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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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구속사적 기록입니다. 또한 긴 방황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참 위치를 깨닫게 되는 인간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노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들이 요구하는 것과 그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 속에서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민들을 볼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그러한 가운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해야 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집을 떠나는 아들
   이 비유의 배경을 우선 살펴보면 아버지와 두 아들, 그리고 많은 품꾼과 큰 집 등이 나타나 있습니다.
   1) 둘째아들의 욕망
   집을 나가는 둘째아들에게는 분명히 자기 나름의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서면서 그 아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이었습니다. 그는 둘째아들이기 때문에 재산의 삼분의 일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참조, 신 21:17).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욕망은 아버지의 재산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자 도구였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아버지와의 이별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로운 독립, 그리고 물질과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으리라는 탐욕, 소유욕, 권력욕, 등이 그를 충동질하였던 것입니다.
   2) 욕망을 채우는 방법
   아버지 집에 있을 때 이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하기만 하면 무슨 일이라도 가능했습니다. 순종을 통하여서 얻을 수 있는 그 모든 행복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어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한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수족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러한 순종을 통하여서 아버지의 지혜를 얻고 아버지의 아들로서 화목을 이루며,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날 때 그는 이러한 모든 축복의 잔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어차피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아버지께 순종하며 사는 길과, 아버지를 거역하고 세상을 따르는 길, 이 둘 뿐이었습니다. 세상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흑백의 논리로 이원화되어서는 안 되지만 믿음 안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갖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러한 이원화가 당연히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날 때 그의 세계관과 인생관은 이러한 철저한 이원 구조로 짜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께 순종하며 사는 길을 포기하고 세상을 택하여 갔던 것입니다.
   3) 아들의 실패
   아버지 집에 있을 때 세상을 바로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한 이 아들은 철저한 실패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질은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분명한 물질관이 없었던 그는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13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허랑방탕하여'라는 뜻의 헬라어는 '아소토스'라는 부사로서 '무절제하게', '방종하게', '타락하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침내 재산을 다 탕진하고 그 나라에 흉년이 들게 되자, 그는 돼지를 치는 비천한 직업을 갖게 됩니다(15절). 돼지는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동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올바른 물질관, 세계관, 인생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천한 삶만이 주어집니다.

   2. 돌아온 아들
   1) 스스로 돌이킨 아들
   히브리적인 사고를 통해서 볼 때 '스스로 돌이켜'라는 관용어구는 회개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17절). 둘째아들의 회개는 과거의 풍족함으로 인한 상대적 빈곤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아버지의 집과 세상과의 비교에서 느끼는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18절) 표현하고 있습니다(참조, 시 51:4). 헬라어로 죄라는 개념은 '표적을 빗나감', '길을 잘못 들어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범한 실수는 아버지를 통해 풍족함을 버리고 스스로 풍족함을 누리려고 한 것이 첫째였고, 둘째로는 이원화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향하면서 아버지를 등진 것이었습니다. 그가 물질을 통한 풍족함을 얻기 위해서였다면 아버지 집 안에서 훨씬 더 완벽한 풍족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돌아온 아들
   18절 서두에 나오는 '내가 일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나스타스'로서 '죽은 자가 살아나다', '깨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8절도 회개의 일부분에 속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미 아버지께 돌아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는 부활한 것이며, 중생한 것입니다. 돌아가는 실제적인 행동이 20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더욱 철저한 순종의 위치로 돌아가겠다는 표현은 이미 18절에 선명히 나타납니다. 풍족함을 누리는 참된 길은 순종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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