리
고 그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이와 같이 파멸은 선교열에 불타
는 친구들을 증가시키는 횃불인 것이 입증되었다.`


소망과 믿음의 승리
약 100년 전 애굽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곷병이 하나 있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사람의 실수로 떨어뜨려 깼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쭈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다. 전문가들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 새파란 싹이 돋아났다. 3천년간 침묵을 지킨 생명이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는 분명히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은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이뤄지고 만다.
그러기에 세계 제 2차대던째 독일 콜론의 지하실에는 "나는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을 때도 그 태양을 믿으며,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그를 믿는다"라고 쓴 글이 있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어떤 전쟁 포로가 장차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글일 것이다.


두려움의 안경과 믿음의 안경
중세기 종교개혁가 루터의 이야기다. 그의 학창시절에 독일 고학생들은 노래를 잘하면 남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아 학비를 마련하곤 했다. 물론 노래가 너무 엉망일 경우나 창문 안 주인의 성품이 곱지 못하면 무안을 당하고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한번은 루터가 어느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척 열고 바라보더니 냅다 뛰어나오는 것이었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자기 노랫소리가 듣기 싫어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나이는 계속 쫓아왔다. 결국 발이 빠르지 못한 루터는 붙잡혔는데,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돈 뭉치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루터에게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자선가였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길, '나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않다.' 라는 열등의식 속에서 노래를 하다 보니 그 사나이가 뛰어나오는 것도 자기를 해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루터는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갈아 끼면 세상이 다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고 했다.
사실이다. 환경도 중요하지만 그 환경을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고, 그 해석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진다.
미국의 한 신발회사에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두 명의 사원을 시장조사차 보냈다. 그때 한 사원은 보고하기를 "이곳은 모든 사람이 신발을 신지 않으므로 판매 불가능" 하다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다른 한 사원은 "이곳은 아직 아무도 신을 신지 않았으므로 판매가능 무진장"이라는 보고를 띄웠다. 전자의 불가능 사원은 평생을 말단 사원으로 마쳤지만, 후자의 무진장 사원은 그 신발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이것은 능력의 차이라기보다는 가치관의 차이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어떤회사에서 물만 부으면 되는 케익용 가루를 시판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측에서는 그 제품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기대 이하로 그 제품의 인기도는 너무나 저조했습니다. 이에 고심을 하기 시작한 회사측은 수많은 여론조사 끝에 드디어 그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케익을 만드는 방법이 너무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측에서는 부랴부랴 제품의 내용물을 바꾸어 물과 계란을 넣으면 되는 케익용 가루를 만들어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구원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건 너무 쉬우므로 그것에 선행을 곁들여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저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주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믿음의 모본
성경: 엡6:4 * 찬송: 305장, 492장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어느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그 근처에 사는 교인댁 한 곳이 생각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 댁을 심방하고 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목사님의 방문을 받으니 심방 받는 집에서는 반갑게 목사님을 맞이했습니다.
목사님은 자리에 앉아 말했습니다.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어서 한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성경책을 좀 가져오십시오" 그때에 그 교인은 생각했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 가정이 예수님을 얼마나 잘 믿고 있는지 목사님께 보여 드려야지.' 그래서 아이를 불러 말했습니다. "얘, 너 안방에 가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책을 가져다주겠니?" 목사님 들으시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꼬마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들고 나오는 책은 성경이 아니라 백화점 물품 구입 목록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그 가정의 신앙정도는 그 가정의 어린아이 말과 행동에서 밝혀집니다. 자녀교육의 첫 번째 법칙은 가르치는 교훈이나 개념보다는 본보기에 훨씬 많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됨됨이가 그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우세합니다. 자녀들은 아주 작은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정보원"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가르쳐야 됩니다.
자녀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원하시면 기도하는 모본을 보이고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싶으시면 부모가 먼저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부모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처럼 자녀에게 아름다운 가르침은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로서의 나의 모습이 자녀에게 과연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 돌아보고 믿음의 모본을 보입시다. 자식은 부모의 행위를 그대로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신6:1-9)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이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믿음의 분량대로 섬김
본문: 로마서 12:1∼8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절)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교회)이 있습니다. 100년전만 해도 세계 최대의 교회, 최고수준의 회중, 최고의 건물, 몇 세기에 한번 날까 말까하는 설교자를 갖추었던 그 교회가 1세기도 가기 전에 얼마나 초라하게 몰락했는지 모릅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까요? 런던도 바뀌고 사람들도 바뀌었지만 교회만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변화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또한 이 변화는 삶이 뒤따르는 변화입니다. 인격과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마음에 인격적으로 모신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고전3:16)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변화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변화입니다. 생활이 따라주는 인격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지도 않은 채 무엇을 하려고 하는 데에 교회의 교회됨을 상실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나 어떤 신앙인은 직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직분이란 하나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지 그 직분이 계급의식을 갖거나 차별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할 것들 하나가 바로 계급입니다. 교회는 계급사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서로 섬기는 곳이요,서로 높여주는 곳이요, 서로 세워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정신과 그릇됨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가 무엇입니까? 다양성이 인정되는 교회를 말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섬기는 분들이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첫째,타성에 빠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야 합니다. 옛것을 우려먹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둘째, 내가 섬기는 교회에 희망과 환희 그리고 영적인 감동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늘 처음 만났던 그 감격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셋째, 겉늙음으로 인하여 안일과 자기 만족에 도취되지 않는 것입니다.
잔칫집에서 잔치를 벌이다 보면 접시 하나 깨지고 밥그릇하나 깨지는 것은 보통입니다. 그것을 깨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이 잔치가 아니라 그릇이 깨져도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잔칫집입니다. 정말 신실하게 섬긴 이는 실수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밤잠 못 자고 애태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수가 유익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에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듣고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언제나 하나님을 찾고 부를 수 있다면 돌파구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 기도: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저에게 주신 사명을 성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섬기게 하옵소서 아무도 모르는 자리라 해도 감사함으로써 섬기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력인가 믿음인가
어느 날 화이트 부인에게 한 손님이 찾아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중에 화이트 부인은 “저는 확실히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화이트 부인이 구원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손님은 “부인은 화이트 부인이 되려고 노력하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녀는 “아니요, 제가 화이트 부인인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이나 화이트씨의 부인이셨습니까?”라고 손님이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손에 있는 결혼 반지를 만지며 “이 반지를 끼었을 때부터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손님은 구원도 그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노력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손해보며 사는 것 입니다.
미국의 선교사 중에
제임스 엘리어트라고 하는 선교사가 있었다.
그분은 학교를 졸업하고 뜻을 같이 하는 네 명의 친구와 함께 남미 에콰도르 인디안 부족이 사는 마을로 선교를 위하여 떠나게 된다. 그러나 저들은 그곳에서 선교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창을 든 인디안들의 공격을 받아 현장에서 모두 순교 하고 말았다.그런데 선교사들은 정글의 맹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 하기 위하여 허리에 총을 차고 다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인디안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 총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창에 맞아 순교의 피를 흘렸다. 만일 저들이 정당방위였다고는 하지만
'자기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총을 꺼내어 인디안들을 죽였다' 라고 하면 그곳에 선교의 뿌리는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저들은 그것을 생각하고 총이 있었지만 총을 쓰지 않고 창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1950년대초에 있었던 이 사건은 미국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 기독교 잡지사 기자가 그 엘리어트 선교사 부인에게 찾아가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분노하며
선교사 부인을 위로하기 시작 햇다.
그때, 선교사의 부인은 그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을 한다.
"말씀을 삼가하여 주십시요. 비극이라니요.
제 남편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그곳에 갔습니다."
그리고 엘리어트 부인은 남편이 대학 다닐때에 썼던 큐티 노트 한 부분을 공개했다. 그 글은 미국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었다.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결국 붙들고 있을수 없는 그것을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을 위하여 바칠수 있는 사람이 있다.
날 구원 하신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내 삶을 결산하기 위해 이 부족한 모습 그대로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나를 부르신 소명 앞에 부족한 대로 최선을 다하겠다. 놓쳐서는 안될 그것을 위하여 결코 끝까지 붙들고 있을수 없는 그것을 바치겠다. 젊음은 지나가는 것이다.
명성도 자기만족과 쾌락도 그리고 물질도 결국은 붙들고 있을수가 없다. 그리고 버리고 포기하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오! 하나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태워 주소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6·25 때 아이젠하워 장군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부산의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묘소를 참배할 계획이었다. 미군 당국은 당황했다. 말이 묘소이지 황량한 벌판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늦겨울이어서 잔디를 구할 수도 없었다. 그 당시 현대상사의 정주영 사장이 그 소식을 듣고는 미8군 당국자를 찾아가 자신이 묘지에 풀이 나게 할 테니까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급한 나머지 그에게 실비의 3배를 주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했다.
그 길로 정주영 사장은 그 주위의 보리밭을 모두 사들였다. 때마침 보리싹이 새파랗게 솟아오르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파내어 묘지를 입혔다. 예정한 날 아이젠하워 장군은 유엔군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갔다. 묘지마다 새파란 싹이 덮여 있었으니까 보기에는 좋았을 것이다.그러나 사흘 뒤 묘지는 누렇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보리에 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결국은 그 영혼이 메말라 버릴 수밖에 없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자.


마음으로 믿는 믿음- 순종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하신 일을 믿는다는 것은 머리와 마음으로 그리고 삶 전체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것과 그의 전기에 나오는 모든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를 믿거나 의지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은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을 포함합니다.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당신이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거하기 위해 그분을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당신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용납될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하여 해주신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구원해달라고 그분께 기도로 부르짖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10:13). 당신이 부르짖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는 마음 때문이라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리스도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순종하고자 하는 새로운 태도가 없다면, 그는 구원받을 만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믿음과 순종
본문: 여호수아1:1-9
위대한 선교사 리빙스턴이 16년동안 아프리카에서 험한 세월을 보내고 자깐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는 27번째로 열병을 앓아 몸이 몹시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또한 사자에게 물린 한쪽 팔은 힘없이 몸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글래스고 대학생들 앞에서 설교하면서 감동적인 간증을 했습니다.
"힘이 들고 고독한 선교사 생활 가운데서 저를 지탱해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었습니다."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간 그는 몇 년 후 치덤보라는 작은 마을에 임시로 마련된 오두막에서 새벽 4시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듯한 자세로 주님이 기다리시는 영광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임마누엘의 약속을 지켜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면서 그가 그처럼 영웅적인 삶을 살며 사역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임마누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으면 그 믿음 자체가 엄청난 생의 에너지를 갖게 합니다.


소망과 믿음의 승리
약 100년 전 애굽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곷병이 하나 있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사람의 실수로 떨어뜨려 깼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쭈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다. 전문가들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 새파란 싹이 돋아났다. 3천년간 침묵을 지킨 생명이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는 분명히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은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이뤄지고 만다.
그러기에 세계 제 2차대던째 독일 콜론의 지하실에는 "나는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을 때도 그 태양을 믿으며,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그를 믿는다"라고 쓴 글이 있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어떤 전쟁 포로가 장차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글일 것이다.


 믿음의 삶으로 부르신다
지난 몇 년간 나는 그네 타기 곡예를 즐겨 보았다. 당시 89세이시던 아버지가 이곳(데이브레이크)에 방문하시면서부터 나는 서커스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난 서커스 구경을 가기로 결정했고, 그날 저녁 우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그네 타기 곡예사 다섯 명이 진행하는 서커스를 보았다. 세 명은 ‘나는’ 역이었고, 두 명은 ‘잡는’ 역이었다. 한마디로 공중 무도회였다! ‘나는’ 사람들은 공중으로 치솟았다. ‘잡는’ 이의 강한 손에 붙들리기 전에는 모든 것이 아슬아슬했다.
공연 때마다 나는 곡예사들의 용기에 끊임없이 감탄한다. 곡예사들은 잡아 주는 이의 든든한 손에 자기 손이 빨려 들면서 비행이 끝나리라는 것을 믿는다. 자신이 붙잡고 있던 튼튼한 그네를 놓아야 반대편 그네까지 우아한 반원을 그리며 날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상대방이 나를 잡으려면 일단 놓아야 한다. 이렇게 기꺼이 내려놓으려는 자세로 사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최대의 도전 중 하나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명성이든 우리는 수많은 영역에서 어떻게든 움켜쥐려 한다. 내게 필요한 것을 내 손으로 움켜쥐어야 한다는 신념은 인간이 고난을 겪는 커다란 원천 중 하나다. 그러나 소유와 계획과 사람을 내려놓으면, 비록 모험이 따를지라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자유의 삶에 들어설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기꺼이 내려놓는 자세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는 또 하나의 스텝은 지금 가진 것을 움켜쥐지 않는 것이다. 안심할 수 있는 안전 지대를 확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나 다른 이의 삶을 스스로 안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따르고 싶고 사랑하는 하나님께 다 내어 드리는 것이다.


소망과 믿음의 승리
약 100년 전 애굽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꽃병이 하나 있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사람의 실수로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쯔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다. 전문가들 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 새파란 싹이 돋아났다. 3천년간 묵을 지킨 생명이 집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는 분명히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은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이뤄지고 만다. 그러기에 세계 제 2차대전 때 독일 콜론의 지하실에는 `나는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을 때도 그 태양을 믿으며,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그를 믿는다.`라고 쓴 글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버리지 않고 인내하고 기다리면 하나님은 이뤄주실 것이다. 히뉴원굴 기자는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며 휘장안에 들어간다`(히6:19)고 하였다.


믿음의사랑
리챠드 범브랜드 목사가 약 30명의 크리스챤들과 함께 루마니아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김옥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감옥 속으로 밀 쳐 던져졌는데,침침한 감방 속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가 알아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감방 속의 모든 크리스챤들은 곧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던 비밀경찰의 대위였다. 그가 왜 감옥에 들어 왔는지 너무나 의아해 하는 크리스챤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에,열 두 살 된 소년이 자기를 면회 왔다고 하여 사무실로 들여 보내라고 했다. 수줍어하며 자기의 사무실에 들어 오는 소년의 품에는 아름다운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져 있었다.
소년은 입을 열어서 말했다.`대위님,당신이 우리 엄마와 아빠를 체포해 가신 분이에요. 오늘은 우리 엄마의 생일이예요. 나는 엄마의 생일이면 꼭 꽃다발을 사서 엄마에게 선물하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 왔어요. 그런데 금년에는 당신이 우리 부모님을 체포해 갔기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꽃을 선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나에게 늘 가르쳐 주시기를,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나에게는 지금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이 꽃으로 대위님의 애기들의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서 가지고 왔어요. 이 꽃다발을 대위님 부인에게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대위는 그 소년의 꽃다발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소년을 부둥켜 안고 눈물로 울었다고 한다.
그 후로 그의 마음에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가 왔고 남은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사랑
믿음과 기도는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바퀴처럼 서로 의존적이다. 따라서 믿음과 기도의 밀도와 열도는 항상 정비례한다. 믿음이 식어지면 기도도 식고 기도가 뜨거우면 믿음도 뜨겁다. 또한 믿음과 기도는 근육과 같아서 쓰면 쓸수록 강해지나 쓰지 않으면 무위해진다.
한편 믿음과 기도는 성도의 생산과 창조의 도구이기도 하다. 믿음과 기도의 펌프로 지하의 무진장한 하나님의 유전에서 능력과 지혜를 퍼내야 하겠다.
재정도 퍼내고 사랑도 퍼내자. 두가지 개념을 주목하라. 1.명령과 2.약속이다. 성서는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약속이 있다.(요일 5:14)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 뜻 행할 것을 기도하면 반드시 주신다는 믿음으로 사랑의 생산자가 되자.


믿음 속의 사랑
스위스의 어느 심리 학자가 많은 임상 케이스를 기록한 가운데 30여 세가 되도록 사람을 전혀 믿을 수 없고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고아 출신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의심을 가지고 대합니다. 그 말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너무나 심한 천대와 학대와 사기를 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그 부인의 고민은 자기가 사랑한다는 진정을 남편이 믿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3-4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자기의 진실과 사랑을 그의 마음속에 깨우쳐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과 자기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선 사람을 믿지 아니하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둘에다 둘을 더하면 넷이라는 자명의 진리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무한하시고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하여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적인 인식입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2)


 믿음
믿음은 두 가지 요소,
 즉 믿는 것과 신뢰하는 것으로 이루져 있습니다.
 당신은 은행이 당신을 위해 당신의 돈을 보관할 수 있다고 믿지만 당신의 돈을 은행에 맡길 때까지는 은행에 대한 믿음을 행사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기차가 당신을 어떤 곳에 태워다 줄 수 있다고 믿지만 당신이 기차를 타고 그것이 당신을 목적지에 데려다 줄 것을 신뢰할 때에만 기차에 대한 믿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그의 모든 전투 때마다 그를 따라다닌 좋은 의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의사를 질투한 어떤 사람이 그를 없애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의사가 어느 날 아침 알렉산더 대왕의 컵에 독약을 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 의사를 당장 처형시킬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 식사 때 알렉산더 대왕은 그 편지를 모인 사람들에게 읽어 주고 자기가 의사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컵을 집어 그 안에 든 것을 마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를 믿고 그 의사를 신뢰하였습니다.
 복음은 그처럼 단순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관해서 말하는 모든 것을 믿는 사람은 그의 영혼과 영원한 행복을 걸고 예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믿음
 캐나다에 '성(聖) 앤"이라는 아일랜드의 성자가 살았습니다. 소녀였을 때, 그녀는 대단히 잔인한 주인 부부 아래에서 매우 빈약한 급료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소녀에게 일 마일이나 떨어진 가파른 언덕에서 물을 길어오게 했습니다. 한때는 근방에 샘이 있었으며 지금은 메말랐으나 여러 해 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녀는 아주 피곤해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읽었습니다. “내가 골짜기 가운데 샘들을, 솟게 하리라. 마른 땅에서 물이 솟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소송을 일으키라.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이 말씀은 앤을 감동시켰으며 그녀는 주님 앞에 탄원을 했습니다. 물이 그들에게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가파른 언덕을 물을 지고 나르는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고된지를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리고는 누워서 잠들었습니다. 그녀는 마음의 기도를 탄원했고 그녀의 확실한 증거를 보였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녀가 물통을 가지고 샘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그녀는“샘에 물 길러갑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그건 말랐는데”라고 그 사람이 놀라서 대꾸했습니다. 그러나 앤은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를 믿었는지 누구에게 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샘 속에는 팔십 삼 피트나 되는 깊고 맑은 찬 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탄원을 하십시오. 확실한 증거를 보이십시오.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역사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믿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무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는 의식을 주는 마귀의 미소 루이스는 유명한 [악마의 편지]라는 책을 통해서 마음밭 비유를 가장 탁월하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영국의 노신사가 어느 날 대영제국의 도서실을 찾아갑니다. 그 노신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실에 들르는 그의 습관적인 태도로 그날도 도서관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가지 책 중에서 손에 쥐어진 책이 신앙에 관한 책이었고, 이 책을 읽어 보다가 노신사의 마음 속에는 갑자기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분은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노신사에게 그 순간 악마가 찾아옵니다. 악마는 그의 마음 속에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점심 시간이야, 뭘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그는 잠시 전 마음 속에서 생각하려고 했던 하나님에 관한 의식을 누르고 식탁으로 갑니다.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가?” 이 때에 악마는 그 마음 속에 다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악마에게 감동을 받은 노신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프게 생각을 하나. 우선 식사를 끝내고 보자.” 식사를 끝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노신사는 사단의 역사를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오늘은 너무 바빠.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아.”
 그는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탑니다. 버스 좌석에 앉자 신문을 읽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루이스는 이런 인상 깊은 그림을 그립니다. 마치 자신에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버스를 타고 가는 이 노신사 뒤에서 악마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고 말합니다.
 
믿음과 두려움
 시 56:3; 사 12:2; 눅 8:50; 막 5:36
  한 스코틀랜드인 신자가 친구에게 말했다.
 "여보게, 나는 오늘 읽은 말씀 중에서 아주 훌륭한 교훈을 발견했다네.""오, 그래? 그럼 내게도 그것을 들려주게."
 "그래, 읽어 주지."
 말을 건넨 친구는 의기양양하게 그가 발견한 성구를 읽기 시작했다.
 "그 말씀은 바로 시편 56:3이라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도 동의하면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참 훌륭한 말씀이군 . 그런데 말야, 나도 오늘 아주 훌륭한 교훈을 발견했지. 자네가 발견한 것보다도 더 훌륭한 의미가 있는 말씀이라네. 자, 이사야 12:2을 보게나. 그 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네.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자, 어떤가?" (MOODY MONTHLY)
 
 믿음과 순종
 심상 15:22; 딛 1:6; 롬 1:5; 느 9:34
 멕시코에 있는 쿠이케텍 인디언과 체르탈 인디언의 방언에는 `믿는다'라는 말과 `순종한다'라는 말을 구분하지 않는다. 한 단어에 두 의미가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안 초기 선교사들은 미개한 인종의 언어라서 언어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언어는 불완전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그들은 두 단어를 구별하려는 문명인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사실 그들 언어의 불완전성은 문명인들에게 깊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두 말이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믿으면 순종하게 되지 않습니까? 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만문한다. 그들의 생각은 옳다. 오히려 문명인들이 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뻔뻔스러운 존재, 즉 외식자(외식자)로 우리 자신을 만들고 있다. 오히려 쿠이케텍 인디언과 체르탈 인디언이 비록 미개한 민족이라 하더라도 문명인들보다 진리에더 접근해 있다. 적어도 그들은 문명인들이 빠져 있는 종교적 자가분열증에는 걸려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문명인들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불열신앙은 갖지 않은 것이다.
 
 믿음과 의심
  어느 교회 사모님이 몸이 허약해서 늘 근심이었다. 병원에 검진을 하고 의사의 진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인 목사인들 편할 리가 있겠는가?
 말씀보고 기도하고 안정 부절 못했다. 불안해하는 아내에게 하나님 말씀에 두려하지 말라 주께서 붙들어 주신다고 전해 주었다. 그러나 당사자는 불안을 감출길 없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 다음날 결과를 알아보려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의사가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상입니다."그러자 사모의 얼굴에 화기가 돌고 얼굴이 밝아 졌다. 다음주 설교 시간에 남편이 강단에서 사람이 의사의 과학적인 토대로 한 말에 대해서는 금방 쉽게 받아 드려진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 기도한 목사의 말, 아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더디 믿는다고 꼬집었다. 그렇다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연약하다. 목사도 기도하지 않고 말씀 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그날 진단을 하던 날 사모님이 먼저 병원에 가고 목사님이 병원에 뒤 따라 갔는데 시간이 남고 해서 혈압을 쟀는데 평상시 혈압보다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목사가 말로는 하나님께서 붙드신다고 아내에게 위로했지만 목사 역시 불안했던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믿음이 강한 것이 아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치다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주시리라."...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
 
 믿음앞에 능치 않음은 없다
링컨은 게티스버그의 결정적인 전투전야에 매우 침착했고 자신에 차 있엇다.
 그의 이런 모습은 장교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었다.
 "국가의 장래가 불투명한 기로의 시간, 어떻게 이처럼 담대하고 평온하실 수 있습니까?"
 장교들이 링컨에게 물었다. 링컨은 신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금까지 하나님께 기도하며 국가의 장래를 맡겼소. 그분은 국가가 보전되리라는 것과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내게 주셨다오."

 믿음에는 노력이 포함되지 않는다
 행 27:25; 요 20:27; 막 16:14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너력하는 것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오늘 일어난 일을 내게 말햇다고 하자. 나는 그를 향하여 "나는 당신이 말한 것을 믿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진실하다고 생각하면 그의 말 역시 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그를 성실치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믿는다는 사실 중에는 `노력한다'는 요소는 조금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다."라고 선포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거나, 혹은 믿지 않아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거나 하는 둘 중의 한쪽을 선택해야 된다.(C. H. 스퍼전)
 
 믿음으로
  1973년 2월. 그때는 버스 사역이 대단하던 시기였는데 그때 나는 버지니아 주의 린치버그에서 열린 교역자 회의에 참가했었다. 제리 포웰 목사의 버스 사역에 대한 간증을 통해 그 자리에 모인 우리 5천 명은 버스 사역에 대한 꿈을 갖도록 도전받았다. 나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존. 너는 1년이면 네가 처음 왔을 때의 교인 수만큼을 이 버스 사역을 통해 더 얻을 수 있을거다.” 당시 우리 교회 평균 교인 수는 418명이었다. 그런데 나는 버스 한 대조차도 없었다. 나는 나의 숙소로 돌아와 누우면서 말했다. “하나님. 정말로 제가 버스 사역을 하길 원하십니까.” 포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내일은 여러분에게 카드를 나눠드릴 겁니다. 여러분은 1년 내에 버스로 사역하고 싶은 신입 교인의 숫자와 여러분의 이름을 적어 제출하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앞으로 가져다가 여러분에게 읽어드릴 겁니다.” 나는 생각했다. “아냐. 말도 안돼. 온 세계에서 온 5,000명의 사람들 앞에서 이것을 발표하겠다고.” 나는 밤새 씨름했다 그 다음날 나는 그 카드를 받아들고는 418이라고 기록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는 카드를 제출 했고 그것은 5,000명 앞에서 읽혀졌다. 나는 “내 생애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연고로 나에게는 전도의 동기가 주어졌다. 포웰 목사는 우리 교회 임원회에 편지를 보내서 나의 목표를 알렸고. 나는 이 계획이 임원회에 상정되기도 전에 버스 구입을 위한 기금 마련을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년의 기한 내에. 글자 그대로 그날로부터 딱 1년 만에 우리는 버스 사역으로 438명을 얻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나가서 꿈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에게 도전이 되는 것들은 감싸안고 앞에 놓여질 난관을 그려보라. 그리고 부정적이 아닌 적극적인 태도로 대응하는 연습을 하라. 그래서 그 도전들로부터 발견하는 법을 터득하도록 하라.

 믿음으로냐, 두려움으로냐
 대하 20:20; 막 4:40; 약 1:3
  청년들이 보트를 타고 물가의 휘어져 굽은 곳을 건너자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런데 도중에서 풍랑이 심해지자 보트가 몹시 흔들렸다. 그러나 청년들은 침착하고 힘차게 노를 저음으로써 보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도리어 풍랑과 싸운 것을 통쾌하게 여기며 즐겼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 소녀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물결이 보트를 휩쓸때마다 놀라 떨며 부르짖었다.
 어쨌든 그녀도 배와 함께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단지 차이점이있다면 한편은 걱정과 공포로 여행했고, 다른 한편은 신념과 용기로 여행을 즐겼다는 것이다. (린드벅)
 
 믿음은 생명을 지켜주는 빛
 어느 날 영국의계관시인인 테니슨이 친구와 같이 후원을 거닐며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친구는 테니슨에게 물었다.
 "자네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나?"
 테니슨은 말없이 한참 걷다가 가장 아름다운 꽃앞에 와서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여보게, 나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이 꽃과 저 태양의 관계와 같다네. 이 꽃은 태양의 빛과 열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7)

 믿음은자라난다
  나는 1947년에 처음 내가 이 사역을 시작했을 때보다는 지금이 더 많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믿음 자체의 성질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947년에는 적은 믿음이었던 것일 따름입니다. 그것은 둘 다 적은 믿음이며. 단지 지금은 약간 더 커진 상태의 적은 믿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두 종류가 모두 풀어놓아지기를 기다리는. 내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성취하였을 때마다. 나는 내가 좀더 많은 믿음을 풀어놓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가 또다시 물 위를 걸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금광 탐색자가 귀한 광물을 아주 조금밖에 발견하지 못했던 것 이상으로 당신이 적은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 낙심하지 마십시오. 금탐색자는 아주 적은 금부스러기라도 나온 곳에는 그보다 더 많은 양의 금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는 그것으로 인해 계속 금을 채굴하는 것입니다. 폭풍우가 당신과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계속하여 내리칠 때.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계속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줄까요. 그것은 당신이 가진 적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아주 작고도 작은 조그만 부분입니다. 그것은 당신 안에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적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는 단지 적은 믿음을 가지고서 그처럼 엄청난 일을 했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 믿음조차도 의심과 섞여 있었던 믿음이란 사실을. 이처럼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을 받으셔서 그것으로써 이적을 행하시는 아주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격려
 윈스턴 처칠 수상은 후배들과 수행원들을 잘 격려해 주는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한 번은 자기의 후배 중 국회의원이 된 사람 하나가 국회에서 처녀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는 연설이라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읍니까. 그래서 말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처칠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쪽지를 건네주었습니다. 연설 도중에 이 사람이 메모를 받았습니다. 그 메모의 맨 밑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너는 해낼 것이다. 처칠.”
 이 격려로 그는 용기 백배하여. 연설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믿을 만한 한 사람의 격려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 만물을 손에 쥐고 계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의 삶이 형통하지 않겠읍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내 음성을 들어라.
 그리고 내 음성에 순종하라.”
 만약 이런 말씀이 나에게 들려와 내가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있다면..
 우리의 눈이 열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귀가 열려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기만 하면 인생은 황무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황무지를 가나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황무지와 계곡이 도사리고 있는 험준한 땅 속에 젖과 꿀이 흘러내리는 기적을 창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의교훈
  어린이들은 아주 작은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스미쓰씨 가정의 잭키는 사랑하는 개가 갑자기 죽어버려 몹시 슬퍼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잭키를 위로하였다. “잭키야. 네 마음이 어떨지 잘 안다. 그렇지만 이걸 기억해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다 아시고 보살피고 계신다는 걸. 성경에서 이렇게 말했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 개에 관한 일도 알고 계시지 않겠니? 잭키야. 주님께서는 어떤 목적없이는 결코 아무것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대신 더 좋은 것을 주실 때가 참 많단다.” 이틀 후 친구가 조그만 콜리종 강아지를 가져다 주었을 때, 잭키는 믿음의 교훈을 얻게 되었다. 잭키는 언제나 콜리종 개를 가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에게는 그 개를 사줄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제 잭키는 아버지가 설명해 준 바로 그대로, 주님께서 그 강아지를 자기에게 보내주신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들은 '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전쟁, 폭동, 휴전위반, 불신앙과 그외 수많은 일들은 그들에게 극심한 당황을 가져다 주게 된다. 그들은 이 모든 문제들이 어떻게 여러 시대를 거쳐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 왔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에 사로잡히게 된다. 부모가 세상의 일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에 비추어 해석해 주는 가정에서 자라난 어린이는 훨씬 더 평화로울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된다.

 믿음의 그릇
  어떤 군목이 최전방에서 군목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벌통을 쳐서 꿀을 땄습니다.
 아주 좋은 꿀을 따서 부대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광고를 하여 누구든지 빈그릇을 가지고 와서 꿀을 타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군인은 박카스 병을 가지고 와서 꿀을 받아갔고, 어떤 군인은 링게르병을 가지고 왔고, 또 어떤 이는 스페아 깡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군목은 군인들이 가지고 온 빈병에 다 꿀을 가득히 넣어 주었습니다. 박카스병은 박카스병만큼, 링게르병은 링게르병만큼, 스페아통은 스페아통만큼 꿀을 부어 주었습니다. 그후 항의 전화가 걸려오기를 공평하지 않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군목이 대답하기를 "누가 박카스병을 가지고 오라고 했소? 나는 빈 그릇을 가져 오라고 했고 그 빈그릇대로 채워 줬을 뿐이오."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기도
  중요한 수술로 어머니가 3주 동안 병원에 입원하셨던 적이 있었읍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생전 처음으로 목격했읍니다.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읍니다. "네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다. 몇 시간을 주기로 크게 위급한 상태가 반복되고 있단다. 심장의 박동이 멈춘 적도 있었다고 하더라. 의사 선생님은 네 어머니가 얼마 더 살지 못할 거라고 하는 구나.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읍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읍니다. 그 이튿날 아침, 마치 내 기분을 말해 주고 있기나 하듯,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읍니다. 나는 속으로 흐느끼며 길을 걸었읍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럴 수는 없어요. 제발 우리 엄마가 죽지 않게 해 주세요. 내게는 엄마가 있어야 돼요. 아빠에게도 엄마가 있어야 돼요. 우리는 모두 다 엄마를 필요로 해요... 나는 주님께서 엄마를 고쳐 주실는지 정말로 알고 싶어요. 엄마를 살려 주실지 제게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제발 어떻게 해서든지 제게 좀 보여 주세요. 주님!" 이렇게 나는 간절히 기도했읍니다. 이렇게 기도해 놓고서 나는 난처해졌읍니다. 어떤 방법으로 보여 달라고 한다지? 하는 머리 위에 시커멓게 몰려 있는 구름을 쳐다보면서 얼결에 "주님, 엄마를 낫게 해주실 것이라면 지금 저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도록 해주세요"라고 말했읍니다. 거의 순간적으로, 구름이 갈라지면서 햇빛이 쏟아져 내렸읍니다. 곧이어 틈은 다시 메꿔져 버렸읍니다. 그렇지만 나는 알았읍니다. 사흘 후 우리 형제들이 거실의 낡은 청색 카펫트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읍니다. 아빠의 기뻐하시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 왔읍니다. "위험한 순간은 지나갔다. 엄마는 곧 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내가 어찌 의심할 수 있었겠읍니까?

믿음의 기도
 어떤 가련한 과부는 많은 액수의 요금 청구서를 받아들고 큰 낙담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녀가 요금을 이미 다 치뤘는데도 청구서가 다시 날아왔던 것입니다. 그녀는 이미 치룬 영수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요금을 다시 지불해야 되지 않을까 두려워 했습니다. 그녀가 가진 돈은 자기 남편의 장례비로 거의 다 써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영수증을 찾게 해달라고 주님께 특별히 기도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수금원이 그 과부의 집을 방문하여. 만일 그녀가 며칠 안으로 요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법정에 고소하겠다고 윽박질렀습니다. 바로 그 때 나비 한 마리가 열린 창문으로 날아 들어왔습니다. 이걸 본 그녀의 어린 아들은 그것을 잡아 학습 과제물에 보탤 욕심으로 그것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이 그것을 잡으려 하자 나비는 소파의 등 위에 내려 앉았다가 그 뒤로 기어들어가 버렸습니다. 소년은 그 무거운 가구를 혼자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수금원에게 자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이 가구를 밀어제끼자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것을 집어든 과부의 눈은 기쁨과 흥분으로 동그랗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영수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간절한 믿음의 기도를 존귀케 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의 깊이
 블론딘이라는 유명한 곡예사가 세계 최대의 폭포인 나이애가라에 쇠줄을 매달고 그 줄위를 자전거로 건너가는 묘기를 선보였다. 수천명의 관중들은 환호했다. 블론딘은 "이번에는 아이를 업고 줄을 타겠소. 내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관중들은 "할 수 있소"라고 외쳤다.
 그러나 블론딘이 "여러분의 자녀중 일곱살 미만의 아이를 올려보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관중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인생을 맡기라"고 하면 침묵하는 것이 현대인의 나약한 모습이다.

믿음의 나락
  코끼리를 산채로 잡는 사냥법입니다. 먼저 코끼리를 정글로부터 유인하여 미리 만들어 놓은 우리에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코끼리의 발목에 든든한 쇠사슬을 매어 놓고 한 끝은 튼튼하고 굵은 나무기둥에 묶어 놓습니다. 그후 우리를 치우면 야생의 코끼리는 정글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러나 발목에 묶인 쇠사슬 때문에 몇발작 걷다가는 저지를 당합니다. 처음에 코끼리는 쇠사슬로부터 놓여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있는 힘을 다 동원해 보지만 계속 실패를 하게 되고 결국엔 체념하며 비록 코끼리가 끊고 도망갈 수 있을 정도의 기둥과 줄에 묶어놔도 조금만 줄이 팽팽해지면 힘쓰기를 포기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대로 줄을 잡아당겨 코끼리를 훈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체념은 소망을 포기하는 행동이며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입니다. 처음의 고통이나 고난이 비록 견디기 어려울지라도 믿음과 소망을 갖고 기다리며 노력하면 결국에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모본
  저는 “아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간첩”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귀찮은 손님이 찾아와서 “주인 양반 계십니까?”하고 묻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아침에 일찍 나가셨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광경을 아이가 봤습니다. 그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어, 저럴 때 저렇게 거짓말을 하시는구나.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데도 안 계시다고 하는구나. 거짓말을 해도 되는구나.' 그래서 거짓말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전화로 옆집 부인 흉을 봅니다. “우리 옆집 새댁은 어른을 봐도 인사는 커녕 본 척도 안해요.” 아이가 옆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그 말을 들었습니다. '아, 전화로는 저렇게 남을 흉보는 것이구나.' 부모의 사소한 행동을 모두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에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려주면 아이는 '아니 어떻게 된 일이지? 아빠, 엄마는 안 그러시면서 흉보는 것이 사랑하는 건가 뭐'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들이 자녀 앞에서 위선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저 아무 소리 안 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모른다고 생각되겠지만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아이들은 똑똑합니다. 아주 작은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 때 첫째는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가르쳐야 됩니다. 아이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원하시면 기도하는 모본을 보이십시오.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싶으시면 당신이 먼저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많은 아버지들은 “교회 가서 손해볼 것 없으니까 애들이나 데리고 가. 나는 안갈래”합니다. 그것이 무슨 본입니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본을 보임으로써 가르쳐야 됩니다.

믿음의 모험
  얼마 전 워싱톤에 있는 조폐공사에 한 관광팀이 도착하여 녹인 주물을 동전의 모형에 부어넣는 과정을 견학하였다. 직
 공은 한 남자에게 이렇게 제의하였다. "선생님, 당신이 손을 물에 대고 있으면 제가 이 주물을 붓겠읍니다. 그래도 손
 이 화상을 안입게 되지요. 한 번 시험해 보실까요?" 그랬더니 "천만예요, 그러나 당신 말은 그대로 믿겠읍니다"라고 그
 남자는 대답하였다. 그 때 그의 아내가 왔으므로 직공은 그녀에게 같은 제의를 했다. "네, 좋아요"라고 그녀는 선뜻 동의하였다. 실험이 안전하게 끝나자 그 직공은 남편되는 사람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저를 믿는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사모님은 저를 신뢰하셨답니다." 아내는 직공의 말과 기술을 믿고 대담하게 모험을 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모든 것을 걸었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믿음은 어디로 인도되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희생제물로 준비했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이삭을 원하시며 '어떻게'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이루실 것인지를 몰랐다. 모험적인 그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신실한 자의 아비가 되게 하였다.

 믿음의 비교
  5월달에 우리 나라에 들어온 둘로스라고 하는 선교선이 있습니다. 350명의 선교사들을 태우고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선교를 하는 배입니다. 작년 8월10일 토요일에 텝리핀 잠보앙가라고 하는 곳에 선교사들이 내려서 전도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회교도인 젊은이가 나타나서 수류탄을 던져서 선교사 두 명이 즉사하고 32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은 선교사는 스웨덴 출신인 18세의 소피아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19세의 카렌이란 아가씨인데 뉴질랜드에서 왔습니다. 꽃다운 젊은이들이 죽은 것입니다. 자기 자녀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들은 배에다 전보를 쳤습니다. 뭐라고 쳤는지 아쁠니까? “우리는 이 비참한 일에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 내용을 직접 읽었습니다. 부모님들이 어떻게 이처럼 대범할 수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교한 것입니다. 자기 딸이 죽은 것하고 장차 주님께서 약속한 영광하고 비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딸이 피지 못하고 꺾였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당한 것이니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비교를 한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딸을 잃은 슬픔을 가누기 어려웠겠지만 이 슬픔은 장차 주님께서 나타나실때 주실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더 복음을 열심히 전하시오”하고 격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선물
주여 제게 믿음을 주소서
매일 매일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평온한 마음을 주시고
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손을 붙잡아 주소서
모든 것 가운데서
당신을 찾을 수 있는 고요한 마음을 주소서
주께서 원하시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순전한 영혼을 주소서
미래는 주께서 주신 선물
주의 사랑을 믿기에
두려움 없이 그 앞으로 나아갑니다
-영국 시인 J.옥스남의 '믿음'-


믿음의 연단
  뮬러의 기도로 운영하는 사업이 외관상으로 화려한 것 같으나 실은 믿음의 연단 속에서 맺어진 결실이었다. 어떤 때는 육 년을 연달아 극한 믿음의 시련을 견뎌야만 했다. 한 번은 아이들에게 아침끼니를 이어주어야겠는데 양식이 떨어져 버렸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굶는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뮬러는 아이들 전부를 빈 식탁 둘레에다 않혀놓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오늘도 아침 식사를 주시니 감사 합니다. 아멘."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으나 식탁 위엔 빵조각 하나 얹혀져 있지 않았다. 그 때였다. 대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힘겹게 들어서는 사람은 빵이며 고기를 잔뜩 바구니에 담아가지고 가까스로 들어오는 이웃 음식점 사람이었다. "어젯밤까지 손님을 다 치르고도 남은 것들을 주체할 데가 없어 고아원으로 끌고 온 것이다"고 했다. "믿음을 강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믿음의 연단뿐이다."는 것은 뮬러가 늘 즐겨 쓰는 말이었다. 믿음의 연단이 아니고는 참 믿음, 거짓 믿음을 분간할 수 없다. 믿음이 참 믿음으로 나타나기는 연단을 통해서 뿐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을 연단 하신다. 연단 뒤에 오는 축복은 너무나 광명스럽고 놀라워서 말을 못 한다.

믿음의 열매
 1955년 미국에서 흑인가수로는 처음 메트로폴리탄에 출연, 영감있는 노래로 관중을 사로잡은 여가수가 있었다.
 마리아 앤더슨. 그녀의 대표적인 곡은 '그 누가 나의 괴로움 알며'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인종과 피부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불행한 날을 보냈다. 그러나 기독신앙은 모든 고난을 이기고 더욱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게 했다.
 "내 괴로움을 아무도 모르나 오직 주님은 아신다."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하며 현실을 극복했다. 주님이 내 괴로움을 아신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믿음의 열매
 1811년 영국의 바드게이트라는 한 지방, 조그만 빵집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주위 사람들은 이 소년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19세기 사람들로부터 '위대한 의학자'라는 칭송을 받은 인물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심프슨.
 현대의학의 시금석이 된 마취제를 발견한 주인공이다.
 그는 앞날을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힘든 현실을 극복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그와 함께하신 것이다.

믿음의 위력
 오래 전 평안북도 정주에 살던 가난한 농부가 열병을 앓앗다. 이웃에 살던 크리스천이 이 사람에게 신앙을 가지라며 전도했다.
 '나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며 완강히 거부했던 농부는 나중에 외국인 선교사의 방문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날 이 농부의 열병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진짜 '유익한 일'이 후세에 나타났다.
 이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복음 안에서 성장, 1946년 지금의 연세대 초대 총장이 된 것이다. 백낙준 박사 이야기다.

믿음의 응답
 두려움이 많은 세상이다. 불행이나 고통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불쑥 우리에게 찾아와 삶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나 「영원한 약속」인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편55:22).외국에서는 이런 글귀가 적힌 액자를 현관 입구에 걸어놓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불안이 노크할 때 믿음으로 응답하며 나아가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믿음의잔
  믿음은 두 가지 요소, 즉 믿는 것과 신뢰하는 것으로 이루져 있습니다. 당신은 은행이 당신을 위해 당신의 돈을 보관할 수 있다고 믿지만 당신의 돈을 은행에 맡길 때까지는 은행에 대한 믿음을 행사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기차가 당신을 어떤 곳에 태워다 줄 수 있다고 믿지만 당신이 기차를 타고 그것이 당신을 목적지에 데려다 줄 것을 신뢰할 때에만 기차에 대한 믿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그의 모든 전투 때마다. 그를 따라다닌 좋은 의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의사를 질투한 어떤 사람이 그를 없애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의사가 어느 날 아침 알렉산더 대왕의 컵에 독약을 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 의사를 당장 처형시킬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 식사 때 알렉산더 대왕은 그 편지를 모인 사람들에게 읽어 주고 자기가 의사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컵을 집어 그 안에 든 것을 마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를 믿고 그 의사를 신뢰하였습니다. 복음은 그처럼 단순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관해서 말하는 모든 것을 믿는 사람은 그의 영혼과 영원한 행복을 걸고 예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믿음의 전도는 영원하다
 스펄전(1834-1892)은 널리 알려진 영국의 대중전도자.
 어느 날 스펄전이 택시를 탔을 때 기사가 "손님. 아주 오래 전에 손님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 기억하지 못해 미안하군요."
 스펄전의 말에 기사는 주머니에서 빛바랜 신약성경을 꺼내며 정중히 말했다.
 "10여년 전이었으니 기억하시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요. 그때 손님께서 이 조그마한 성경을 주시며 읽어보라고 하셨지요. 저는 이 성경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다시 태어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축복
 이스라엘 우화.
 창조주께서 처음 새들에게 날개를 주셨을 때 새들은 그것이 '창공을 나는 특혜'인 줄 모르고 "뭐 이런 것을 달아주셔서 다니기 불편하게 만드셨습니까?"라고 불평했다.
 "그것은 날개다. 힘껏 펼쳐 보아라."
 창조주께서 말씀하셨지만 새들은 불평만 하고 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용감한 독수리가 높은 곳에 올라가 힘껏 날개를 펼쳤다.
 이렇게 최초의 비상은 섭리에 따른 믿음에서 이루어졌다. '고통의 짐'을 '은혜의 날개'로 믿고 감사하는 사람이 복을 얻는다.


믿음의 행보
  한 세균학 검사실에서 3백여 종류의 우유 견본 검사 의뢰가 들어왔는데 조수가 교수에게 일이 벅차겠다고 걱정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한 번에 하나씩만 하면 벅차지 않아”라고 말했다. 이 평범한 말 가운데서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산더미 같은 일생의 과제를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하다가 부담이 되어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하고 해보면 쉽게 풀리는 것을 기억하고 꾸준히 끝까지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오게 된다. 하루 한 시간씩 집중적으로 성경을 일생 동안 공부하면 신학자가 될 수 있고 하루에 한 사람 전도하면 최대의 전도자가 될 수 있다. 거북이처럼 걸어가야 한다. 신앙은 인내이기 때문이다. 욥은 졸지에 재산을 잃고 자녀도 건강도 그리고 아내도 잃고 친구의 공격을 받았지만 믿음의 행보를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면 후 일에 보람을 지닐 수 있다. “보라! 난 이겨냈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번이라도 패배가 싫으면 아예 시합을 말아야 되듯 고통과 패배가 없는 삶을 원한다면 차라리 삶을 포기해야 한다. 주검은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 패배, 고난, 슬픔이라는 감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지금 탕자를 찾고 계신다. 머리에 과학의 모자를 쓰고 허리에 이성의 칼을 차고 등에는 재물의 배낭을 메고 손에는 쾌락의 지팡이를 짚고 사는 현대의 탕자를 부르고 있다. 하루에 한 발자국만 주님 앞으로 나아가자.

믿음이 슬픔을 덜어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나는 절친한 친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의 동료 목사인 그는 방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발지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사망 통지서를 받은 터였다. 그 아들도 목사가 되기로 결정되어 있었고 충분한 성직자의 자질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꼈다. 그와 내가 침묵 속에서 함께 앉아 있을 때 그는 차분하고 사랑스럽게 아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 했다. "나는 한탄하거나 하나님께 반항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내 아들은 가 버렸다오. 언젠가는 그 애를 다시 만날 수가 있겠지요. 한 가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제 그 아이가 여기 없기 때문에, 내 몫의 목사직뿐만 아니라 아들 몫까지 두 몫의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할 작정입니다." 그는 이 불가피한 사건을 용기있게 받아들였으며 그를 좌절시키는 힘과 싸워서 승리한 것이다. 우리가 슬픔을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지닌 믿음의 크기에 따라 그 슬픔을 유발하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존 수더랜드 보낼]


믿음이 지켜지는 좋은 세상
 터키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옛날 왕이 민정시찰을 나갔을 때 한 가난한 여인이 왕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제가 잠든 사이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훔쳐 달아났습니다"라고 말했다.
 "물건을 생각하면 잠들지 말았어야지. 어찌 잠들었는가?"
 왕이 묻자 여인은 "저는 폐하를 믿고 편히 잠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늘 깨어 백성을 보살펴 주시리리라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이 '믿음의 여인'에게 큰 상을 내렸다. 하나님을 이처럼 믿고, 서로가 서로를 이처럼 믿는다면 '좋은 세상'이 될 텐데….

믿음이라는 줄
 한 소년이 연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연이 너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타래에 묶인 실이 곧바로 서 있는 것을 보고 연이 바로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소년을 쳐다보며 "연이 어디 있는지 안 보이는구나. 너는 아니?"라고 물었다.
소년이 대답했다. "그럼요. 이 줄을 잡아보세요. 팽팽하잖아요. 연은 보이지 않지만 제 머리 위쪽에서 푸른 하늘을 날고 있어요. 줄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지요."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지키시고 복 내려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분명히 안다. 우리의 '연줄'은 믿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믿음 있고 사랑 없는 것이
  바리새교인이란 반드시 위선자는 아니었다. 모범적 바리새인이란 믿음있고, 사랑없는 자였다. 그들은 말했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면 구원될 것이다 라고.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면 구원되리라고.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충돌은 사랑과 믿음과의 충돌이었다. 보다 좁은 믿음이, 보다 넓은 사랑의 우선권을 인정할 수 없어 이것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양자가 한가지로 하나님께 쓰이려했다. 바리새인은 믿음으로써, 예수님은 사랑으로써 그러므로 저 신성한 비극이 있었던 것이다.

믿음
  이런 얘기가 있읍니다. 어떤 교우가 꿈에 새 예루살렘성에 가 보게 되었읍니다. 높은 시온산 꼭대기는 새 예루살렘성을 잘 지었는데 금강석과 홍보석과  가지 각색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성이었읍니다. “내가 정말 새 예루살렘성에 가까이 왔구나.” 한 걸움 두 걸음 점점 올라가 보니 큰 문이 있는데 계시록에 기록한 대로 큰 진주 하나로 된 문이었읍니다. “야. 내가 새 예루살렘성에 왔구나” 생각하고 문을 두드렸읍니다. 두드리자마자 문이 곧 열리더니 베드로가 척 내다봅니다. “저는 아무 교회에서 온 아무개올시다.” 그러니 베드로가 묻습니다. “이 성에 들어오려면 믿음표가 있어야 하는데. 믿음표 가지가 왔느냐.” 이 분이 “네. 가져왔읍니다”하며 안주머니를 만져 보니 믿음표가 없어졌단 말입니다. 옆 주머니를 보니 거기도 없단 말입니다. 아무리 뒤져도 믿음표는 없었읍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어졌읍니다.” 그러자 장사꾼이었던 이 분은 사정을 해보았읍니다. “나에게는 믿음표가 없지만 아무 교회에 십년 이상을 다니고 했는데 좀 들어갈 수 없읍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그것은 안되네. 아무리 오래 다녀야 쓸데 있나 믿음표가 있어야지.” “그런게 아니올시다. 사실은 제가 그 교회에서 장로 일을 십여 년이나 봤읍니다. 그래도 좀 들어갈 수 없읍니까.” 베드로 사도가 하는 말이 “아니. 장로 십여년이나 믿음 없이 했으면 말썽꾸러기였겠구먼. 그게 무슨 쓸데가 있어”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읍니다. 여러분. 사도 베드로는 성질이 급한 분입니다. 문을 꽝 닫는 소리에 깨 보니 꿈이더랍니다. 그것이 꿈이었기에 다행이지 꿈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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