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요한복음 10:28] 성도들은 절대 불신앙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불신앙에 대해 가볍게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진실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언짢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함으로써 그분을 근심시켜 드릴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잊어버리거나 여러분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소중한 말씀 속에 나와 있는 모든 약속들과 정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하나님이 어떻게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세기 21:6] 다 늙은 사라가 아들을 낳다니 이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자연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연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불쌍하고 쓸모 없는 죄인인 내 영혼 속에 주 예수님의 영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인 모든 법칙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그 본성이 쓸쓸한 광야처럼 메마르고 시들시들하며 저주받은 불모지 같던 나, 그래서 한 때 절망적이었던 내가 이제는 거룩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다니, 이런 경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늘 싱글벙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께 받은 그 특이하고..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다니엘 5:27]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저울에 자주 달아 보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다윗이 지은 시편 몇 편을 읽어 보십시오. 경건의 연습이 될 것입니다. 그 구절 하나하나를 묵상할 때마다 여러분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나도 과연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도 다윗처럼 느낀 적이 있었던가? 나도 다윗이 이 참회 의 시를 지을 때 느꼈던 심정처럼 그렇게 죄 때문에 아파 본 적이 있었던가? 아둘람 굴이나 엔게디 황무지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찬양했던 다윗처럼 내 영혼도 어려울 때 그렇게 자신 있게 하나님을 믿었는가? 나는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가?”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적힌 성경 구절을 보십시오. 그 글을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1서 4:19] 이 지구상에는 태양에서 오는 빛 외의 다른 빛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의 가슴 속에 예수님에 대한 참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주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온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사랑은 바로 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은 항상 분명하고 위대한 진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의 아름다운 결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연구하는 사람도 하나님에 대해 냉랭한 존경심은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따스한 사랑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로마서 14:8] 우리가 회심하는 즉시 천국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아마 우리는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기 위해 여기서 지체하고 있을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설사 방금 예수님을 믿었다 해도 즉시 천국에 들어가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과 함께 그 기업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성화가 길고 지속적인 과정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몸을 벗고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는 온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기만 했다면, 우리를 불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로 변화시켜 즉시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 때문에 지금 여기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필요 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시편 126:3] 어떤 성도들은 뭐든지 어두운 면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동안 자기들을 위해 행하신 것보다는 자기들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한번 물어 보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자기들이 안고 있는 끊임없는 갈등, 깊은 고난, 슬픈 역경, 마음속의 죄악성 등에 대해 잔뜩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 동안 자기들에게 베풀어 주신 긍휼이라든가 도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영혼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그들은 기쁘게 앞으로 나서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저..
“나는 미천하오니.” [욥기 40:4] 길을 잃고 헤매는 가련한 죄인 여러분, 여기 여러분에게 힘과 격려가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미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았던 성도들 중 자신이 미천하다고 생각지 않았던 성도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욥과 이사야와 바울도 모두 “나는 미천하고 더럽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불쌍한 죄인인 여러분이 이들과 똑같은 고백을 한다고 해서 더 창피할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로부터 모든 죄를 뿌리째 뽑아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또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아직 더럽고 미천할 때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더럽고 미천함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창세기 7:16]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자 하나님은 그 사랑의 손으로 노아를 온 세상과 격리시켜 방주에 닫아 넣으셨습니다. 선택의 의미를 갖고 있는 그 문은 우리와 세상(악한 자의 손에 있는) 사이에 들어서서 둘을 갈라놓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죄와 환락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둠의 자녀들과 함께 허영의 시장에서 놀 수 없습니다. 노아는 그의 하나님과 함께 방주에 닫아 넣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방주로 들어가라”고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초대를 통해 그가 친히 그의 종 노아 및 그 가족들과 함께 방주 안에 거하실 예정이라는 사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디도서 3:4]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들과 함께 교제하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성령에 의해 기쁨이라는 이 비옥한 들로 인도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구주께서 그 동안 우리에게 나타내신 사랑의 역사를 잠시 마음속으로 더듬어 봅시다. 주께서 보여 주신 황홀했던 사랑의 행위들이 수없이 많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랑의 행위들은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소생한 그 영혼의 생각과 감정들을 예수님의 마음과 한데 어우러지게 하기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묵상하면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실 뿐 아니라 교회의 기업 무를 자이신 주님께서 옛적부터 갖고 계시던 그의 모든 부요를 ..
“이 모든 사람은 옹기장이가 되어 수풀과 산울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거기서 왕과 함께 거하여 왕의 일을 하였더라.” [역대상 4:23] 옹기장이는 세공사 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에 속하는 일꾼입니다. 그런데 “왕”이 옹기장이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들이 일하는 재료는 진흙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왕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일 중 가장 비천한 일에 종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왕”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비록 옹기들 가운데 파묻혀 있다 해도 언젠가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이 될 것”을 희망하며 하나님이 부르신 그 소명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일, 울타리를 치..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갈라디아서 5:17] 어느 성도의 가슴 속에서나 옛 본성과 새로운 본성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옛 본성은 아주 적극적이며 기회만 있으면 그 치명적인 무기고에 있는 무기들을 다 동원해서 새로 태어난 은혜를 대적하려 듭니다. 한편 새로 태어난 본성은 그 원수를 저항하고 멸하기 위해 항상 경계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은혜는 그 악을 쫓아내기 위해 기도와 믿음, 소망과 사랑을 무기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열심으로 싸웁니다. 서로 상반되는 이 두 본성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한 계속 싸웁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기독도”와 “아볼루온”의 싸움은 세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이 싸움은 쪽문..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5] 이것은 태초부터 그랬습니까? 첫째 날에도 빛과 어둠이 시간을 갈라 놓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번영이라는 햇빛을 쬐다가 역경이라는 한밤중에 갇히게 되는 환경의 변화를 겪는다 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 영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영혼이 항상 정오의 빛으로 빛나라는 법은 없을테니까 말입니다. 틀림없이 전에 즐기던 기쁨이 사라지는 바람에 슬피 울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요 밤중에 사랑하는 이를 찾아 헤맬 때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비단 나 혼자 이런 일을 겪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주께서 사랑한 모든 성도들이 심판과 긍휼, 시련과 구원, 애통과 기쁨, 이 모든 것을 다 겪었습니다. 우리가 “..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사무엘하 15:23] 다윗은 비탄에 잠긴 부하들을 데리고 배신한 아들 압살롬을 피해 이 울적한 시내를 건넜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환난을 면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환난으로 가득 찬 일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로부터 기름 부음받은 자인 자인 동시에 여호와께 고난당한 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환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까? 지금까지 가장 고상하고 훌륭했던 사람들이 슬픔의 문에서 그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쓰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왜 환난을 당하면 무슨 못 당할 일이이라도 당한 것처럼 불평을 하고 야단입니까? 만왕의 왕되신 우리 주님조차 즐겁고 호화로운 길을 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
왕이……악을 미워하시니 [시편 45:7] “화는 내되 죄는 짓지 말라.”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보고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는 선함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거짓되고 사악한 모든 길을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유혹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얼마나 미워하셨습니까! 마귀는 서로 다른 형태로 세 번이나 주님을 공격했지만, 주님은 항상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악도 증오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악에 대한 증오심을 나타내되 책망의 말로써보다는 불쌍히 여기는 눈물로써 더 많이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과부의 가난을 삼키며 외식으로..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30] 성도 여러분, 오늘의 본문 속에는 여러분에게 아주 귀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가난하거나 고난을 당하고 있거나 아니면 무명 인사로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여러분을 불러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의 결과, 특히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복된 결과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힘을 얻으십시오.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임이 확실한 것처럼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그 모든 시련들도 분명히 곧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거의 모든 지복들을 받아 누릴 만큼 부요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피곤한 머리에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고하던 그 손으로는 승리의 종려가지를 ..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그는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 [사무엘하 9:13] 므비보셋은 결코 왕실 식탁을 빛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식탁에서 계속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그의 얼굴에서 사랑하던 친구 요나단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므비보셋과 마찬가지로 영광의 왕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삼하 9:8)라고 부르짖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가장 친밀한 교제를 나누심으로써 우리를 만족시켜 주십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 얼굴 속에서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백성은 다른 사람 때문에 소중한 존재..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시편 55:22] 지나친 염려는 설사 그것이 합당한 이유에서 하는 염려라 할지라도 분명히 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셨습니다. 사도들 역시 염려하지 말라는 교훈을 여러번 강조했습니다. 염려하는 것 자체 속에 이미 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염려의 본질을 살펴보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밀어 제치고 우리가 대신 그 자리에 들어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미 행하신 일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행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어버리실거라는 상상을 진짜인 것처럼 생각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져 주실 능력도 없고 또 그렇게 하실 의향도 없..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시편 38:21] 우리는 시험을 당하거나 유혹받을 때 하나님께 우리를 버리지 말라고 종종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항상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해도, 여호와께서 계속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한순간도 잘할 수 없습니다. 빛 가운데 있든 어둠 가운데 있든, 주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든, 아니면 유혹을 받고 있든, 우리는 언제든지 “여호와여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를 붙잡아 주소서. 그래야 제가 안전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는 항상 유모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조타수가 없는 배는 즉시 그 항로를 벗어나 떠내려가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위로부터 오는 도움을 끊임없이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시편 107:7] 변하기 쉬운 불안정한 상황에 접하게 될 때 우리 성도들은 “왜 이럴까?” 하며 불안해 합니다. 빛을 구하는데 어둠이 찾아오고 평화를 원하는데 골칫거리가 생깁니다. 그럼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산은 든든하게 서 있으니 나는 절대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주께서 주의 얼굴을 숨기시니 제가 이런 환난을 당합니다. 어제만 해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했었는데, 오늘의 내 생활 속에서는 그것을 뒷받침해 줄 만한 증거가 아주 미약합니다. 그뿐 아니라 내 소망에까지 구름이 끼었습니다. 어제는 비스가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저 멀리 보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장차 얻을 그 기업을 생각하며 자신 있게 기뻐할 수 있었는데, 오늘 내 영혼은 아무런 ..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ㅊ “……맛보았으면”-그렇다면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맛보았으면”-이것은 즉 어떤 이들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못했을 가능성과 개연성도 있다는 뜻입니다. “……맛보았으면”-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베풀어지는 일반 긍휼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특별 긍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 알고 있는지의 여부도 한번 조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은혜에 관한 한, 우리 마음속을 살펴보지 않아도 되는 은혜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알아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만약 자기가 정말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는지 그 점에 대해 미심쩍을 경우에..
기이한 인자 [시편 17:17] 우리는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의연금을 보낼 때 돈이나 물건은 잘 보내는데 마음은 함께 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 점에 대해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자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베푸시든 항상 사랑의 마음으로 베푸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풍성하고 호화로운 식탁에서 다 식어빠진 고기와 부서진 빵 몇 조각을 우리에게 보내시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접시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떠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거기에 주님의 향기로운 사랑의 양념까지 쳐서 주십니다. 또 우리 손에 금빛 나는 은혜의 징표를 쥐어 주실 때도 우리가 그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 손을 꼬옥 잡으며 쥐어 주십니다. 이처럼 주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태도는 그 은혜..
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 [전도서 10:7] 이 세상에서는 정말 훌륭한 사람들은 알려지지 않은 채 무명으로 지내는 반면 어정뱅이들이 높은 자리를 빼앗아 불법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갖고 있는 수수께끼로, 언젠가 그 수수께끼가 풀리는 날에는 의인들의 마음이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납니다. 따라서 설사 우리가 이런 운명에 처한다 해도 절대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온 땅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가장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를 섬기며 곤한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요, 그 보혈로 인..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골로새서 2:9 - 2:10] 하나님이자 동시에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속성이 다 우리의 것입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란, 그 기이한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든 아무튼 신성의 모든 충만이 우리를 완전케 하기 위해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실 수는 없었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다 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의 능력과 신성을 기꺼이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자신의 전능하심, 전지하심, 편재하심, 불변하심, 무오하심, 이 모든 것을 다 사용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서 일어나 그 신성에 속..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편 30:5] 성도 여러분! 지금 캄캄한 시련 가운데 계십니까? 그렇다면 내일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믿는 주님께서 오실거라는 생각을 하며 기운을 내십시오. 참고 기다리십시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참고 기다리십시오! 농부되신 우리 하나님은 그의 곡식을 추수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참고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때를 당하고 있다면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길어봤자 태양만 몇 번 더 떠오르면 아름다운 가나안 땅 해변..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우리 주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특별히 나타내십니다. 비록 성경은 이 사실을 선언하고 있지 않지만, 이런 일을 직접 체험했다고 간증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주요 구세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독특한 방식으로, 즉 단순히 읽거나 듣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체험했습니다. 유난히 훌륭했던 성도들의 전기를 읽어 보면 예수님이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 영혼에 말씀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기이하신 인격을 열어 보여 주신 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천국에 가 있지는 못하고 천국 문지방 가까이 가 있었지만 그 영혼이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깊은 행복감에 젖어들 ..
내가……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20] 언제나 동일하신 분,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계시다니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인생의 흉흉한 파도 한가운데 반석되신 주님이 계시다니 얼마나 안심이 됩니까? 오 성도 여러분, 녹슬고 좀이 슬며 썩어져 갈 이 땅의 보물 위에 치심치 말고 영원토록 신실하신 주님께 마음을 두십시오. 거짓된 이 세상의 요동하는 모래 위에 집을 짓지 말고 심하게 퍼붓는 소낙비나 사납게 날뛰는 파도 한가운데서도 요동치 않고 안전하게 서 계신 반석되신 주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유일하게 안전한 그 창고에 보물을 쌓아 두며 절대 잃어버릴 염려없는 그곳에 보석들을 보관하십시오. 아니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보관하십시오. 마음을 다해 오직 주님만 사랑하며, 그분의 인자하심에..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마태복음 12:15] 본문 말씀을 보니 끔찍하고 무서운 병에 걸린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잔뜩 나타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경멸하셨다는 말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한 사람 한 사람 다 치료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별의별 기괴한 악들이 주님 발 아래 다 모여들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구역질나는 궤양이며 썩은 내 나는 종기들! 그러나 주님은 그 괴물 같은 악이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든, 또 얼마나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고 나타났든 그것들을 다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갖가지 모양 속에 들어 있는 악을 다 이기셨습니다. 악의 화살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오든, 무섭게 날아오는 그 세력을 꺾으셨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요한1서 4:13]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집을 갖고 싶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것을 구할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까? 그것은 교만한 인간 본성이 주고 싶어하는 것보다 훨씬 싼 값에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없이 값없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론 아주 비싼 값을 지불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무언가 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그 집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값 없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원토록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는 우리 주님 집에 세들어 살 생각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모시고 “그 안에 거해 보시렵니까?” 그렇습니다. 그 집에는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으며..
“인생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예레미야 16:20]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저지른 큰 죄 중 하나는 바로 우상 숭배라는 죄였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이스라엘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우리 역시 그와 똑같이 어리석은 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던 레판의 별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으며 여자들이 봄과 식물의 신인 담무스를 위해 더 이상 울지는 않지만, 우리는 아직도 맘몬이라는 금송아지를 섬기며 교만의 사당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자아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택함받은 백성들을 지배하고 정복하려 애쓰고 있으며, 육체는 공간만 있으면 어디든 그 제단을 세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하는 자녀들이 죄의 원인이 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스라엘 자손이 다……원망하며.” [민수기 14:2] 옛날 이스라엘 진영에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를 맞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아픈 고통을 주실 수 있느냐며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하지?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식으로 징계를 받아야 해?” 오 원망하는 자들이여! 무슨 연유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푼 그 섭리에 대해 원망하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이 받아 마땅한 것보다 더 심하게 여러분을 다루실까봐 그러십니까? 그럼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께 얼마나 반항했던 사람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분의 지혜로 판단할 때 여러분을 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