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제목 : 세상의 빛 (The Light of the World)
작가 : 윌리엄 홀만 헌트 (William Holman Hunt, 1827- 1910)
크기 : 233X 128cm. 켄버스에 유화 (1904년 작)
소재지 : 영국 런던 성 바오로 성공회 대성당

윌리엄 홀만 헌트 요한복음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는 귀절을 읽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 그림을 남겼다.

 

이 그림은 가시 면류관을 쓰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깥에서 손잡이가 없는 문을 두드리고 계신 모습니다. 처음 이 그림을 본 친구들이 문에 손잡이가 없음을 지적하며 그림이 잘목되었다고 지적하자, 헌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문의 손잡이는 안 쪽에만 있다네. 안에서 열어 주어야만 예수님께서 들어갈 수 있지."

 

 

 

성서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가르치기 위한 여러 상징과 비유의 표현을 쓰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빵(요한 6, 51), 참 포도나무(요한 15, 2), 목자(요한 10장; 히브리 13, 20), 빛(요한 8, 12) 등이다.
무한하고 절대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인간의 유한한 언어를 사용해 표현하기 위해 이런 상징과 비유의 사용이 불가피하기에 성서에 이런 용어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 작품의 주제 역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까이 계신 주님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단어이다.

작가는 영국인으로 1848년 결성된 라파엘 전파의 창립회원 중 한 사람으로 지난번에 <주님의 종이오니>라는 작품으로 소개한 가브리엘 로제티의 친구였으며, 무신론자였다가 1851년 성공회 분파이며 가톨릭처럼 전례를 강조하는 고교회(High Church)에 입교한 후 신앙의 깊이를 더 하면서 개신교적인 성향이 강한 복음주의에 끌리게 되었다.

성서를 글자그대로 해석하는 생활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작품 경향에도 이 방법을 도입해, 매우 상징적이지만 기존의 전통, 즉 가톨릭적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충실한 자연묘사를 통한 새로운 화풍을 창출하면서 예술에 있어 종교개혁을 이루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 나타나고 있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의 내용인데, 작가는 이 주제에 너무 심취해서 여러 번 이 주제의 작품을 제작했다.

이것은 작가가 세 번째로 같은 내용을 주제로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육화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가 아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 영혼의 문을 두드리시는 것을 묘사했기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지상 삶을 사셨던 모습이 아닌 천상의 영광을 누리시는 화려하고 장엄함으로 나타나고 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이미 그린 <성전에서 찾은 예수>, <한밤의 탄생>등의 주제에서 빛에 대한 작가의 상징성을 잘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그동안 작가의 작품 활동과 신앙적 사색이 결집된 것이며, 전통 안에서 정착된 형식을 답습하는 마네리즘 보다는 현실안에서 정확한 자연 묘사의 충실을 목표로 했다.

이것을 위해 작가는 작품에 착수하기 이전 이집트, 팔레스티나를 여행하면서 성서를 주제로 한 정확한 묘사를 할 수 있도록 성서 공부, 성지 풍경의 확인 현지인들의 생활 풍습에 대한 많은 견문을 키웠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런 견문의 결실이기에 성서적인 내용을 나름대로 정확히 표현하고 있어 가장 성서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 대한 접근을 <빛>이란 성서 용어에서 찾고자 했다.

작가는 작품에서처럼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고 강렬히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을 빛이라 생각하고 여기에 대한 많은 사색과 연구를 하면서,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 작품에 나타낸 것처럼 등불로 표현했다.

 

  이 작품에서 그리스도께서 들고 계신 등불은 바로 우리 인간들의 어둔 마음을 비춰주시고 밝은 삶의 지혜를 주시는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하고 있다. 먼저 이 작품에서 작가는 빛의 특성을 강조할 수 있는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 배경이 새벽녘, 즉 밤과 새벽 사이에 볼 수 있는 푸르름에서 영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신비를 창출했다. 별이 희미하게 보이며 달빛이 아직 남아 있는 분위기의 화면 뒤편엔 사과나무가 있는데, 에덴 동산을 상기시킨다.

작가의 초기 작품에서는 등불의 이미지가 그리 중요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데, 작가로서의 작품 활동에 몰두할수록, 등불은 작품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으며, 등불을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과거 여러 그림에서 익히 사용되어 그 지방 사람들에게 익숙한 그런 등불이 아닌 자신이 창작한 여러 형태의 등불을 계발했다. 등불의 상징은 받아들이기에 좀 생경함이 있는 대로, 진부한 전통에서 벗어난 영국 프로테스탄트의 성격을 확실히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작가는 새벽을 기다리는 신비로운 밤의 분위기를 창출함으로서 단순한 어두움과 빛, 밤과 낮이란 기존적인 대비가 아니라 밤의 의미성이 더 극명히 드러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죄의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인간들이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등불의 역할을 하시는 분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이 등불을 <그리스도를 닮음>을 삶의 목표로 여기는 크리스챤들에게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 즉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아 변화되어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빛의 새로운 그리스도, 자기가 몸담은 삶의 현장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을 힘 있게 전하고 있다.

 

작가는 이 등불 외에도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상징들을 도입하고 있다. 등불을 드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른손으로 닫혀진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이 문은 담쟁이와 잡초가 우거진 채 뒤엉켜 있어 아직 한번도 열어 본적이 없는 그런 문으로 묘사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폐쇄된 삶의 태도와 완고한 마음들을 상징하고, 더 높은 복음적인 삶을 위에 시도해야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실 탈출에의 열정을 끈끈한 욕망의 세계에 묶어 두는 게으름과 방종을 상징한다.

작가는 세상에 빛으로서 삶을 보여줄 수 있는 크리스챤적인 경건을 강조하기 위해, 여기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나태와 방종을 제시했고 대비적 효과와 함께 크리스챤적 경건은 결코 이론적 언어의 유희가 되어선 않되고 실재적 현실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주님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결단의 분발이 필요한데,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인간적인 게으름과 방종이라고 보며, 또한 이 문들을 뒤덮고 있는 잡초들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의 방해물로 교회가 가르치는 칠죄종(七罪宗)의 상징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나무 위쪽에 조그만 도끼가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바울로 사도의 권고처럼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아야 한다” (2테살로니카 3, 10-13)는 게으름에의 경고와 근면한 삶에의 강한 권고를 표현하고 있다.

그림의 밑 부분에 쓰여 있는 묵시록 3장 20절 역시 그 자체로 초월적 의미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크리스챤들에게 익숙한 성서 구절이면서도 작가는 자기나름의 새로운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자세히 보면 주님께서 두드리고 계신 이 문은 손잡이가 없는데, 작가는 왜 문에 있어야 할 손잡이가 없는지에 대해 심원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이 문은 바로 하느님이 주시는 빛을 갈망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이란 빛이 필요한 인간이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해야 할 결단의 상징임을 표현하고 있다.

파우스트의 주인공처럼 하느님이 창조하신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신했던 괴테(W. Goethe)가 죽음의 순간에 “빛을, 더 밝은 빛을!”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간의 갈망으로 작가는 이 빛을 찾기 위한 크리스챤으로서 해야 할 결단의 명백한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손잡이가 없는 이 문의 상징을 통해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내안에 모시기 위해선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지 전능하신 그분께서 열어 주시길 기다리는 수동적 태도여서는 않 되고, 내가 뛰어가서 빗장을 풀고 문을 여는 능동적인 태도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방탕의 심연으로 부터 일어나 하느님을 찾은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회개가 자신의 힘과 의지와는 무관한 하느님의 도움임을 절감했기에 인간 구원에 있어 하느님 은총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하면서도 이런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 편의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기 위해 “너 없이 너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너 없이 너를 구원하시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이처럼 작가는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들을 수 없는 희미하고 몽롱한 신비의 차원에 돌리지 않고 실재적이며 감동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기 위한 인간 편의 노력, 즉 회개를 향한 적극적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손잡이가 없는 문을 그렸다.

 

작가의 양식은 강렬하고 선명한 색채와 확실한 명암효과 및 섬세한 세부 묘사가 특징이며, 기질적으로 혁명가이며 개혁가였던 그는 과거 전통적인 가톨릭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지나친 미화나 과장을 철저히 배격하면서 내용의 정직성과 작품 접근의 정확성을 강조하면서 그 시대 미술이 빠져있던 천편일률적인 천박함을 거부하는 새로운 화풍을 창출하고자 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영국이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시대였다. 1838년 빅토리아 여왕이 19세의 나이로 대영제국의 군주가 되면서 5대륙으로 영토가 확장되어 명실상부한 <해질 줄 모르는 대영제국(Great Britain)>의 이미지가 형성되고 이때 경제적인 발전 뿐 아니라 도덕성에 대한 관심도 증대되면서 삶의 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던 때였다.

1848년에 설립된 <라파엘 전파>는 바로 예술에 대한 영국인의 이런 기대를 대변하며, 예술의 순수성을 과거의 지루한 답습이 아닌 현실의 정확한 묘사에 중점을 두어, 과거처럼 신앙적인 주제를 짜인 형식에 맞추려는 마네리즘적 방식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정확히 그림으로서 예술이 생활 개선의 중요한 장이 되도록 노력했다. 우리도 오늘날 여러 문제가 많은 대로 스스로 <웰빙 Well-being>시대에 진입했다고 느끼는 현실에서 우리 삶의 수준을 진정한 웰빙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작가가 시도한 예술을 통한 삶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작품은 현미경으로 투사한 것 같은 정확한 표현으로 성서적 사실 묘사와 함께 개선되어야 할 도덕적인 문제성이 있는 사회현실에 관여함으로서 그 시대에 필요한 도덕성의 회복이라는 교훈적 관점을 강조했다. 이 작품에서 그리스도는 여러 성화에서처럼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긴 했어도, 그가 사용한 상징은 결코 교회 역사 안에서 정착되거나 고대 사회에서부터 전수되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상징들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깊은 사색에 의해 창출되었기에 상징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의도를 알기 위해선 깊은 사색이 필요하나, 이런 정성된 노력을 통해 과거 상징이 주지 못했던 새로움을 얻을 수 있기에 이 그림을 착심해서 바라보노라면 <그리스도 세상의 빛>이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 아무 생각없이 흘려 넘기기 쉬운 주제가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신선한 충격과 감동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항상 그렇듯 새로운 것이 시도되는 과정에선 항상 반대를 수용해야 하는데, 이 그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죤 러스킨(John Ruskin)은 이 그림을 보고 1854년 타임지에 “이 작품이야 말로 성미술 분야에서 다른 어느 시대도 표현하지 못했던 고귀함을 표현하는 것이란 찬사를 보낸 반면, 당시 영국의 명망 있는 비평가이며 역사학자로서 <영웅과 영웅 숭배 On Heroes, Hero Worship>를 쓴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예수는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여느 인간들의 삶의 현장에서 땀 흘리며 살아가는 갈릴래아의 어부인데, 이 그림의 예수는 갈릴레아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는 너무 우리와 거리가 먼 그런 모습”이라는 비판을 했는데, 이것은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동문서답식 비판이다. 작가가 그린 예수는 부활한 예수이기에 인간의 모든 한계와 제약에서 해방된 그런 분이시다.

이런 극단적 찬반의 반응 가운데서도 이 주제는 한 세기 이상 영어 문화권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감동을 주는 영국 프로테스탄트 예술의 대표가 되었으며, 성서적 신앙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 기질에 너무 어울리기에 영국 교회의 공식적인 작품 (ICON)이 되었다. 이 그림은 불가지론자인 Charles Booth가 구입해 성 바오로 대성당에 기증했는데, 성당에 안치하기 전, 그는 이 성화를 모시고 1905-1907년 2년간 카나다, 오스트렐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 영연방국을 돌며 순회 전시했다. 연일 성황을 이룬 전시회는 수많은 관객들이 몇 시간을 기다리며 관람하여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년전 작고한 일본 작가인 엔도 슈사꾸(遠陞周作)는 가톨릭 신자이기 이전 가톨릭 작가로서의 작품 활동을 했으며, 그의 대표작인 <침묵>을 위시해서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은 바로 ‘신앙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사색이었으며, 그는 몇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일본 작가로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이 두 명이나 되기에 균형을 지키기 위해 탈락되었지만 그의 문학성에 대해선 탁월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말년에 신앙의 의문에 대해 이런 내용의 글을 남겼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종교의 필요성을 갈망하고 있으며, 종교만이 오늘의 모든 문제와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사람들이 선뜻 교회로 들어오기를 망설이거나, 용기를 내어 교회에 들어왔다가도 실망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지? 이것이 오늘 교회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엔도 슈사꾸의 이 의문과 안타까움은 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크리스챤들이 곱씹으며 살아야 할 신앙의 화두가 되어야 하고, 이 작가의 <세상의 빛>이란 작품의 주제는 어떤 의미에서 엔도 슈사꾸가 제시한 화두를 풀 수 있는 좋은 열쇠가 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들은 세례라는 면허증을 받은 후 이 세상 사람들과 별 다름없는 빛과 어두움 사이를 왕래하면서 주일이나 지키는 그런 형식적인 신앙에 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빛과 어둠의 구분도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바른 삶의 모습으로 예수가 드러날 때, 즉 예수가 자기의 삶과 죽음을 통해 보인 빛을 볼 수 있을 때, 신앙 안에서 빛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서슴없이 교회를 찾게 될 것이란 결론을 믿는다면 이 작품은 작가의 시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처럼 오늘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앙을 살아가는데 너무 익숙하고 이것을 당연시 여기는 우리들에게 크리스챤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확실한 해답과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손에 들려 있는 등불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의 상징도 되는 것이다.

에페소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매 순간 선택하고 실천해야 할 삶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라.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리라.” (에페 4, 14)

<형상을 만들지 마라>는 출애굽기의 말씀을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해석도 없이 너무 편협하게 알아들음으로 인해 예술을 통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지진아가 된 개신교 공동체가 이 작품을 통해 모처럼 주님을 아름다움의 원천으로 접근했다는 것은 형제적 일치에 필요한 공감대 형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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