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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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야고보서 3장 13절-18절

제    목 : 땅에서 실천하는 하늘의 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지금까지 야고보는 믿음을 나타내 보아라고 했으나 이제부터는 지혜와 총명을 행함으로 보이라고 요구한다. 지혜와 총명에 대한 실천의 요구는 약 3:1, 2과 연결하여 볼 때 그리스도교 안에 서로 대립하고 갈등을 빚는,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Easton). '지혜'가 보편적인 뜻을 가진 데 반해서 '총명'은 전문가로서의 풍부한 이해력을 의미한다고 하겠다(Easton).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지혜를 가졌다고 말만 하지 말고 지혜가 담긴 온유함으로 지혜를 실천해 보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지혜가 온유함으로 나타나는 것은 '빈센트'(Vincent)의 말대로 지식은 많이 안다는 것으로 교만하기 쉬우나 지혜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단계이므로 겸손과 온유가 그 표현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온유.' 고전 헬라어에서는 '노여움을 완화시키는 방법'으로(Aristotle), 혹은 '힘이나 폭력의 반대로서 정죄된 자를 동정하는 것'으로(Platon), 혹은 단순히 노여움의 반대어로 (Herodotus) 정의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가 단순히 외적인 것에 비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온유한 마음의 내적 평정, 유화, 친절 등을 말한다(이상근).


   본문의 말씀을 요약해 보면, 지혜가 있는 자는 그것이 있다고 자랑하지 말고 선행으로써 그 증거를 보일 것이며, 지혜가 있다고 하면서도 다른 이들과 불화하고 싸운다면 이는 지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정욕과 마귀로부터 온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자와 총명한 자들이 있는 곳에서는 결코 다툼이나 시기 등이 있을 수 없다는 말로서 그것이 바로 지혜 있는 자들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세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지혜가 있는 자는 선행으로 그 지혜가 참된 것임을 보여야 합니다.

   본문에서 의도하고 있는 대상은 초대 교회 당시 교회 안에 있던 유대교 선생들, 즉 랍비라 불림받기를 좋아했던 자들로서 이들은 그들의 율법적 지식과 학문을 늘 내세워서 교회를 교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어수선하게 하고 신자들 간에 분파와 불화를 일으켰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만일 그들의 지혜가 바른 것이라면 선행으로 그것을 증명해야지 말과 지식적인 변론으로만 자신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서도 신학에 대해서 좀 지식이 있다고 하는 이들이 교회나 성직자의 목회에 대해서 사사건건 비판과 비방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새 신자들이나 귀가 가벼운 이들을 마치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가장 바른 것인 양 가르칠 뿐 아니라 그에 따라서 다른 이들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공격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들로 인해서 분파가 생기고 갈등과 대립이 생기게 되는데, 본문은 분명히 참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자라면 절대로 교회 내에 다툼을 일으키지 않고 선행과 온유함으로 그 자신의 지혜를 보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혹은 이 세상적인 학문과 지식이 많다 해도 그 자신이 삶을 통해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다 잘못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자신이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더욱 그의 행동에 유의해서 보는 이들의 신앙에 유익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 교회 안에서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는 지혜는 세상적이며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입니다.

   사 9:6을 보면 장차 오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평강의 왕이라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평화를 이루시는 왕이란 뜻입니다(참조, 엡 2:14).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계시는 곳에는 싸움과 다툼이 있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서는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는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참 지혜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이라 규정합니다. 사실 올바른 신앙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주장이나 견해를 내세우기 위하여 상대방과 다툼을 벌인다든가 상대방을 넘어뜨리기 위한 비방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가 믿고 있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모든 이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들은 꼭 싸움이나 비방, 중상 등을 통해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잠시는 그 영향력을 발휘할지는 몰라도 결코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기 스스로 고립되어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으로 인해서 다툼이나 시기가 있다면 자신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즉시 인정하고 고쳐 나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사탄의 수하가 되어 교회를 깨뜨리는 역할을 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시기와 다툼이 있게 되면 건설적이기보다는 파괴적인 결과만 있게 됩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면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기나 다툼이 있는 교회마다 소란스럽고 도덕적인 타락이 있다는 지적이 아니라 시기와 다툼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그들의 무리 속에는 결과적으로 요란과 악한 일들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남보다 많이 안다고 하는 자랑이나 교만에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이것이 시기와 다툼으로 변하고 결국은 요란, 즉 무질서와 타락으로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교회 안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시기와 다툼을 즐기는 자들은 처음에는 교회의 어떤 정책이나 실행이 그릇되었다고 반발을 하다가 점차 그 일과는 무관하게도 목사나 특정한 교인들의 인격과 생활을 트집 잡고 나중에는 교인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까지 하게 되며 결국은 교회를 비방하고 세상의 방탕한 생활로 빠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자기가 아는 만큼 행동으로 생활하려는 의지가 없이 남에게서 자신이 더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마음에서 오는 결과들입니다. 신앙은 결코 지식일 수 없는 전인적인 삶이란 것을 알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성도는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하기 위해서 부름 받았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면서 손가락질을 할 때, 우리의 손가락 씻은 구부러져 자기 자신을 향하고, 나머지 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을 업신여기려고 한 손가락을 그에게 내밀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것의 세 배나 더 욕하는 것이며 더군다나 또 다른 손가락은 하늘을 향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욕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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