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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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예화 58편 모음
1.부활(復活)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조그마한 장소에 모여서 자기네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땅을 망쳐버리려고 제아무리 기를 써보더라도, 또 그 땅 위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돌을 깔아 덮어버리더라도, 석탄이나 석유, 연기로 그을려 놓는다 하더라도 아무리 수목(樹木)을 베어버린다 하더라도 -도시에서도 봄은 역시 봄이었다.
햇볕이 따사로이 내리 쬐자 풀은 되살아나서 송두리째 뽑아버리지 못한 곳이라면 가로수 길 옆 잔디는 물론이요 포석틈바귀에서도 파릇파릇 싹터 올랐다. 자작나무 백양나무 벚나무는 끈기 있고 향기로운 잎사귀를 벌리고 보리수는 빵긋이 벌어진 싹을 부풀려 올리고 있었다. 까마귀와 참새 그리고 비둘기들은 봄을 즐기는 듯이 벌써 보금자리를 마련하기에 바빴고, 파리들도 양지바른 담장 가에서 윙윙거리고 있었다. 이처럼 초목과 새들과 벌레들 그리고 아이들은 모두 즐거웠다. 그러나 인간은 - 끊임없이 자기를 속이고 괴롭히며 또 서로 속이고 또 서로 괴롭히고 있었다. 인간은 이처럼 아름다운 봄날 아침을 신성하게도 귀중하게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자. 여기서 문제 들어갑니다. 위의 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느 작가의 유명한 책 처음 시작 부분입니다. 누구나 중고등학교 시절에 한번쯤 읽었을 책입니다. 맞춰보세요.

2. 선녀와 나무꾼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전 세계에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나라마다 등장인물이나 배경은 약간씩 다르지만 이야기의 맥락은 거의 비슷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재림, 그리고 성도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뚜렷한 전달수단이 없던 옛날에 입에서 입으로 각 나라에 전파되면서 약간씩 변형된 것이 아닌가 하고 보기도 합니다.
하늘의 선녀들이 깊은 산 속에 있는 폭포에 내려와 목욕을 하는데,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덫에 걸려 죽어 가는 노루를 구해준 댓가로 노루가 알려준 대로 천사들을 발견하고 천사의 날개옷 하나를 감춥니다. 선녀는 하늘로 귀환하지 못한 채 결국 나무꾼과 결혼해 자녀까지 낳고 삽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날개옷을 돌려받은 선녀는 홀로 하늘로 귀향해 버리고 나무꾼은 노루가 절대로 날개옷을 꺼내주면 안 된다고 했던 다짐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스토리는 서양버전입니다. 선녀가 자녀들을 양 옆구리에 끼고 하늘로 올라가고 이어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게된 선녀들이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긷자 나무꾼이 두레박을 살짝 타고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는 스토리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동양버전입니다.
한국 버전은 또 다른데, 하늘로 올라간 남편은 지상의 노부모가 걱정되어 선녀가 준 용마를 타고 지상에 내려오지만 노모가 끓여준 뜨거운 팥죽을 먹다가 흘리는 바람에 용마가 놀라 도망가 하늘행을 포기하고 노부모와 함께 여생을 산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기독교 버전으로 바꾼다면 아마도 나무꾼이 노부모까지 용마에 태워 하늘로 데려간 뒤 온 가족이 함께 영생을 누리는 해피앤딩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 부활, 승천의 여정이 바로 성도들의 천국행이 해피앤딩으로 끝남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3. 3일의 비밀
언제나 즐거움과 기쁨으로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꽃장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단골손님이 할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언제나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니 할머니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으신가 봐요."
"천만에요. 걱정 근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내게도 고통스러운 일, 짜증나는 걱정거리가 생긴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매일 즐겁게 사실 수가 있어요?"
"나는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산답니다.
"3일의 비밀이라니요? 그게 무엇입니까?"
"'3일의 비밀이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맡겨버리고 조용히 3일을 기다리는 것이라오.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그 문제가 해결되는 데는 3일이면 족하다오. 때론 숫자대로 3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주님의 부활 원리는 늘 동일하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떤 암흑 같은 고난이 와도 3일 후면 언제나 광명의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사는 게 늘 즐겁기만 하지요"

4. 나 보이니?
연예인들의 특성상 그들이 신앙을 갖기란 매우 힘들었는데, 각고 끝에 연예인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가르치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 제자들과 말씀하시는 장면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 맨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이지요?" 미리 성경을 읽어오라고 누누이 말을 했건만 바쁜 일정에 누구도 성경을 읽어오지 않았으니 알 턱이 있나요.
모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이리 저리 휘저으며 유령 같은 몸짓으로 하는 말 "예들아~ 너희들은 내 몸이 보이냐?" 엉뚱한 말 한마디로 어색한 분위기는 갑자기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엉뚱한 연예인이 바로 코미디언 구봉서 장로님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와 웃음은 사람에게 여유를 갖게 합니다.

5. 부활절의 첫 복음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당시 국제 사회는 조선을 ‘소망 없는 은둔의 땅’으로 보았다. 그러나 황무지이기 때문에 더욱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였다. 그들은 순교의 각오로 파송을 자원했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 거센 풍랑을 헤치고 한 척의 배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단순한 입항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 땅을 밟았다. 황무지에 소망의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아펜젤러는 본국에 보낸 첫 선교 보고서에서 이 날의 감동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다. 그날 사망의 철창을 쳐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빛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6.부활절 달걀
십자군 전쟁 때의 일이다. 로잘린부인은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듣고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 틈을 이용해 재산을 가로챈 후 로잘린을 마을에서 내쫓았다. 그녀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안착했다. 마침 부활절을 맞아 마을 어린이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 "얘들아, 너희들의 나무를 하나씩 정하렴. 그리고 나무 밑에 둥지를 만들어 놓아라. 그러면 둥지에 예쁜 알이 들어있을 것이다." 로잘린은 둥지에 형형색색의 그림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글이 적힌 달걀을 놓아두었다. 어린이들은 신기한 표정으로 색달걀을 받았다. 그런데 한 소년이 달걀을 들고 친척집을 가던 중 길가에 쓰러진 부상병을 만났다. 소년은 부상병에게 달걀을 주었는데 부상병은 그곳에 적힌 글씨와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것은 내 아내 로잘린의 그림인데. 그리고 이것은 가훈이 아닌가?" 그때부터 부활절 달걀은 '사랑'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7. 속이 빈 프리스틱 계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 교회학교에 나오는 여덟 살짜리 소년 톰이 있었습니다. 그는 병이 많아 몸이 늘 아프고 힘이 들어서 늘 휠체어에 실려 교회에 나오는 소년이었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톰의 교회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속이 비어 있는 플라스틱 계란을 주며 그 속에 무엇이든 생명이 있는 것을 넣어 오라고 했습니다. 부활절 아침, 아이들이 차례로 계란을 열어 보았다. 꽃이나 나뭇잎, 곤충 등 아이들은 생명이 있는 여러 가지를 준비해 왔습니다. 톰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톰의 계란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걸 본 몇몇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웃었지만 앓고 있는 톰을 동정해서 교사는 부드럽게 "준비하지 못했어도 괜찮아. 톰이 많이 아팠나 보구나."라고 위로하였습니다. 하지만 톰은 선생님께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생명을 준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그 무덤이 비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생명이 있는 살아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잖아요."
이 소년은 10개월 뒤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장례식 날, 그의 관에는 꽃 대신 빈 플라스틱 계란이 놓여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누우셨던 무덤을 비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소망을 가득 품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8. 위기를 기회로
세상을 변화시킨 기독교 역동성의 배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수없는 박해와 도전을 만났지만 언제나 위기를 갱신의 계기로 삼아 스스로를 정화하며 세상을 압도하는 생명력으로 변화의 주체가 됐습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핵심이고 신앙의 초석이며 변화된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 어떤 슬픔과 공포, 회의와 실망, 고통과 상처도 부활의 사실을 믿고 부활의 능력 가운데 살며 부활 복음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침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하는 감격의 부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길자연 목사

9. 부활 증인과 증거
인류가 소유한 기록 가운데 4복음서보다 성스럽고 진실 된 피 묻은 기록은 없을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의 거의 절반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일주일간의 기록이다. 사도행전의 수백 명의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증인들이었다.
인류 증언사 가운데 일찍이 예수님의 부활 증인들보다 진실 되고 다수의 순교자를 낸 것은 없었다. 공모 사기 사건이라면 무슨 대가를 바랐을까. 금생과 내세, 영육 간에 백에 하나도 유익이 없는 일을 위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기의 순교를 해야 했던 심리적, 도덕적 동기가 설명이 안 된다.
안식일이 주일로, 할례가 세례로, 회당이 교회로 바꿔진 사회학적 이유도 부활의 역사성 이외에는 근거를 설명할 수 없다. /예수칼럼 : 김준곤

10.토마스 아놀드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아놀드(Thomas Anold)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 역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만일 기독교가 예수의 부활을 허위로 선전했다면 기독교가 2천년 후인 오늘까지 존재할 수 없고 점차 큰 발전을 가져올 수 없을 것입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만일 예수의 제자들이 서로 의논해서 예수의 부활을 거짓으로 만들어 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본심에 돌아갔더라면 예수의 부활이란 전부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순교를 하면서까지 입증한 제자들의 진실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만약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벌써 그런 사람과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였습니다.
* 성경: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15:16)
* 묵상: 나는 주님의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는가?

11. 교회 힘의 근원
인도 수상 네루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인도의 종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늪지를 메우고 댐을 건설하도록 자극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가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짐을 덜어 주려고 노력해 왔다. 교회가 인간을 자극하고 이끌었던 힘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 참조: 마28:1-8, 요20:1-10

12. 스탈린이 부활할까 봐
스탈린의 유해를 국내에 안치하는 것을 꺼림직 하게 여긴 후루시쵸프가 드골에게 청해서 나폴레옹의 묘가 있는 앙바리드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드골은 앙바리드는 영웅을 모시는 묘지라고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워싱톤에 알아보았지만 앨링톤 묘지도 스탈린만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도 영국의 영웅 이외에는 사절하겠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이스라엘에 부탁을 해보았는데, 뜻밖에도 학살자의 유해를 인수하겠다고 회신을 보내왔다. 다만 회신 끝에 이러한 추신이 있었다.
"믿을 만한 국제 통계에 의하면, 성스러운 이스라엘에서 사자(死者)의 부활은 그 확률이 세계 최고임을 알아주기 바람."
고민 끝에 후루시쵸프는 스탈린의 유해를 그냥 소련 땅에 묻어 두기로 하였다 한다.

13. 반박의 글을 쓰다.
영국의 한 젊은 변호사 프랭크 모리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박하는 글을 쓰기 위하여 세밀한 조사와 연구 끝에 놀랄만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는 연구를 종합하여 책을 썼는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송두리째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책이 "Who moved the stone" "누가 돌을 옮겼나?"라는 유명한 책이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이론적으로 따져 본다고 하여도 그것은 확실한 사실인 것이다. 예수 부활이 사실 무근이라면 십자가에 죽인 바리새인들이 큰 증거를(세워) 선전했을 것이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14. 부활 신앙의 부활
미국 대통령을 지낸 부시가 부통령 시절에 소련 부레즈네프 수상의 장례식에 미국 대표로 참석했다. 장례식은 공산당의 관례대로 진행되었다. 모든 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검정 색이나 붉은 색으로 덮여 있었다. 장례식의 말미에는 고인을 위한 마지막 경의를 표하는 순서가 있었고 이때 고인의 부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품에 간직했던 백합 한 송이를 꺼내어 관 위에 놓았다. 백합은 전통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그리고 미망인은 남편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식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여인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일어선 그녀는 성호를 그었다. 이 순간, 여기저기서 미망인을 따라 성호를 긋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았던 조지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얼어붙은 소련 땅에 기독교 신앙은 완전히 죽어 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순간 부활 신앙이 부활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 이동원

15. 이디 아민 목사
1973년에 당시 우간다라고 하는 나라에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디 아민이라고 하는 대통령이 있었다. 이 독재자로 인해 온 국민이 꽤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그 가우데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키파샘판디라고 하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당시는 아민 대통령을 반대하는 무리면 무조건 죽어버리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암살단이 부활절 아침에 교회에 막 쳐들어 왔다. 목사님을 죽이려고. 그 분에게 총을 들이댔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싱글싱글 웃으시면서 "그러시죠 뭐. 하지만 내가 이제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죽이세요." 마지막이니 그러라고 했다. 목사님은 조용히 기도를 했다. 그런다 아무 다른 기도가 없고, 예수님께서 하시던 기도 그대로 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이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아멘"했더니 암살하려던 사람들이 "기도해줘서 고맙습니다,"하고는 그냥 가더란다. 그 분 이야기는 이렇다. 지금 금방 죽는다고 하지만 아무 두려움도 없다. 왜? 부활절 아침이니까. 지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고 부활 신앙으로 충만해 가지고 있는 시간이라 죽음에 대한 문제가 조금도 거리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곽선희 목사 설교예화 중

16 부활은 인류를 향한 최고 선물
스칸디나비아에 페드로라는 한 어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고기잡이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페드로의 어선은 나뭇잎처럼 표류했습니다. 칠흑 같은 밤, 페드로는 파도와 강풍에 맞서 몇 시간을 싸웠으나 방향과 기력을 모두 잃고 자포자기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때 먼 곳에서 강렬한 불기둥이 솟구쳤습니다. 불기둥은 곧 육지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페드로는 사력을 다해 불기둥이 있는 곳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은 자신이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맞으며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통곡한 이유가 달랐습니다. “여보, 제 실수로 우리집에 불이 나서 세간을 몽땅 태웠어요. 이를 어떡하면 좋아요” 그 생명의 불기둥은 바로 페드로의 집에서 피어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껴안으며 밝은 표정으로 말합니다. “여보, 고맙소. 당신이 실수로 불이 난 것이 나와 아들의 목숨을 구했소. 불기등이 없었으면 우린 모두 침몰했을 것이오. 집에 불을 내줘서 고맙소.”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불기둥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까짓 초가삼간이 불타는 아픔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상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영생의 소망을 품은 사람은 삶의 가치관이 다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17. 묘비 없는 칼뱅의 무덤
장로교의 창시자인 장 칼뱅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다.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장로교회를 창립하자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장로교회를 세웠고 다른 많은 지도자들도 유럽 각지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웠다. 칼뱅이 죽을 때 남겼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바로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장 칼뱅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놓았다. 그래서 칼뱅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장차 부활의 새 아침이 올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칼뱅처럼 아름다운 영적 유산을 이 땅 위에 남기고 가야겠다.

18. 그리스도인의 D-day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롬멜이라는 명장이 있었습니다. 롬멜 장군은 1944년 6월 1일 독일 군대에게 프랑스 서부 해안의 경계를 한층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연합군에게 프랑스 상륙을 허용하게 된다면 독일군이 한층 불리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상이 악화되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가 프랑스 서부 해안을 덮고 있었습니다. 기상 상황을 본 롬멜 장군은 안개가 낀 며칠 동안은 아무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도 되겠다고 판단해 6일날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롬멜 장군이 안심하고 자리를 비운 그 다음날 연합군의 대대적인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는 그날을 가리켜서 ‘디데이(D-day)’라고 부릅니다. 연합군이 독일을 패배시키고 세계 대전을 결정적인 승리의 자리로 바꿨던 날, 결정적인 승리가 확보된 날을 ‘디데이’라고 합니다. 물론 디데이로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한 뒤에도 독일은 최후의 저항을 계속했지만 마침내 독일이 패배하고 연합군이 최후의 승리를 합니다. 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던 날은 ‘디데이’라고 안하고 ‘브이데이(V-day)’라고 합니다. 바로 승리의 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디데이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여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날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디데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모든 계교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새 시대를 활짝 열어놓았지만 아직도 사단의 격렬한 저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단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최종적으로 완전히 패배하고,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때 바로 브이데이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디데이’와 ‘브이데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긴장 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로새서 2: 15)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19. 부활의 주님
한때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인도를 위시한 불교국에서는 한동안 떠들썩했었다. 석가모니의 이 유명한 뼈들은 잘 진열되어 수백 만 인도사람들의 경의 속에 시가행진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뼈 앞에 부복한 것을 지켜보고 있던 한 선교사가 그의 친구에게 "만약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뼈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기독교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라고 했다. 기독교는 그들처럼 죽은 자를 믿는 종교가 아니요 산 자를 믿는 종교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새벽에 여자들이 향품을 예비해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예수님을 찾을 때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하는 천사들의 책망을 들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산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는 때가 많은 것 같다. 주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볼 것이요, 책 한 권 쓰시지 않으셨고, 번듯한 집 한 채 없어 머리 둘 곳도 없으시면서도 세상의 부의 주인이 되시며, 군사 한 명 없으셨으나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계시는 주님을 보아야 할 것이다.

20. 부활의 종교
해리 리머박사가 한 회교인 관리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그 회교도 관리는 대답하였다. “우리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성경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회교 관리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코란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셨다고 믿습니다.” 또 리머 박사가 말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셨음을 믿습니다.” 그러자 그 회교관리 역시 대답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언자 모하메드를 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리머 박사는 다시 한 번 강조해 말하였다. “우리는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회교 관리 역시 또 대꾸하였다. “우리는 모하메드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죽은 것을 믿습니다.” 리머 박사는 또 말하였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 부터 스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그분의 말씀은 실제로 증거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러자 회교 관리는 말하였다. “우리는 죽은 이후의 예언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21. 부활의 주님
성경: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마호멧을 찾아가겠습니까?"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을 잘 섬기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 부활절 성찬
김미자 집사의 남편은 말기 위암이었다. 암세포가 임파선까지 전이돼 의학적 치료는 끝난 채 임종만 기다렸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이 두려웠다. 진통이 찾아올 때는 더욱 두려웠다. 그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김 집사가 부활절 성찬예배에 참석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자기 몫의 성찬을 챙겼다. 떡은 손수건에 싸고, 포도주는 작은 병에 담았다. 성찬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와 고통 속에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남편에게 성찬을 내밀었다. “여보, 오늘 부활절 성찬입니다. 당신을 위해 내 몫을 받아왔어요. 이 떡은 십자가에서 살을 찢어 영생하라고 주신 주님의 몸이고, 이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대신 고통당하신 주님의 피랍니다.” 남편은 아내의 뜨거운 사랑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성찬을 받았다. 기적이었다. 평안이 오고 고통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김 집사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감사하고 죄송해요. 성찬은 그렇게 받는 것 아닐 텐데요.”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23. 부활의 기쁨
성경: 요한복음 20:19-29 * 찬송155장
첫 부활주일은 큰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모든 눈물을 거두어 주신 날입니다. 수난 금요일은 말 그대로 눈물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많은 여자들뿐만 아니고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곡하고 애통해 하였습니다. 부활 주인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가까이 와서도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 그 모습을 보일 때에 그들의 기쁨은 말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사실 그들의 눈물만 거두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망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이 땅 위에 뿌려진 인류의 모든 눈물을 거두신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가 다시 살리겠느냐?" 하는 의문은 욥기 이래 인간의 끊임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부활 주일은 이 인간의 깊은 욕구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대답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 다시 살아 잠자는 자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되었도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리라"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여 주십니다.
* 기도: 이 부활주일의 기쁨을 생각할 때에 우리 가정에 새로운 승리, 새로운 기쁨의 크신 은총을 더하여 주옵소서.

24. 부활과 영생
본문: 요한복음 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 인생들에게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이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하였으며 많은 종교에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봉독한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심판을 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나 예수님에게 위임하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심판을 받지 않고 혼인잔치와 천년 왕국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는 부활을 통하고 산 자는 휴거를 통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첫 부활에 참여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혼의 부활뿐만 아니라 몸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재림하실 때 주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 부활한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죽음에서 멸망할 것이 아니라 첫 부활이 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믿음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부활, 심판, 영생과 관계됩니다. 믿는 자는 이미 현세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을 면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 축복을 영원히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우리를 위하여 첫 부활이 되시고 영생의 축복을 주시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 봉사, 진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한태완 목사(예화포커스)

25. 부활 찬송과 루이 14세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외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 권위를 만방에 널리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성도로서 신교를 방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의 손길을 뻗쳐 칙령 거역죄로 세오졸프라는 사람을 체포하여 파리 탑의 감옥에 감금했습니다. 때마침 부활절이 되어 루이 14세는 황제의 복장을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를 행진하였습니다. 높은 감옥의 탑 위에서 이 행렬을 바라본 세오졸프는 하늘의 영감을 받아 부활절 찬송을 힘차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다. 세상사람 찬양하니 천사 화답하도다." 이렇게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이 찬송 소리는 의기양양하게 행진해 가던 루이 14세의 양심을 때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왕 중 왕"이 되신다는 사실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는 부활 축제 행렬을 세우고 감옥으로 들어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잘못을 빌고 그를 석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26. 부활의 새로운 역사
한 역사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사건 세 가지를 말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이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실 세계는 그 사건을 가장 큰 사건으로 지금도 인정을 합니다. 우리 인간사의 날짜 계산을 지금은 그리스도 탄생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금이 2003년이라고 하는 날짜 계산을 온 세상이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사건도 세계가 인정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십자가는 흉악하고 소름을 끼치는 사형 집행 기구로 누구도 보지 아니하려고 하는 괴물 같은 것으로 취급을 받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는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표시가 되어서 온 세상에 십자가가 세워져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거룩하고 경건한 표시를 몸에 지니고까지 다니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십자가가 조금 화려해 졌습니다. 금으로 만든 십자가도 있고 다이아몬드 십자가도 있을 만큼 아주 귀하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변해진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죽었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건입니다. 이것도 온 세상이 다 인정을 합니다. 오늘 온 세계 인류는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는 합창 소리로 지구를 진동시키고 있는 날이 오늘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작은 나라에만도 50,000개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말하면 온 세계 지구 전체는 오늘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인류의 대 축제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네 번째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일이 하나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이 세상에 다시 재림하여 오시는 사건이 됩니다. 결국 인류사는 예수의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큰 사건이요 관심이 된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27.부활의 향기
백화점 야채코너보다 재래시장의 채소 난전이 더 자연스럽다. 다듬어져 하얀 살을 내보이는 정돈된 야채에 비해 재래시장에 펼쳐진 봄나물이 더 다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엉클어져 자유롭고 편안함이 봄기운을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게다. 봄나물에서 지난겨울 부산하게 맨몸으로 땅을 뚫고 올라온 흔적이 보이는 듯하여 애착이 간다. 거친 흙을 뚫고 올라온 연한 줄기들은 예수의 부활을 닮은 것 같아 행복하다. 나물의 새순들이 땅속에서 딱딱한 흙을 뚫고 나오는 것을 지레 포기했다면 생의 향기는 기대할 수 없고 땅속에서 썩고 말았을 것이다. 봄나물은 생명이 있어 엷은 향이 우러나온다. 된장을 풀어 끓인 달래와 냉이국은 저장된 음식의 입맛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 좋다.
예수의 부활은 절망이 희망의 향기로, 죽음은 부활의 향기로 다가왔다. 성경에서 부활의 메시지는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하였다. 이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메시지인가. 부활이 있기에 내일이 있고 부활이 있어서 살맛이 난다. 봄나물이 봄의 향기를 전하듯 부활의 소식은 삶의 향기를 전함이다. /정종기 교수

28. 부활의 역사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스퍼전목사가 하루는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는 불량소년을 보았다. "새를 어떻게 할래?" 스퍼전이 묻자, 소년은 "괴롭히다가 죽일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스퍼전은 2파운드를 주고 그 새를 사서 멀리 날려 보냈다. 이틀 후 부활주일에 스퍼전은 이렇게 설교했다.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 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29. 한 가지 소식
영국의 계관시인 테니슨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아름다운 언어로 찬양한 시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시골길을 가다가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일하는 중년 부인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 좋은 소식이 있나 보죠?” 테니슨이 묻자 부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한 가지 소식밖에 모른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테니슨도 말했다. “부인, 그것은 오래된 소식이자 새로운 소식이며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면 그리고 그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넉넉히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당신의 삶속에 진정 부활의 기쁨이 있는가? /이영무 목사<영신교회>

30. 부활
미국의 노부부가 성지 순례차 고향 땅 이스라엘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묻힐 경우 축복도 받고 비용도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처리 해 미국으로 공수하는 방식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000달러나 된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망설이다 결심했다. 비싸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묘지에 묻겠다는 것이었다. 유대 땅에 묻히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자기 아내가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감당하기 어렵다는 ‘뼈 있는’ 이유였다. 우리는 부활을 바란다. 지금의 아내와 남편들도 함께 부활을 바라는가. 부활의 생명이 오늘의 유한한 생명 속에 꽃피고 열매 맺기를 정녕 바라는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을 내일처럼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열매일 것이다.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31.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 할쌔(마태복음28: 1- 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는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 25-26)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3:14- 15)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전15: 12- 21)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 : 20)

32. 부활에 관한 금언
기독교는 종교가 끝나는데서 부활과 함께 시작한다.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부록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죤 s. 웨일)
복음 서신들이 부활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부활이 복음 서신들을 설명한다.(죤 s. 웨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믿는 것은 오직 그의 부활의 완성된 사실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파운스 박사)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좋으나 하나님을 사랑함이 더욱 선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기 속에 부활시킴은 더욱 선한 일이다.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책들 속에만 쓰신 것이 아니라 봄날의 잎사귀들마다에도 쓰셨다.
주님의 왕관에서 빛나는 금강석은 숨길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마침내 천국의 불멸하는 존재들에게 내린 은총으로 부활한 모든 인간의 영혼에까지 다다른다.(마르틴 루터)

33. 죽으면 부활이 있습니다.
신혼초기 가난하고 완고한 시집에서 마음고생을 크게 했던 어느 크리스천 미술인의 고백.
이 분은 쥐꼬리만 한 남편의 교수 월급으로 시동생들의 학비까지 보태며 살림해야 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는데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출석하는 교회 목회자를 찾아가 상담했다. 그날 목회자는 "순교가 따로 있겠습니까. 시집에서 순교하겠다고 생각하고 생활하세요. 시집에서 관에 누워 나오겠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죽으면 부활이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이 분은 큰 힘을 얻고 모든 어려움을 이겼다.

34. 텅 빈 계란과 예수님의 무덤
날 때부터 몸이 꼬여진 상태에다 정신박약아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그는 12살이었지만 아직도 2학년에 속해 있어서 담임선생 도리스에게는 언제나 큰 부담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 아이는 몸을 뒤틀거나 시끄럽게 하여 다른 학생에게 지장을 주며, 학습을 자주 방해하는 것이었다.
도리스 선생은 지미의 부모를 학교로 오라고 하여 이 일을 상의하게 되었다. 도리스 선생은 “왜 아이를 특수학교에 전학을 시키지 않는가?”고 부모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지미의 어머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사무엘의 아버지가 말을 했다.
“선생님, 사무엘를 위한 특수학교가 이 근처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미는 이 학교와 친구들을 몹시도 사랑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아이를 먼 곳의 다른 학교로 보내면, 그것은 아이에게 견딜 수 없는 충격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얼마 살지 못할 아이를 부모의 심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봄 수업시간의 일이다. 부활절이 가까워 오는 날이었는데, 도리스 선생이 플라스틱으로 된 계란들을 교실로 가지고 들어와서는 19명의 아이들에게 그 플라스틱 계란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그 계란의 중간을 열어 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 플라스틱 계란은 절반으로 잘라지며 열렸고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무엇이든지 생명을 나타내는 것을 그 속에다 넣어 가지고 다음날 학교로 가지고 오라고 했다.
이튿날, 학생들이 계란을 모두 선생님의 책상에다 갖다 모아 놓았다. 선생님은 한 개씩 열기를 시작했다. 계란 속에는 예쁜 꽃과 물 등 갖가지 것들이 하나씩 들어있었는데 한 가지만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무엘 것이었다. 선생님은 왜 아무것도 없고 텅 빈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는가라고 했더니,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무덤이 텅 빈 것이라고 했어요!”
선생님은 다시 지미에게 물어보았다. “사무엘, 왜 예수님의 무덤이 텅 비었었지?”
“네 선생님, 나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예수님의 아버지가 그를 무덤 속에서 살려냈어요!”
석 달 후에, 사무엘은 하나님 품에 안겼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관 위에 나란히 놓여있는 19개의 텅 빈 플라스틱 계란들을 바라보며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35. 안식일에서 주일로
제1차와 2차 유대인 반란 사건 사이에, 회당과 교회는 안식일 예배에 관한 입장의 차이로 더욱 더 멀어지게 되었다. 안식일 논쟁은 교회가 유대교 구조 안에서의 그의 본래의 자리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 시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역사적 예이다. 그러나 추가적으로, 안식일과 그 외의 거의 대부분의 모세의 율법에 대해 기독교가 거부함으로써, 기독교는 이스라엘도 거부했다고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내보냈다.
비록 초기에는 안식일을 지키긴 했지만 때가 되자 교회는 예수가 부활하신 주일에 예배드리기 시작했다(참조, 마28:1). 그러나 유대인과 기독교인 모두 일요일이 로마인들이 태양신 숭배와 연관하여 거룩히 지키는 날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디옥의 주교 이그나티우스는(Ignatius)는 이러한 변화가 A.D.115년 이전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마그네시아인들 (Magnesians)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그들에게 "더 이상 안식일을 위해 살지 말고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나게 된 날, 곧 주님의 날을 위해 살 것"을 말하고 있다. A.D. 120년경에 씌어진 교회 훈련 지침서 디다케(The Didache)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주님의 날에 예배하기 위해 함께 모일 것을 가르치고 있다.

36. 부활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인도의 전총리 네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천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도의 종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늪지를 메우고 댐을 건설하도록 자극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회가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칭송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 왔다. 교회가 인간을 자극하고 이끌었던 힘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부활의 역사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37.부활절의 유래
부활절의 원래 명칭은 히브리어의 `유월절'의 의미인 "파스카(Pascha)" 였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이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과 같은 시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자연스러운 명칭이었다. 이는 유대인이었던 사도들과 개종자 들이 그들의 옛 절기인 유월절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 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부활절을 지켰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6장 6.9절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유월절양"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는 말씀이다. 그런데 북부 유럽에서는 봄에 "이스트르(Eastre)" 축제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시기에 "파스카(Pascha)"를 경축하였다. 그 후 기독교인들은 이 파스카 축제를 "이스터(Easter)"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떤 의미로 `파스카'를 `이스터'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봄, 빛의 영광됨이 의미상 일치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짐작만 있을 뿐이다.
파스카는 거룩한 주간으로 지켜졌다. 부활주일 전 주일은 종려주일로 정하고 주님의 승리의 입성을 기념하여 저녁 때 성도들이 감람산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행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며 `호산나'를 불렀다. 목요일에는 `성만찬'과 금요일에는 `성 금요일'을 생각하여 주님의 고난과 관련된 금식을 하였다. 그러므로 부활절 축제는 부활하신 그 날만의 축제가 아니라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의 고난 주간과 연결되어 맞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난과 부활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하여야 부활의 기쁨이 보다 크게 체험하는 것이다.
현재 지키고 있는 부활절은 325년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부활의 날"을 정하여 주일에 지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날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 후 제8세기부터 3월 21일(춘분)이나 춘분 이후 만월 후 첫 주일을 지키기로 하였으며 만월이 주일이면 그 다음 주일로 부활의 날을 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원칙에 의해 부활주일은 3월 22일과 4월 25일 사이에 결정되는 것이다. 이 부활주일부터 40일째가 주님의 승천하신 날이요, 50일째가 오순절이다.

38 부활절 계란 그림의 유래
부활절 계란을 주고받는 풍습은 유럽에서 십자군전쟁이 일어났을 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로자린드 부인은 남편이 전쟁에 나간 뒤 나쁜 사람들에 의해 재산을 빼앗기고 산동네에서 살게 되었으나 동네 사람들의 친절로 생활했다. 부인은 이 친절에 보답하려고 부활절을 즈음해, 예쁘게 색칠한 계란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계란에다 로자린드 집의 가훈인 `하나님의 사랑을 믿자.'라는 말을 써 넣었다.
이 계란을 받아든 한 소년이 병든 군인을 보고 잘 간호해 준 다음, 계란을 주었는데 이 군인은 그 계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계란에 씌어 있는 글이 바로 그 군인의 가훈이었고, 그 군인이 바로 로자린드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군인은 수소문 끝에 자신의 부인과 함께 만났다. 그 이후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퍼져 부활절 주일에 색 계란이 선물로 나눠지게 되었다.

39. 게으름뱅이 배추벌레
게으름뱅이 배추벌레가 여행을 떠났습니다. 누런빛 몸뚱이를 꿈틀꿈틀거리며 아주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긴 여행이라고 하니까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버스를 타고 가는 것도, 기차를 타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은 더욱 아닙니다.
꿈틀...꿈틀...꿈틀...
마디마디 이어진 몸뚱이를 움츠렸다 폈다하면서 넓은 신작로를 건너야하는 여행길입니다. 가는 곳은 저 길 건너 숲속입니다. 오래지 않아 추운 겨울이 오겠기에 나무 위에다 누에 집을 지으려는 것이랍니다. 하지만 여행길은 그리 쉽지 않았어요.
조심성 없는 어린이들의 발꿈치, 쉴 새 없이 오가는 짐차들의 바퀴. 그런 것들에게 밟히거나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길 건너 예쁘게 피어 있는 노란 들국화를 보니 힘이 솟았어요.
다섯 밤이나 지나서 배추벌레는 겨우 넓은 행길을 다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어요? 5일 전 멀리서 보았던 국화꽃님이  이젠 다 시들어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어요.
"얘, 들국화님이 어디 갔지?" 배추벌레는 울먹이며 종달새에게 물었습니다.
"들국화님은 돌아가셨어요."
"만나보고 싶었는데……" 종달새는 다시 노래하듯 말했어요.
"또 살아날 걸 뭐……"
하지만 아직 나이 어린 배추벌레는 그 말의 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죽은 게 살아나다니 그럴 수가 '하는 수 없이 이번엔 푸른 풀밭을 찾아보았어요. 포근한 풀밭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배추벌레야, 풀잎들도 모두 죽었단다. 하지만 다시 살아나겠지."
이번엔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며 속삭였습니다.
다시 능금나무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능금나무도 시들어 있었습니다. 그만 눈물이 콱 솟구쳤어요.
"얘야 울지 마, 난 다시 살아날 거야."
마지막 능금나무 잎이 땅에 떨어지며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배추벌레는 그 뜻을 알 수가 없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배추벌레는 슬퍼하며 나무 가지 사이에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조그만 누에 집입니다. 바람이 차츰 차가와져서 일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어요. 이윽고 새하얗고 둥근 집이 지어졌습니다. 피곤한 몸이 차츰 추워왔습니다. 외롭기도 하였어요. 배추벌레는 누에 집 속에 들어가 앉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왠지 스르르 눈이 감기면서 몸이 자꾸 얼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저것 봐라 애벌레도 죽었어! 집 속에 들어앉아 죽었어?"
바로 앞을 지나가던 어린이들의 목소리였지만 아주 먼 데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애벌레는 "내가 왜 죽어, 이렇게 살아 있는데……"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왠지 그 소리가 나오질 않았어요. 그리곤 자꾸 졸리기만 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하얀 눈을 몰아 왔습니다. 눈이 펑펑 쌓이고 쌓였습니다. 그리곤 긴 겨울이 지나갔습니다.
차츰 햇님의 살결이 따뜻해졌습니다. 바람도 부드러워지고 눈도 녹아내렸습니다. 봄이 온 것입니다. 땅이 따스해지니까 땅 속에서 잠자던 씨앗들이 기지개를 폈습니다. 새싹이 귀여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능금나무 가지에도 순이 돋았습니다. 애벌레가 들어있는 누에 집에서도 안에서 무엇인가 꿈틀 꿈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애벌레가 살아났다! 애벌레가 다시 살아났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속삭이며 지나갔습니다. 누에집이 깨지면서 배추벌레가 살아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누렇고 보기 흉한 것이 아니라, 눈부신 날개를 지닌 예쁜 것이 아니겠어요? 금색, 까만색 그리고 빨간 점들…. 무엇일까요? 네 그래요.
"나비님. 나비님" 종달새가 예쁜 목소리가 불렀습니다.
"난 배추벌레였는데, 왜 날 보고 나비라고 부르지?"
"얘, 이젠 너 벌레가 아니란다. 넌 다시 살아난 거야! 자 나비님, 인사 받으세요. 어서…."

40. 애벌레와 잠자리
연못 바닥에 애벌레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연꽃줄기를 타고 물위로 올라간 수많은 자기의 친구들이 함흥차사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부터 누구든지 일단 물위로 올라간 후에도 반드시 연못 속으로 되돌아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도록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연꽃 줄기를 타고 올라와서 물위에 떠있는 연꽃의 넓은 잎사귀 위에 앉아 완전히 탈바꿈을 하여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잠자리로 변했습니다. 그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물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연못 위로 날아다니면서 연못 속에 있는 친구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비록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자기가 바로 자기들과 같은 애벌레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죽음도 이와 같은 탈바꿈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비록 세상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또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애벌레와 잠자리 이야기'는 성도의 영적 변화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 중생의 감격과 기쁨에 살게 되면 근심하고 염려하고 애벌레 같던 옛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의 세계에서 잠자리처럼 훨훨 날며 살게 될 것입니다.

41.생명보다 귀한 것
"의식(衣食)이 족하여야 예절을 한다."고 맹자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면적인 진리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예절은 의식 전에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식물을 희생해서라도,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음식물을 준비합니다.
남극탐험에 나선 Robert Falcon Scott 일행은, 음식물에 결핍된 때, L.E. Grace Oeates 소령의 희생에 의해 구원되었습니다. 오트 소령은 대원 한 사람이 음식물을 많이 소비하는 것에 의해 전원이 기아사멸 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밤중에 몰래 천막을 빠져나가 스스로 동사(凍死)했습니다. 그의 경우, 예절을 알아 대원의 식물을 보급했습니다. 예절은 식물에 선행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전집 13권 39

42. 그리스도
석가는 자기가 죽는 때에 "나는 죽으나, 내 가르침은 영원히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17:23)고 하시고, 그대로 무덤 속에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살아계십니다. 다만 그 교훈이 남는다든가, 그 사업이 계속된다든가 하는 것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살아계시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 국립 제1은행의 창립자인 실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찌(1840-1931)씨가 구미여향을 마치고 돌아와서 귀국 담을 하고 있는 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최초로 연쇄점을 창시하여 성공한 워너메이커(1838-1922)를 만났을 때입니다. 워너메이커는 열심 있는 크리스찬으로, 주일에는 상점을 쉬고서 교회에 출석합니다. 체신장관이 되어달라고 한 때도, "교회학교 교장을 하고 있으므로 주일에는 직무를 수행치 못할 것인데 그래도 좋으면 장관직을 수락하도록 하지요"하고 말했을 정도의 열심가였습니다. 그런 사람이어서 시부사와씨가 방문한 때도, 교회로 인도해 가서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 이 유명한 일본의 실업가의 이야기를 듣게 하였습니다.
그때 시부사와씨는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학생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데, 동양에도 위대한 성인인 공자가 있습니다. 그 공자라는 분은..." 하고 이야기를 끝냈는데, 뒤에 워너메이커는 학생들을 향해 "공자는 훌륭한 사람인 것이 틀림없으나, 공자는 죽었습니다. 그 무덤이 있고 참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들의 구주로서 여러분과 함께 계셔주십니다"라는 뜻의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시부사와시는 미국의 회상으로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이 워너메이커씨가 열심으로 예수는 살아계시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이야기한 광경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실로 예수는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2천 년 전의 예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간구하고, 호소하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43. 부활
복음서 기록에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1)동일성(identity):이것이 중심점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장사 지낸바 바로 그 예수다.
2) 연속성(continuity): 예수께서는 육체적 감각으로 감지될 수 있는 신체의 형태로 부활하셨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바울도 부활의 육체적 성격을 강조한다. 
3)비연속성(Discontinuity): 비록 육체적 부활을 하셨지만 그 신체는 이전과 똑같은 신체는 아니다.  그것은 이제 새로운 세력을 소유한 변화된 몸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 가지는 종말론적인 성격은 바울이 예수의 부활에서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선언하는데서 더 분명해진다(고전15:20). 첫 열매란 오늘 우리에게 별로 명확한 뜻을 전달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고대 팔레스틴에서는 이것이 전달하는 의미가 매우 생생했을 것이다. 첫 열매는 추수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실제적인 추수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약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곧 풍성한 수확을 하려는 추수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부활의 첫 열매라 함은
1) 신자들의 부활을 확증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부활은 이제 희망 이상의  한 사건이 된다.  모든 것이 이 사건에 달려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이 첫 열매라 함은 우리의 부활을 확증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부활이 그의 부활과 같은 것임을 가르쳐 준다.(빌3:21, 고후5:4)

44. 부활을 설명한다면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마호멧을 찾아가겠습니까?"

45. 부활
부활에 반대하는 주장, 즉 부활이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논의를 살펴봅시다.
한 가지 논의는, 4복음서의 부활 기사는 모순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고 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에루살렘 근처라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반대론을 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무덤에서 말을 전해준 사람들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즉 마가복음에서는 무덤에서 말을 전한 사람은 "한 젊은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젊은이"가 무덤에서 말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무덤에 있는 사람은 "천사 하나"라고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두 천사"입니다. 이와 같은 모순이나, 틀림이 있는 이런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확실히 모순이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어떤 드라마에 있어서 표현의 문제이고, 사건의 외관 문제일 뿐이지, 우리 주님의 부활의 중심 내용에 관한 문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현대적인 비유로써 생각해 봅시다. 세 사람이 축구 구경을 갔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를 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한 사람은 갑 팀이 꼭 이겼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을 팀이 꼭 이겼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그 아무개 선수는 매우 지저분한 선수라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 선수가 다만 지나치게 열심히 싸우더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에 의하면, 심판이 훌륭했다고 보는데 반해, 한 사람은 때려 죽여야 한다고 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러 가지 생각이나 평가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득점입니다.
사람들은 드라마의 형식을 변경할 수는 있으나, 얻은 점수만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부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보는 관점 외관, 그것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이라는 사건은 시종 불변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한 젊은이"가, 요한복음에는 "두 젊은이"로 되어 있는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마가복음은 주후 60년경에, 요한복음은 주후 1백년 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이야기가 40년간, 이야기 또 이야기되었다고 하면, 도중에 그 이적에 대해서 점점 구체적이 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인간의 본성에 의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는 시종 변하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은행가 제임즈 호프 심프슨경과 수표 및 수표의 싸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동일한 사람에 의해 싸인 되었다."고 생각되는 두 장의 수표를 손에 넣고, 이것을 햇볕에 비추어 보고, 받쳐보고서, 전혀 틀림이 없고 1미리도 어긋남이 없을 정도로 두개의 싸인이 일치될 경우면, 그 중의 하나는 위조수표라고 믿어도 틀림없습니다. 누구도 자기의 이름을 똑같이 두 번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학교의 교사는 두 소년이 똑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을 듣거나, 대학에서 두 학생이 꼭 같은 답안을 제출했을 때는 이것을 진실이 아닌 공모나 합작인 것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이야기란 각각 다른 사람에 의해 이야기될 때, 반드시 틀리게 마련입니다.
그 틀림과 모순이야말로 진리라는 증거입니다.  부활의 이야기가 사람의 창작이었다면, 계산이 조금도 어긋남 없게 조화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의향대로 계산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그 진실을 전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모순 때문에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William Barclay, A New People's Life of Jesus

46. 부활은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을 완성으로 이끄는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결국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언젠가 키에르케고르는 그와 같은 생각을 부드럽고 편편한 돌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편편한 돌을 연못의 수면 위로 던지게 되면 춤을 추듯 물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더니 물속으로 쑥 가라앉아 버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면이 잔잔해집니다. 마치 이것은 사후의 소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는 '호흡'이라는 희곡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막이 오르면 쓰레기가 잔뜩 어질러져 있는 무대가 등장합니다.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아기의 첫 울음 소리로 시작한 연극은 한 노인의 임종의 헐떡거림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막이 내려옵니다. 여기서 베케트가 말하고자 한 요지는 인생은 허무하고, 존재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벧전 1:3, 4). 이것은 한 마디로 소망을 의미합니다.

47. 고난 속에 잉태되는 부활의 소망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부활이라는 생명을 잉태시키고 계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운행의 법칙이다.
우리는 그 고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쓰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에 함께하시고 이 고난을 부활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때 인간은, 역사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 아브라함 마슬로우는,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느냐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이겨 왔느냐와 비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없이 위대한 사람을 생각하기 어렵다.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부활의 진리가 숨어 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기 자신에게, 가정에, 교회에, 민족에게 어떤 시련이 와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하나의 깨어진 꿈은 모든 꿈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의 부서진 희망은 모든 희망의 마지막이 아니다. 폭풍우와 비바람 저 너머로 별들은 빛나고 있으니 그대의 성곽이 무너져 버릴지라도 다시 성곽 짓기를 계획하라. 수많은 꿈들이 재난에 무너져 내리며 고통과 상한 마음이 세월의 물결 속에서 그대를 넘어뜨릴지라도 그래도 신앙에 매어달리라. 그리고 그대의 흐르는 눈물 속에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기를 힘쓰라.

48. 생명과 부활
몇 년 전에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실습용 대상으로 기증하겠소.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길 바라오.
이것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오. 부모님의 평생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소." 이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은 웃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죽음이 닥치면 죽음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와 철학과 사상들은 죽음을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 예찬론까지 등장하기도 합니다. 죽음에 관한 미화는 죽음에서 도피하고 싶은 인간 본능의 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필연적이며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시키기 때문에 아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는 "예수님의 최대 업적은 그분이 부활의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이고 그 메시지로 다시 사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삶이 당신을 좌절과 어두움과 절망에 몰아넣더라도 주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 다가오십니다. 주께서는 무덤 저 건너편의 놀라운 소망을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삶을 치유하시며 나를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이것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죽음의 극복은 불로초를 먹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기독교의 특성은 영혼의 불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로 인해 모든 종교나 사상을 뛰어넘습니다.

49. 부인할 수 없는 부활의 증거
로마의 바티칸 궁정에는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 (Picta)라는 조각품이 있다. 그 작품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시체를 성모 마리아가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그런데 여러 해 전에 이탈리아의 어떤 정신병자가 그 조각을 파손시켰기 때문에, 또 다시 많은 경비를 들여서 보수하였고 지금은 유리 상자 속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그 조각품은 미켈란젤로가 죽기 이틀 전까지 조각했다는 걸작품이다. 이를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그 앞에 꿇어앉아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만약 그 작품의 모습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일생이 끝났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라 할 수 없다.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슬픔의 종교요 무덤으로 끝나야만 하는 종교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므로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 구원의 종교임을 증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부활에 대한 기사로 가득 차 있다. 부활의 진리를 기독교의 중심 되는 내용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며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다.
람세이(A.M.Ramsay) 교수는 말하기를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 복음은 결론이 없는 복음일 뿐아니라 전혀 복음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아놀드 (Thomas Anold) 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 역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때 영국의 무신론자였던 리틀스톤(Girbert West)는 자기들이 무신론을 주장하는데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의 변화였다. 그들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변정하기 위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 연구한 뒤에 두 사람이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도 더 이상 이에 대한 반증을 할 수가 없네.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해서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우리들이 죄인임을 잊고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할 수밖에 없네."라고 고백하였다는 것이다. 부활사실을 부인하기 위하여 연구하던 무신론자들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처럼 부활을 부정하는 세력은 다 망했으나 부활의 진리를 증거 하는 교회는 언제나 살아 역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50. 묘비 없는 칼뱅의 무덤
장로교의 창시자인 장 칼뱅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다.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장로교회를 창립하자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장로교회를 세웠고 다른 많은 지도자들도 유럽 각지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웠다. 칼뱅이 죽을 때 남겼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바로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장 칼뱅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놓았다. 그래서 칼뱅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장차 부활의 새 아침이 올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칼뱅처럼 아름다운 영적 유산을 이 땅 위에 남기고 가야겠다.

51. 한 가지 소식
영국의 계관시인 테니슨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아름다운 언어로 찬양한 시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시골길을 가다가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일하는 중년 부인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 좋은 소식이 있나 보죠?” 테니슨이 묻자 부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한 가지 소식밖에 모른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테니슨도 말했다. “부인, 그것은 오래된 소식이자 새로운 소식이며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면 그리고 그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넉넉히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당신의 삶속에 진정 부활의 기쁨이 있는가?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새”(마태 28:8)

52. 반박의 글을 쓰다.
영국의 한 젊은 변호사 프랭크 모리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박하는 글을 쓰기 위하여 세밀한 조사와 연구 끝에 놀랄만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는 연구를 종합하여 책을 썼는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송두리째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책이 "Who moved the stone" "누가 돌을 옮겼나?"라는 유명한 책이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이론적으로 따져 본다고 하여도 그것은 확실한 사실인 것이다. 예수 부활이 사실 무근이라면 십자가에 죽인 바리새인들이 큰 증거를(세워) 선전했을 것이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부활신앙은 우리들에게 새로워지는 기대감에 찬 생활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그들을 무력하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낡음의 문제입니다. 험난한 세파에 치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낡음의 관념에 시달리는 이들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새로움을 창조해가는 힘을 줍니다. 다른 교리와는 달리 부활신앙은 지하수처럼 우리 인격의 저변을 흐르면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는 생기의 근원이 됩니다.

53. 부활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 : 20)
1973년 부활절 아침. 이디 아민대통령의 독재에 시달리던 아프리카 우간다의 한 교회. 셈판기목사는 7천여명의 신자들에게 부활절 설교를 했다. "부활의 주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 정의의 편에서 끝까지 싸우자." 설교를 마치고 목양실로 돌아온 셈판기 목사에게 5명의 괴한이 침입했다. 그들은 목사에게 총을 겨루었다.
그 때 셈판기 목사가 말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날이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소. 다만 당신들을 위해 2분 동안만 기도하게 해주시오." 셈판기 목사는 5명의 괴한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들은 자신이 범하고 있는 죄를 알지 못하나이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옵소서."
한참 기도를 하고 눈을 떠보니 괴한들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괴한의 우두머리가 총을 거두며 말했다. "목사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기도가 괴한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모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극복이고 해방이다. 목사의 삶은 육신에 대해 죽은 자의 삶이다.

54. 빛을 사모하는 태아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데살로니가전서 5 : 5-6)
갓난아기는 보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분만할 때 쓰이는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미루어, 이것은 능히 일반적인 상식으로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램프와 투명조명을 갓난아기에게 비추어 댑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못 본다고 믿으니 사정 볼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조명은 분만을 담당하는 의사들에게는 분명히 편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에게는 어떠할까요? 아기의 머리가 겨우 엄마의 질강을 빠져 나오려 할 때, 동체는 아직도 모체 안에 있는데, 아기가 눈을 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간 이내 감습니다. 갑자기, 그리고 꼬옥, 그리고는 그 자그마한 얼굴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모습을 하며 귀에 익은 울음을 터드립니다. 만일 본다는 일이 광선을 파악하는 일이라면 아기는 분명히 봅니다. 마치 식물이나 꽃이 빛을 그리워하듯 아기도 본능적으로 빛을 사랑하고 그리워합니다. 만일 임신 6개월의 여성이 맨몸으로 태양광선을 쏘인다면 뱃속의 아기는 그것을 황금빛 아지랭이로 볼 것입니다.

55. 부활의 증거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절대 사건이었다. 『일요일 아침 천하의 교회 종소리를 듣는다. 저것은 로마의 사형수 나사렛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이 말은 니이체의 말이다. 니이체의 이 말은 공허한 말이다. 예수의 부활은 태양 같은 증거들이 있고 진실한 증인들이 있다.
1.역사(歷史)의 증거(證據)
인류사는 AD와 BC,즉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의 연호를 쓴다. 예수그리스도 사건이 역사의 분수령이고 원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 그리스도 사건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2.성경의 증거
책 중의 책이고 영원한 생명의 책인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예수가 중심이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전 15:3)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 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절기 때 운집한 수백만 유대인들에게, 유대 천지에 그것을 공언 했다. 예수님의 사역 중 죽은 자를 살리신 증거가 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사로를 살려주셨다. 부활의 능력을 실증하신 것이다.
3.사도들과 제자들의 증거도 있다.
사도행전의 사도 자격 요건은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이어야 했고 (행1:22)사도행전의 기독교인은 부활의 도를 전하는 사람들로 통했다. (행4:2)이들은 거짓말을 못해 순교한 사람들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기독교 박멸운동을 하던 사람인데 부활한 예수를 만난 이후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4.원수들의 증거가 있다.
예수님의 처형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국인 로마의 국권력이 개입되어 있었다. 두 국권 당국이 골치 아팠던 것은 산 예수보다 부활한 예수 운동이었다. 그것을 초전 박살내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의 시체를 찾아 공개하는 일인데 그 반증을 제시할 수 없었다.
5.군중들의 증거가 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처형 사건은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었다. 그가 나귀 타고 입성할 때 예루살렘 군중들은 열광적으로 호산나를 연호했다. 그랬던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사형수로 처형되는 것을 보고 얼마나 허탈했겠는가? 같은 군중이 불과 50일 이후 같은 도시에서 그 예수가 부활했다는 메세지에 3천명,5천 명씩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바로 심증이 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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