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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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잘 다스리는 길 (이사야 42장 1-9절)

 

< 마음 상태를 알려주는 바로미터 > 

 사람은 항상 발전적인 내일을 꿈꾸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먼저 마음을 축복 받을만한 마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몸의 건강상태를 파악할 때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듣습니다. 심장 소리가 안 좋으면 더 나은 장비로 심장 상태를 검사합니다. 그만큼 심장 상태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 상태입니다. 마음은 사람의 깊은 곳에 있는 정보의 저수지 및 감정의 통제소와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 상태는 그 사람의 현 상태가 어떤지를 잘 알려줍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그 상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마음 상태를 알 수 있을까요?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는 4가지 바로미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말

 예수님은 마음에 가득한 것이 말로 나온다고 했습니다(마 12:34). 실제로 누군가와 대화를 해보면 그의 마음 상태가 어느 정도 파악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다스리려면 입술부터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구절에서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정의를 베풀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정의를 추구한다고 하면 큰 소리를 낼 것 같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조용히 정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을 가지려면 ‘소리를 높이는 법’보다 먼저 ‘소리를 낮추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묻기보다는 항상 “믿고 순종하라!”고 먼저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비판적인 사람을 축복의 주인공이나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시지 않습니다.

 어떤 여성은 늘 비판적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학교에 대해서 불평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것을 불평하니까 친구들은 그녀가 그 말을 할 때까지는 그런 문제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나중에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가는 곳마다 불평과 원망을 했습니다. 그 경우에 진짜 문제는 바로 ‘자신’입니다. 자신의 창문이 더럽고 흐리면 그 창문을 통해 보는 세상도 더럽고 흐리게 보입니다.

 어느 날, 친구들이 그녀의 집에 놀러갔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부모도 똑같이 모든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웃과 시 공무원들을 계속 비판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고용인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계속 비판했습니다. 그런 비판적인 영이 그들의 영혼과 가정과 삶 전체를 더럽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의 창을 먼저 깨끗하게 닦고 최상의 것을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사람을 볼 때 나쁜 점만 보지 말고 좋은 면도 봐주십시오. 만약 누가 어떤 잘못을 하면 그 잘못에 대해 지적은 하되 그 잘못 하나로 그의 인격전체를 판단하지는 마십시오. 어떤 사안에 대해 누군가와 동의하지 않고 찬성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졌다고 그의 인간성 전체를 판단하거나 그의 약점을 헐뜯지는 마십시오. 그처럼 입술을 잘 관리하면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도 현저하게 높아질 것입니다. 

2. 사랑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상처 입은 영혼도 외면하지 않고 정의로 그 영혼을 만족시켜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연약한 자를 품어주는 성육신의 사랑을 통해 열방 나라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앙망할 것입니다(4절). 그처럼 조용한 성육신의 사랑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 사랑의 승리를 믿고 누군가의 처지와 개성을 이해해주고 그 인격체를 존중해주십시오. 그러면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도 현저하게 높아질 것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어떤 교회의 예배에 한 청년과 그의 여자 친구가 참석했습니다. 그 청년은 팔, 목, 심지어는 얼굴에도 문신을 했습니다. 여자는 몸 전체에 온통 100개 이상의 피어싱(piercing)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이렇게 비판할 것입니다. “왜 저렇게 하고 다닐까? 저들의 가정환경은 어떨까? 저들 부모는 얼마나 속이 썩었을까?”

 그러나 그때 목사님은 비판적인 렌즈를 버리고 하나님의 렌즈를 꼈습니다. 그러자 시각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첫째, 그 모양을 하고도 수치심을 버리고 교회에 나온 것이 기뻤습니다. 둘째, 그들이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를 드린 것이 기뻤습니다. 셋째, 잠깐 대화해보니까 꽤 예의바른 청년들인 것을 알고 기뻤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청년은 헤비메탈 그룹의 리더로서 전날 근처에서 큰 콘서트를 한 후 어떤 감동에 이끌려 예배에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청년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회에 왔습니다. 예배도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은 벅찬 감동에 눈물이 나올 뻔했습니다. 얼마 후, 그 청년이 다시 찾아와 자신이 새로 만든 앨범의 CD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 CD의 7번곡을 들어보세요. 지난번 예배 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지은 곡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얼마나 기쁘게 보시겠습니까? 

 이제 사랑이 없는 비판적인 시각으로만 사물을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렌즈를 끼고 비판 대상에게도 좋은 점이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그에게도 좋은 점들이 많은데 그것들을 외면하고 나쁜 것 하나만 보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비가 없었다면 우리도 어떤 끔찍한 모습이 되었을지 누가 압니까? 그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비판하고 헐뜯는 사람이 되지 않고 세상을 보는 저의 창문부터 깨끗하게 하소서!”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쉽게 남을 비판하고 헐뜯습니다. 자신과 남은 다른 사람인데 자기 생각과 스타일대로 비판합니다. “나는 저렇게 옷을 입지 않아! 나는 저렇게 운전하지 않아! 나는 저렇게 휴가를 안 보내! 내 아이들은 저런 학교에 안 보내! 왜 저런 물건을 사지?” 그런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는 내가 아닙니다. 그의 신을 신어보지 않으면 그가 왜 그랬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며칠 전, 한 40대 부부가 전세금 뺀 돈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한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그에 대해 “게으른 부부다! 대책 없는 놀자 판 부부다!”라고 무작정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여행 전까지 열심히 살다가 ‘자신’과 ‘인생’과 ‘세상’을 좀 더 알고 싶다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런 취지라면 오히려 멋진 부부가 아닐까요? 그런 부부라면 여행 후에도 열심히 살 것이고 평소에 돈도 엉뚱한데 쓰지 않을 것입니다. 

 남의 사생활에 참견하지 마십시오. 누가 손가락 5개에 다 반지를 끼고 심지어는 발가락 5개에 다 반지를 껴도 참견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런 선택을 안 할 수는 있지만 남의 자유로운 선택까지 막으려고 여론몰이를 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발가락에 반지를 끼고 다니는 태도보다 비판적인 영에 사로잡힌 태도를 더 싫어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렌즈를 끼고 성육신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현저하게 배가될 것이고 그와 더불어 축복된 운명으로부터 자신이 멀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3. 예배

 예배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만물의 창조주이자 관리자이십니다(5절). 또한 하나님은 백성을 지켜주시며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십니다(6절). 또한 하나님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는 육체의 치유도 주시고 갇힌 자와 흑암에 앉은 자를 해방시키는 육체의 자유도 주십니다(7절).

 계속해서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여호와란 ‘스스로 있는 자’란 뜻입니다(출 3:14). 결국 여호와 하나님만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란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언 말씀대로 이뤄주시고 앞으로 새 일을 행해주실 것입니다(9절). 그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는 누구보다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엇인가를 경배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관심과 사랑과 헌신과 충성을 드릴 대상을 찾습니다. 그 대상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우리를 만드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결국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 그의 마음상태도 충분히 파악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다스리려면 예배하는 삶을 체질화시키십시오. 참된 만족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골프 선수 중에 폴 에이징거란 세계적인 골프선수가 있습니다. 그가 33세에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두려움이 그를 덮쳤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암으로 죽든지 다른 것으로 죽든지 죽는 것이다. 이제 골프에서 이기는 삶보다는 인생을 잘 사는 문제에 관심을 두자.”

 그때 그는 자신에게 성경을 가르쳤던 래리 무디의 말을 기억해 냈습니다. 래리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징거! 우리는 죽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갈 산 사람들이 아니라 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갈 죽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이 머리에 맴돌면서 갑자기 영생의 소망이 뚜렷해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에게 예배하는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신비한 평안이 마음에 임하면서 마침내 암을 극복해냈습니다. 그가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골프로 돈도 많이 벌고 우승도 많이 했지만 우승의 기쁨은 잠깐이었습니다. 참된 기쁨은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 안에서 인생의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선순위를 둘 때 마음도 잘 다스릴 수 있게 되고 그와 더불어 다른 소중한 축복도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4. 돈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예수님은 마음 상태를 아는 키 요소를 돈으로 보셨습니다. 실제로 돈을 어디에 쓰느냐를 보면 그의 마음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말해준다(money talks).”란 속담도 있습니다. 카드 사용내역을 보면 그의 마음과 가치관까지 대략 파악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물질로 채우려고 하지 말고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에 열심을 내십시오. 그리고 영혼을 오염시키는 사치는 최대한 멀리 하십시오.

 그리스의 전성기를 이끌던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전몰장병들을 위한 장례식에서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여러분! 미를 추구하면서도 사치하지 말고, 지혜를 사랑하면서도 약해지지 마십시오. 부자는 부를 자랑하기보다 선행의 도구로 삼고, 빈자는 가난을 부끄러워하기보다 가난을 이겨내는 노력이 게으른 것을 부끄러워하십시오.”

 이제 물질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정신적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소박한 삶을 긍지로 삼으십시오. 그래야 영혼이 약해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사가 되는 도구’입니다. 전사의 삶은 소박해야 합니다. 욕망의 포로가 되면 결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눔의 훈련과 실천이 중요합니다. 

 지금 힘들어도 물질을 떼어내는 아픔을 조금씩 훈련하십시오. 형편과 여유가 있을 때 나누는 삶도 아름답지만 형편과 여유가 없을 때 나눈다면 그 삶이 얼마나 더욱 아름답습니까? 나눔은 내일을 위해 심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둡니다. 진짜 부요함은 얼마나 심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심으면 언젠가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 심은 대로 거둡니다 >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 다니는 형편이 어려운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에게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생겼습니다. 당시의 최대 음악가인 파데렙스키 피아노 공연을 개최해서 그 이익금으로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마련하자는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때 파데렙스키의 매니저가 초청료로 2천 달러의 많은 금액을 요구했지만 두 청년은 연주회를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홍보하며 뛰었지만 수입이 1600달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둘은 파데렙스키를 찾아가 자신들의 노력과 결과를 설명하며 전체수입 1600달러를 주고 나머지 4백 달러를 빠른 시일 내에 보내드리겠다는 약정서를 주었습니다. 그때 파데렙스키가 그 약정서를 찢으면서 그 돈을 돌려주고 말했습니다. “자네들에게 필요한 만큼 먼저 취하고 그래도 여유가 되면 나머지를 매니저에게 주게.”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폴란드의 수상이 된 파데렙스키가 1차 대전 후 굶주린 국민들을 먹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도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식량과 구호품이 폴란드로 물밀 듯이 반입되었습니다. 구호품 전달자는 후버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파데렙스키가 후버에게 감사의 전신을 보내자 후버가 이런 답신을 보내왔습니다. “파데렙스키 수상님! 제가 오히려 은혜를 갚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제가 옛날에 스탠포드 대학 학생 때 공연비 문제로 도움을 받은 바로 그 학생입니다.”  

 나눔은 위대한 보상을 가져오는 최고의 투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드리고 선교사님들과 이웃을 위해 썼던 것들은 지금도 다 계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이 드리고 나누고 베푸십시오. 그러면 언젠가 반드시 신비하게 채워질 때가 올 것입니다. 

 다만 보상을 목적으로 심지는 마십시오. 충성하고 헌신할 때도 보상부터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그 충성과 헌신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저희 선교사역을 위해 큰 헌금을 하고도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 제 이름을 감춰주세요.” 그처럼 이름과 보상에 관심이 없이 나누기를 힘쓰면 하늘나라에서 그의 명성은 누구보다 자자하게 될 것이고 이 땅에서도 그와 그의 후대에게 나타날 축복은 누구보다도 찬란할 것입니다.

 제가 요새 <대조영> 이후 거의 7-8년 만에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슈퍼스타 케이>란 프로그램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울랄라 세션이란 팀 때문에 보는데 훌륭한 청년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연줄도 없고 외모도 없어서 오래도록 뜨지 못했지만 음지에서 실력을 기르며 활동하다가 마침내 때가 되어 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남에게 기쁨을 주려고 음악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같이 겸손합니다. 그들의 실력, 겸손, 열정을 보면 그들이야말로 인생의 모범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학교와 학원에 잘 다니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모범생입니다. 그 기준에 의하면 울랄라 세션 청년들도 부모님 속을 꽤나 썩였을 것입니다. 매일 음악에 빠져 있으니까 그들 부모들도 여느 부모들처럼 똑같이 잔소리를 했을 것입니다. “윤택아! 공부 좀 해라! 승일아! 친구 잘 사귀어라! 명훈아! 학교생활에 충실해라! 광선아! 노래 좀 그만 해라!” 

 기존 사고에서는 그들은 탈선적인 학생들처럼 여겨졌겠지만 지금 그 청년들이 얼마나 멋지고 겸손하게 자랐습니까?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도 인격이 안 돼서 남을 등쳐먹는 자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 제도권에서 원하는 길을 그대로 따라야 그 학생이 모범생이란 시각을 버리십시오. 어른들에게는 울랄라 청년들이 음악에 빠진 것이 탈선처럼 보였겠지만 그들에게는 그 길이 자기들이 가야 할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들이 지난주에는 또 한 번의 감동을 더 주었습니다. 지난주 미션은 ‘누군가를 위해 노래하는 미션’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함께 하지 못한 ‘군조’란 멤버를 위해 노래하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청년들입니까?

 그때 그들은 197만 명의 지원자 중에 탑 세븐(top seven)에 든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성이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된 것은 순전히 멤버 4명의 힘이었고 군조란 멤버는 한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자신의 무임승차는 간절히 원해도 남의 무임승차에는 진절머리를 칩니다. 그런데 정상으로 가는 길에 아무런 역할도 못한 제 5의 멤버를 기쁘게 소개하고 더 나아가 그를 위해 노래까지 준비했다니까 얼마나 고귀한 청년들입니까? 

 ‘명예의 나눔’은 ‘돈의 나눔’만큼 위대한 것입니다. 4명에게 돌아갈 명예가 5명에게 돌아가면 그만큼 주목을 덜 받고 배분수입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또한 이제까지 4명으로 정상까지 올라왔으니 “5명이 왜 필요한가? 그냥 4명으로 계속 가자!”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역할도 못한 제 5의 멤버를 기쁘게 맞이해주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사람들은 공부 잘하는 제도권 안 학생들은 ‘모범생’이라고 하고 음악 잘하는 제도권 밖 학생들은 ‘딴따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울랄라 청년들 같은 딴따라라면 인격이 떨어진 공부벌레보다 훨씬 낫습니다. 저도 이번에 편견을 확 씻어냈습니다. 앞으로 사위를 맞이할 때도 훨씬 넓은 시각으로 맞이할 것 같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만의 재능으로 남에게 기쁨과 행복과 보람과 물질과 명예를 나눠주면 그것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이제 열심히 살고 열심히 나눠주십시오.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나눠주십시오. 자신의 명예와 영생도 나눠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재정도 힘써 나눠주십시오. 그처럼 나눔을 목표로 살고 나눔을 목표로 돈도 버십시오. 

 제가 요새 <네트영어 교육방송>의 비전을 세운 제일 동기도 바로 ‘나눔’입니다. 영어의 원리를 나누며 학생들의 영어공부에 도움을 주고 또한 그로 인해 하나님이 재정을 주시면 그 재정을 나누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요새 사역을 계속 하면서 좋은 일에 나눌 곳이 점점 많아지고 도와야 할 선교사님들도 점점 많아지는데 재원이 딸렸습니다. 그래서 선교와 구제와 뜻 깊은 일을 위한 지속적인 재원확보를 위해 그 비전을 세운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저희 선교연맹 한인총회는 매년 미국의 7개 지역회를 번갈아 돌아가면서 개최됩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저희 총회 33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제주도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에서 오려면 비행기 값이 만만찮아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몽골, 대만, 일본, 중국 등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은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작은 비용으로 총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총회는 회의만 하는 총회가 아니라 서로 힘과 격려를 주는 선교 중심적인 총회로서 매년 은혜롭게 개최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총회에 참석하면 목사님들이 큰 힘과 격려를 받고 돌아갑니다. 사람의 감정을 터치해야 하는 ‘감정사역자’의 애환과 상처와 아픔과 고독이 총회기간인 4-5일 동안 동료 목사님들과 서로 교제하면서 씻기는 경험을 합니다. 특히 선교지에서 외롭게 사역하는 선교사님들은 더욱 큰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동료 목사님과 선교사님들에게 힘을 드리는 일에 저희도 한번은 동참하겠다고 해서 내년 4월에 한국에서 총회를 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산마련이 쉽게 되지 않고 이번 주 목요일이 호텔예약을 하기로 했는데 계약금 마련도 잘 안 되니까 회의에서 몇몇 분이 약간 소리를 높였습니다. “누가 한국에서 총회를 하자고 결정했습니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꼭 총회를 한국에서 해야 합니까?” 

 재정적인 동참을 못하면 조용히 기도만 해주어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동참을 못한다고 3년 전에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해 “꼭 한국에서 총회를 해야 하느냐?”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분들이 보란 듯이 계약금이 마련되게 하소서! 네트영어를 축복해주셔서 이런 상황이 생기지 않게 하소서! 속히 거룩한 커넥션이 이뤄져서 축복 받은 후에 잘 나누고 거룩한 일에 잘 쓰게 하소서!” 그처럼 나눔을 목표로 살면 하나님이 반드시 나눌 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동시에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이제까지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4가지 바로미터를 살펴보았습니다. 말은 마음 상태를 나타냅니다. 항상 좋은 말로 좋은 마음을 드러내십시오. 사랑도 마음 상태를 잘 나타냅니다. 항상 남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성육신의 사랑을 가지십시오. 예배도 마음 상태를 알려줍니다. 더욱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이루십시오. 돈의 씀씀이도 마음 상태를 잘 나타냅니다. 이제 드림과 나눔과 베풂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십시오. 항상 좋은 말, 진실한 사랑과 예배, 그리고 나눔을 통해서 마음도 잘 다스리고 내일의 축복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마음을 잘 다스리는 길 (이사야 42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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