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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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사람과 속사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6~18)


<서론>

오늘 저는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겉사람과 속사람의 구별이 안 되었습니다. 뭐가 겉사람이고 뭐가 속사람인지 분별하려고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곧 옛사람과 새사람이 확연히 마음속에 구별되고 그날부터 마음속에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새사람과 겉사람이 주도권 싸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사사건건이 새 사람은 새로운 길로 가려고 하고 옛사람은 전통적인 삶을 그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는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윌(Will)박사가 아리엘 듀란트(Ariel Durant)박사와 함께 지난 3,421년 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은 기간은 불과 286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20세기만 놓고 보면, 전쟁과 혁명으로 죽어간 인구가 약 9억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현재 지구상에는 여러 핵 보유국가들에게 약 3만 7천여 개의 핵탄두가 있고, 만약 핵전쟁이 일어나면 미국과 러시아가 가진 핵탄두만으로도 지구를 41번이나 파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예일대학의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 교수는「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전쟁을 하는 주요 요인을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즉, 경쟁자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인 이익 추구, 명예 추구인 것입니다. 성경은 전쟁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간단히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생기면 탐욕으로 말미암아 싸우거든요. 인생은 빵 한덩어리를 두고서 누가 더 많이 점령하느냐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없으면 싸우지 않지요. 그러나 욕심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싸우는 것입니다.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아담을 따라 하나님 없이 인간의 정욕,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면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본론>

1. 겉사람으로 사는 것

첫째로, 우리 겉사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알아보십시다.

나도 겉사람으로 살고 너도 겉사람으로 살고 그러면서 무엇이 겉사람인지 모르면 안 될 것입니다. 겉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겉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경고한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왜 겉사람이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즉시로 속사람은 죽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속사람, 영생의 사람은 죽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사람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은 자기의 정욕중심으로 삽니다. 자기 욕심중심으로 살아요. 무엇이든지 내 욕심을 먼저 앞세워 놓고 그 욕심에 따라서 결정하는 것이 겉사람이 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리고 겉사람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마귀를 따라 이 세상에 나와서 그때부터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쫓지않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해서 마귀의 종이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시키는 대로 따라서 행하면 시키는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지배하에 사는 사람은 모든 면에 악한 꾀를 쫓아서 사는 것입니다. 악한 꾀라는 것은 탐욕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삽니다. 선악과는 하나님만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하나님과 동등하게 좋다 나쁘다를 경쟁해서 살겠다는 나쁜 마음인 것입니다. 죄인의 길에서 사는 것이 바로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인데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삽니다. 그래서 죄인의 길에 서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 삽니다. 자기를 과대평가합니다. 자기가 실제 자기보다도 더 잘났다고 생각하고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더 능력있다고 생각하고 더 대접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오만한 자리에 앉아 삽니다. 그리고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옛날 습관을 따라서 썩어져 가는 삶속에 즐기고 사는 것입니다.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그 속에 행복하다고 웃고 즐기며 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결국은 멸망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죽고 나면 저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한해가 지나면 나이가 한 살 더 먹잖아요. 죽음이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 저 건너편에 무엇이 있을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확신이 없는 사람도 죽고 난 다음에 천당과 지옥이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주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모릅니다. 죽고 난 다음에 정말 저 세상에 있을까? 퀘스천을 가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누가복음 16장 19절로 24절에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느 도시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자색옷이란 것은 옛날에 권력이 있는 사람이 입는 옷입니다. 그리고 고운 베옷은 돈이 많은 사람이 입는 옷인 것입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니까 권력도 있고 돈도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의 삶 철학은 쾌락주의인 것입니다. 매일같이 호화롭게 즐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기 쾌락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께 대한 경배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문가에 대조적으로 거지 나사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헌데 투성이었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헌데가 꽉 들어찼습니다. 치료할 수 있는 약도 없었고 그런 설비도 없었습니다. 개들이 와서 같이 헌데를 핥으며 개들과 같이 살았고 부잣집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산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환경을 살펴볼 때 이 부자는 하나님 없이 인본주의로 살았지만 이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왜냐하면 죽고 난 다음에 아브라함의 품 낙원에 들어간 것 보니 낙원에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낙원에 들어가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 낙원에 안들어갑니다. 나사로는 비록 생활은 병들고 가난하고 굶주렸지만 그는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전통적으로 믿는 방법으로 믿었고 우리 순복음식으로는 안 믿은 것 같습니다. 우리식으로 믿었으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해야지 왜 거지가 되어서 앉아 있어요? 창피하게...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래서 나사로가 목사를 잘못 만났든지 교회를 잘못 다녔던지 병들고 가난하고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 중요한 것은 영혼만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건강도 세월이 지나면 늙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재산도 못가지고 천당가는데 영혼은 영원히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나사로는 영혼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살다가 얼마있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병들어서 헐벗고 굶주리니 빨리 죽을 수밖에 없어요. 요사이는 보통 100살을 산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옛날보다 영양이 좋고 사회환경이 좋고 치료를 잘 받고 하기 때문에 100살 사는 것을 그렇게 오래 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장수케 하므로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겠다고 했으니 주님이 여러분에 대한 뜻은 할 수만 있으면 장수하는 것입니다. 옆에 사람들 보고 장수하십시오. 축복하십시오. 축복이 굉장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우리 입의 말로써 축복을 전달해 줄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사로는 죽었는데 천사들이 와서 그를 받들어 낙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천국에는 못 들어가고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낙원은 천국 들어가는 대합실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낙원에 주인으로서 있고 아브라함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언제 천국으로 들어가느냐.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흘려서 모든 인간의 부채를 다 청산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낙원으로 내려갔습니다. 가니까 낙원에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를 지릅니다. 예수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 이제 너희가 대합실에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천국에 올라가실 때 낙원에서 기다리는 영혼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낙원에 가 있었습니다. 대합실에 가 있고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대합실 지옥에 가 있어요. 진짜 지옥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장차 받을 형벌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도 죽었지요. 부자가 영원히 살 수 있나요? 그런데 어디를 갔느냐. 음부로 내려갔습니다. 지금 죄인들이 내려가는 곳은 지옥이 아니고 음부입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은 나중에 심판을 받고 들어가는 곳이고 지금은 음부는 심판받을 사람이 대기실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음부에 들어가서 너무 괴롭다 말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답게 살았는데 갑자기 육체를 떠나자 음부에 떨어져서 불꽃 가운데서 너무나 괴롭고 물 한방울이 귀합니다.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를 쳐다보니까 이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희희낙락하고 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자가 신세가 달라져서 고함을 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가지고서 손가락에 냉수 한 방울 떠서 찍어서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나 이 불꽃 가운데 괴로워 죽을 지경입니다. 그때 아주 아브라함의 맹렬한 대답이 왔습니다. 너는 세상에 살 동안에 잘 살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말씀도 순종하지 않았지? 나사로는 세상에서 너무 고통스럽고 괴롭고 병들고 헐벗었으나 말씀을 사랑하고 모세와 선지자들을 존중하고 살았기 때문에 이곳에 와 있다. 운명이 달라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사람이 죽으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이고 하나님의 계시적인 생각은 하나님이 계획한 저편 세상을 밝히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편 세상을 밝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써 죽었다가 부활해서 우리에게 와서 저 세상 소식을 전해 주셨는데 예수님 말씀이 분명하고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아무리 부귀, 영화, 공명을 누리고 호화롭게 살았다 할지라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기 전에 음부에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다가 나중에 심판을 받아 최후의 심판 후에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요사이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주님이 하늘에 가서 우리 있을 곳을 예비해 놓았기 때문에 지금은 낙원에 들어갈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육신의 장막집 벗어버리면 직행으로 가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으로 우리가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인간은 인본주의사상에서 삽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인간 중심으로 삽니다.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를 믿으면서 인본주의로 살아서 많은 시련과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이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물질과 쾌락과 인본주의에 사로잡혀 살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불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한가지입니다. 훌륭한 성이요 사람들이 화려하게 생활을 했지만 인본주의로 쾌락주의로 살다가 하나님 심판을 받아 불과 유황불에 타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대 문명은 첨단 기술이 발달하여 정보화 시대, 유전자 생산 시대, 국제화 시대 등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가치관이 붕괴되고, 도덕적 삶이 타락하여 정신적으로는 공황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각종 자연재해를 통해 인류 문명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가르시아 마르케스는「백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세와 문명의 폐해를 씻어낸 대 홍수 이후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하지만, 인간 내부의 악으로 인해 결국 유토피아는 실현되지 못한다.”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을 가지고 집을 짓고 성을 세워도 스스로의 악 때문에 지가 지어놓고 지가 무너뜨려 버리고 만 것입니다. 세계의 문명은 인간들이 열심히 세워 놓고 난 다음에 전쟁으로 스스로 다 무너뜨려 버리고 만 것입니다. 겉사람은 하나님 없이 인본주의로, 인간의 지식과 과학 기술에 의지하여 문화적 혁명을 이루고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겉사람의 삶은 아무리 뛰어난 문명 안에 살지라도, 타락과 부패가 속에서 솟아오르기 때문에 다 파괴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 손으로 지어놓고 자기 손으로 파괴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2. 속사람으로 사는 것

그러면 둘째로, 속사람은 무엇이며 속사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인 것입니까?

속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께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셨으면 이런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짜고짜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나다니요? 나같이 나이 많은 영감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또 나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이 혈육으로써 천국에 못 들어간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어떻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납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거듭난다는 것은 마지막 아담 예수께서 우리의 처음 아담 하에서 지은 모든 죄를 다 청산하고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 형상과 모양의 생명을 복구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예수님은 죽음을 극복하시고 새로 살아난 생명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영생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사는 생명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사는 생명인 것입니다. 사람은 다 영원히 살지요. 지옥가도 영원히 살고 천당가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는 것을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여러분은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 산 생명 아닙니다. 하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이 살아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요 또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와서 계신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을 성전 삼고 와서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2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마음에 받아들이면 예수님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고 무엇을 상상하느냐. 저기에 예수님이 나의 죄,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을 걸머지고 매달려 죽으셨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것을 상상하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다음에는 뭘 바라보는 것입니까? 아라마데 요셉의 무덤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했다. 예수님과 같이 무덤에 죄와 허물, 질병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장사지내 버리고 부활해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승리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바라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볼 때 언제나 이 두가지 사건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믿고 말해야 되고 또 그를 통해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망과 음부를 청산하고 부활 영생 천국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써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 여러분은 새것인 것입니다. 새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마지막 아담 예수를 통해서 태어난 새사람으로 취급하고 여러분에게 은총을 베푸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늘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찬양하면 늘 높여 주시고 여러분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고 환난 때 같이하여 여러분을 건지고 영화롭게 해주시고 육신으로도 장수하고 영혼으로는 영영 장수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생명을 따라 사는 것이 거듭난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 옛날 죄짓는 마귀의 생명은 청산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속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님의 인도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혼자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무서워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로 16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않고 다시 네게로 오리라고 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창조의 영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십시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고 난 다음에 빛이 생기고 궁창이 생겨나고 만물이 생겨난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이 역사하면 만물이 새로워지고 좋은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님은 그 성령을 여러분 속에 두셨습니다. 아무리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은 위에 있어도 성령이 여러분 속에 기도를 통해서 운행할 때는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주셨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여러분이 들고 읽고 듣고 기도하고 마음에 간직하고 성령의 마음의 감동으로 기도히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기적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성령과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시는데 이제 그 성령을 여러분 속에 두시고 그 말씀을 여러분 손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아 알고 성령을 의지하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하늘 손가락으로 지은 달과 별을 보니 인생이 무엇인데 하나님이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돌보시나이까. 우리를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시고 손으로 지은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것을 여러분이 다스릴 수 있는 대리권 행사를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다스리느냐.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와 계시니까 성령님에 의지해서 인생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공허하고 혼돈한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흑암의 세력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창조의 능력이 여러분과 같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운행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그렇기 때문에 근심시켜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사람이 된 사람은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 온 최고의 선생님인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님, 오늘 성령시대에 성령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을 근심시키면 여러분 우리가 참 손실이 많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므로 근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 가장 큰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피하고 게으르고 태만하면 성령께서 근심하시고 슬퍼하십니다.

레슬리 레이니는「승리의 생활」이라는 책에서 성령님을 근심하게 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을 말했습니다. 내가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지, 근심하고 있는지, 내 마음을 살펴 한번 보십시다.

첫째로,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은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근심한다고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풍랑 이는 바다처럼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하면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을 근심시키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안식과 상쾌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마음속에 운행할 때는 마음이 평안하고 상쾌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우울하고 기분이 나쁘고 평안이 없으면 성령의 역사가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능력을 상실합니다. 성령이 근심하고 슬퍼할 때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듣고 감동을 안해요. 예배를 드려도 예배에 가슴 설레는 것이 없어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모인 곳에 진동하게 하더니 사람들의 능력이 충만해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진동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찬송할 때 내 마음이 진동해요. 마음이 진동하면 마음이 설레요. 마음에 감격이 있어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요. 희망이 생겨나요. 그러한 역사가 사라지면 성령을 슬프게 하고 마음에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성령이 슬퍼하면 마음에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이 슬퍼하시므로 우리도 삶에 근원적인 기쁨이 없고, 살아갈 열망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우편이 즐거움이 넘친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안 기뻐할 도리가 없어요. 하나님 기쁨인 것입니다. 마귀는 슬픔입니다. 마귀의 앞에는 슬픔이 충만하고 마귀의 우편에는 괴로움이 넘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이 충만하면 기쁨과 즐거움이 항상 같이 따르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면 성령께서 잠잠하고 역사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성령이 잠잠하면 마음에 의심이 생깁니다. 확신이 사라지고 의심이 들어와서 자기도 모르게 갈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성령이 떠나면 건강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병들므로 몸이 병들 때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속사람으로 날로 새롭게 살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근심하거나 슬퍼하시지 않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늘 깨어 말씀과 기도에 힘쓰며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시고 새로 거듭난 새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사차원의 영성을 따라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계시적인 지식을 따라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늘 묵상하고 듣고 읽고 먹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양식인 것입니다. 세상지식은 감각적인 지식이지만 이는 계시적인 지시로 거듭난 사람만 이 성경을 읽습니다. 거듭난 사람만 성경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을 개발하기 위해서 계시적인 지식인 말씀을 늘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영성을 개발하려면 희망찬 꿈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희망이 있어야 돼요. 희망을 잃어버리면 죽음이 오는 것입니다. 젊은이에게는 환상을 늙은이에게는 꿈을 주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 거듭난 사람은 마음속에 희망이 늘 있어야 돼요. 희망의 불길이 사라지지 말아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사는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새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믿고서 삽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살기 위해서는 모험적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일이 계산해서 합당한 것만 믿으면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 믿음이란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모험으로 뛰어드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갈 때 계산해서 물위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중력이 얼만데 부력은 얼마고 바람방향은 어떻고 파도의 높이는 얼마고 계산해서 물에 한번 들어가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들어간 것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오라고 하시면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서서 간 것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아들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불러내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헤아리라고... 별들을 수없이 헤아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너희 자손이 저 별들처럼 많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를 믿었습니다. 75세 된 노인이 별들 쳐다보고 믿은 것은 하나님 말씀 때문에 믿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 말씀을 주시면 말씀대로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은 모두다 로고스로써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인데 기도하면 이것이 레마가 되어서 여러분에게 직접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어요. 모험을 가져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데 우리 거듭난 사람만이 모험적으로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거듭난 사람은 변화된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므로 말미암아 마음에 변화된 대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나는 산다는 변화된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외워서 말씀대로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하루에도 수십번 시편 23편을 외웁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데 그것 전부 다 그 말이 내 말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답답하면 하나님께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데요.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내가 불행하면 내 영혼을 소생시켜서 행복하게 해주시옵소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 주님께서 같이 계시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합동하여 유익이 됩니다. 원수에게 공격을 당하면 하나님, 원수가 공격해도 하나님 나에게 진수성찬 차려 주십니다. 전부 말씀을 그대로 우리가 입으로 시인하면 그것이 굉장한 능력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 그러지 말고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시다. 하나님은 나의 의뢰하는 곳이 되신다. 하나님은 나를 새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신다. 그렇게 말을 성경적으로 하면 내 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면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힌 바 되는 것입니다. 파도 이는 바다에 배가 항구로 찾아가는 것은 키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파도 이는 세상에서 안전한 항구로 가는 것은 키가 우리 혀라는 것입니다. 말을 여러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성경적으로 하면은 하나님의 역사가 그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마귀적이고 세상적이고 절망적이고 파괴적으로 하면 또 우리 인생도 그 말을 따라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힌 바 되었으므로 새해에는 말조심을 하십시오. 생각을 하나님 말씀으로 꽉 채워 놓고 여러분 아름다운 꿈을 말씀으로 그려놓고 말씀을 따라서 모범적으로 믿고 말씀 따라서 입술로 말하면은 창조적인 다스리는 역사가 여러분 생애 속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성령이 여러분 생애 속에서 창조적인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3. 날로 새롭게 사는 삶

셋째로, 우리는 이제 날로 새롭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하루 정체되지 말고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새로운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겉사람은 낡아진다. 나이 한 살 더 먹으니 주름살 하나 더 지고 허리도 조금 더 구부려지고 말도 좀 더 천천히 할지 몰라도 그것 걱정할 것 없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로워진다. 왜 말씀이 있으니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니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기도가 있으니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로 속사람이 새로운 생명으로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같이 우리는 죄와 허물을 벗어버리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었다고 해서 한번에 천사가 안됩니다.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어른이 안됩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절로 10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이와 같이 우리가 끊임없이 목표를 변화에 두고서 말씀을 읽고 성령인도를 받으면서 기도하면서 한발자국 한발자국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나아가고 변화되는 것이 새로 변화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후퇴하지 말아야 돼요. 늘 전진해야 돼요. 나아져야 돼요. 아무리 폐지와 같은 인생이라도 여러분 폐지를 가지고서 새로운 종이를 만들면 굉장히 좋은 종이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한번은 유명한 제지 공장을 찾아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제지공장에 가니까 아주 신문지 조각, 더러운 종이 뭉치 이런 것들이 창고에 꽉 차 있어서 그가 코를 잡고서 세상에 제지공장이 깨끗한 종이 만드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더럽고 추한 제지종이가 있는지 몰랐다고 공장장 나오라고... 공장장에게 공장이 이게 뭐냐 말이야. 그러니까 공장장이 폐하, 지금 보시는 종이는 재료입니다. 이것 전부 쓰다 내버리고 코풀다가 내버리고 짐승의 퇴비가 섞여있고 이런 것을 가지고 공장에 오면 우리가 이것을 새로 제조해서 좋은 편지지 좋은 텍스트북 용지로 사용합니다. 여왕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주일쯤 지나고 난 다음 여왕 왕궁에 편지지가 아주 좋은 편지지가 배달이 되었어요. 그림도 아름답게 그리고 아주 냄새도 향기로운 냄새가 나은 좋은 편지지여서 여왕이 기뻐서 야~ 이 편지지 참 좋다. 그것에 내가 편지써야겠다. 거기에 공장장이 메모를 적어 놓았어요. 폐하, 폐하가 싫어하던 그 폐지가 바로 지금 이 종이입니다. 폐지를 공장을 통하면 이렇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폐지들인 것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공장을 통하면 새로운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점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구원 못받아요. 폐지입니다. 썩은 종이입니다.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이 폐지가 십자가 공장을 통하면 아주 좋은 종이가 돼요. 새사람이 되어요. 성령의 사람이 되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하나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로워지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사람이 된 우리들은 항상 우리를 새롭게 하는 십자가 밑에서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로 25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세세토록 있는 말씀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한 것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령이 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만 있으면 새로운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창세기 1장 1절에 보십시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데 성령이 운행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지금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까? 여러분 가정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사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까? 이것 어떻게 해결합니까? 절망 아닙니까? 예수님을 모시고 구원받아 성령이 운행하시면 그 다음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여서 생각하고 말씀으로 꿈꾸고 말씀으로 믿고 말씀으로 말하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그대로 여기 두면 안돼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돼요. 원래는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이 말씀이 우리 것이 되어야 돼요. 어떻게 말씀이 우리 것이 되느냐. 생각이 달라지면 우리 것이 됩니다. 말씀이 들어가서... 말씀을 통해서 아름다운 꿈을 꾸면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믿으면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입술로 시인하면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입술의 고백으로 우리 속에 들어오고 성령이 운행하면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나서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에 빛이 들어오고 질서가 들어오고 창조가 들어오고 아름다움이 들어와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말씀이 계시고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낙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와 성령충만하기 위해서 항상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충만을 간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로 24절에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이 새사람을 만들어 주었으므로 우리는 입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6절로 19절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냥 충만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것으로 충만하라. 하나님 가진 것 다 가져라. 하나님 주신 것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다 가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새사람이 된 사람은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종교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없으면 교회당도 허무하고 소용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설교도 의미가 없어요. 얼마나 달콤한 성가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

사랑이 없으면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해도 꽹작꽹작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 아무 내용이 없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하버드대학을 나오고 박사학위를 몇 개를 받고 분석이 능해서 투자하는 것마다 돈을 억수로 벌어들여도 하나님은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냥 동정한다고 물자 전달해 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어야 된다. 그러면 그 사랑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예수님이 속에 계셔야 그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 사랑 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다 예수님의 사랑이 넘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일생은 겉사람과 속사람의 싸움인 것입니다. 바울 선생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는 서서히 변화되는 것이니 신앙은 어린 아이가 자라는 것처럼 많은 실수를 하면서도 말씀과 성령으로 날마다 자라고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이루어지고 창조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계속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습니다. 내일이 오늘과 같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매일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매일 창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옛생각에 묶여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옛날 미움에 묶여 있지도 말고 옛날 원한에 묶여 있지도 말고 옛날 잘한 것도 자랑하지 말고 옛날 못난 것도 낙심하지 말고 앞으로 주님 더 좋은 세계를 예비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더욱 영혼이 잘되고 더욱 범사에 잘되고 더욱 강건하고 더욱 생명을 얻되 더욱 넘치게 얻고 더욱 천국을 주님 예비하고 있기 때문에 내일을 바라보고 늘 변화받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 변화가 말씀을 통해서 오고 성령을 통해서 오고 기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고 성령이 있고 기도가 있으면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기적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이 새해에는 여러분 이런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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