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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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 21:2-3

제    목 : 낙심을 이기는 3가지 길

 

< ‘셀프 리더십’을 가지라 >
 한 아이가 놀다가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 그는 약을 발라 주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넘어져도 안 다치게 땅이 스펀지라면 좋겠어요.” 그때 엄마가 말했다. “그러면 꽃들은 어떻게 자랄까? 농사는 어떻게 하고, 자동차는 어떻게 다니지?” 

 사람들은 대개 실패 없는 스펀지 같은 세상을 원하지만 세상이 스펀지가 아닌 것이 오히려 축복이다. 실패는 보약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실패하거나 망할 수 없다. 실패하고 망하는 것은 오히려 기적이다. 불치병에서 치유되고, 사업이 기적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기적이지만 ‘하나님 자녀의 실패’도 기적이다. 그 ‘성도의 실패’라는 기적에는 반드시 더 큰 축복을 주려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다.

 일이 잘 안 풀려도 낙심하지 말고, 고난이 심해도 기죽지 말라. 옛말에 기가 살아야 운도 산다는 말이 있다. 이제 가슴을 펴 당당히 걷고, 밝은 얼굴을 하고, 콧노래를 부르고, 많이 웃으라. 성공하는 사람의 공통 특징 중의 하나가 ‘잘 웃는 것’이다. 

 또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을 많이 하라. 희망적인 말은 절망적인 환경을 물러가게 한다. 힘들어도 죽겠다고 하지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말라. 실패자는 대개 원망과 이유와 변명이 많다. 반면에 성공자는 실패를 남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내 탓입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누가 나를 인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나를 잘 인도해야 한다. ‘셀프 리더십’을 가지라. 자기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고 자기를 잘 인도할 때 남도 잘 인도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처진 모습과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

< 낙심을 이기는 3가지 길 >

 사람들은 가끔 낙심에 빠진다. 그때 중요한 것은 마음을 잘 다스려 낙심을 이기는 것이다. 어떻게 낙심을 이길 수 있을까?

1. 땀을 흘리라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부활한 후에는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6:32). 그 말씀을 기억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뵙고 싶어 갈릴리까지 왔던 제자들은 최소한 7명이었다(2절). 

 그 7명은 베드로와 도마,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다른 제자 둘이었다. 그들이 주님 말씀을 기억하고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왔지만 어디에도 주님 흔적이 없었다. 기다림이 길어지자 제자들 마음속에 낙심이 들고 한탄도 나왔을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가 뭘 하겠어!” 

 사람은 낙심이 되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누가 “하늘이 파래!”라고 해도 고개 한번 들기 싫고, 마음의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 모든 것이 싫을 때가 있다. 제자들은 점차 그런 상황에 빠졌다. “도대체 주님은 어디 계신가? 비전은 있는가?” 제자들은 서로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것을 보았다. 그 상황을 베드로는 도저히 참지 못했다. 결국 본문 3절에서 베드로가 말한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 

 베드로의 행동은 못난 행동 같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된다. 계속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더 낙심에 빠질 수 있다. 절망적 환경에서도 땀을 흘리면 영혼까지 절망에 빠지진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이 힘들고 어려운 때는 가만히 있기보다 무언가 할 일을 찾아 나서라.

 1992년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주님을 기다린다고 일터를 버리며 수많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주님의 은혜를 기다릴 때는 기도만 하며 기다리지 말고 땀을 흘리며 기다리라. 행함과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가끔 자기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날마다 기도원에 가는 사람이 있다.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는데 본인은 기도원만 찾아다니고, 부흥회나 성경공부만 찾아다니면 그것은 정상이 아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기도만큼 소중한 것이다.

 기도만큼 땀을 좋아하라.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땀을 싫어하면 좋은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책임한 사람에게 기적을 주지 않는다. 그러면 더 무책임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매일 새벽기도를 8시간 하고 2시간을 졸면서 일하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 매일 새벽기도를 2시간 하고, 8시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책임적인 사람이다. 

 무책임은 불신이고, 책임은 신앙이다. 진실한 믿음은 책임감 있는 사람을 만든다. 신앙이 좋은 것 같은데 책임감이 없는 것은 좋은 신앙이 아니다. 가정과 일을 버리고, 기도원이나 특별집회만 따라다니는 것은 거의 불신에 가까운 것이다. 성경은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했다(딤전 5:8). 

 요새 일거리가 없다지만 어떤 일에는 일할 사람이 없다. 힘든 일이 싫다고 유흥업소 가서 편하게 돈벌려고 하고, 사명도 없이 신학교만 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십계명에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의 보다 적극적인 의미는 “땀을 흘리라!”는 것이다. 땀이 없는 삶은 크게 보면 도둑질하는 삶이다. 땀이 없으면 낙심도 금방 찾아온다. 반면에 이마에 땀이 있으면 낙심은 맥을 못 추고 사라진다. 

2. 희망을 잃지 말라

 본문에서 베드로가 낙심을 이겨보려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했지만 그 태도에는 꿈과 희망과 사명을 잃어버린 체념적인 모습이 묻어나온다. “내가 무슨 세상을 뒤집어!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 그게 속 편하지.” 

 사람이 꿈과 희망과 사명을 잃어버리면 누구나 베드로처럼 과거의 익숙한 삶을 찾지만 사실 그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 과거를 바라보는 신앙은 이미 죽은 신앙이다.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도 지금의 현실이 과거의 영화보다 훨씬 소중하다. 

 사람의 가장 큰 실패는 돈이나 친구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가장 큰 실패는 꿈과 희망과 사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꿈이 없으면 쓸데없이 버려지는 인생이 되고, 짐승처럼 타락의 길로 가게 된다. 반면에 꿈은 짐승 같은 사람도 성자로 만든다. 사람은 꿈꿀 때 살맛이 나고, 그런 행복한 영혼에게 축복도 따른다. 

 한 아내가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명문대를 졸업했고, 딸도 명문대에 다녀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다. 그런데 남편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퇴직했고, 갖고 있던 주식도 떨어져 큰 손해를 봤다. 게다가 같은 교인의 유혹으로 잘못된 부동산 거래를 해 큰 손해를 봤다. 그 일을 당하고 너무 기가 막혔고, 높아 보이던 남편이 못나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 날, 그분 얼굴이 펴졌다. 부쩍 성숙한 딸 때문이었다. 그분은 어려움 없이 자란 딸에게 말했다. “얘야! 이제 우린 네 앞날을 책임질 수 없어. 네가 스스로 일어서야 해.” 그 말을 듣고 딸이 정신을 차리고 사법시험에 도전하겠다고 결심했다. 똑똑한 딸이 그렇게 결심하자 금방 붙을 것만 같았고, 희망이 생기면서 가정의 우울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희망을 품고 고시촌이 있는 신림동으로 이사했다. 

 현실이 어려워도 찬란한 꿈과 비전은 어려움을 이기게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장래의 소망을 주는 것’이다(렘 29:11). 우리의 장래에 소망을 주실 생각으로 가득 찬 하나님을 생각하며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라.

 희망을 가진 사람과 희망을 잃은 사람은 얼굴 표정부터 다르다. 주름살의 방향도 다르고, 말투도 다르다. 이제 절망을 생각하지 말고 희망을 생각하라. 하나님은 지금도 “어떻게 축복을 주실까?”를 생각하신다. 힘들어도 꿈과 희망과 사명을 포기하지 말라. 그러면 낙심에 빠지지 않고, 어떤 유혹도 이겨낼 수 있고, 어떤 어려움에서도 인내할 수 있다. 

3. 좋은 믿음 친구를 가지라

 본문 3절에서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했을 때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누구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하지 않았다. 3절 하반부 말씀을 보라.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베드로의 말을 듣고 다른 제자들도 다 따라 나섰다. 이 장면은 믿음이 좋은 친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베드로가 기다림을 포기하자 다른 제자들도 포기했다. 실망과 낙심은 전염성이 빠르다. 반면에 그만큼 희망도 전염성이 빠르다. 나 한 사람이 넘치는 희망을 가지면 어두운 분위기는 금방 달라진다.

 좋은 믿음의 동료는 삶에 큰 힘이 된다. 내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교회를 개척할 때 가장 서러웠던 것은 목회 동료가 거의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 선배 목사들이 “혼자 어떻게 개척할 거냐?”고 했을 때 “하나님만 바라보면 되지 목회 동료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목회하면 할수록 목회 동료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가끔 미국 교단 총회에 참석하면 동료 목회자들의 얼굴만 봐도 큰 힘이 된다. 마치 시집간 딸이 친정에 간 기분이다. 

 가끔 교단 총회에서 목회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목사들이 싸우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점점 그 모습도 이해가 되었다. 목회자가 목회 현장에서 쌓인 마음의 상처와 한이 목회자들만 모인 곳에서 편한 마음으로 투정 부리듯 표출되기에 그런 일도 생긴다. 마치 힘들게 시집살이하던 딸들이 명절에 친정에 와서 작은 일로 쉽게 섭섭함을 느끼고 다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총회에서 목회자들이 모여 대화하다 보면 목회로 생긴 상처가 아물어지고, 자기 교회에서는 항상 꿋꿋한 모습을 보여야 하기에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 마음이 큰 위로를 받는다. 총회에서 가끔 노 목회자들이 “이 목사님! 힘들지요?”라고 하면 그 한 마디만 들어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온다. 잠깐 귀국한 선교사에게 “선교사님! 힘들지요?”라고 하면 그 한 마디에 눈물짓는 선교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가끔 타교단에서 내게 “왜 그렇게 외롭게 고생하느냐?”고 자신들의 교단으로 오라고 제의한다. 그래도 선교를 최대의 사명으로 아는 교단이 좋아서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결정으로 외로움도 많았다. 만약 내가 후방선교사로서 전방선교사를 후원하겠다는 비전이 없었다면 나는 한국 목회를 포기하고 동료 목사님들이 많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가끔 말씀에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은밀하게 물질로 후원하는 분들도 있다. 그들 중에는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런 분들을 보면 감동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 이렇게 은밀하게 후원하는 동역자들을 붙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들의 마음과 헌신을 기억해주소서!” 그런 동역자들이 있기에 선교사후원사역과 인터넷 말씀사역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좋은 신앙 동료는 행복의 중요한 요소이다. 어떤 이유를 대든지 혼자 지내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다. 에덴동산에서도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신 후에 하와를 만들어 동반자로 주셨다.

 사람은 좋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 가끔 연로한 분들을 편하게 모신다고 한적한 전원주택으로 모시는데, 그것은 연로하신 분들을 더 힘들게 한다. 연로하신 분들의 가장 큰 적은 돈과 건강도 아니고 외로움이기에 도시 한복판의 시끌벅적한 곳에 사시게 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 사람에게는 함께 할 사람이 필요하다.

 좋은 친구를 사귀라. 좋은 친구란 믿음의 격려를 해주는 친구이다. 그 중에서 제일 좋은 친구는 바로 예수님이다. 찬송가 487장 2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은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낙심될 때마다 주님께 나와 기도하면 신기한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을 들린다. 예수님이 없으면 재능과 자본이 있어도 공허하지만 예수님이 있으면 재능과 자본도 없어도 풍성한 삶이 펼쳐진다. 

 결국 제자들은 우르르 고기를 잡으러 몰려갔지만 소득이 없었다. 기술과 의욕은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밤이었기 때문이다. 기술과 의욕과 재능과 실력과 자본만 가지고는 안 된다. 예수님이 필요하다. 예수님만 있으면 아무리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넉넉히 살 수 있고, 극심한 절망과 고통도 곧 희망과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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