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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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를 부은 여인 ( 요한복음 12장 1~8절)

 

주님을 믿을 때 감정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깊은 곳에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향유를 뿌려서 머리털로 발을 씻어주듯,

장례하듯, 예배를 드리듯 이런 믿음이 여러분 안에서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절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방황하지 말고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 만난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변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우리의 인생에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병을 고치고 어떤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세계, 인격의 세계, 영의 세계가 변하게 됩니다.


구원받고 주를 따르는 것이 ‘기적’


오늘 본문에 보면 마리아라는 한 여인이 소개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고 난 후에 그림자처럼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계속 따라다닙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난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고 삶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는 것이 기적입니다. 마리아처럼 보일 듯 말 듯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유월절이 시작되기 6일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그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었습니다.”

베다니라는 곳에서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누가 봐도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던 베다니라는 곳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잔치가 벌어진 곳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의 주인공이었던 나사로도 가고 마르다와 마리아도 참석했습니다. 모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환영하면서 또 식사를 다 베풀어줘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날랐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함께 있었습니다.”

잔칫집에 모인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마르다는 평소 성격대로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어 날랐습니다. 마르다와 같은 사람들을 일 중심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르다는 그저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자꾸 무언가를 갖다드리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또한 나사로도 예수님 옆에서 같이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서 옛날처럼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처럼 분주하게 음식을 나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을 주시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구석에 앉아 있던 마리아가 미리 준비해 놓은 향유병을 갑자기 꺼내듭니다.


향유를 깨뜨린 마리아의 ‘예배’


3절을 보겠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매우 값비싼 향유인 순수한 나드 1리트라를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집안은 온통 향내로 가득했습니다.”

나드 1리트라는 당시 일반 노동자의 1년치 연봉 정도로 비싼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비싸고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옆에 있던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분노를 표출합니다. 1년 동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그 향유를 살 수 있는 정도로 비싼 것을 예수님의 손도 아닌 발에 모두 쏟아부은 것입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붓고 난 후 자신의 머리털로 소리 없이, 거침없이 예수님의 발을 닦아줍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가룟 유다는 “그 비싼 나드 1리트라를 살 돈으로 가난한 자를 도와 줄 것이지 왜 예수님의 발에 버리냐”고 따집니다(5절). 가룟 유다는 ‘이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생각하며 분노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분노가 심해지면 데모가 되고 이것이 조금 더 심해지면 폭력이 되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가룟 유다도 그런 종류의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행동은 값싼 행동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돈을 들인 행동이었습니다. 또한 이 향유를 조금씩 나눠서 쓴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부어버렸습니다.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다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소리없이 닦는 행동은 마리아가 가장 존중하는 분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내놓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잘 살펴보면 마리아는 이 행동을 하면서 단순히 ‘예수님, 영광을 받으십시오. 찬양을 받으십시오’라는 뜻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정말 주님을 향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곧 예배입니다.

우리가 왜 헌금 냅니까? 왜 주일에 옷을 단정하게 입고 오십니까?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입니까? 왜 주일에 찬양대가 찬양을 합니까?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내 목소리로 내 표정으로 내 눈물로 내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전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교묘한 사탄의 전략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뿌린 향수로 인해 향기가 온 방 안에 가득 찬 것을 볼 수 있습니다(3절). 이것이 인생입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았고, 누군가한테 명령하지도 않았고, 설교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는데 이 여자의 몸에서 퍼지는 은은한 향기가 온 방을 가득 채운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다시 보면서 ‘내 인생이 이랬으면 좋겠다. 내가 어느 날 관에 묻힐 때도 이 향기가 났으면 좋겠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이 향기를 맡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4~5절을 보겠습니다. “그때 제자들 중 하나이며 나중에 예수를 배반할 가룟 유다가 말했습니다. ‘왜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낭비하는가?’”

이때까지도 예수님을 배반할 가룟 유다가 될지 아무도 모를 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향해 “네 안에 마귀가 들어갔구나. 너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4).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사탄이 개입합니다.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자존심을 상하게 만듭니다. 가룟 유다가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왜 낭비하냐’면서 마리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가룟 유다의 이 말 속에서 사탄의 몇 가지 모습과 전략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가룟 유다가 하는 말들은 거의 대부분 합리적이고 이성적입니다. 누가 들어도 그럴 듯합니다. 그런데 깊이 들여다보면 사탄이 하는 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주의자들은 항상 질문합니다. 합리주의자들은 항상 앞뒤가 맞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룟 유다가 그런 관점으로 마리아를 본 것입니다.

두 번째, 사탄은 언제나 가난한 자를 핑계 삼습니다. 가난한 자가 있으면 자기가 도우면 되지 꼭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너는 왜 돕지 않느냐?’라고 말하게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속성입니다. 늘 정의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일합니다.

제가 영국에 있을 때 어느 날 그곳에서 가장 존경받는 추기경의 인터뷰 장면을 TV에서 봤습니다. 그때 기자가 “오늘 우리 사회에서 뭐가 제일 중요합니까? 종교인으로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라고 물었습니다. 그 추기경은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난한 자를 위해 소리치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현장에 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와야 한다고 소리침으로써 가난한 자를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는 그런 모습이 가장 보기 싫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그래도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가난한 자를 도와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럴듯하게 가난한 사람들을 내세웠습니다. 사탄이 공격할 때는 언제나 긍정적인 면에서 말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정의를 앞세우는 사탄의 전략


네 번째, 분노와 공격이 항상 뒤따릅니다. 이런 모습을 가진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가룟 유다였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있는 돈을 훔쳐가곤 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정말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가룟 유다의 관심은 오직 돈이었습니다. 그 돈이 헌금으로 들어왔으면 아주 잘 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12제자 중에서 돈궤를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순수하게 봉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봉사를 통해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탄의 역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가룟 유다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두어라. 이 여인은 내 장례 날을 위해 간직해둔 향유를 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7절).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뿌린 이유를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가난의 문제나 그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8절).

향유를 더 뿌렸다고 해서 예수님의 발이 좋아집니까? 아닙니다. 당시 그 누구도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봉사하는 것, 여러분이 헌금하는 것,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다 장사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마리아가 먼저 깨닫고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장례란 내 몸에 있는 모든 기름을 다 짜내서 예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장례식은 안식이요, 영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위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예식이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 “너희들 옆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이 있지 않느냐”라는 뜻은 “이 시간은 장례식이기 때문에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너희들은 평생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고 뜻이 통하고 생각이 통했던 이 침묵하는 한 여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믿으십시오. ‘적당히 믿으나 열심히 믿으나 끝나면 마찬가지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적당히 믿는 것과 열심히 믿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지식적 믿음이 아닌 ‘온전한 믿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 모두가 슬퍼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 예수님 좀 빨리 오시지,오빠가 죽기 전에 오시지 왜 죽어서 다 냄새가 날 때까지 안 오시냐’며 애통해 했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 이미 나사로는 무덤 속에 있은 지 4일이 됐습니다(11장 17절).

11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달려 나가 예수를 맞았지만 마리아는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4일 동안 그렇게 시체를 지키면서 그냥 속상해 하다가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르다가 먼저 뛰어나갑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꽉 껴안으면서 ‘조금만 일찍 왔더라도 오빠가 당신의 능력으로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께서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것을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보면 마르다는 ‘믿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 살아날 것을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너무 훈련을 많이 받아서 ‘죽으면 천국 간다’라는 공식을 많이 외우고 있습니다. 마르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아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물으십니다(11장 25절).

예수님의 질문은 ‘진짜 믿느냐’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지식적으로, 신학적으로 아는 믿음일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니까 믿는다고 말할 뿐이지 실제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경험을 더 믿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조상들의 죽음을 다 보고 살았기 때문에 죽음은 이해를 잘합니다. 무신론자들도 그렇고 실존주의자들까지도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갈등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부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저 ‘장례식을 잘 치르고 보내면 되지. 그 이상 희망이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11장 25~26절). 그러자 마르다는 믿는다고 대답하고 동생인 마리아를 부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그때까지 마리아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마리아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한테 뛰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냥 방구석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먼저 뛰어갔습니다. 늘 예수님 옆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는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11장 32절을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예수를 보자 그 발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저희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한 말은 비슷합니다. 그러자 마리아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11장 35절). 여러분의 눈물이 부활을 가져올 수 있는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국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안에 그런 내면적인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전심으로 예수님을 가슴에 안고 눈물 흘리며 찬양을 하고 예배를 드리십시오. 이제 주님을 믿을 때 감정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깊은 곳에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향유를 뿌려서 머리털로 발을 씻어주듯, 장례하듯, 예배를 드리듯 하십시오. 이런 믿음이 여러분 안에서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의심하거나 방황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절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방황하지 말고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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