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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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으로 이끄는 무관심
(눅 16:19-31)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눅 16:22-24).


 여기 본문에 나오는 한 부자는 사람을 죽였다든가 도둑질을 했다든가 하는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은 없는데 죽은 후에 그 영혼이 불꽃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한편 그 부자의 집 대문간에서 빌어 먹으며 허네를 앓던 거지 나사로는 죽은 후 아브라함의 품(천국을 묘사)에서 행복을 누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얼핏 보면 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 가고, 거지 나사로는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처럼 보입니다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부자는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잘 살면서도 꼭 관심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못한 무관심의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죄에는 실제적으로 악한 일을 범하는 적극적인 죄가 있는 동시에 마땅히 해햐 할 선한 일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달란트를 받아서 땅에 묻어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께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과 저주를 받은 사람의 죄처럼 말입니다. 부자가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꼭 관심을 가졌어야 할 것에 대해 무관심했습니까?


 1.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 했습니다.

 자기는 좋은 집에서 자식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산해진미를 먹으며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하면서도 자기 집 대문간에서 먹다 버린 쓰레기를 뒤져 먹으며 헌데를 앓으면서 고통을 당하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 부자는 전혀 무관심 했습니다. 자기 집 대문간에서 날마다 얻어 먹는 이 거지를 자기가 돌봐줘야 했었는데도 무심하게 보아 넘겼고 그가 헌데를 앓아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으며 고통과 비참함을 당하는데도 도와 줄 생각을 하지 않고 무관심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하나 잘 먹고 잘 살면 되었지 다른 이웃의 불행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해 왔던 부자 청년은 돈만 알고 이웃의 불행에 대해서 무관심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을 해 주셨건만 이 청년은 돈에만 관심이 있었지 가난한 자들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들도 나 하나 편안하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내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안될 이웃이나 그들의 일에 대해서 무관심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꼭 돌봐줘야 할 고통받는 자, 병든 자에 대해서, 심지어는 부모 형제에 대해서까지 무관심하지 않습니까?

 결국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그 부자는 죽어서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고,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에 받들려 천국에 가 복락을 누리게 되어 서로 입장이 뒤바뀌었습니다. 그 부자는 너무나 뜨겁고 목이 타며 고통스러워 자기집 대문간에서 얻어 먹던 거지 나사로를 우러러 바라보면서 손가락 끝에 물 한방울만 찍어다가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혀로 남을 위로해 주고 도움을 주는 말은 하지 않고 남을 멸시하고 고통을 주는 말, 교만한 말만 했을 것입니다. 또 혀로 많은 여자를 농락하고 희롱하는 죄를 짓는데만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혀로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부자는 끝내 불꽃 속에서 그 혀가 타 들어 가는데도 물 한방울 얻어 축일 수가 없는 영원히 불행한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 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의 입장이면 어떨까? 이 부자는 자기집 쓰레기통만을 뒤져 먹고 사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 그도 같은 사람인데 한 번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에는 그 입장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불행을 당한 사람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대 그를 이해할 수도 있고 사랑을 베풀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수를 하거나 범죄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미워하거나 정죄하기에 앞서서 그 사람의 환경이나 입장이 오죽했으면 그런 죄를 지었을까 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듯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것이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는 첫째 단계라고 봅니다. 이해도 사랑도 여기서부터 생긴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도 입장과 형편을 그 사람과 바꾸어 생각하라는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어느 기차 안에서 아빠가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고 아기를 안고 진땀을 빼며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계속 울어댔습니다. 그때 한 손님이 화를 버럭 내면서 '여보슈, 그 아기 엄마한테 좀 갖다 주구려 어디 시끄러워 살겠소?'하고 말했더니 그 아빠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여보시오 손님, 미안합니다. 나도 아기 엄마한테 갖다 주고 싶소만 어제 이 아기 엄마가 갑자기 죽어서 지금 시체를 뒷칸에 싣고 가는 중입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기차 안은 엄숙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잠시 후에 화를  내었던 손님이 얼른 일어나 그 아기를 받아 주면서 '내가 봐 줄테니 가서 좀 쉬십시오'하고 도와 주더랍니다.

 남편은 하루종일 빨래하고 애보고 밥하느라 수고한 아내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아내는 남편이 하루종일 윗사람들의 논치를 보며 땀흘리고 수고하고 돌아온 것을 생각해 주고, 시어머니는 철없는 며느리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고, 며느리는 기껏 아들 키워 사랑을 몽땅 빼앗긴 것 같은 심정의 시어머니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고 사장은 사원들을, 사원들은 사장의 입장을 서로 바꾸어 생각해 준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살기 좋고 아름다워지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 부자와 같이 이웃에 대해 무관심한 자가 되지 맙시다.


 2. 내세에 대해서 무관심 했습니다.

 이 부자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고 풀잎의 이슬같은 이 세상만 알았지 영원한 사후의 세계, 내세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성경에 인간의 생명은 아침 안개와 같다고 했고, 풀잎의 이슬과 같다고 했고, 속히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길게 살아 100년을 산다고 해도 이는 내세 영생에 비하면 바다의 물 한방울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한알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그림자와 같은 세상만 알고 육신의 사는 것만 알았지 내세 영생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습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죽은 후에야 내가 알게 무엇이냐 하고 날마다 썩어질 육신의 쾌락만 추구하고 살았지 영혼이 영생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비록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온 몸에 헌데를 앓으며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아 주는 신세였지만 하나님을 믿고 내세를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세상의 삶이 괴롭고 육신이 고통스러우니까 내세와 영생을 더 바라보고 소망을 삼고 살았겠지요.

 그러다가 부자도 죽고 거지도 죽었습니다. 죽음은 빈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법입니다. 이 부자는 장사 지낼 때 많은 조객들도 오고 칭찬하는 사람도 많고 명주 수의를 입혀 두터운 관에 넣어서 무덤을 작은 산만하게 만들 정도로 굉장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사후의 문제, 내세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구덩이에 떨어져 슬피 울며 고통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가마니에 둘둘 말려 시체가 치워 버려지는 신세가 되고 누구하나 슬퍼하는 사람도 없이 장사 지냈겠지만, 이 나사로는 결국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영생 복락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생애를 보냈으나 하나님을 믿고 내세를 위해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내세에 대해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첫째, 영생의 본능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짐승이나 식물에게 없는 영생을 사모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전 3:11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능이 있으면 그 본능을 만족시킬 대상이 있는 법입니다.

 사과가 먹고 싶다는 것은 사과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녀가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연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겨울에 앙상하게 죽은 것 같던 나무가 다시 살아나고 콩이나 옥수수 씨앗을 심으면 다 썩어 죽는 것 같은데도 다시 살아 수 십배 열매를 맺는데, 만물의 영장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한 번 죽음으로 끝이겠습니까? 분명히 내세와 영생이 있습니다.

 셋째, 경험자들이 있습니다.

 며칠간 혹은 몇 시간 분명히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도하다가 입신 상태에서 천국과 지옥을 본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넷째, 성경이 말씀해 줍니다.

 수천년간 변함없는 진리로 증명되어 오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를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 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바로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보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믿음과 영생은 병행하는 것입니다(요 1:12, 요 5:24, 요 6:47, 요 14:1-3, 6). 롬 10:10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순간에라도 예수님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영생을 얻고 천국은 당싱의 것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깨달아 항상 이웃과 하나님의 나라인 내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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