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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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영에 속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비록 유대인의 이름 있는 선생이었지만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영의 일에는 무지했던 그였지만 그러나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 일을 보다 상세히 일러주셨습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니고데모의 질문
   1) 그의 정직성
   그는 유대의 이름난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체면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정말로 훌륭한 교사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교사는 모르는 것 없이 다 아는 완전한 지식의 소유자가 아니라 모르는 것을 겸손히 배우려는 '겸손'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훌륭한 교사이기 이전에 훌륭한 학생이었던 것입니다. 실로 훌륭한 학생만이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는 법입니다.
   2) 그의 영적 무지
   또한 이 질문은 그의 영적 무지를 드러냅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그는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학식은 그가 영의 일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못 되었던 것입니다. 영의 일은 그렇습니다. 영의 일은 영으로만 분변이 가능하고 이해가 가능합니다(참조, 고전 2:13). 그런데 니고데모는 여전히 육에 속해 있었고 육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영적 진리를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실로 하늘나라의 일을 알려고 하면 자연인 상태를 벗어나야 합니다. 자연인 상태에서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아야 예수는 한갓 종교적 교사 또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위대한 선지자 정도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2. 불신의 위험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우리는 여기서 불신의 힘, 불신의 능력을 봅니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고통 속으로 몰고 갈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예수님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능력을 제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불신앙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층에게도 하늘나라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이 소원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불신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에 대해 약간의 의심이라도 품는다면 우리는 그의 능력을 제한하게 됩니다. 그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순간적으로 의심을 품음으로써 물속에 빠졌던 사건을 상기해야 합니다.

   3. 믿음으로 말미암는 중생
   1) 중생의 성격
   먼저 중생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중생이란 거듭남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입니다. 죽음이 없이 거듭 태어남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죽음입니까? 육에 대한 죽음입니다. 우리의 영혼까지 지배하려는 육신의 정욕이 죽어야 합니다. 이 죽음이 없이 중생은 없습니다. 둘째는 새로 태어남입니다. 죽었던 육적 자아와는 전혀 별개의 인간으로 우리는 태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에 속한 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전에는 세상을 것을 추구하던 사람에서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중생의 방편
   그러면 그 중생의 방편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거듭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철저히 그의 지배에 들어갈 때 우리는 새사람이 됩니다. 금욕적인 생활이나 윤리적인 삶으로써 우리는 절대 거듭날 수 없습니다. 쓰라린 실패만을 맛볼 뿐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나서 천국을 소유하려는 자는 오직 그의 공로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 외의 길은 없습니다.

   4. 예수와 불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믿음으로 중생하고 영생 얻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뱀을 예로 듭니다. 이는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만든 장대에 높이 들린 놋뱀을 바라봄으로써 살아난 사건인데(참조, 민 21:4-9), 놋뱀과 예수님 사이에는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아무런 공로 없이 바라봄으로써 구원 얻었다는 점이 같은 점이며, 뱀은 숭배의 대상이 되지 못한 반면 예수는 경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백성들의 뱀을 바라봄으로써 나은 것은 뱀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라본 행위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의 믿음은 순종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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