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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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도리

4:14-16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홀로 거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하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더불어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진정으로 사람을 만나고 교재하기가 참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감추고 가면을 쓰고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위선의 가면을 쓰고 삽니다. 겉으로는 양심 바르고 모든 면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처럼 살지만 그 속은 썩을 대로 썩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따뜻한 모습으로 사랑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지만, 그 안에 살인마가 들어있어 가지고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이고 그래도 양심에 가책이 없이 살아가다가 붙잡혀 감옥에 간 사람도 있습니다.

 

이번에 자기가 고백했잖아요. 자기가 열다섯 사람을 죽였다고.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그 사람을 착한 사람, 조용한 사람으로만 기억하지 그를 살인마로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진정 나를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외로운 것입니다. 외로워요.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진정으로 얘기할 대상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 외로운 인생길에서 우리의 속마음을 다 알고 우리의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를 용납하고 받아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구주가 되시고 참된 친구가 되시고 동행자가 되어 주시고 위로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일생을 이끌어가는 사랑의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 은혜에 감사한지.

 

1.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

 

성경은 먼저 예수님이 우리에게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히브리서 414절은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죄를 짓고 속죄함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제사장이 있어서 그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대신 그 속죄의 제사를 드려 주었습니다.

 

누구나 죄를 지으면 자기 집에서 가장 아끼는 짐승을 데려다가 제사장 앞에서 잡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자기가 보면서 "내가 죄지으면 안 되는데" 하며 그곳에서 그 피를 뿌려 속죄의 제사를 받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 짐승을 자기가 보는 앞에서 칼을 들어 죽이고 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는 죄짓지 않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돌아서서 또 죄를 짓고, 또 사랑하는 양을 가져다가 염소를 가져다가 또 피를 흘리고 또 피를 흘리고 또 피를 흘리고. 이것이 구약의 죄 사함의 제사였고 특별히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이 1년에 단 한 번 성막 안에 있는 성소 안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피를 뿌려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사함의 문제는 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을 때마다 또 죄 사함 받고 또 죄 사함 받고 또 죄 사함 받는 일회적인 속죄에 불과했습니다.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피의 제사를 정해놓으신 것은 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누가 죽어야 되는데 짐승이 대신하여 죽은 것입니다. 집에서 애완용 개를 기르시는 분이 많이 있죠? 여러분이 죄지을 때마다 개가 죽었다면 애완용 개가 살아남지 못하고 씨가 말라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죄를 많이 지으니깐.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서. 그 예수님이 친히 대제사장이 되시고 친히 속죄의 양이 되어 주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지성소에서 성소로 들어가려면 휘장이 있는데 이 휘장은 얼마나 단단히 짰는지 양옆에서 소가 10마리씩 끌어도 휘장이 찢어지지 않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실 그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쫙 찢어져 내렸습니다. 마태복음 2750, 51절은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1년에 단 한 번 그것도 대제사장이 자기의 죄를 다 사함 받고 정결한 모습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던 그 자리를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자신이 속죄 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 휘장이 열린 것입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담이 무너졌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밖에 나가지 못했던 그 지성소에 우리는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 지금도 매일 순간마다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무 때나 원할 때 대통령을 자유롭게 만난다면 큰 특권일 것입니다. F.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이 강연회를 하는데 사진 한 장이 찍혔습니다. 강연회를 하는 테이블 밑에 그 아들이 기어 들어 와서 장난치고 있었어요. 아들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죄 덩어리인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언제나 나아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할렐루야. 우리는 그 은혜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가까이 가면 몸이 데고 화상을 입잖아요. 하나님이 워낙 거룩하시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그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는데 예수 보혈의 공로로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으니 이것은 은혜중의 은혜이고 특권 중의 특권인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2.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그런데 그 대제사장 되신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에 대하여서 415절은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할렐루야. 전능하신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잠시 잠깐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셔서 자라시며 모든 인간의 고난을 친히 경험하셨습니다. 배고플 때 배고픔을 느끼시고 슬플 때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46절에 보니까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요한복음 1135절에 나사렛 무덤 앞에서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와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30살이 되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러니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태어난 형제들이 미쳤다고 그랬습니다. 늘 혼자 나가 있더니 미쳤다고 그랬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정신병자가 나왔다고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몰려가서 그 말씀을 들으니깐 당시 지도자들이 그를 미워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어떻게 하면 그를 죽일까 모여서 연구를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시고 끌려가셔서 채찍질을 당하시는데 그 채찍 끝에는 뼛조각이, 날카로운 것이 붙어 있어서 때릴 때마다 살점이 뜯어져 나갔습니다. 온 등허리가 다 뜯어져 나갔습니다.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어디 손톱만 찧어서 손톱 하나 빠져도 막 아프다고 악 이러고 다니는데 그 등허리가 다 파여서 피를 흘리시고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면서 여러 번이나 쓰러지시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 쓰고 십자가에 달려 손과 발에 못 박혀 피 흘리며 돌아가신 예수님.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다 느끼신 것입니다. ?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하여서.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하기 위하여서. 주님이 그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무시한다고요? 여러분을 짓밟는다고요? 예수님은 그보다 더한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사야 533절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친히 경험하신 예수님.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이 아시는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처럼 외롭게 사신 분이 없었을 것입니다. ? 아무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누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겠습니까.

 

저를 여러분이 매일 주일마다 보다가 어느 주일에 딱 서서 제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믿겠습니까? 이 목사가 돌았구나, 돌았어. 물론 저는 안 그럴 거지만.

 

누가 예수님을 이해했습니까? 누가?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그나마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잉태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 그 누구도, 그 누구도, 그 누구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수제자 베드로마저도 3번이나 부인하고 예수님께 등을 돌린 사람입니다. 그 외로움을 주님이 겪으셨습니다. ? 우리가 겪을 외로움을 주님이 대신 겪으시기 위해서 그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밤 잠자지 못하고 눈물로 베개를 적실 때 주님이 곁에 오셔서 우리를 꼭 안아주시면서 "힘들지,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외롭고 슬플 때,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고 그렇게 절망할 때 주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히브리서 52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나그넷길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연약함과 아픔을 아십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져 아파 쓰러져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비판의 돌을 던질 때 주님이 막아주시면서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아. 나는 너의 일생을 함께할 거야."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 내버려 내동댕이쳐진 절망의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 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할렐루야!

 

3.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

 

셋째로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긍휼히 보십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에 대해서 히브리서 416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나아가서 우리가 절망에 처했을 때 상처 입고 쓰러져 몸부림치고 힘들어할 때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와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아무에게도 말 못 할 고민에 처했을 때 아픔 가운데 상처 가운데 어찌할 바 모르고 주저앉아 있을 때 그때가 바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인 것입니다.

 

사람이 주는 위로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의 긍휼하심이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제가 너무나 힘들어서 더 이상 살기 원치 않습니다. 주님 저를 살려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바디매오가 있습니다. 늘 더듬으며 살아야 했고 거지가 되어 "한 푼 줍쇼" 하며 동냥을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귀는 밝아서 모든 이야기를 다 듣습니다. 듣다 보니깐 예수란 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모든 병을 고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평생소원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웅성웅성하더니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가복음 104748절은 설명합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갑자기 동냥하던 거지가 소리를 지르니깐 "시끄러워! 거지 주제에 무슨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조용히 해" 그러니깐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가는 얼마나 소리가 컸던지 주님이 발을 멈췄습니다. "저자를 내게로 오게 하라." 할렐루야!

 

주님이 가다가 걸음을 멈출 때까지 여러분 부르짖고 또 부르짖기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실 때까지 부르짖어야 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그 말을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주님이 나를 찾으신다고 하니깐 자기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인 겉옷을 내던져 버리고 예수님께로 달려갑니다. 그 겉옷은 비가 올 때는 우비가 되고, 잠잘 때는 자기에게 담요와 이불이 되고, 동냥할 때는 그 앞의 좌판에서 동냥 판이 되고, 보통 때는 방석이 되고, 이 하나 가지고 모든 것을 다하였는데 전 재산 이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평생의 소원이 눈을 뜨는 것. 그래서 그 겉옷 던져버리고, 주님께 달려갑니다.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오늘 그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부르짖고 또 부르짖어서 주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나의 소원은 이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401절에서 2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과가 그냥 나무에 심으면 덜렁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심고 5년을 기다려야 열리는 것입니다. 모르셨죠? 쌀농사는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두고, 포도도 매년 열리지만 나무마다 열리는 시기가 따로 있습니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올라가는데, 결국은 구름이 되어서 비가 내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부르짖음을 멈추기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응답 될 때까지 부르짖고, 또 부르짖고, 또 부르짖고, 또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을 지으신 분은 찰스 어스틴 마일즈라고 하는 분입니다. 이분이 1913년에 찬송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100년이 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 찬송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가장 절친한 친구 아담 가이벨이라는 친구 있는데 아담 가이벨은 8살 때 눈병으로 눈이 먼 그러한 사람입니다. 아주 가깝게 지내는 친구였는데 아담 가이벨이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참 믿음으로 잘 길러 가지고 좋은 신랑을 만나서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사위가 나가서 일하는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나서 사위가 죽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담 가이벨이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어찌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제가 저희 가정이 평생동안 주님을 잘 섬겼는데 어찌하여 나의 사랑하는 딸의 남편이, 나의 사위가 이렇게 불의의 사고로 죽을 수가 있습니까?"

 

큰 슬픔에 잠겨서 찰스 어스틴 마일즈를 찾아갑니다. "이런 찬송 하나만 지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찬송을 지어줄게" 이렇게 말을 했겠죠? "희망을 잃고 힘없이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피곤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쉼을 주고, 죽음의 침상에서 평안의 베개처럼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찬송을 하나 지어주오."

 

그래서 '그런 찬송을 지어야 하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날, 요한복음 20장을 펴서 읽다가 감동이 다가오는데 온몸이 전율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지는 것을 알고 울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데 마치 자기가 서서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것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왔다가 다 갔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 "우리 예수님 어디 갔지? 우리 예수님 어디 갔지?" 눈물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저쪽 뒤에 계시다 나타나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 당신이 우리 주님의 시체를 가지고 갔으면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어디 옮겨 놓았습니까?"

 

예수님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그 음성을 듣고 마리아가 눈을 떠보니 예수님의 오 주님하고 엎드린 그 감동적인 장면을 생각하면서 펜을 듭니다.

 

<찬송가 442(:499) : 저 장미꽃 위에 이슬>

 

(1)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2)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우는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3)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후렴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주님이 우리 일생을 동행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절대 절망하여 주저앉지 말고 외롭고 슬프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죽고 싶은 맘 들어도 주님 손 꼭 붙잡고 한평생 믿음의 전진해 나가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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