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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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

전1:1-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중략)…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전도서 1장 1∼11절

 

주님 보혈로 죄를 씻고, 삶의 존재 가치 찾으며

건강한 자화상 가지고 죽음의 절망 극복 할 때

진정으로 행복하고 기쁜 삶 누리며 살 수 있어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삶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고 있으며, 사망의 그림자가 모두를 덮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후회 없이 살고 행복하게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진정 너는 행복하게 살아가느냐?’라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1. 죄책과 정죄의식으로부터 자유한 삶

 죄책과 정죄의식에 사로잡힌 삶에는 절대로 행복이 없습니다. 큰 죄, 작은 죄 등이 마음속에서 참소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기쁘고 행복하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이들을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에 모든 실과는 다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셨으되 선악을 아는 분별의 권세는 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선악을 분별하는 ‘좋고 나쁨’의 결정은 절대 주권적인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가장인 아버지가 이건 ‘좋다 나쁘다’를 결정합니다. 회사에서는 사장이 ‘좋다 나쁘다’를 결정합니다. 이 우주 만물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나도 결정하겠다. 당신이 결정한 것은 나쁘고 내가 결정한 것이 좋다”라고 한다면 결국에는 논쟁이 붙으며 싸움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에는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울 자가 없으며 하나님만이 선악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은 그렇게 결정했으나 우리는 그렇게 결정 안합니다. 이렇게 하는 게 좋습니다”라고 하며 대적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과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적자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라고 하셨고, 그들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범죄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은 에덴으로부터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8절∼10절에 보면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야훼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야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야훼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으면 숨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양심에 숨어야 되고, 이웃 사람에게 숨어야 되기 때문에 늘 스스로 변명할 수밖에 없으며, 숨어 살게 됨으로 마음에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죄책감이 있으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고 죄를 다 청산해 버리는 순간 마음에 기쁨이 옵니다. 시편 32편 3절에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라고 다윗은 죄책으로 인한 고통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죄를 다 자복하고 나니 그 마음에 기쁨이 넘쳐 다윗은 시편 32편 5절에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야훼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우리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나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대신 담당하고 청산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앞에 나와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때,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성가 가수로 활동하는 전용대 목사님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서대문 시절이었을 때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었습니다. 전신마비가 되어서 겨우 지팡이를 짚어 교회오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옛날에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거리를 걸을 때면 절름발이라고 놀림 받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런 현실이 괴로워서 늘 술에 취해서 살았습니다.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으나 하나님께서 자살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을 읽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기고 피 흘려 자기 같은 절름발이 버림받은 사람도 구원을 받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몰라줘도 주님은 나와 같이 계신다. 세상에 아무 친구 없어도 주님만은 내 친구가 되신다”하며 찬송을 부르고 그 기쁘게 살았습니다. 어느날 최자실 목사님께서 “너는 하나님께서 찬송을 부르고 영광을 돌리라고 절름발이 되게 하셨으니 예수님께만 영광 돌리고 찬양 부르고 씩씩하게 살아라.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의 사명이 찬송을 부르는 것임을 알고 찬양사역자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주신 은사와 사명이 있습니다. 은사와 사명을 발견한 전용대 목사는 “제가 가진 것은 많지 않으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명을 다하고 사니 누구보다도 행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누구든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없는 즐거움은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솔로몬 왕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즐거움을 다 누려본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0장 23절∼25절에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그들이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그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부귀영화를 누려본 후 그는 전도서 2장 11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부귀영화 공명은 헛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귀영화 공명을 얻기 위하여 생명을 내놓지만 하나님이 같이 계시지 않으시면 그 부귀영화 공명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사명을 마음껏 사용하며 인생을 살 때 큰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허무와 무의미를 극복한 삶


 허무와 무의미의 삶에 사람들은 다 몸서리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의 가치가 어디에 있고, 자기가 살아갈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는 인생이 존재의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목회 카운슬링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한 중년 남자가 목사님에게 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목사님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목사님하고 상담한 후에도 답을 얻지 못하면 나가서 자살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자 목사님이 놀라며 “뭐가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직장을 잃어버려 수입이 없습니다. 내가 돈벌이 못하니 아내가 나를 버리고 떠나려고 합니다. 자식들도 아버지가 무능해서 교육도 못 받고 있습니다. 식욕이 좋은 저에게 먹을 것도 없습니다. 생활이 어려우니 친구들도 다 떠나가 버려 친구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흰 종이와 연필 한 자루를 주면서 쓰게 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니 당신의 친구입니다. 그러니 친구가 있다고 적으십시오. 그리고 두 번째 아내가 완전히 떠나지 않았으니 아직 아내가 있다고 적고, 셋째로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식들이 있으니 자식이 있다고 적으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어도 시한부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데 당신에게는 건강이 있으니 건강이 있다고 적으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당신은 가지고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없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당신은 아무것도 없고 세상에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의 없는 것은 제쳐 놓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당신은 아직 부자입니다”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없다는 말은 하지도 말고, 있는 것을 말하며 살아야 합니다. 있는 것을 말할 때 삶에 존재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큼 우리의 존재 가치를 느끼게 해 주시는 분은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굉장히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우리가 가치가 없었다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주시고 대신 우리를 구원하겠다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될 우리를 건져내신 것을 볼 때 우리를 생명처럼 사랑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예수님만큼 가치가 있는 삶을 사는 인생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주적인 가치를 가진 자로서 자신의 가치를 느끼며 감사하고 찬양하면 우리의 마음에 행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3. 죽음과 무의 절망을 극복한 삶

 마음의 병중에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의 병입니다. 사람들은 한번 태어나서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영원한 행복은 없다고 말하기에 사람들은 언제나 죽음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히 사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합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블레셋이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장수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골리앗이 앞장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는데 “너희 중에 남자 있으면 나오라! 한 번 대항해서 싸워보자”라고 외치는데도 온 이스라엘과 왕인 사울은 그에게 대적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울왕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기골이 장대함에 기가 눌려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삼상 17:4∼11)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인 사울로부터 시작해서 군인 한 사람 한 사람까지 이 전쟁에서는 승산이 없다는 패배의식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립동 소년 다윗은 달랐습니다.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대가 벌벌 떨고 있었던 그때 다윗은 나가서 큰 소리를 칩니다.(삼상 17:37)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와 같이 계시며, 하나님께서 그와 더불어 싸우신다는 승리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고 고백하며, 물맷돌을 던졌고 그 돌을 맞은 골리앗이 넘어지자 달려가 골리앗의 칼로써 목을 베어서 그 머리채를 손에 들고 흔드니 그제서야 이스라엘 군사들이 용기를 얻어가지고 블레셋을 향해 달려 나가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만세 전에 하나님이 미리 우리를 택해서 불러 주셔서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고,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니 우리는 보통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보통 사람이 아닌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자화상을 가지고 늘 기도하고, 성경 읽고, 찬송하면 내 자화상이 든든해지기 때문에 원수의 공격이 있을 지라도 쉽게 막아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약하고, 두려워 떨고, 힘이 없고, 보잘 것 없다는 비뚤어진 자화상을 가져선 안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 주신 자화상을 가지고서 나아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두려움을 이기는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건강한 자화상을 가져야 죽음과 무의 삶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39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전인구원을 받아 이 세상에 살면서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천국 가셨지만 주님 안에서 슬픔을 극복한 선교사 ‘토레이 박사님’과 저는 굉장한 친분이 있었습니다. 신학자 토레이 박사님이 우리나라 강원도에 와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그만 12살 된 딸을 사고로 잃어버렸습니다. 딸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다음에 그가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그 딸이 아빠하고 부르던 그 음성이 귀 끝에 쟁쟁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딸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고, 얼굴도 볼 수 없고, 성장해가는 과정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잘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침상에서 일어나서 산책을 나가 가로등에 기대어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의 영이 성령님을 따라 기뻐하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체험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 성령이 내 마음속에서 우물처럼 샘솟아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런 힘으로 용솟음 쳤다. 내 인생에서 그때가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성령이 막 용솟음 쳐 오르는 기쁨을 일생에서 처음으로 그때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딸을 잃은 죽음의 슬픔조차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토레이 박사가 체험하고, 이 세상에 어떠한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라도 성령이 오시면 다 이기고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주님께 부르짖으면 성령의 생명이 와서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미국의 ‘존 데반 출판사’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신앙생활에 대한 몇 가지 조사를 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성경이 당신에게 유익이 됩니까?”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응답자의 86%의 미국인들이 “성경이 복의 근원이 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번째로 “어려움을 당한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65%의 미국인들이 “성경에서 해답을 찾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믿음으로 세워진 나라인 미국 국민은 대다수가 성경을 복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문제의 해결이 성경에 있다고 답한 것입니다. 미국인들 대다수는 미국이 아직도 강한 나라인 것이 다가온 문제 앞에서 성경으로부터 그 어려움의 해답을 구하고, 믿음으로 나가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불행도, 행복도 다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선택에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늘 싱글벙글 웃는 80대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비결이 궁금해서 말을 붙였습니다. “할머니”하고 부르자 할머니가 그저 “하하하하하하” 웃기만 하셔요.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요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죠?”하자 할머니 대답이 “아유 하하하, 건강하고 말고, 하하하, 그저 위암이 말기가 되어서 그렇지. 내가 가난한 집에 딸로 태어나서 시집와서 80세가 되도록 살면서 집도 마련했고, 자식을 다섯 명이나 얻었고, 그러고 지금은 암에 걸렸지만은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니 행복하지 어디 행복 안한 것이 있나? 하하하” 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을 던지 목사님이 자기가 여태까지 목회한 것이 헛일한 것 같다고 느꼈다 합니다.


 우리는 같은 상황이라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행복은 없지만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행복은 있습니다. 행복한 삶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행복과 기쁨을 파괴하려는 원수의 무기를 제거해 버려야 됩니다. 그것은 죄책이요, 미움이요, 죽음의 절망입니다. 이와 같은 병적 존재를 수술해 내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의 은총으로 행복과 기쁨의 삶을 주십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보혈로 매일매일 씻고 청산해야 합니다. 또 삶의 의미와 가치도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김으로 얻을 수 있게 되고, 죽음의 절망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죽음 저 건너편에 안심하고 건너갈 수 있으므로 모든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의 은총으로 행복과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을 가지고 나가면 어디가도 행복을 얻을 수가 있으며, 행복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 자리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믿음으로 고백하며 행복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 주신 인생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귀는 정죄의식을 주고, 허무한 마음을 주며, 죽음의 절망을 통해 패배자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그 모든 억압과 절망의 자리에서 자유함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으로 참된 행복의 삶을 누리며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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