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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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탕자의 비유 중 그 중간 부분으로 탕자를 맞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가 잘 집약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탕자의 비유가 자기의 분깃을 받아 아버지를 떠난 허랑 방탕한 탕자, 즉 '인류'를 설명하는데 데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기보다는 그 탕자를 맞으시는 아버지, 즉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관해서도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탕자를 맞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기다리시는 아버지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에게 상속될 분깃을 미리 받아 다시 돌아올 기약 없이 떠나갔지만 언젠가는 그 아들이 돌이켜 아비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들이 아비의 품을 떠날 때는 자신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음을 확신하고 떠났지만 그 자신에 찬 확신이 한낱 망상이었음을 언젠가 느끼고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으며,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1) 뉘우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뉘우친다는 것은 스스로의 잘못을 느끼고 깨닫는다는 것으로 허랑방탕함이 체질화되어 버린 이 아들에겐 웬만한 자극 없이는 어림없는 바람입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그 아들이 쉽게 자신의 우매함을 깨달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가 의지하는 재물이 다 떨어지고 나면 그가 뉘우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날마다 그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의 품을 떠난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뉘우치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2)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 아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아비 집을 떠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벌써 오랜 세월이 흐른 일입니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기다렸음을 본문 20절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의 품을 떠난 후 지금까지 천년이 하루같이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자비하신 아버지
   보통 세상의 아버지들 같으면 본문과 같은 탕자를 아무런 책망이나 나무람 없이 맞는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20절 하반절에 '아버지가… 측은히 여겨 달라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는 것을 볼 때 이 탕자의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사람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 과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즉 이 말은 탕자의 지난날을 묻지 않으셨다는 것으로 과거의 어리석고 추한 것들을 덮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한 마디의 책망이나 질책도 없이 우리의 지난날의 죄를 덮으시고 그것들을 묻지도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몰라서도 아니요 책망거리가 되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음으로 그 책망이 연기된 것도 아닙니다(참조, 겔 18:22). 그냥 아무런 조건이나 이유 없이 우리의 죄를 덮고 묻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2)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또한 이 아버지는 당연히 있을 법한 분노 대신 그를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말씀하는 것으로 세리나 창기나 살인자들처럼 율법으로는 용서받지 못할 이들, 즉 세리처럼 남의 것을 토색하고 창기처럼 세상에서 정조를 파는가 하면 살인자들처럼 이웃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하나님의 진노로 죽어야 하는 우리를 불쌍하고 측은히 여겨 우리의 생명을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탕자와 같은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불쌍히 여겨 지난날의 잘못과 허물을 묻지 않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3. 잔치를 베푸신 아버지
   탕자가 집을 나갈 당시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신을 신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배불렀을 것이며, 몸 여기저기를 금은으로 치장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헌 누더기를 걸치고 굶주려 돌아왔으며, 상속받은 한 몫의 재산도 다 탕진해 버리고 신조차 신지 못한 맨발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 하면서 이제는 염치도 없어서 아들의 대우도 받지 않겠다는 것이요 종이나 머슴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생각이요 자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체면 없고 자격 없는 탕자 같은 우리지만 그의 사랑을 믿고 세상에서 돌이킨 그 믿음과 용기를 보시고 나갈 때 못지않은 더 좋은 옷을 입히시고 신발을 신기시고 반지를 다시 끼워 주시는가 하면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셔서 그와 우리의 즐거움을 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죄인이 돌아오는 기쁨보다 더한 기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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