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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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명기 32장 5절-6절

제    목 : 소망의 하나님




'적과 흑'의 저자 프랑스인 스탕달에 대하여 거의 평생을 연구하였던 벨리 토리라는 교수가 있다. 그는 그가 연구하여 논문을 쓴 원고가 잘못하여 몽땅 불에 타 잿더미가 되는 재난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 상황에 깊은 허무감을 느끼고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여 결국은 자살하고 말았다.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지 못하는 자들은 모든 일의 최후에는 허무와 좌절로 소멸될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였으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극복할 힘을 주셨습니다. 이탈리아의 시성 단테는 그의 작품 「신곡」의 「지옥문」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슬픔의 거리로 이르는 입구, 여기는 영겁의 고뇌로 이르는 입구, 여기는 멸망의 백성들을 위한 입구이니 너희들 여기로 들어오는 자는 모두 희망을 버릴지니라.' 희망이 없는 곳, 그곳은 바로 지옥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희망을 가슴에 품었을 때 세계는 모두 그의 것입니다. 희망을 조금씩 버리게 될 때 인간은 늙어 가고, 모든 희망을 버리게 될 때 인간은 죽게 됩니다. 희망이 있는 자가 노력하게 되고, 노력하는 자는 성공하게 됩니다. 살전 5:8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과 구원의 희망으로 완전 무장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1. 소망은 어디서 생깁니까?

   인간의 극한 상황, 즉 절망과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소망은 생겨납니다. 절망과 고통의 깊은 늪을 인간이 헤매다 보면 바로 거기서 희망의 환한 길이 나타나는 것을 종종 체험하게 됩니다. 창 21장에 나오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경우, 가정불화가 잦아지자 아브라함은 첩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주어 내쫓았습니다.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던 두 모자가 물이 떨어져 죽음을 앞에 높고 서러움과 절망에서 통곡하고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망을 갖게 됩니다.

   창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경우를 보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집을 떠난 야곱이 해가 지고 배에 허기를 느끼고 몸이 피곤해지자 광야에서 돌 하나를 취하여 베개로 삼고 고민 가운데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그는 꿈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망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철저하게 버림을 받는 자신을 발견한 그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대속을 위한 죽음을 희망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을 보았고 동시에 십자가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알고 '다 이루었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열두 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라하게 처형당하자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체념하여 절망과 두려움과 실의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 희망이 없는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시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는 음성 속에서 그들은 전에 없던 희망을 가지고 죽음을 뛰어넘는 능력 있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2. 무엇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습니까?

   외부적 조건이 달라지지 아니하였는데 절망하는 자에게 희망이 생겼다면 무엇이 그를 변화시킨 것일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하갈은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야곱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용감하게 광야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높은 담으로 막혀 있는 현실에서, 빛이 없는 캄캄한 곳에서, 절망의 깊은 늪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그 절망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절망을 박차고 일어섰을 때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들었음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은 낙심과 좌절과 괴로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깊은 절망 속에서 많이 생겨납니다.



   3. 소망은 누가 주십니까?

   희망은 하나님께만 있고 하나님만이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이 세상에는 참된 소망이 없습니다. 수많은 국가와 사람들이 살기 좋은 사회와 세계를 만들겠다고 외치지만 실제로 되어지는 것은 죽음의 공포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은 실망을 느낄 때가 반드시 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만족하게 해주시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오늘 우리에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시며 기쁨과 평안을 주십니다. 희망이 있을 때 발걸음도 가볍고, 역경도 뚫고 나갈 수 있으며, 먼 길도 마다않고 달려갈 수 있으며, 고생도 슬픔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희망 없는 곳이 지옥이며, 희망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희망을 가진 민족은 현실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일어설 것입니다. 근본적이면서도 궁극적으로 성도에게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가지는 가치관은 세상이 가지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가지는 가치관은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건강이 가치관의 기준이 될 수도 있고 명예나 재물, 또는 어떤 윤리 의식이 가치관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가지는 가치관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기쁨이 되고 삶의 지표가 됩니다. 이러한 삶의 기쁨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흠'이란 뜻은 도덕적인 의미로서 욥 11:15; 31:7 잠 9:7에서와 같이 '부정하고 더러운 죄악'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어기고 더러운 죄악으로만 일관하는 완고한 죄악의 세대'를 의미한다. 한편 본문 5절의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난무하여 '그들의 결점이나 오점 때문에 그 앞에서 타락하여 그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Lowth, Dake), '그에게 그의 자손이 아닌 그들의 맹세를 더럽혔다'(Fuerst)라고 해석하였으나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히브리 어법을 착각한 억지 해석이다. 본문은 이러한 해석보다도 '로저스'(Rogers)의 해석대로 '완고하고 방종한 세대가 하나님께 범죄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자신들의 꼴불견 때문에 그의 자손이 아니다'라는 해석이다.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자칭한 것은 그가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며 보호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는 '그가 우리를 속하셨기에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고 증거한 이사야 선지자의 증거(참조, 사 63:16)에 의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바울 사도가 증거한 말씀, 즉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 15)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주로 믿어 그의 피로 거듭난(참조, 히 1:5) 영적 이스라엘에게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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