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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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감사절의 교훈

 

출23:16-19

 

대전중앙교회 /최병남목사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 동안의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40년동안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려운 것은 양식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으나 매일 하루 분량만 주시기 때문에
내일 먹을 것이 없으니 불안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소원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자기 손으로 농사하며 내일 먹을 것을 저장하여 놓고 안정된 가운데 편안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에는 참된 안식이 그리웠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가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둘 시기가 되어 보리와 밀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자기들을 구원하여 안식을 누리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맥추절입니다.

맥추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Ⅰ. 맥추절은 과거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였으나
과거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광야생활중의 어려움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려운 과정을 헤쳐 나왔어도 현재의 생활이 풍족하면 지난 일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착에 만족하지 말고 과거의 어려움을 거울 삼아
더욱 열심히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장 12절을 보게 되면 "맥추절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아울러 애굽 땅에서 노예생활하던 때를 기억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과거에 우리가 어떠한 생활을 했다는 것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혜로운 삶은 과거를 기억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현재를 바르게 의롭게 겸손하게 살아가는 삶, 이것이 맥추절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입니다.


Ⅱ. 과거에 받은 은혜, 현재에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게 되면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잘 살게 되고 여유 있게 됐다고 자부하게 될 때에 바로 그때에 자칫 잘못하면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교만해지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사실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면 내가 똑똑해서 살아온 것 아닙니다.
지난날 돌이켜 보면 수 없는 환란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건져주시고 지켜주셨던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와 같이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인도해 주셨다고 하면
우리의 장례도 나는 비록 부족하고 연약해도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Ⅲ. 맥추감사절의 영적인 교훈입니다.


맥추절을 다른 말로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맥추절인 오순절에 가나안에서 첫 양식을 먹게 되었던 것처럼
신약에 맥추절인 오순절에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께서 임하시므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 속에 계시게 된 축복의 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약 맥추절에는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신약의 맥추절에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에게 내리지 아니하던 성령의 역사가 누구에게나 쏟아져 내리게 됩니다.

여기에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보잘 것 없고 적은 것 같아도
그것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오순절에 인간을 영원히 주리지 않게 하시려고 오신 성령님도 그날에 오셔서 계속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며 지속적인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맥추절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성령의 충만함을 주신 것에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중생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사탄의 공격에 싸워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맥추절을 맞이해서 맥추절의 세 가지 의미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1. 지난날의 어려운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날의 어려운 때를 기억할 때에 교만해지지 않고 인생을 의미 있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감사를 부르고, 불평은 불평을 부릅니다.
누가 감사하지 못합니까? 교만한 사람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늘 불평하게 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들이 감사생활을 통해서 날마다 겸손해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감사생활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져오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가져오게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감사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될 때에 우리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어
주님을 닮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맥추절의 영적인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중앙교회 교우여러분들이여! 이제부터 우리는 잃어버린 감사를 다시 찾으십시다.
멀어진 감사를 다시 가까이 합시다. 그리고 우리 생활 속에서 원망과 불평을 내버리고 기뻐하며
감사하며 험난한 인생 길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맥추감사절에 감사합시다

 

본문 신16:9-12

 

강남중앙침례교회 /김충기목사


오늘은 7월 첫 주일입니다. 6개월 동안도 하나님의 은혜로 평강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무더운 계절에 들어서도 영적으로 무장하는 달이 되게 하시고 오늘 맥추감사절에 몸과
마음을 바쳐 감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에 감사합시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맥추감사절이라 할 때 이것은 구약의 3대절기인 '유월절(뮤교절)', '맥추절(칠칠절)', '초막절'에 속합니다.
신명기 16:16절에서는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절기가 4월에 부활절, 7월에 맥추감사절, 11월에 추수감사절, 1
2월에 성탄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맥추감사절의 의의를 알아야 합니다.

一. 맥추절의 의의를 알자. (신명기 16:9-10절, 12절)
맥추절은 무교절(유월절)이 지난 다음 일곱 번째 주일 다음날을 하나님께 지키는 것입니다.
신명기 16:9-10절에서는 "칠 주를 계수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맥추절의 의의는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에 종살이를 하면서 마지막에 먹을 것도 못먹고 입을 것도 못입고 아들나면 죽고,
이와같은 죽음에 공포에 싸여있었는데 하나님의 역사로 양의 피로 문설주에 발라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들을 출애굽하게 하셨고,
광야로 와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왔는데, 이 맥추절은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을 생각하고 구속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6:12절에서는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택한 백성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리시고 구속하신 것을 생각하여 감사하는 절기, 그것이 바로 맥추절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쁘고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8.15기념일을 앞두고 남북한의 이산가족이 만난다는 사실에 기쁘고 가슴 부풉니다.
그러나 애굽 땅에서 구속하여 주셔서 살아난 것을 생각할 때 더욱 감사한 것처럼, 우리가 죄악된 세상에서 구속되어 택정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천국가는 축복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는 것으로 맥추절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우리 찬송합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찬송하게 하소서.
아버지 아버지 나를 구하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광 받아 주옵소서" 맥추절의 의의는 참으로 귀합니다.

二. 맥추절은 첫 열매로 감사하자. (신명기 16:9-10절, 출애굽기 23:16절)
맥추절은 첫 열매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6:9-10절에서는 "칠 주를 계수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지내는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를 먹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자기 손으로 농사해서 첫 열매를 거두는 것이 맥추절입니다.
우리 나라 곡식의 첫 열매는 보리이고 과일의 첫 열매는
살구이듯이 가나안 땅에서 첫 소출인 보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출애굽기 23:16절에는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는 맥추절은 곡식중에 첫 소산을 자기 힘대로, 믿음대로 자원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三. 맥추절의 영적인 뜻을 알자 (사도행전 2:1절)
맥추절의 영적인 뜻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순절이요, 성령강림주일이요, 교회의 시작임을 말합니다.
맥추절의 영적 뜻의 첫째가 오순절인 것은 유월절 이후에 주일을 일곱 번 지난 후 즉,
7x7=49일 다음날(50일)이기에 오순(50)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오순절이 사도행전2:1절에서 말씀하듯이 성령이 오신 날이기에 성령강림주일로 따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성령강림주일은 바로 교회의 시작입니다. 성령오시고 나서 교회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오심에 의해서 전도도 하고 기도도 하고 교회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맥추절은 막혀있던 전도와 기도, 중심으로 하는 감사도 다시금 시작되는 오순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애굽같은 세상에서 구원해주셔서 가나안의 축복을 허락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오순절 성령 충만하여 전도하고
전심으로 주께 헌신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구원해주신 것 감사드리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자원함으로 힘대로 하는 감사되게 하옵소서!


▒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23:1-6

 

예중교회/김철현 목사

 

온 지구를 뜨겁게 하던 월드컵이 끝났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대한민국을 새롭게 인식하고
우리스스로는 높아진 국가 위상에 기뻐하며 나름대로 성공한 월드컵을 자축하기도합니다.
분명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온 국민을 하나로 묶어 주는 큰 역할을 월
드컵이 해냈습니다. 그 가운데 긍정적인 하나의 변화가 있는데 그것은 한국축구의 4강 신화
를 이룬 장본인인 <거스 히딩크(Guus Hidink)>감독의 조국 <네덜란드>에 대한 관심과 국
가적 관계입니다. 그래서 꼭 가보고 싶은 외국 여행 희망지 중에 단연 네덜란드를 손꼽는다
고 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양국 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네덜란드에 가 본적이 없습니다 마는 옛날부터 네덜란드하면 가장 대표적
으로 떠오르는 유명한 풍물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풍차(風車 :
windmill)]입니다. 풍차가 무엇인지는 다 아실 것입니다.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바람의 힘
을 이용해서 동력을 얻는 기계"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날개들이 돌아가며 힘을 만들어
내고 그 힘이 물을 뿜어 올리기도 하고 방아도 찧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거대한 풍차를
돌리는 것이 바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람이 불어 주지 않으면 이 풍차는 무용지물(無用之
物)입니다. 만약 사람의 힘으로 그 풍차를 돌린다고 생각해 보면 그것이 가능할까요? 절대
로 안될 것입니다.
믿음의 삶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나름대로는 날마다 잘 해 보려고 발버둥쳐 보지만
쉽게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음을 굳게 먹어 보기도 합니다. 의지를 다져 보기도 합
니다. 결심을 새롭게 해봅니다.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또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도 쉽게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우리의 날개가 쉼 없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돌릴 바람이 있
어야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돌려 나갈 수 없는 믿음이라는 풍차를 돌릴 수 있는 그
바람은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 하시나니 소년이라
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9-31)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힘입니다. 그런데 아
무리 바람이 불어도 풍차가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제이겠습니까? 풍차의 방향
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풍차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바람을 향해서 서있어야 합니다. 방향
만 바람 쪽으로 향해 있다면 가만히 있어도 풍차는 힘차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행위가 하나님을 향해서만 있다면 그래서 하나
님이 주시는 힘으로 산다면 우리의 삶은 강한 힘을 받아서 힘차게 돌아갈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며 살아갑니다. 자기만의 평가에 의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기평가에 의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런데 가
만히 살펴보면 대부분이 세 단계의 평가 기준을 거칩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삶에 의해
자기를 평가합니다.
먼저는,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과거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 과거를 참 중요하게 여깁
니다. 묻어 두었던 옛이야기 보따리를 꺼내어 하나씩 풀어놓기를 좋아하는 습성들이 이 때
문입니다. 그 과거가 절망이었든지, 아픔이었든지, 실패였든지, 그래서 때로는 지우고 싶은
과거일지라도 소중히 여깁니다. 그 내면에는 오늘의 내가 있기에 그 과거는 소중한 것입니
다. 그래서 그 옛날을 돌아보며 나를 평가합니다.
또 하나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하는 현재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인 현
재란 각기 다릅니다. 어떤 이는 가정이 있어 즐겁습니다. 가족이 있어 인생의 참 의미를 느
낍니다. 자식이 있어 소망이 있습니다. 고로 "나는 행복하다" 합니다. 반면에 불행하다 생각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에겐 모든 것이 늘 부족합니다.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보다 좀 더 나은 미래가 있기를 조
급하게 기다립니다. 얼른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이렇듯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삶의
평가에 행, 불행의 기준을 둡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미래의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한층 더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어선 또 다른 세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욕망이라는
것이 따라옵니다. 과거보다는 말할 나위 없이 나은 미래여야하고 현재보다도 더더욱 나아야
할 것입니다. 바라는 만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피곤합니다. 성취하는 길만
이 내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라 여기기에 그 미래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
니다. 때로는 인격이 무너지고,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윤리와 도덕이 무시되는 <총체적 인간
성 상실>을 가져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나를 인정 받고자합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다
좋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여 인정 받고자 하는 열성은 대단한 것
이라 합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진정으로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있으니 이게 문
제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감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불평
과 원망은 잘하지만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불평과 감사는 할수록 커집니다.
내 과거의 삶을 돌아 보건대 정말 감사한 일 뿐입니다. 그 과거에 매여 있었다면 아무짝에
도 쓸모 없을 나 같은 못난 인간이 이렇게 까지 왔다는 사실이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닙니다.
현재의 내 삶이란 더욱 눈물로 감사할 일입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을 만날 줄 누가 알았겠
습니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리라고 꿈속에서나 상상해 보았습니까? 여러분, 미워하
지 마십시오. 탓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밉다해도 가만 생각해보면 이 보다 좋은 사람
들이 없습니다. 특히 이 세상에는 내 남편보다 좋은 남자는 없습니다. 내 아내보다 좋은 여
자는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사람끼리 짝지어 놓으셨기 때문입
니다. 비단 인간관계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불만이 너무 많습니다. 요구가 너무 많아요. 원망
이 지나칩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의 덴버(Denver)>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자동차 안
에서 졸도해 있는 것이 발견됐습니다. 자동차 가스인 일산화탄소가 차 속으로 스며드는 것
을 모르고 문을 잠그고 잠든 채 있다가 두 사람이 함께 졸도한 것입니다. 달려온 구조대는
잠겨진 차안에서 두 사람을 구해내기 위하여 결국 자동차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사람을 꺼내
어 인공호흡을 시키고 응급조치를 하였습니다. 구조대의 재빠른 조치로 두 사람은 죽음을
간신히 면하고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기가 막힌 일이 발생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청년이 경찰서에 들어오더니 청구서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그 청구서는 다름이 아
니라 구조대가 그들이 목숨을 살려내기 위하여 자동차의 유리창을 깨뜨린 것을 수리하고 가
지고 온 청구서였다는 것입니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하나님은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용서함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
습니다. 그런데 그 값진 구원을 거저 받은 우리들이 또 다른 요구들로 하나님을 괴롭힙니다.
말이나 됩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제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이 불만입니까? 복중의 복인 죄 용서함 받고 구원의 복을 주었으면 감사할 것
이지 그렇지 못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는 깨알같이 적힌 <불만목록서>와 <청
구서>가 들려져 있습니다. 무슨 불만을 터뜨릴까를 잠들기 전까지 생각하다가 잠이 들고 눈
만 뜨면 자동판매기처럼 쏟아냅니다. 하나님께 청구하려고 하는 것과 불만이 정말 가한 것
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교회가 너무 적어서 기분 나빠 못 다니겠습니다. 큰 교회에
가서 좀 폼 나게 예수 믿어 볼랍니다"."하나님, 사람들이 이 위대한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
불만입니다."."하나님, 대박 한번 터져서 벼락부자나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예수 한
번 진하게 믿어 보겠습니다."혹여 이 정도의 유치한 불만과 어리석은 청구가 아닌지 모르겠
습니다. 성경은 이런 우리들에게 한 마디로 정신차리게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살
전 5:16-18)
여러분 언제나 감사가 먼저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습니다. 깨
달음만이 아니라 좀 더 나아가서는 고맙게 여기는 마음 곧 감사하는 마음에 행복이 있습니
다. 사람이 어떠한 여건에 있든지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 그는 그만큼 행복할 수 있는 것입
니다.
영국의 설교가요 성서학자인 <메튜헨리(Matthew Henry)>는 어느 날 평소에 자기가 지나
는 골목길에서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매를 맞아 많은 피를 흘리며 겨우 집
에 도착을 했습니다. 놀란 가족들을 안심시키고 자신의 서재로 들어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10여 년 동안 똑같은 골목길을 지나면서 아무 사고가 없었던 사실에 대한 감
사가 없었습니다. 그저 무사히 집에 돌아온다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 여겼기에 감사가 없었
습니다. 주님, 저의 무지를 용서하여 주시고 이제부터는 그 골목길을 지나 무사히 집으로 들
어올 때마다 감사하는 여생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루함을 느
낄 정도의 자신의 평범한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요, 기적이라는 깨달음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범죄 심리학자인 <소퍼(Soper)>박사는 교도소에 있는 복역수와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의 차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은 하루 종일 불평과 요구만을 말한다. 그러나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는 하루 종일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똑같이 울타리에 갇
힌 사람들이지만 어떤 사람은 감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불평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감사란 <깨달음>과 <겸손>에서 오는 것이고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흔히 감사의 차원을 셋으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리적인 감사>입니다. 다른 말
로는 <조건적인 감사>혹은<반사적인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하
고 건강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일반적인 감사입니다. 둘째 감사는 <철학적 감사>가 있습니
다. 이것은 가난하다가 부해져서 하는 감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서 깨달음이 깊어진 것
입니다. 전에는 은혜인 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까 은혜요, 전에는 복인 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 복이란 말입니다. 전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줄 알았는데 깨닫고 보니 제
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있고 셋째는 <신학적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예수께
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 죄를 속량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이 은혜요, 기쁨이요, 복
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치가 있는 감사가 있다면 바로 이
세 번째 감사일 것입니다. 이 감사를 배워야합니다.
우리가 읽었던 시23편은 너무나 유명한 다윗의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총체
적인 감사를 보여줍니다. 그의 과거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요, 현재의 삶
에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노래며, 장래 자신에게 베푸실 놀라운 하나
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보다 마땅히 감사할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형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목동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블레셋]의 전사
인 <골리앗>을 죽이고 그 포상으로 <사울>의 딸을 얻은 후 <사울>의 시기 대상이 되어
이곳 저곳으로 도망 다녀야 하는 어려운 시절을 겪게 됩니다. 더군다나 잠시 흐트러졌던 그
의 생활이 <밧세바>를 범하게 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계획적으로 살인하는 죄에 이르
게 합니다.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그의 삶에 무엇이 감사 할만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의
위대함은 이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잊지 아니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이 신앙은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 감사의 극치가 오늘 그의
노래에 담겨져 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은 다윗의 감사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주시는 총체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이 보다 더 어
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이런 빈 잔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심령 속에 깃들
여 있는 이 빈 잔은 영원한 가치가 아니면 채워 질 수 없는 잔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
세상의 어떤 것들로도 채워 질 수 없는 잔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의 잔을 무엇으로 채우려합
니까? 무엇으로 인하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감사 할 수 있습니까? 이 [맥추 감사주
일]에 여러분의 영혼의 빈 잔이 여전히 비어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가치 없는 잡
동사니들로 가득 차서 감사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보다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의 빈 잔에 가득 찬 시기와 질투와 허영심, 그리고 미워하는 마음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들,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불 신앙적인 자기 자신의 벽들을 허물
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마땅히 채워야 할 영원한 가치들을 채우지 못하여 허기진 영
혼의 빈 잔을 감사의 조건들로 가득 채워서 오늘 다윗 같은 찬양을 끊임없이 드릴 수 있기
를 바랍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 감사치 않은 자의 변명 (맥추절)

 

눅17:11-19

 

예은교회/김학현목사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
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이 예수님
의 말씀 속에는 10명이 모두 돌아와 감사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주님
은 한 명만 감사하러 온 것에 대하여 실망하셨고 놀라셨습니다. 당연히 감사해야 하는데 감
사하지 않으면 주님은 실망하십니다. 주님께서 실망하신 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모두
가 감사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감사의 기대가 있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으니 1명처
럼 돌아와 감사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 기대가 무너지자 놀라고 실망하십니다. 그것도
당연히 감사할 줄 알았던 유대인들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감사할 줄 알았던 이들
은 안하고, 감사치 않을 줄 알았던 사마리아인은 와 감사하니 놀라실 수밖에요. 오늘날도 직
분에 걸맞지 않고, 믿음에 걸맞지 않은 감사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끔 저는 성도들의 감사생활을 보며 기대치 않은 사람에게 놀라고, 기대한 사람에게 놀랍
니다. 1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집사님이 아주 큰 돈을 벌었습니다. 한 달 후 추수
감사절을 저는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그 어떤 분보다 많은 추수감사헌금을 할 줄 알았습니
다. 그러나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액수 5만원이 그의
추수감사헌금의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감사를 기대하고 계시다는 걸 잊지 마
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는 같은 본문을 통하여 감사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눴습
니다. 감사는 어려운 것이어서 그 스코어가 9대1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9대1이란 감사치 않
은 사람과 감사한 사람의 비율입니다. 오늘 9라는 스코어를 가지고 있는 다수, 감사치 않은
사람들의 변명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감사치 않은 9명도 그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본문은 그것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은 이렇게 변명했을 것
입니다.

나중에 감사하려고 했습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한 명은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이기보다 예수님께 감사하는 게 우선
이라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아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간 소외되
고 천대받던 문둥병에서 놓임 받은 것을 자랑하고 떳떳한 시민이 되었음을 이웃에게 알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우선순위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아홉은 “너무 그러
지 마십시오. 나중에 감사하려고 했습니다.”라고 외치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문제임에도 우선순위를 잘못 설정함으로 실패하기 쉽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신앙은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잘 정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실패한 이유를 아십니까? [삼상2:29]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
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것이어
야 합니다. 그러나 엘리와 그 두 아들은 자신들의 배 채우는 것에 가장 좋은 것을 사용하였
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중히 여긴 것이요, 우선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불신입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 이 말씀
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부모자식간에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말씀하심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감사도 다를 수 없습니다.

그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다윗은 다윗성에 언약궤를 무사히 옮기고 나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 감사드립니다. [대상16:7,8]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세워
위선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다윗의 신앙이 위대한 점이 여기 있습니다. 그는 그
무엇보다 먼저 여호와께 감사합니다. 아홉이 실패한 것은 감사를 나중으로 미뤘기 때문입니
다. 여러분, 감사를 내일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한 마음이야 왜 없겠습니까?

아홉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이야 왜 없겠습니까? 제 가슴에는 주님
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가득하답니다.” 10명 모두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하지 않다면
인간이 아니죠. 그런데 문제는 감사를 마음으로만 담고 있는 사람과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
한 사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마음에서 나지만 행동화할 때 인정됩니다.

오늘 성경에서 10 사람 모두 감사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 그
마음을 행동화하였습니다. [15,16절]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
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사
마리아인의 감사의 행동화는 “큰 소리”와 “돌아와”, “엎드려”라는 세 단어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두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한 것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아홉과 이 한 사람이
다르다면 감사한 마음이 다른 게 아니라 감사의 행동화에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의 차이입
니다.

믿음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관념론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관념론이 아닙니다. 주
님은 행동하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는 말씀도 그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성경에
서 여실히 증명됩니다. [19절]의 선언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
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정말 감사를 행동화하였을 때 구원을 선물로 받습니다.

본문의 아홉과 하나는 그 믿음이 다릅니다. 아홉은 병 고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고, 하나는
구원 받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병을 고치고 기적을 보고 환상을 보는 종교적 엑스타시에 만
족하는 성도들이기 보다, 하늘나라 시민이 되길 바랍니다.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
의 구원을 받음이라” 감사의 행동화에 실패할 것인지, 성공할 것인지 여러분이 선택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다 나와 같은데요

아마 아홉은 다른 사람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간 사람은 오직 한 사람입니다. 자신
의 옆을 봐도 앞을 봐도 다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위안을 삼으며 집으로, 친구에게
로 갔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다 집으로 가네요.” 그들이 외쳤을 법한 말입니다. 잘못
된 비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홉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율법을 너무도 잘 알고 지키고 있는 유대인
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감사를 방해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서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따
라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야 종교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이니까요. 여러분, 오늘
날에도 이런 사태는 너무 잘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이제 시작하는 사람
보다 낫겠지 뭐.’, ‘권사님이니까 따라해야지.’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믿음 없고 인색
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을 따라하지 마세요.

실은 신앙도 일종의 배움입니다. 감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따라하려면 제대로 된 사
람을 따라해야 합니다. 제 아들은 늘 자신은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반에서 2등하고
학년에서 15-20등정도 합니다. 그는 늘 말합니다. “이만하면 잘하잖아요!” 그런데 제 엄마
는 늘 못한답니다. “그렇게 해선 안 돼. 내신 등급 1등급은 받아야 돼.” 왜 이 말을 할까
요? 아들은 자신 보다 못하는 아이들과 비교하고 엄마는 잘하는 아이와 비교하기 때문입니
다.

어디다 비교하느냐는 중요합니다. 아홉 명은 서로에 비교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모두가 병
은 고쳤지만, 구원하고는 거리가 먼 걸 어찌합니까? [마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가 바로 이
런 내용입니다. 오후 1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먼저 온 사람들이 많이 받을 줄
알았다가 한 데나리온을 주자 불평합니다. 자신에게 약속된 게 한 데나리온이면 비교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잘못된 비교는 불평을 낳고 감사를 잃게 만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
들의 불평도 비교에 기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에 실패하고 변명해도 소용없습니다. 감사에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결과는
엄청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감사를 먼저 하십시오. 마음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감사를 행
동화하십시오. 잘못된 비교는 금물입니다. 다른 사람이 지옥 간다고 우리가 지옥 갈 수는 없
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자는 변명이 있겠지만, 그 변명은 하나님을 설득시킬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 맥추 감사제사를 드리자

 

민28:26-31

 

한남제일교회/오창우목사

 

할렐루야 ! 오늘은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게 1년에 세 번, 하나님 앞에 감사절기제사를 드리
도록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맥추 감사절입니다.
오늘은 이 맥추감사절의 의미를 제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눌려고 하는 것
입니다.
맥추 감사 제사는 어떻게 드리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모여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 제사의 내용은 무엇인가? 감사절은 축제인데...
과연 많은 것을 얻어서인가? 해마다 드리라는 것으로 보면 흉년에도 드리라는 것
이다. 결국 이 감사축제의 의미는 신앙적인 것에 의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처럼... 외양간에 소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을 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리로다... 의 고백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1. 모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맥추 감사절은 첫 번째는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
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모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 출석을 하지 않는 것은 내 신앙에 문제가 생긴 증거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사
람들은 교회에 모이는 일을 힘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귀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신앙 생활은 모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관을 따르지 말라` 그랬던 것입니다.
여러분! 월드컵 때 응원 생각나시지 않습니까? 집에서 텔레비전보고 할수도 있지만 경기장
에서뿐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함께 모여서 응원을 합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700만 명이 경기장에서, 전국의 길거리에서 모여서 함께 응원을 할
때 세계를 감동시키고 우리 자신도 감동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도 한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할까? 생각만 해도 감동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께 기도를 하니
까 하나님이 블레셋군대를 물리쳐 주셨습니다. 승리했습니다.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기를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 내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습
니다. 그런데 요즘에 모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도 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맥추 감사절을 맞
이해서 성회로 모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26절 말씀 같이 보겠습니다.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아멘
성회로 모이는 데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일하는 것 때문에 모이는
것을 안 해도 괜찮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유 없습니다.
일하지 말고 모여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만남을 통해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관계확인이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우리도 명절에 가족
끼리, 친척끼리 모입니다.
이 명절에는 친구와 사업상의 관계자도 중요하지만 가족끼리 모입니다. 그러면 양해가 됩니
다. 모여서 가족간의 사랑, 형제간의 우애를 나누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회로 모여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모이는 것에 순종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냐 또 그러냐 하는 것을 나눌수도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 모일때 모이지 않으면, 참석하
지 않으면 그 사람 진짜 우리 가족 맞아? 그런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모일 때 모
이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 백성 맞아? 이렇게 이야기해도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일을 성수한다고 하는 근본적 의미는 무엇보다도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모이는 곳에 은혜가 있고
모이는 만큼 하나님이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일 오전뿐 아니라
오후에도 그리고 수요일 저녁에도 금요일 저녁에도 새벽에도 모이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
다. 모이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모이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모일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오늘도 모인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실줄로 믿습니다.

 

2. 맥추절의 제사는 2가지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제사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
분 27절부터 29절까지 있는 말씀을 읽겠습니다.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일년 된 수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매 수송아지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숫양 하
나에는 에바 십분지 이요 어린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의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 아
멘.
복잡한 내용이 써 있습니다마는 제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번제고 하나는 소제입니다.
첫째, 번제를 드린다.
번제는 생명을 바치는 제사입니다. 소, 양, 비둘기, 뭐 이런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경에 보게 되면 수송아지, 수양.. 뭐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만 한마디로 생명을 바치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제사입니다. 이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 번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셨던 제사입니
다.
창22장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 이유는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시험했겠습니까? 어쨌든지 이 사실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좋은 믿음이다.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번제를 드린 것으로 봐서 생명
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외아
들 이삭을 바치면서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1:17-19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
기 때문에 그는 외아들 이삭을 바칠 수가 있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
의 생명에 대한 주권에 대한 인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바칠 때에 외아들만을 바치는 게 아닙니다. 외아들이 죽으면 자기의 대도 끊
어지는 거 아닙니까? 자기의 생명도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겁
니다. 그는 이 생명 바치는 일에, 또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일에, 그는 하나님
앞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순종해서 하나님이 그를 인정했고 하나님이 이런 아브라함을 통해
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고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은 것입
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던 믿음입니다.
다윗은 자기 아들이 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간곡하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자 신하들에게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 아들을 살려달라고 그렇게 울며 불며 기
도했던 다윗 그 기도 안 들어줬으니까, 다윗이 앞으로 어떻게 할까 염려가 됐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이것을 눈치로 알았습니다. 왜 그러냐? "죄송합니다.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때 이 다윗은 아무 소리하지 않습니다. 일어난 자리에서 그는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그
리고 몸을 단장하고 집무실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아들이 죽었는데, 그렇습니까? 그때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
니다. 내가 아들이 아직 살았을 때에는, 병들어 있을 때에는 그래도 살려 주실까 해서 기도
했지만, 이제 죽었는데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때 다윗의 그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 아닙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어찌 할 수 있겠느냐.
생명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시는 것도 하나님이시고 또 죽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다.
그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번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 감사절을 지나면서 소위
감사예물을 드리면서 이것은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 이 속에 있느냐
이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살아 있는 것에 진짜 감사하고 있습니까? 아니 이 시간까지
살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내가 오늘 어디서 무슨 사고로 죽은 사람
보다 더 잘나서 이 시간 살아 있는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음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생명의 주인이시고 나를 살게 하신 그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는 것 이
것이 번제를 드리는 성도의 자세라 그런 말입니다.

두 번째, 소제를 드린다.
소제는 하나님의 삶의 주관자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은 철저하게
내 일이 잘 될 때에도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믿고 안 될 때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주관자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도 공중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누가
가서 그 먹이를 주지도 않고 길쌈도 아니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은무엇 이냐. 하나님
이 인도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고 하는 것
입니다.
이처럼 소제는 생명을 바치는 번제와는 달리 땀흘려 농사하여 지은 곡식을 추수한 것을 드
리는 제사인데 생명을 나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듯이
농사짓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농사를 지었다고는 하지만 그런다고 농사가 잘 될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철
저히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는 것이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어제 일을 생각해 보십시요. 태풍이 부니까 그 동안 잘 지어놓은 농사가 어떻게 되었는가?
한 순간에 다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제 속에는 잘되고 못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나의 노력의 결과가 있
을 수가 없다는 신앙의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 우리는 이 사
실을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맥추 감사 추수의 날에 이러한 생명의 주권- 살고 죽는 것은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하나님께 있다는 신앙의 고백을 하는 번제와 우리가 잘 되고 못되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달
려 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소제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이 사실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
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요.
한 부자가 추수 때가 되어 추수를 하는 가운데 과거와는 달리 풍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
다. 그래서 그는 창고를 헐고 더 큰 창고를 짓고 천년만년 이것으로 잘 살자며.... 기뻐합니
다. 이런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 그러나 기억하라 만약에 오늘 밤에
하나님이 너의 생명을 가져 가신다면 이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십니다. 무슨 뜻
입니까?
돈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믿어서는 안된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는 겁니다. 생명의 주인 되시고 삶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번제와 소제를 통해서 우리의 생사화복...사람이 살고 죽고 잘 되고 못되
고는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하나님만을 믿으라는 고백을 듣기를 원하시
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와 신앙의 고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히11:6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
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고 했습니
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정체는
첫째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찾는 자는 상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는 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는 두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제물을 드려야 한다.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는 것은 나의 생명을 지켜 주시고 살게 하신 것에 대한 값이
요 나의 삶을 인도하시고 도와 주셔서 여기까지 왔다는 -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것에 대한 값의 제물인 것입니다.
지난 반년 동안 나를 살게 하신 생명의 값 그리고 삶을 인도하신 은혜의 값은 어느 정도여
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값을 이 시간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건 조크입니다. ( 빵 냄새 값 100만원 )
어느 동네에 욕심 많은 사람이 빵집을 했습니다.
이 빵집 주인이 아주 잘 익은 빵을 가마에서 막 꺼내는데 이웃집 사람이 그 빵의 고소한 냄
새를 맡으면서 하는 말이 "야! 빵 냄새 너무 좋다! 이 빵 냄새 맡으면 기운이 나고 너무 너
무 좋다" 그랬습니다.
빵집 주인이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왜 내가 여태껏 이 생각을 못했지?`
저 사람 기분 좋게 한 것은 내 빵인데, 나는 빵 만드느라 열심히 고생하고 빵을 만들어 냈
는데 냄새는 저 사람이 맡으니까, 이제는 빵 먹는 값뿐만 아니라 빵 냄새 맡는 값도 받아야
되겠다. 특히 이웃집 사람이 가장 많이 맡았으니까, 이 사람부터 받아야겠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집 사람에게 `그 동안 이웃에 살면서 매일 상당한 양의 빵 냄
새를 맡았으니 냄새 값 주시오` 그랬으니 그 사람이 주겠습니까? 안 주겠습니까?
여러분같으면 줍니까? 안 줍니까? 난 절대 안 주겠다는 겁니다...그러니까,
빵집 주인은 정식으로 법원에 빵 냄새 대금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나서 동네 사람들은 재판장에 다 몰려 왔습니다.
`야! 판사가 어떻게 재판할까?`
빵집 주인의 열띤 주장을 다 들은 재판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일리 있다고 판결을 내리는
데 "이웃집 사람은 빵냄새를 맡아서 기분이 좋았으니, 냄새값 100만원을 지금 지불하시오"
10만원도 아니고 100만을 하라니, 어떻합니까?이웃집 사람은 뭐 씹은 얼굴로 100만원을 주
머니에서 꺼내어 주었습니다. 빵집 주인은 100만원을 가슴에 끌어 안고 얼굴에 함박 웃음을
띠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판결이 안 끝났습니다."
"이제 다시 빵집 주인은 100만원을 이웃 사람에게 돌려주시오."
"이웃 사람은 빵 냄새만 맡았을 뿐 빵을 가져오지는 않았으니, 빵집 주인도 돈을 만지면서
기쁨을 누렸으면 이제 다시 돈을 돌려주시오."
순간 재판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습니다. 터무니 없는 욕심을 부린 빵
집주인은 망신을 톡톡히 당했습니다.
이 욕심 많은 빵집 주인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망신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복은 두 가지입니
다.
첫째는 받는 복이 있습니다. 소유의 복입니다. 둘째는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빵집 주인은 받는 복은 받았으나 내 것으로 만드는 누리는 복은 받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는 받은 복은 많은데, 누리는 복을 받지 못해서 인생이 헛되다 그랬습니다. 누
리는 복을 받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느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누리는 복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 많
이 받기는 받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누
리는 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인 되시고, 하나님이 삶의 주관자가 되심을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심을 때 하나님
은 심는 대로 거두는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심을 줄 알아야 합니
다. 그 감사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누리는 복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제사는 추수의 결과에 상관없이 많이 거두었든지 못 거두었든지 드려야 한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부정적인 현실에도 믿음과
감사로 극복하며 새로운 삶을 창조해 가야 합니다.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떠난 한 여자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악성 위궤양을 앓고 있었지
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때가 되어 떠났습니다.
그런데 선교지로 떠난 지 한 달이 지났는 데도, 본부에서 선교 지원금 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 동안 선교사님은 아무 활동도 못하고 매일 보리죽만 먹으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그렇게 고생을 하며 지내고, 그리고 한 달 뒤, 선교 지원금이 도착하여
육 개월 동안 활발히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와 선교보고를 하면서, 한 달 동안 선교비가 오지 않아 보리죽만 먹었던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건강을 지켜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고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선교 보고가 끝나자 한 의사가 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선교사님은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예, 그렇지요!" 그런데 이분의 이야기는 그런 뜻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보리죽만 드셨기 때문에 살아나신 겁니다."
“선교사님의 악성 위궤양은 본국에 있으면 절대 못 고칩니다. 왜냐 하면 먹을게 많아서, 그
런데 그 곳에 가서 한달 동안 굶다시피 보리죽만 먹고 살았는데, 악성위궤양은 안 먹으면
낫는 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병을 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집의 개들도 보면 아프면 안 먹습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치유가 됩니다. 그
때에 이 선교사가 깨달았습니다. 사실 선교비가 오지 않은 한 달동안 얼마나 원망했겠습니
까?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하나님 정말 나를 사랑해서 이곳에 보냈습니까? 그랬을 것입
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랬
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는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는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통해서 건강을 되
찾기도 하고, 잃어버린 신앙을 되찾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와서 깨어지고 회
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더 큰 축복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하나님께서 "NO"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나의 오만을 없애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오만은 당신께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포기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인내를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인내는 고난의 산물이며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얻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행복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은 은총을 주실 뿐이지 행복은 나에게 달려 있다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영혼을 성숙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성장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고 당신은 내가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가지를 쳐주실
뿐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내 고통을 덜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고통으로 인해 내가 당신께 더 가까워 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여쭈어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YES"라고 말씀하시며
그래서 당신 외아들을 나에게 보내주셨다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것만큼
내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게 도와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 드디어 네가 바른 생각을 했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인이고 삶의 주권자 되심을 믿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고백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 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말씀을 믿으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분명히 믿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다가
와도 그것을 잘 참고 견디면 하나님은 그 이상의 축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절대로 나를 버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그때도 나
를 사랑하시고 나를 도와주심을 믿는 그런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3. 맥추절 제사, 번제와 속제는 기본이고 그 외에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


30절31절을 보자.
"또 너희를 속하기 위하여 숫염소 하나를 드리되 너희는 다 흠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
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아멘. 맥추절 제사는 기본적으로 번제와 소제이고, 그런데 하나님은 속죄제도 드려라 그랬습
니다. 이 속죄제는 매일같이 드리는 제사도 드리라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맥추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상번제인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가 아니라 이것도 드려야 된다는 것입
니다. 여기 상번제라고 하는 것을 봐서 우리는 속죄제는 매일같이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무엇인가 하면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제사입니다. 우
리의 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고 나의 삶에 주관자가 되시는데도 불
구하고 하나님이 없이도 살 것처럼 살았던 것에 대한 불신이고 두 번째는 잘 될 때는 내가
잘나서 잘사는 것처럼 교만하다가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던 죄입니다.
우리는 이런 죄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를 교만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속죄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맥추감사의 제사와 함께 매일같이 드리는 상번제, 속죄제를 드릴수 있
기를 바랍니다.

미국에 바바라 존슨이라고 하는 주부가 있습니다.
(「모자에 제라늄 꽃을 꽂고 행복하게 살아라』 5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 셀러 저자.」)
바바라 존슨은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그는 아주 어려운 일을 겪고 난 후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바라 존슨은 남편과 네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문제가 불어
닥쳤습니다. 집에 돌아오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그만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첫째 아들
은 음주 트럭 운전자에 의해 치어 죽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호모섹스에 빠져 집을 가출해
버렸습니다. 셋째 아들은 베트남전에 18세에 자원입대해서 어린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습니
다.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그는 연속되는 불행으로 ‘하나님, 어찌해서 내게는 불행만 다가옵니까?` 하고 하나님을 원
망하고 세상과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비참해지는 자신을 발
견하고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부정적으로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해!` 하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내
생명의 주인이시고 나의 삶에 주관자가 되심을 고백하고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내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감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
니다. 시간만 나면 교회에 가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식물인간이었던 남편이 기적적으로 생기를 되찾고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
다. 그는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게 되었고, ‘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나도 뭔가
좋은 일을 해야지.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해야지.` 하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난을 당해 실의에 빠진 부모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베트남 전쟁으
로 전사한 젊은이들이 5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전사했을 때 그 부모들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위로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국가를 위해서 큰 일을 한 겁니다.`
또한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해서 위로했습니다. 그들을
모아 함께 기도도 하고 그들을 위한 세미나도 개최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이들을 도와주
는 그룹을 만들고 선교회도 조직했습니다.
그는 남을 돕는 일로 아주 바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시고, 희망과 능력을
주셔서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출판계의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강사로 초청을 받게 되
었습니다. 여성계의 지도자가 되어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주는 엄
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호모섹스로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도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은 베스
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는 남은 생애를 보람 있게 사는 축복을 감사를 통해서 받았습니다.
만약 절망하고 낙심했더라면 더 비참하게 살았을 텐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생명의 주인 되시고 삶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고 또 감
사했을 때 그의 인생은 새로워졌습니다. 진로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성공했습니다. 행복하게 되었습니다. 남을 도와주는 존경받는 여성계의 지도자가 되었습니
다.
여러분은 어떻게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원망하며 사시겠습니까? 불평하며 사시겠습니까?
남의 약점만 끄집어내고 욕하며 사시겠습니까? 비관적이며 부정적인 삶을 사시겠습니까?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작은 일부터 감사하고 교회에 나와서도 감사하고, 가정에서
도 감사하고, 직장에서도 감사하고, 국가와 민족, 사회에도 감사하고 감사의 씨를 뿌릴 때
감사의 열매, 축복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감사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주인되시고 우리의 삶의 주
관자 되시는 우리는 주어지는 삶의 현실을 감사해야 합니다.그러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 이런 일을 보면 은혜는 환경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 은혜 입니다!
* 깨달으면 감사, 못 깨달으면 원망입니다. 깨닫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동안 감사치 않은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깨달음의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 중에 최고의 은혜는 깨닫는 은혜입니다. 땅에 살아도
깨달으면 하늘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살아도 못 깨달으면 땅의 사람입니다.
두 렙돈으로 가난하게 살아도 깨닫는 은혜 받으면 천국의 삶이지만, 재벌 되어 부자로 살아
도 못 깨달으면 그 사람은 진정 거렁뱅이입니다.
움막에 살아도 깨달으면 천국일지라도, 100평 빌라에 산다해도 못 깨달으면 움막만도 못한
것입니다. 죽 끓여 놓고도 깨닫는 은혜 받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지만 고기반찬을 놓고도
못 깨달으면 세상에 종 되어 삽니다.
감옥에 앉았어도 깨달으면 그곳이 천국이지만
궁궐에 앉아 살아도 못 깨달으면 그곳은 감옥입니다.
힘겨운 직장 속에서도 깨달아지면 그곳은 선교지 되지만
좋은 직장 속에서도 못 깨달으면 그곳은 수용소 되고 맙니다.
방 한칸에 온 식구 살아도 깨달으면 대궐이지만,
각자의 방 넓다 해도 못 깨달으면 쪽방의 삶 입니다.
시원치 않은 남편(아내) 앞에 두고 깨달으면 주님 섬기듯 하지만
못 깨달으면 그 남편(아내)은 남남 되고 맙니다.
못 고칠 질병 끓어 안고도 깨달아지면 그것도 감사의 이유이지만
건강하여도 못 깨달아지면 그 건강은 아픔만도 못합니다.
깨닫는 것이 그렇게 큰 은혜일수 없습니다.
은혜란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아지면 은혜 입니다.
기막힌 은혜란, `아 그래서 그렇게 되었구나!`
`하나님의 섭리를 잘 헤아릴수는 없지만
그렇게 하실려고- 그래셨구나!`라고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상황으로 바꾸어 지는 것도 주님의 은혜이지만 변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속에서 주님의 섭리가 깨달아진다면 더 큰 은혜 입니다. 즉시로 응답을 주심도 귀한 은
혜이지만 침묵과 더딘 응답 속에서도 깨닫는 은혜 받았다면 그것은 더 없는 축복 입니다.
가시를 뽑아 주심도 은혜이지만 박힌 가시 속에서 말씀하심으로 깨닫게 하신다면 그 가시는
오히려 갑절의 은혜가 됩니다.
깨달음의 깊이가 감사의 깊이이며 감사의 깊이가 영성의 깊이일 것입니다.
깨달으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입니다. 못 깨달으면 그 어디나 지옥입니다.
"주님! 깨닫지 못한 우매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기막힌 깨달음
으로 충만케 하사 놀라운 인생으로 살게 하옵소서".
아멘.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는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생활은 깨닫는 은혜를 받지 못하면 습관적이고 위선적이 되기 쉽다. 신앙생활의 기쁨은
없다. 오히려 교만한 마음으로 남보다 먼 저 인정받기를 원했고 남을 판단하는 일에 앞장서
고 분노 실망으로 억울해 한다. 나의 열심이 오히려 짐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시는 주님의 신실하신 그 사랑이 잠 자고 있던 내 영혼을 깨
우심을 받으라. 그러면 복음의 빛으로 내게 들어오신다 .
나의 행함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그의 의로우심을 내가 믿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심을 깨닫게 해주신다.
나는 믿는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어둠의 자식이 아니고 빛 의 자녀가 되었음을. 이제 나는
내 안에 계신 성령께 순종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라.
부족한 나의 것으로 드리지 아니하고 온전하신 주님의 것으로 드리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우리 찬송을 한 장 부르자.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에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
나 하늘나라.
지난 서해바다에서 일어난 소위 서해교전으로 인해 우리 아군이 많이 죽었다.
생각할수록 속이 상한다. 희생자들의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바란다. 문제는 죽
은 이들의 죽음과 희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죽음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를 잘 들어야 한다.
국방의 측면에서 보면 안보를 튼튼히 하라는 것
정치의 측면에서는 햇빛정책을 계속할거냐 아니면 강경책을 쓸 거냐이고, 사회적인 측면에
서 보면 분단의 아픔이다. 그렇다면 신앙적 의미에서 볼 것은 무엇인가?
1. 월드컵이 신앙이 되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2. 월드컵의 열기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는 일에의 열심히 그 10%만이 라도 되라는 책망이
기도 하다.

맥추절은 추수했다는 소득에 대한 단순 감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이다. 그
래서 맥추 감사제사는 두 종류이다.
1.자원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제사 이다. 생명과 삶의 주관자 되심이다.
2. 의무제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아온 것 그 죄를 회개하
고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하는 것이다.
창세기 34장의 복을 받자.(22-24)
1)승리
2)번영
3)보호.안전
살전 5:16-18의 말씀대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
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라는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루어
지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산다. 믿어라. 최고의 감사로 하나님 믿음을 보이라.

 

▒ 맥추절을 지키라

 

출 23: 14-17

 

서론> 술을 좋아하던 분이 교회를 나오게 되었는데, 교회에서 맥추감사절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맥추감사절을 잘못 알아듣고는 이번에 "맥주감사절이 있다면서요.
그 날은 교회에서 맥주 파티라도 있습니까? 교회에 나오면 술을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웬 맥주감사절입니까?" 그때 어느 성도가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맥주 감사절이 아니라 맥추감사절입니다." 이 성도님이 맥추감사절을 맥주감사절로 오해한 것도 큰 무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맥주는 보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추수와 관련해서 두 가지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맥추감사절이고,
다른 하나는 추수감사절입니다. 맥추감사절은 말 그대로 보리를 수확하고 거두어들이는 시기인 7월 첫주에 드리고,
추수감사절은 11월 셋째 주에 드립니다. 맥추감사절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절과 같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밀추수가 끝난 직후 풍성한 수확을 기념하는 맥추절에 새로 추수한 곡물을 고운 가루로 빻아서
떡 두덩이로 만들어 그것을 제사장에게 가져왔습니다. 제사장은 가져온 떡을 요제, 곧 흔들어 드리는 제사로 드렸습니다.
또한 떡 두덩이와 함께 어린 숫양 두 마리도 함께 드렸습니다. 이와 같은 맥추감사에 대한 규례는
레위기 23:15-17절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현대를 사는 오늘 우리가 이 맥추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맥추절을 지키라고 했지 지키면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곧 순종을 해야 함을 말합니다. 만약 이를 거부할 때는, 거기에 따른 무서운 형벌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순종하는 자에겐 복이,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따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반문을 제기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
들었던 명령이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합니다.
거기에 대한 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23:14을 보십시오. 거기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습니까?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모세의 말을 듣고 있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손도 아닌데
구지 맥추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또한 하나님과 언약으로 맺어진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모세가 이 맥추절에 대해 말씀할 때, 이 규례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언약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 백성된 우리에게도 적용되어 지는 것입니다.

맥추절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신 16:12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억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왔음을 기억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말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억상실증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에 비유할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었지 않습니까? 물으면 그들은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하는 자들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린 일을 정말 기억하지 못합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은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하면 언제 모세를 통해 홍해흫 건너게 하였습니까? 라고 반문 합니다. 하나님께서 먹을 물이 없을 때,
광야에서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시고, 먹을 것이 없다고 할 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은 기억이 안 납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쉽게 하나님을 배반하겠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종되었을 때를 잊지 말라고, 개구리 올챙이 시절 잊고
살지 말라고 이와 같은 절기를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잊지는 않습니까? 지금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혹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여 주셨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이 죄문제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피로 씻음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은 죽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중 마지막 재앙인 장자 재앙이 애굽에 내릴 때,
그들의 자식들과 생축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은 둘째 사망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영원히 지옥형벌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데,
예수께서 살리셨습니다.
예화)
영국의 유명한 매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목사님이 하루는 어떤 골목길을 가다가 매를 맞고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차려 일어 나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집에 들어오니,
온 식구가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그 피투성이의 몸을 가지고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생명만은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내가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하면 나를 때린 저 강도와 같이 되었을 터인데 예수 믿고, 강도가 안 되고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내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의 조건만 찾아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이 맥추절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맥추감사절을 어떻게 지켰을까요?
첫째로, 그들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 첫 것이라는 단어와, 수고하여 라는 단어입니다. 아무리 첫 것이라도, 그것이 부당한 방법으로 취한 것,
하나님은 받질 않으십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땅에서 수고한 것 중에서 제일 첫 것을 드려야 합니다. 첫 것을 드린다는 것은 유월절 예식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애굽에 내린 열가지 재앙 중 장자 재앙은 초태생에게 내린 벌입니다. 초태생이면,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다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처음 것을 드린다는 의미는 초태생 장자 죽음에 대한 대속을 뜻합니다. 장자로서 죽어야 하는데,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여 예물로써 대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출애굽기 34:18-26절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죽음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그 예물로서 대속의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예물을 말씀하실 대, 빈손
으로 내게 보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대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물은 자원하는 예물입니다. 그것이 억지나, 인색함으로 드리는 것이면 하나님은 받질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헌물을 받을 만큼 가난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인색함으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대로,
헤아려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고,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받은 복을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받은 복에 대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령을 받았을 때, 아직 가나안에 정착하지 않은 때이므로,
앞으로 주실 복에 대해 믿음으로 감사를 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화)1874년부터 1877년까지 3년에 걸친 심한 가뭄과 엄청난 수의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대경제 공황에 빠졌다.
1877년 4월 27일, 미네소타 주 주지사 필스버리(Pillsbury) 씨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 기도의 날'을 선포하였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 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 기도는 하늘을 덮었다. 그러자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감사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감사가 기적을 만들어 낸다고 할 때, 그 기적은 믿음이 동반된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복 주실 것에 대해 감사하고, 문제 해결해 주실 것에 대해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은 1년 중 전반기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배푸신 복에 대해 감사하고,
앞으로 나머지 반년도 복 주실 것을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분도, 복주실 것으로 인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게서 여러분에게도 기적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모든 식구들과 함께 맥추절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구약 시대에는 성막과 성전이었고,
신약시대에는 교회입니다.
성막과 성전에는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이 가져온 예물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도록 흔들어 요제를 드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날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열납하시도록 축복하게 하십니다. 제사장들이 흔들어 요제를 삼은 것은,

곧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은 교회에서 나와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나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
심지어는 우거하는 객이라도, 나그네라도, 외국인이라도 함께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가족 모두가 다 나와서, 맥추절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맥추절에 대한 규례는 영원한 규례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대대로 지킬 언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금생 뿐만 아니라 내새에도 유효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맥추절에 대한 규례를 영원한 규례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처음 익은열매가
곧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대문입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이 첫 곡식을 요제로 흔든다음에야 비로소,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드릴 수 있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첫 열매가 있은 후라야 우리 모두 부활할 수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무말랭이처럼 말라비틀어진 육체는 지니고 언제나 휠체어에 앉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루 게릭병(근육 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다.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이 병에 걸렸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 2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랄까. 죽음이 선고가 있은 지 무려 4반세기 이상을 살고 있긴 하지만 1
985년에는 또 다시 폐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가지 상실하고 말았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 번 상상해 보자.
그 불행과 고통을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표현해야 할까?
당사자인 호킹(Howking)박사의 <시간과 역사>라는 책을 대하면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우리가 통상 머리말이라고 하는 부분을 그는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 하에 기술하고 있다. 그의 글이 또한 전개되어 가면서 그는 계속하여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다.
호킹은 만인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불행의 요건을 남달리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인생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삶의 자세로 간사가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정신적인 자세가 아니라면 그가 어찌 그렇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나라까지 와서
강연을 하겠다는 엄두인들 내겠는가? 호킹은 남달리 값지고 성공적인 삶의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원인은
곧 감사로 충만한 정신자세 때문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해 본다.
흔히 그는 현대의 살아 숨쉬는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사공의 마술사'인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이론 물리학자라는 평가도 받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기에 그는 나이 겨우 32세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왕립협회의 회원이 되는 영광을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 영국 케임 브리지 대학의 루카스(Lucasian) 수학교수로서 뉴턴의 영예를 계승하고 있다.

건강, 지위, 재산, 가문, 학벌, 건전한 가족운 등 남이 부러워할 만한 여건들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서도 불평 불만에
사로잡혀 찌들고 비뚤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사람은 천당에 옮겨다 놓아도
거기에서도 불평거리를 찾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도 지옥의 삶을 살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이 보기에 아무리 고통스러워 보이는 삶의 여건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호킹 박사와 같이 본인의 기본적인
자세만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감사가 충만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인간임을 우리는 새삼스럽게 재음미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 날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지옥형벌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에 감사하십시다.
또한 죽은후에 다시 부활할 것에 감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 맥추감사 지키는 방법

 

민28:26-31

 

서론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맥추감사절을 지킬 때는 이렇게 지키라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게 1년에 세 번 하나님 앞에 감사절기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맥추 감사절입니다.

1. 많이 모여야 예배해야 합니다

본문 26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하였습니다.
이 절기(칠칠절)는 밀의 첫 소출을 하나님께 바치는 맥추절(출 23:16) 또는 맥추의 초실절(출 34:22)로서,
보리 수확의 첫 열매를 바치는 초실절(레 23:9-14)로 부터 50일만에 맞이하는 날입니다.
실제로 이 날은 보리의 첫 수확하는 날로부터 밀 수확을 시작하는 날까지의
약 7주간과 연관을 가진 절기로써 곧 그 동안의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그 날 즉 그 절기 일에는 성회로 모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모이는 것이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이기를 힘쓰고 찬송하기를 힘쓰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모이기를 권고하면서 하는 말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하였습니다(히 10:25).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회당 예배 외에도 다른 특별한 그리스도인 모임을 가졌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경우 특별한 그리스도인 모임을 폐하는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유대인 관습에 빠져 그리스도인로서의 신앙과
생활을 잃어버리게 되기에 저자가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예배를 폐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앞두고 곧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더욱 열심을 내어
다가오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서로 격려와 위로를 통해 담대해지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그 자체가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절을 위하여 기쁨으로 주 앞에 모여서 찬송과 기도로 진정한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향기로운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본문 27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일 년 된 수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하였습니다.
이 부분에는 칠칠절(七七節)에 드리게 될 번제와 소제의 예물에 대해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칠칠절 제사가 예표하는 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무교절 기간 중 안식일(성회) 후 첫날에
곡물의 첫 소산을 헌상한 것은 안식일 후 첫 날, 곧 신약의 주일(主日)에 이뤄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요 20:17 고전 15:20). 그리고 무교절 기간에 첫 소산을 드린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새 소제를 드린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모든 성도들의 중생과 부활을 예표한 것입니다(고전 15:22-26). 또한 이때 드려지는 번제는 성도의 온전한 충성과 헌신을,
속죄제는 그리스도와 교제하고자 하는 자에게 필수적인 회개와 그리스도의 죄 사유하심을 각각 예표한 것입니다.
문제는 주께서 향기롭게 받으시는 제물입니다. 주께서 믿음이 담겨지지 아니한 에물은 받지 아니하심은
이미 창세기 가인의 제사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아벨을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고 가인은 믿음을 빼놓고 드린 것이 문제입니다(히 11:4)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고 인색함이나 억지로 드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하였습니다(고후 9:7).
여기서는 연보의 액수가 많은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충동적이거나 우연한 결정이 아니라
내적인 결심에 의해 즐거운 마음으로 연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누가 자랑하거나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또는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많이 바쳤다면 그것은 참다운 연보가 아닐 것입니다. 헌금하기 싫어하고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연보하거나,
대의 명분이나 외부적 압력에 의해 연보를 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심이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하였으니(엡 5:2)
우리도 주와 목회자들을 위하여 헌금하는 것이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빌 4:16-20).
믿음으로 드리는 물질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드리는 물질이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3.하나님께는 흠 없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본문 30-31 "또 너희를 속하기 위하여 수염소 하나를 드리되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하였습니다. 이는 칠칠절에 번제 및 소제와 더불어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리는 바로 죄란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본장 15절과 22절)은 즉
죄 사유함을 얻은 인간에게 비로서 진정한 감사와 은혜에 대한 찬양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히 13:15-16).
구약시대에 속죄제는 인간들의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제사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과 우리들의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둘도 아닌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원수되었던
관계가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죄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담기지 아니한 물질은 흠이 있는 것이고 감사가 담긴 물질은 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감사가 없는 것이 왜 흠인가? 믿음으로 행치 아니함이 죄라면(롬 14:23)감사가 없는 물질은 믿음이 없는 물질뿐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감사의 표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달음 때문입니다. 은혜 중에 최고의 은혜는 깨닫는 은혜입니다.
땅에 살아도 깨달으면 하늘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살아도 못 깨달으면 땅의 사람입니다.
움막에 살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그 곳이 천국일지라도 100평 빌라에 산다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주의 은혜를 깨닫고 움막에 사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감옥에 앉았어도 깨달으면 그곳이 천국이지만 궁궐에 앉아 살아도 못 깨달으면 그곳은 감옥입니다.
힘겨운 직장 속에서도 깨달아지면 그곳은 선교지 되지만 좋은 직장 속에서도 못 깨달으면 그곳은 수용소 되고 맙니다.
찬송가 작가는 주를 찬양하기를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고 했는데 은혜란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아지면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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