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허탄한 교훈들과 망령된 가르침들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 서신 1장에서 디모데에게 그 가르침들을 제어하고 미혹에 빠진 자들을 복음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본문에서 바울은 이 교리들에 어떻게 대항해야 될지를 교훈합니다. 먼저 당시 유행한 거짓 교훈의 특성을 살펴본 뒤 이에 대해 교훈한 바울의 대비책을 살펴보겠습니다.
1. 망령된 신화를 버려야 함
바울은 우선 디모데에게 망령된 신화를 버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망령되다는 단어는 본래 '대문'이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짓밟히다'는 뜻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신성을 짓밟는 교훈을 가르친다 하겠습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아데미 여신을 비롯한 이방 신상들을 섬기는 풍습이 만연했습니다. 이 이방 종교는 온갖 음란한 제전 의식을 수반하였는데 많은 에베소 사람들이 이에 참여함으로 에베소는 성적으로 몹시 문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영지주의가 만연하여 교인들을 혼돈케 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을 부인하며 가현설을 주장하였고, 영적 지식을 통하여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어 에베소 교인들이 올바른 신관을 갖고 신앙 생활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이처럼 망령된 교훈을 좇는 자의 대표적인 특성은 히 12:16에 언급된 에서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서는 메시아의 혈통과도 관계있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팖으로써 대대로 망령된 자라는 오명을 벗지 못한 인물입니다. 이와 같이 망령된 신화를 좇는 자는 하나님의 신성을 짓밟고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저버리는 자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인들이 망령된 신화를 버리도록 하라고 교훈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2. 허탄한 가르침을 물리쳐야 함
바울은 디모데에게 허탄한 가르침을 물리치도록 교훈합니다. 여기서 허탄하다는 말은 지각 있는 자의 주의를 끌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노인네가 쓸데없이 지껄이는 것 등을 가리킵니다. 이는 당시에 교회의 내부에서 유행했던 율법주의자들의 횡포를 단적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 지역의 이방 종교와 아울러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가 복음을 혼동케 하였습니다. 특히 율법주의는 교회의 내부에서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강하게, 혹은 약하게 끊임없이 교인들을 괴롭혔고, 또 그 외형이 복음과 유사했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큰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과 노년에 여러 교회들을 보살피는 가운데서 가장 염려하고 또 스스로 어려움을 느꼈던 부분도 바로 율법주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때에 따라서는 율법의 여러 규례들을 인정하기도 하고 또 상황에 따라서는 복음의 빛에 비추어 율법을 재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논쟁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도 못했고 심지어 이 논쟁은 분파만을 조장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일들을 스스로 체험하였기 때문에 율법주의는 허탄한 가르침에 불과하며 이를 피하거나 물리치라고 교훈하였습니다.
3.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함
지금까지 바울이 디모데에게 망령된 신화를 버리고 허탄한 가르침을 물리치라고 한 것은 한마디로 경건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건의 훈련을 요구한 이유는 첫째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유익이 있다는 표현은 '전혀 유익이 없다'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사실 금욕주의자나 율법주의자들이 실행하는 것과 같은 연습은 육체에만 유익할 뿐 위선을 조장하여 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둘째로 경건의 연습은 범사에 유익하여 금생과 내생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기 때문입니다. 즉 경건에 이르기 위한 연습은 금생에서도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할뿐만 아니라 그 행복이 내생에까지 연장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땅에서의 육체의 연습도 그 중요성을 크게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바울은 육체의 연습에만 치중하여 내생에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을 잃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절제하며 그 발걸음을 삼가고 나아가서 좀더 적극적으로 시간을 정하여 신앙의 훈련을 쌓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목적이 되어 버리고, 또 이를 근거로 남을 판단할 때 그는 바울이 염려한 대로 약간의 육체적 연습을 위해 내생의 약속을 잊어버릴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오늘날 특히 새로운 여러 신학 사조와 이단의 활동, 그리고 극대화되어 가는 보수주의의 신율법주의적인 경향이 만연한 이때에 경건에 이르기를 사모하는 성도에게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큰 지혜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