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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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스승이신 예수님
(마11:28-30) 

 

 

   우리는 모두 마음의 한 구석에 영원히 지을 수 없는 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숱한 만남의 사람들이 있고, 인연으로 얽혀진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분들 중 하나는 아마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일 것입니다. 오늘은 가르치는 분들을 한번 다시 생각하는 스승의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 땅에서 그래도 사명을 가지고 자라는 후손들을 바르게 가르쳐 나라의 동량을 삶으려는 교사의 사명과 위치 및 그 역할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일깨우며 그들의 수고와 어려움을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기도로서 돕고 그들이 수고하고 애쓰는 각 부분에 있어 협력을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적극적으로 돕자는 의미에서 이 스승의 주일을 정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반 교사의 위치와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회는 예로부터 가르치는 분을 귀하게 생각하고 존경했습니다. 스승을 사부라고 가르치는 아버지라고 했을 뿐 아니라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다고 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스승의 은혜를 깊이 깨우친 사람들이 스승의 그 고마움을 이렇게 노래로 지어 불러지고 있지 않는가 말입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 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후렴) 아- 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 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2. 태산같이 무거운 스승의 사랑 떠나면 잊기 쉬운 스승의 은혜 어디간들
    언제인들 잊사오리까 마음을 길러주신 스승의 은혜
 3. 바다보다 더 깊은 스승의 사랑 갚을 길은 오직 하나 살아 생전에
   가르치신 그 교훈 마음에 새겨  나라 위해 겨레 위해 일하오리다

  우리 사회가 지키는 스승의 날은 5월 15일입니다. 일부에서는 이 스승의 날을 2월 달로 옮겨야 된다는 주장이 제기 되기도 합니다만 오늘을 스승의 날로 제정한 것은 분명한 의미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5월15일은 우리 민족의 성군이셨던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탄신 일입니다. 세종대왕은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다방면의 재능과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를 펼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고 최고의 문화와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측우기 해시계 등을 발명하고 제작을 했을 뿐 아니라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고 훈민정음을 창제했습니다. 우리 민족 최고의 지도자요, 최고의 스승인 세종대왕의 탄신 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처음에는 1958년에 청소년 적십자 회라는 청소년동아리에서 사은행사를 시작했는데 1965년부터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해서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배움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 없는 줄 압니다. 왜냐하면 배운 만큼 살아가고 배운 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배운 사람은 좋게 살아갑니다. 나아가 얼마만큼을 배웠느냐에 따라서 그 배운 것을 활용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반면 배움에 있어서 얼마나 배웠느냐는 배움의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배웠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잘못된 것을 배웠다면 그것은 아무리 많이 배웠다고 할지라도 배우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른 것을 배워야 하고 배운 것을 바르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누군가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배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가르침을 통해서 배우는 교수의 경험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터득하여 얻는 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지식은 대다수 가르침의 배움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좋은 가르침을 원하고 좋은 스승을 원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사들이 있습니다. 실력 있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유능한 교사들이 있습니다. 잘 가르치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그 배운바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가 말입니다. 사람들의 지식이 점점 향상되어가고 놀랍도록 지식의 활용도가 많아져 가는데 왜 이 사회는 바로 서지 못하고 점점 더 부패하여가고 온갖 범죄가 난무하고 타락하여 가는가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 가르침의 문제요 배움의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르치는 교사들이 바로 서서 가르치지 못했고 배움의 사람들이 바로 배우지 않고 배웠어도 그 배운 바를 바르게 활용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가르침과 배움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바르게 가르쳐야 함은 물론이요 배우는 사람들이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바른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더불어 바르고 온전하게 가르쳐 주는 바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살아가지만 사람은 본능적으로만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교육에 의해서 사람다워집니다. 교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교육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키워주는 다섯 분의 선생님을 만납니다. 첫 번째는 태어나면서 만나는 부모님이고 두 번째는 교회에서 만나는 주일학교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학교에서 만나는 학교 선생님. 네 번째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회 선생님이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우리 영혼의 영원한 스승이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참된 선생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만인이 우러러 숭모하는 인류의 참 스승,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신 최고의 스승입니다. 그분은 우리 인생에게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 진리의 스승이시며 인생의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생명의 스승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시며 풍성하게 하시는 영혼의 스승이 되시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배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스승을 바로 만나야 하고 잘 만나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좋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좋은 스승으로서 예수님은 우리를 좋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기 위하여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시는가에 대하여 생각하고 깨우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분 선생님이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아니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생들을 향하여 내게 와서 배우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늘 와서 배워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배운 대로 산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배우되 참된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된 것을 배우지 않기 때문에 바른 인격자가 되지 못합니다. 참된 것 바른 것을 배우지 않게 때문에 바른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바른 것을 배워야 합니다. 바르게 배워야하고 온전하게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스승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배워야 합니다

 주시는 본문 마11:2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참다운 쉼과 인생의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 뒤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배고프고 소외된 백성들,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는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고 뒤를 따랐습니다. 또 하나는 소수의 사람인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 배우도록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간들, 기본적인 생존의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따르는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에게서 진리를 배우고, 인격을 배움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이 제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새롭게 배워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은 세상의 것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께로 왔다면 주님의 가르치심대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배운 대로 성격도, 인간성도, 체질도, 기질도 다 형성되었습니다. 부모의 운명을 대물림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우리 사회에 물려진 습관과 문화가 오늘의 사회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배움에 따라서 운명을 결정하는데 잘 배우면 잘 배운 대로 성공하고, 행복하고, 잘못 배우면 잘못 배운 대로 인간은 불행하고 굴절된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성격도 배운 대로 됩니다. 부모로부터 상처 나고 부모로부터 받은 그대로 또 배운 대로 형성이 됩니다. 부모에게서 자기도 모르게 그대로 배운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식에게, 아내에게, 사회 속에 그대로 표출하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거의 배운 대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만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친구를 사귀면서도 배우고, 가정에서도 배우고, 사회에서도 배웁니다. 그러면서 배운 대로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부모에게서 배웠든, 친구에게서 배웠든, 사회에서 배웠든 그대로 하나의 인간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배우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다시 배우라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주신 말씀으로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식을 배우고, 기술을 배우고, 학식을 배우고, 많은 정보를 배우지만 마음을 배우라고 초청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배워야 할 것 가운데 최고의 배움은 바로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특별한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우리에게 마음을 가르치는 특별한 스승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인간의 행복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고 불행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불행합니다.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을 만들어가지만 마음이 불행한 사람은 결코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교육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배움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사회적으로 큰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을 먼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밀턴은 마음은 천국도 지옥으로, 지옥도 천국으로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삼중고의 인간 소경, 벙어리, 귀머거리였던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 답은 것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것은 가슴으로만 느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좋은 것은 마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월리암 제임스는 “우리 세대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이 자기 마음 자세를 바꾸므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일찍이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모든 운명과, 행복과, 불행과, 삶의 모든 자유가 다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내게 와서 내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무슨 마음입니까? 예수화 되어지는 마음입니다.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온순하게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온순과 온유는 다릅니다. 온순은 자연적인 성품이요, 온유는 하나님께서 바꾸어주신 성품입니다. 온순은 겉 사람의 성품이요, 온유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 속 사람의 성품입니다. 온순한 사람은 자기 고집대로 삽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대로 삽니다. 온순하면서도 예수를 안 믿을 수 있지만 온유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는 끝까지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고, 화평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를 이룹니다.

   사도 바울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했다”(빌 2:5-8). 이것이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자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온유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서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자기를 완전히 별세시키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마음을 배울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방법을 하나 제시했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멍에를 멘다는 말은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 땅에 가면 두 마리의 짐승이 한 멍에 아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멍에라는 말을 달리 표현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배우고 훈련하는 것을 멍에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고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멘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배우고, 따르고, 본받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서 날마다 그 삶 속에서 예수를 드러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는 은혜가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나는데 하나는 죄사함 받으라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받는 사건이요, 초보적인 은혜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높은 단계를 우리에게 요구하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본받고 예수님의 인격을 형성하고 세상을 살려내는 그런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로의 부름입니다. 이것이 함께 멍에를 메고 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멍에가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를 배운다는 것이요, 예수를 배운다는 것은 예수 십자가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배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배우는 것인데 예수 배움은 예수와 함께 죽기 위하여 십자가 지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멍에 속에 들어가기를 배워야 합니다. 
  멍에라고 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닙니다 속박당하는 것입니다. 얽메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주는 멍에는 무겁습니다. 힘듭니다. 고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멍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멍에속에 들어가면 참된 자유와 평안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멍에 속에 들어가면 쉽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멍에를 메고 나는 그 속에 끼어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되게 하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서로 맞지 않는다는 고통입니다. 사람이 사회에 맞지 않아서 이 사회가 고통입니다. 부부간에 맞지 않아서 사네 안 사네 고통입니다.
까다로운 성격을 누가 맞추면서 살겠습니까 안 맞아서 못살겠다는 것이 이혼입니다. 직장이 맞지 않으면 일하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갓 입사했다가도 안 맞으면 금방 나옵니다. 교회에서도 은혜가 맞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고통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와 맞지 않으면 예수 믿는 것이 고통입니다. 왜 맞지 않습니까? 멍에가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무엇입니까 가르침을 받는자와 가르치는 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코드가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배워서 예수와 꼭 맞으면 그때부터는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맞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서 예수와 맞아진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다 맞습니다. 어떤 까다로운 남편과도 맞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바르게 배운 사람은 평안합니다. 행복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배움도 바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배운 자답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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