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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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예화 모음

 




영생의 소망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일이 뭔데?"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게 내일이야."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 말을 듣고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 메뚜기는 어느 날 개구리와 함께 놀았습니다. 개구리는 "날씨가 추워지니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내년은 겨울이 끝난후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 오는 거야." 그러나 메뚜기는 개구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밖에 모르는 사람은 "영생이 뭔데?"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때 영생이 있음을 압니다.기독교의 복음에서 영생에 대한 소망은 기독교신앙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삶이 결코 현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에게는 소망이라는 백신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고 내일보다 모래가 더 좋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 소망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는 것으로 영생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만 하는 데서 그치시는 지요? 아니면 그 사실을 누리면서 사시는지요?

 

하해룡 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의 장모가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그 때의 일만 생각하면 장모의 훌륭한 신앙고백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온 장모가 심한 각혈을 하여서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 진찰을 한 결과 다발상폐암이라는 무서운 병으로 진단되었습니다. 의사는 3개월 이상을 견디기가 힘들 것이라고 했으나 믿음과 인내로 일년을 견뎌내고 그 고통 중에서도 회갑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시골에 내려가서 장모님의 회갑예배를 참여하고 올라온 어느 수요일 밤 설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1시에 벌떡 일어나 장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수화기를 통해서 "하목사인가, 나는 지금 숨을 모두어 쉬는 중일세. 지금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일세, 목사일 잘 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만나세"라고 말하는 장모의 숨찬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어머님 기도드리겠습니다. 수화기를 꼭 잡으십시요"라고 부탁드린 후 "하나님 아버지 어머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서실 때까지 십자가를 놓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를 마치자 그녀는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녀의 신앙고백을 과연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는 영생의 소망을 주는 종교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3:1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10:28),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2:7) 등의 여러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요일2:25)

 

그러므로 우리는 무덤 저편에 있는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삽니다. 우리가 그리던 주님을 모시고 기쁘게 찬송 부르며 살 것이요, 세상에서 헤어졌던 성도들을 만나 기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요즘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는데 관하여 도움을 주는 새 과학 이야기가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 "사회안전보장"에서 제안한 것으로 냉동방법이 있는데 나이 많은 사람이나 병든 사람을 지금은 의학이 그 병을 고칠 수 없고 노인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없지만 과학이 좀더 발달하게 되면 그런 병을 고치고 노인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니 그때까지 냉동시켜 놓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기관이식인데 이미 실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연구가는 사고당하여 죽는 사람의 건강한 부분을 잘라서 그것을 기관은행에 잘 보존해 놓았다가 그 부분이 필요한 사람에게 공급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너럴 일렉트릭의 연구책임자 다드리지 코올은 앞으로는 인간의 머리까지도 완전히 부속품 바꾸듯 교환하는 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과학자들은 부인과 아이들의 유전자를 조사하면 이미 죽은 남편의 유전자를 알 수 있으므로 소급해서 남편을 만들 수 있다고까지 말하며, 예일 대학의 아더 W.갈스턴 박사는 부유한 사람의 세포를 영구적 개발 실험실에서 생성해 낼 수 있으므로 그 부지와 꼭 같은 복사 인간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이론이 가능하다 해도 인간의 생명을 영원히 연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기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생하는 길을 열어주셨고 그의 표본을 그리스도로 하여금 부활로 보여 주셨으니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영생할 소망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가 보증이십니다.

 

부활을 통해서 영생의 소망을 주신 주님, 그 소망 중에 살다가 주와 더불어 영생하는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2)

 

한태완 지음, 요나출판사, "기쁨의 샘" 중에서

 

 

소망의 의미

 

소망은 고난이 없음을 가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소망은 그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으며 또한 마음의 상처 역시 곧 치유되어 마침내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내리라는 것을 믿는 마음이다. 우리를 어둠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빛으로 인도해 내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그 믿음은 바로 우리의 힘의 원천이며 동시에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다. 믿음은 곧 고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그 고난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으며 마음의 상처 역시 곧 회복되리라는 것을 믿는 마음이다. 소망이야말로 삶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는 소망을 잃었노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염려할 필요가 없다. 소망의 불꽃은 다시 타오를 수 있다. 주안에서 소망을 품는 자들에게 주님은 복을 주신다. 소망을 되찾을 수 있다. 이 말은 곧 자신의 뜻을 다시 한 곳에 모아, 주를 섬기면 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은 소망 없는 끝을 바라볼 뿐이지만, 크리스천은 끝없는 소망 가운데 기뻐한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뒤엉켜 있는 우리 삶의 실타래를 풀어내실 수 있다. 이 뒤엉킨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 채 그대로 내버려두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며 기쁨인가! 소망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예화포커스

 

 

하루살이의 소망

 

가끔 병원에 가보면 언제 그 병상을 떨치고 일어날지 모르는 지병을 안고 외롭게 투병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대하게 됩니다.

오래 전에 내가 만난 28세의 청년도 그러했습니다. 암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다 못해 모르핀을 맞으며 병상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중환자실에서 눈을 감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가족들은 처음에 그 형제에게 암이라는 것을 숨겼습니다. 가슴에 잇는 혹을 떼냈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제 아물면 퇴원한다는 말로 3개월을 속이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목사인 저는 그 사실을 알고 거의 매일같이 그를 방문했습니다.

제가 예수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잘 생기고 똑똑한 그 청년은 도무지 마음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이제 퇴원하면 제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그러니 조금 더 지나고 나서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고려해 보겠어요. 의사 말로는 혹을 떼냈으니까 한 달만 지나면 퇴원할 수 있대요."

그의 포부를 듣는 그 순간에 나는 얼마나 깊은 인생의 비애와 고통을 느껴야 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활보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이와 같이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미 우리는 죽음의 운명을 안고 사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죽음을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이 지극히 약한 존재란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

한태완<예화포커스>

 

 

소망의 빛

독일의 나치수용소에 수감됐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네덜란드의 코리 텐 붐(18921983) 여사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기차가 캄캄한 터널 속으로 들어가 어두워졌다고 해서 기차표를 찢거나 기차에서 뛰어내려선 안 됩니다. 조용히 앉아 기관사를 믿고 기다리면 잠시 후 터널 밖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공포와 절망이 나를 둘러싼다고 해도 인생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이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삶엔 고통과 죽음이 깃들어 있지만 즐거움과 평강도 있습니다. 이것은 빛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빛이 없으면 흑암(黑暗)이지만 빛이 있으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영원한 빛은 무엇일까요. 다윗은 시편 27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고백했습니다. 수많은 원수에 둘러싸여 주변이 어둡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하나님이 계시기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인생의 길이 캄캄하게 보일 때라도 빛만 있으면 길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소망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며 그 빛을 세상에 전하는 강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권병훈 목사(상계광림교회)

<겨자씨/국민일보>

 

 

소망의 힘

프레드릭 왓츠(G. Frederic Watts)의 명화, ‘소망(Hope)’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둥그런 지구 위에 약하게 보이는 눈을 수건으로 싸맨 소녀가 남루한 옷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소녀의 손에는 낡은 하프가 들려져 있는데 여섯 줄은 끊어지고 단 한 줄만 남아 있습니다. 소녀의 뒤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별 하나가 희미하게 비취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남북전쟁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었다고 합니다. 소망(所望)이라는 말은 사전에서 어떤 일을 바람. 또는 그 바라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집니다. 소망은 긴장감과 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태도,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이 가능케 될 것임을 믿는 태도, 인내심을 가지고 무엇인가 기다리면서 바라는 태도, 무언가를 바라며 기다리는 태도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태도와 누군가를 향한 신뢰의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삶에 대한 소망적인 태도는 타인과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후 1년 동안 엄마가 아이에게 보여 주는 행동을 통해 아이는 소망에 대해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안락한 잠자리, 따뜻한 음식 등 신뢰할 만한 행동을 보여주면 아이는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며 자신은 신뢰를 받을 만한 존재라고 느끼게 되고 신뢰감을 통해 아이의 마음속에 소망이 깃들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삶의 기본 덕목인 소망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며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이고,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소망의 힘에 대하여 1950년 대 중반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쥐를 대상으로 실험하였습니다. 연구 책임자였던 커트 리히터 교수는 긴 유리 그릇에 실험용 쥐를 넣고 그 안에 물을 천천히 부었습니다. 쥐가 물속에서 얼마 동안 생존하는가를 관찰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실험 결과, 물의 온도와는 상관없이 물을 붓고 15분 정도가 지나자 헤엄치는 것을 포기하고 죽음에 이르는 쥐가 생겼습니다. 어떤 쥐는 무려 81시간을 버티기도 하였습니다. 쥐의 수염과 얼굴에 있는 털을 제거하고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실험보다 쥐의 생존 시간이 현격히 줄었고 여전히 40-60시간 정도 버티는 쥐도 있었습니다. 세 번째 실험은 실험용 쥐가 아니라 덫에 걸린 야생 쥐를 잡아 실험해 보았는데 이번에는 예외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죽었습니다. 네 번째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쥐들이 헤엄을 치며 안간힘을 쓸 때 밖으로 살짝 빼 잠깐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런 절차를 반복했더니 놀랍게도 쥐들은 평균 60시간을 버텨 냈다고 합니다. 어떤 쥐도 15분 만에 포기하지 않았답니다. 리히터 박사의 설명은 쥐의 수염을 자르고 얼굴에 있는 털을 제거하자 쥐의 생명 연장의 꿈이 짧아졌다는 것입니다. 야생쥐의 경우는 덫에 걸린데다 수염과 얼굴이 있는 털까지 잘리고 여기에다 꼼짝달싹을 못하게 되었기에 쉽게 삶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쥐들은 절망에 찌든 상태 즉 피할 길도 도망치거나 싸울 가능성도 찾지 못하는 지독한 절망에 빠지게 될 때 포기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잠깐 자유를 주어 소망을 불어 주었을 때 포기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살기 위해 열심히 헤엄을 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는 위르겐 몰트만은 소망이 없는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정신분석학자 빅톨 플랭클(Victor Frankle)는 이라는 정신분석학자가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나치 치하의 수용소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마음에 분명한 희망을 가진 사람, 분명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 사랑하는 애인이나 아내,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 돌아가서 자신이 꼭 이룩해야할 일이 남아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은 먹는 것으로 사는 것도 아니요, 오직 희망으로 산다. 오직 기다림으로 산다"라고 말합니다. 소망은 실제적인 힘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로 희망에 대하여 체계화를 시도한 미국 캔자스 대학의 심리학자였던 릭 스나이더(Rick Snyder)는 대학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희망의 크기와 그 전의 수능(SAT) 점수, 그리고 대학생활에서의 학점, 졸업 후 성취 정도 등을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학생들이 대학 생활에서 좋은 학점을 받고 잘 적응하는지를 예측하는 것은 수능 점수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희망의 크기였다고 합니다. 대학 시절 학점이 높은 사람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졸업 후 더 많이 성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희망의 크기가 목표 설정과 성취, 노력에 중대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성공의 비결은 소망을 잃지 않는데 있다"고 했고, 헬렌켈러는 "참된 소망은 모든 일을 가능케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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