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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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교훈

(마 11:25-3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스승의 교육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가는 그 밑에서 배운 학생들의 졸업한 후의 생활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에는 학문적으로 권위있는 많은 대학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학자들도 독일의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라도 하나 받아오지 않으면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할 만큼 독일은 최고의 학문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이 대학들이 물질주의, 회의주의, 무신론주의를 가르친 결과 세계대전 중에는 '힘이 정의다'(Might is right) 라는 철학을 낳아 인류에게 큰 불행을 초래했습니다.


 또한 미국은 독일에서 이런 교육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온 학자들로 말미암아 학교들이 새로운 사상인 회의주의와 불신앙의 사상으로 만연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곧 교회 강단에까지 침투해 들어와서 오랫동안 부흥되어 오던 교회들이 쇠퇴해지고 힘을 잃어 문을 닫을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어떤 스승에게 어떤 교육을 받느냐는 것은 그 제자들 뿐 아니라 그 사회에까지 심각한 영향력을 끼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제자들과 사회상을 통해 그 스승들이 어떠했으며 무엇을 가르쳤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선생이었는지 그분의 제자들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으며 서로 위대한 사랑을 나눔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그들이 예수님께 위대한 가르침을 받고 위대한 생활을 배웠다는 증거이며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그의 살아있는 영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예수님은 이 세상의 어떤 철학자나 선생의 생활보다 위대한 삶으로 인간성을 부드럽게 만들고 새롭게 만들었다' 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복되게 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모두 예수님의 발 아래서 위대한 교훈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나 인도주의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최고의 스승되시는 예수님이 만약 여기 나타나셔서 우리를 가르치신다면 무엇을 가르치시겠는가를 성경에서 찾아보아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심령의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외적인 것만을 얻고 갖추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돈과 시간과 재능을 모두 물질적인 것만을 얻기 위해 다 써버리고 맙니다. 좋은 집, 좋은 자동차, 좋은 옷, 좋은 가구 등 많은 사람들이 외적인 치장만을 위해서 날마다 좀 더 좋은 것을 원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다 얻게 되면 마침내 허탈감에 빠지고 허무감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러한 욕망이 아주 그릇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인해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다가 보다 근본적인 내적 심령의 참 풍요와 영혼의 부유함을 잃는 것입니다. 헛된 세상적인 일에 빠져 영원한 만족을 주는 하나님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함으로써 오는 결과입니다.


 여기 어떤 훌륭한 가정 주부가 있어서 가정을 잘 꾸미고 집안을 흠이 없이 깨끗하게 청소하고 살림을 잘 해나간다고 합시다. 그것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생활에 지장을 초래한다면 그 여인은 보다 중요한 것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또 여기 공부를 열심히 하려는 어떤 젊은이가 있다고 합시다. 그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그 공부 때문에 영혼을 질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영적인 것,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면서까지 외적인 것을 취하려고 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만 철저하게 영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영혼을 잘되게 하는 영적인 책임을 지지 못하면서 현세적인 삶만을 즐기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를 가로 막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날 등산이나, 낚시나, 극장가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치 않는다면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며, 주일 밤예배 시간에 TV드라마 보기 위해 빠지는 것은 여러분이 회개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원하시지만 그 즐거움을 하나님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내적, 영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영적인 상태가 건전해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면 어떤 물질적인 것을 얻는 것보다 더 풍요로움과 만족을 누릴수 있습니다. 당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으며,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과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매일매일 하나님이 당신과 동행하시며 언제나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어떤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 믿으면 누가 밥 먹여 주느냐' 고 얘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 6:33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영혼이 먼저 잘 되면 범사가 형통하게 되고 강건케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로 영적인 것이 바로 될 때 물질에서 얻는 만족보다 더 큰 행복과 만족이 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4:16-18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2. 염려는 죄요, 불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염려와 근심은 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완전히 믿지 않는 불신앙의 소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 주시고 권고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6:26, 27에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고 말씀하셨고, 또 "들의 백합화를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고 하셨습니다.


 저는 요새 자연보호운동에 관한 성경구절이 없을까 생각을 했는데 "솔로몬의 입은 모든 영광으로도 자연에 나타난 꽃 한 송이보다 못하다" 라는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것을 만든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위대하신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 맡길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사 49:15,16 말씀에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니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또 사 41:10에서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아주 가까이 계셔서 항상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은 믿을 수 없어도 하나님은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안과 염려는 죄일 뿐 아니라 불필요한 것입니다. 염려는 문제를 긁어 모을 뿐이며 될 일도 더 안되게 합니다. 고로 어떻게 해서든지 불안과 염려는 물리쳐야 합니다. 빚을 졌거나, 실직당했거나, 시험을 당했을 때 주저앉아 염려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께 맡겨버리십시오. 하나님께 맡겨야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십니다.



 3. 인간은 낙심하여 떨어져도 주님은 버리시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 가슴을 치고 울 때에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고 위대한 주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시험에 떨어질 때가 있어도 주님은 결코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1928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로우즈 보올 게임(Rose bowl game) 이 한창 진행되던 중 레이갈(Reigals) 이라는 선수가 볼을 잡아 있는 힘을 다해 골대를 향해 뛰는데 거의 다 가서 이상하게 자기 편 선수가 발을 거는 바람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일어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니까 자신이 자기 편 골대를 향해 뛰어들어 왔던 것입니다. 그 선수는 부끄럽고 창피해서 전반전을 끝내고 탈의실 구석에 앉아 죽고 싶다고까지 하면서 내내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코치가 그에게 가만히 다가와 어깨를 두들겨 주면서 '레이갈, 게임은 이제 반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절반이 남아 있어. 어서 들어가 남은 후반전에 있는 힘을 다해 힘껏 뛰어라' 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수는 다시 열심히 뛰었는데 그 후에도 그는 그 말을 생전 잊지 않고 열심히 뜀으로 말미암아 훌륭한 선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옳습니다. 우리도 가끔 그릇된 길로 갈 때가 있고, 부끄럽고 창피한 일을 저질러 교회 나오기가 두렵고 하나님 뵙기가 두려워서 낙심될 때가 있지만 그 때마다 우리의 위대한 코치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격려하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여러분, 절대 낙심한 채 주저앉지 마십시오. 손을 주님께 내밀면 예수님은 우리를 붙들어 새출발하게 하십니다.



 4. 행복은 이기주의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봉사에서 온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자기만 알고 내 가정만 아는 이기주의에 사로잡히게 되면 행복은 오지 않습니다. 남에게 섬김만 받으려고 하면 항상 불평 불만이 가득하게 되고 진정한 행복을 맛보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남을 섬기고 봉사하려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높이고 행복하게 해 주려고 노력할 때에 저절로 나에게도 행복과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 20:26, 27에서 가르치시길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5. 사람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도록 노력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칭찬해 주는 상황에서느 충성스럽고 활동적인데 칭찬과 갈채가 없어지면 활동이 뜸하고 일을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님들은 사람들이 칭찬을 해 준다고 좋아할 필요가 없고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칭찬을 위해 살으셨는데, 이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하늘의 음성이 들렸던 것입니다(마 3:17).


요 5:44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고 탄식하시면서 인간의 칭찬을 받으면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잃는다고 하셨습니다.


 실로 인간의 칭찬과 영광은 순간적인 것이고 영원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칭찬과 영광은 영원하며 완전하고 참된 만족을 주는 가치있는 것이므로, 사람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도록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보람있는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잠깐 있다 없어지는 것보다 영원히 있을 것을 굳게 붙잡으라고 가르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붙잡기 위해서 일하고 낭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상급이 없는 것들만 위해서 물질도 생명도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해가 질 때 같이 쓰러져 없어지는 헛된 것보다 하나님의 영원한 것을 위해 시간과 생각과 돈을 쓰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느 어리석은 부자가 어느 해 추수를 많이 하게 되니까 적은 창고를 부수고 더 큰 창고를 짓고 그 물질 가지고 세상 쾌락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의 굶주린 영혼이 '내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나는 곡식이 많아도 소용없고 창고가 가득차고 넘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도 그 어리석은 부자는 '내 영혼아 여러해 먹고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라' 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고 말씀하시면서 "자기 육신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자가 이와 같으니라" 고 하셨습니다(눅 12:19-21).


 실로 영원한 가치와 상급이 있는 것을 든든히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구두쇠 영감이 장에 가서 소 한 마리를 사가지고 오는데 어느 머리가 비상한 도둑놈이 소를 도적질하기 위해 꾀를 내었습니다. 구두쇠 영감이 지나가는 길에 아주 새 것도 아니고 아주 헌 것도 아닌 쓸만한 구두 한 짝을 던져 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영감이 지나가다가 그 구두 한 짝을 보고 '아깝다' 라고 생각하면서 무심코 숲 속으로 멀리 던져 버렸습니다. 한 오 리 쯤  가다 보니 이전의 것과 똑같은 다른 구두 한 짝이 또 있기에 이 영감님은 적당히 길가에 소를 매놓고 부랴부랴 아까 그곳에 가서 구두 한 짝을 찾아가지고 돌아와 보니까 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또 시장에 가서 소를 사가지고 오는데 한참 오다가 보니까 저쪽 숲 속에서 '음매, 음매' 소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영감님은 '옳지, 아까 잃어버렸던 소가 저기 있구나' 하고 또 소를 길가에 적당히 매어 놓고 소 우는 곳으로 찾아 나섰는데 소 우는 곳에 다 왔다 생각하면 저 멀리서 다시 울음 소리가 들리고 또 쫓아가면 또 저 멀리서 들리고 해서 한 십 리 쯤 따라다니다가 완전히 지쳐서 포기하고 돌아와 보니까 또 소가 없어져 버리고 말았더랍니다. 그 비상한 도적놈이 이 번에는 소 울음소리로 구두쇠 영감을 유혹해서 소를 도적질한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란 놈도 우리를 이렇게 유혹합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구두 한 짝과 같은 것 때문에 영원한 천국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밥이 돼 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버려야 할 헛된 것은 버리고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해야 주님을 바로 따라가고 진리를 팔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부디 최고의 스승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항상 기억하시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 영원하고 참된 진리와 생명의 길을 걸어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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