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성경본문 : 삼상 16:6,7

제    목 :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이 무엇을 귀중히 보시고 어떤 점을 중요하게 보시는지를 잘 파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롬 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에 오늘 우리는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봄으로써 진정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되새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람은 겉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기름 부어 왕으로 삼았지마는 그가 점점 교만해지고 제 고집만 내세우고 제 욕심만 부리자 바울을 버리고 사무엘 선지에게 명하여 이새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 중에서 기름을 부어 다시 왕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가 이새의 집을 찾아가 그의 아들들을 보자고 했습니다. 먼저 장자 엘리압이 나오는데 키가 크고 인물이 잘 생겼습니다. 사무엘은 순간적으로 '과연 임금님 감이로구나' 생각하고 기름을 부으려고 했더니 천만 뜻밖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오는데 '너는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비나답을 불러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도 아니라 하고 셋째 삼마로 지나가게 해도 아니라 하고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가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 이새로서는 마음에 두지도 않고 상상도 하지 않았던 막내 아들 다윗, 지금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는 목동이 사무엘 앞으로 불려 왔습니다. 온통 먼지투성이에 작고 어린 목동으로서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왕이 될 만한 모습이 아닌 소년 다윗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의 신앙을 보시사 그를 다음 왕으로 택하여 주셨고, 그 뜻을 받은 사무엘 선지가 기름뿔을 취하여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이렇듯이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외모가 잘 생기고 첫 인상이 좋으면 취직하는 데도 출세하는 데도 큰 덕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늙어서 쪼글쪼글해지고 죽으면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의 겉모습을 보지 않고 속 중심을 살펴보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심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첫째, 그 진실성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가운데 중자와 마음 심자가 의미하듯이 그 마음의 진실성을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착해 보이지만 속은 거짓된 사람이 있고 겉으로 별로 착해 보이지도 않는데 지나볼수록 진실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부모가 지켜보나 안보나 진실하게 양떼를 지키고 형들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말거나 어려서부터 양새끼 하나라도 곰이나 사자에게 물려 갈새라 진실하게 돌보는 목동이었습니다.


 실로 그 마음이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으로 믿어지고 거짓된 사람, 위선자는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이 갑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진실된 사람만이 참되고 굳건한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충성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성심이란 가운데 중자 밑에 마음 심한 자가 충자인 것처럼 무슨 일에나 눈가림만 하지 않고 마음 한 가운데를 바쳐서 충성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껍데기로만 믿고 건성으로만 믿는 사람은 시험과 핍박이 올 때, 목사나 교인이 알아주지 않을 때는 타락하거나 넘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 중심이 충성스러운 자는 그러한 것들에 관계없이 신실한 믿음을 보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약속을 어찌하든지 잘 지키도록 노력하는 사람이고 충성된 사람은 변덕을 잘 부리지 않고 눈가림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민 30:2 :신 23:21-23엡 6:24계 2:10).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진실함과 충성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2. 사람은 행위의 결과만 보지만, 하나님은 숨은 동기를 살펴보십니다


 사람은 눈앞에 나타난 결과만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 이전에 그 마음과 생각 속에 숨은 동기를 살펴보십니다. 사람들은 동기가 불순해도 결과적으로 나타난 행위만을 중요하게 보지만 하나님은 모든 행위의 숨은 동기를 살피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은 외면적이요, 형식적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내면적이요, 영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마음에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속으로만 욕을 하고 저주를 했어도 숨은 동기를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살인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에는 '간음하지 말라 '고 했지만 예수님은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숨은 동기를 더 중요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실로 간음죄, 살인죄를 범치 않으려면 항상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과 생각에 죄악의 동기를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벌써 마음속에 악한 마음을 품으면 죄의 결과는 시간 문제이지 언젠가는 나타나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머리 위에 등지를 틀지는 못하게 하라'는 청교도의 속담대로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마귀의 생각, 악한 생각이 자리잡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시 139:23,24에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중심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했습니다. 시 51:6에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전에 중심의 동기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깨끗한 마음을 품도록 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해서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하여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목하에 살인, 파괴, 어떤 잔인한 행동도 서슴치 않고 자행합니다만 그 동기의 의로움과 과정의 선함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요, 그것은 결국 마귀의 사상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많은 사람이 헌금 궤에 돈을 넣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셨습니다. 아무래도 물질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가는 것이므로 주님께서도 헌금하는 것을 유심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말씀하시기를 한 과부가 동전 몇 푼을 넣는것을 보시고 제일 많이 바친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겉에 보이는 결과, 즉 액수는 많지 않아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생활의 전부를 바치는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의 숨은 동기를 무엇보다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3. 사람은 육신을 귀히 보지만 하나님은 영혼을 귀중히 보십니다


 세상에 있는 금, 은 보석을 다 모아다가 여의도 광장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많은 물질보다 그 옆에 서 있는 한 거지의 영혼이나 어린아이의 영혼이 더 귀중합니다. 예수께서도 '한 영혼이 온 천하 물질 세계보다 더 귀중하다'고 하셨습니다.


 계란의 껍질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 흰자위가 더 중요하고, 흰자위보다 노른자위가 더 중요하듯이 사람의 육신보다 그의 영혼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육신은 100년 살다 죽지만 영은 영원한 것입니다. 고로 육신보다 영혼은 억만배 더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도 육신적인 믿음, 영적인 믿음이 있다고 봅니다. 가령 '믿습니다' 한 마디 해도, 입으로만 '믿습니다 '하는 것이 있고, 정말 영혼 깊은데서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서 '믿습니다'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믿음이라야 참 믿음으로 보십니다. 찬송가를 불러도 아무 생각없이 육신의 목소리만 내는 사람이 있고, 영적으로 진실하게 부르는 찬송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배하고 하나님이 다 받으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영적인 예배이고 이러한 영혼의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영혼을 귀중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영적인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영적인 믿음은 보이는 것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태산과 같은 어려운 문제가 가로 놓였어도 보이는 산을 보지 않고, 안보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영적인 참된 믿음입니다. 12명의 정탐꾼 중에 10명은 눈에 보이는 철옹성벽 같은 여리고 성을 보고 실망, 낙담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보이지는 않지만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그까짓 것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좋은 다윗 앞에는 양떼를 지킬 때에 맹수가 나타나는 것이나, 무적장수 골리앗이나 다 똑같이 보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맹수가 나타나든지, 어린아이가 나타나든지, 무시무시한 골리앗이 나타나든지 그것이 결코 두려움과 요동함을 주는 것이 못됩니다. 참된 영적인 믿음은 보이는 것에 지배를 받거나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7에 보면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 11:1 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영적인 믿음은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감정이나 느낌이나 기분에 의해 좌우되면 아직 온전한 영적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전에 성령의 불을 처음 받았을 때에는 설교를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꼭 뜨끈화끈한 느낌이 와야만 '아하, 하나님이 임재하셨구나! '하는 믿음이 생기고,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도 불이 와야만 낫는다는 확신이 있었는데 성숙해 가면서 깨닫는 바는 아무런 감정적인 느낌이 없는데도 믿고 기도할 때 불치의 병도 잘 고쳐 주시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느낌(feeling)에 의존하는 것도 영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뜨끈화끈 안해도, 환상이 안 보여도 말씀에 의지하고 전폭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던지고 믿는 믿음이 영적인 믿음이요 하나님이 귀중히 보시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병 낫기 위해 기도했을 때, 느낌에는 변화가 없고 여전히 쑤시고 아파도 흔들리지 말고 믿고 나가야 낫습니다.


 셋째, 영적인 믿음은 인간적인 이해 타산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이해나 계산과 타산은 육에 속한 것이지 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영적인 믿음으로 옥합을 깨뜨려 비싼 나드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으나, 제자 중에 예수님을 은 30량에 팔아 먹은 가룟 유다는 얼른 그것을 계산해서 '가난한 사람' 구제하는 것을 핑계로 비싼 나드 향유를 허비했다고 마리아를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를 책망하고 마리아를 칭찬했습니다.


 아낌없는 십일조나 헌금을 바쳐서 하나님의 기적이나 축복을 체험한 사람은 모두 인간적인 이해 타산과 계산을 초월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어리석고 손해인 것 같으나 아낌없이 하나님께 먼저 바쳐보니 사실은 손해가 아니고 축복이 됨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고후 10:5), 참된 영적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것의 지배를 받지 않고,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인간적인 이해 타산을 초월한 영적 믿음을 귀중히 보십니다.


 성도 여러분! 부디 사람 앞에서 보여지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보여지는 것에 더 신경을 쓰셔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이 글을 공유합시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

본문과 관련 있는 내용으로 댓글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