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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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서부터 베드로의 해안 지방 선교가 시작됩니다. 본문은 첫 선교지인 '룻다'에서 일어난 사건의 소개인데 여기서 베드로는 8년 동안 중풍병으로 앓아누워 있던 '애니아'를 고칩니다. 그 결과 룻다에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이웃 지방인 '사론'에 사는 사람들까지 기독교로 개종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1.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가로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라는 주님의 말씀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에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단 한번의 설교로 삼천 명(참조, 행 2:41)을 회개시켰으며, 더 크게는 오천 명(참조, 행 4:4)을 회개시키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켜 세웠고(참조, 행 3:7, 8) 본문에서는 중풍병으로 8년 된 애니아를 고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중요한 특징은 베드로가 그 많은 이적을 행하면서도 전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때에도, 그리고 애니아를 고칠 때에도 그는 모든 치료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힙니다. 이러한 사실은 먼저 그의 겸손을 드러내 줍니다. 본래 베드로는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을 드러내기를 매우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기를 좋아했고, 인정받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한 그가 이제는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예수만 드러내기를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러한 베드로의 사역은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베드로는 아무리 놀라운 이적을 체험해도 그에게 예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한사코 예수의 이름을 앞세웠던 것입니다.

   2. 성도는 세상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직접 혹은 구약에서와 같이 천사들을 통해 일하실 수 있으심에도 전적으로 무지하고 무능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을 삼 년 동안 가르치시고 또 오순절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본문에서와 같은 이적을 행하시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사람을 통해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결코 한 사람에게 신적인 능력을 주어 그를 통해서만 역사하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영적 지도자의 우상화는 절대 금물입니다. 다만 이는 성도는 하나님과만 관계성을 가지는 존재가 아니라 믿지 않는 세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당연히 멸망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의롭다 인 쳐 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은 우리로 타인을 멸시하거나 그들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에 도취되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는 의도이신 것입니다.

   3. 믿음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일어나.' 애니아는 중풍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은 대뇌나 중추 신경이 손상을 당해 생기는 병으로 이 병에 걸리면 활동이 부자연스러워 지거나 혹은 신체 기능이 마비가 됩니다(참조, 마 9:2; 막 2:3). 아마 애니아에게도 이러한 증상이 나타났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러한 애니아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만일 애니아가 자기의 현실만 생각하고 '일어날 수 없다'고 응답했다면 그는 영원히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가 명령했을 때 자신의 처지는 생각지 않고 베드로의 명령만 의지했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명령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베드로가 옛날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던 때와 같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참조, 눅 5:5, 6). 애니아가 일어선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상황과 처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4. 범죄의 소지를 없애야 합니다.
   '네 자리를 정돈하라.' 이러한 유의 명령은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도 많이 하신 명령입니다(참조, 마 9:6; 막 2:4; 요 5:8). 그런데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과거에 대한 완전한 청산'의 뉘앙스가 짙게 풍겨 나옵니다. 병상에서 일어난 사람에게 병상이란 이미 과거요, 그 과거란 별로 아름답지 못한 과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러한 자리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벗어났다는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그 자리에 앉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로 돌아갈 소지를 완전히 없애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과거의 완전한 청산을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관시켜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참조, 갈 2:20; 5:24; 6:14). 즉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자리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육적인 자아와 과거의 죄악이 죽은 자리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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