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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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3장 1절-6절

제    목 : 일꾼의 자세


사건 개요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여호수아는 싯딤을 떠나 요단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단강을 건너기 위한 준비를 하도록 명하였다. 먼저 레위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에 행하도록 하였고 백성들은 이천 규빗 뒤에서 따라가게 하였다. 특히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스스로 정결케 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사를 베푸실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역사적 배경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여호수아는 요단강가로 진을 이동하였다. 그후에 삼 일이 지난 후 요단강을 도하할 준비를 시켰다. 이는 도하에 따른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였고 특히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기다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과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아말렉과 가나안인들에게 멸망당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민14:39-45). 특별히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스스로 정결케 하라고 지시한 것도 백성들이 부정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살까 염려한 것이다. 한편 요단강 도하를 위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도록 하였다. 원래 언약궤는 레위인들 중에서 고핫 자손들이 메게 되어 있으나 중요한 때에는 제사장들이 메기도 하였다(신31:9).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궤에서 이천 규빗이나 떨어져 뒤따르도록 하였다. 한 규빗은 팔꿈치 맨끝에서 가운데 손가락의 끝까지 닿는 거리로 약 46-56cm이다. 따라서 이천 규빗은 900-1,100m정도 되는 거리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이처럼 멀리 떨어지게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의 거룩함을 훼손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존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구속사적 의미


요단강의 도하를 앞두고 여호수아가 가장 많이 염려를 한 것은 요단강의 지리적인 조건이나 여리고 거민들의 군사력이 아니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였다. 그래서 백성들을 정결케 하고 언약궤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였던 것이다. 요단강 도하는 바로 언약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의 이러한 태도는 구원의 조건은 믿음의 순결한 의복을 준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믿음 안에서 바로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정탐한 후에, 여리고성으로 진군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인 요단강을 도하하는 장면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시점에서 여호수아는 인간적으로 전혀 서두름 없이 먼저 백성들이 갖추어야 할 준비 사항을 하나하나 지시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간 유리 방황했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의 문 앞에 와 있는 이 시점에서 구태여 3일간 유할 필요 없이 그냥 진군해야 더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에게 정결의식을 요구하며 3일간 머물렀던 것입니다. 여리고 정복과 함께 가나안 입성이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여리고성 정복을 이해해야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전진하기에 앞서 반드시 해야 할 몇 가지 준비사항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위해 어떠한 준비를 했는지 살펴보고,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무엇을 준비해야 되는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 서두르지 않아야 합니다.


[해석]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싯딤을 떠나 요단에 이르렀습니다. (1절) 분명히 본문에서는 ‘아침에 일찌기’라고 시간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앞으로 있게 될 여리고 성(수6:12)과 아이 성(수8:10)을 정복하기 위해서도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서둘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그일에 신중하게 임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1절에 있는 ‘떠나’에 해당하는 원어는 ‘천막 말뚝을 뽑다, 출발하다, 여행하다’는 뜻인 ‘나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천막 생활을 하며 유랑하였던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생활 무대와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동을 하려면, 아침부터 일어나서 준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매사에 신중한 여호수아였기에 요단강을 앞에 두고도 흥분하거나 서두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적용]

우리나라에는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에 매어 못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선조들은 서둘러서 무슨 일을 하려다보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만다는 지혜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하는 데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좀더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인간적인 상식과 예상을 초월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인간적 판단에 의해 일을 서둘러  행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학수고대하던 약속의 땅이 바로 강 건너 편에 보이는 데까지 왔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무모하고 경솔하게 요단강을 건넜다면 분명 실패했을 것입니다. 눅14;28에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경솔하거나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는 지혜를 갖도록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신중함은 곧 통찰력임(잠 22:3)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교훈을 받아들이는 신중함(잠 15:5)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경솔한 행위에 대한 경고(전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2.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해석]

본문 3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출발하면 모든 백성들은 그것을 따라 그 뒤를 좇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방법입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 그냥 단순히 언약궤만 따라간다는 것은 무모해 보입니다. 그러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바, 이를 뒤따르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방법이야 말로 그들의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고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4절에 그 언약궤와 백성들간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거리가 2,000규빗인데 이것은 약 900미터 정도의 거리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궤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기 위함이며, 또 그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충분히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적용]

기독교의 본질은 생활을 규범짓는 ‘율법’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요단강 도하는 그의 백성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관계성을 나타내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유대 랍비들은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궤와 백성들간에 2,000규빗 즉 900미터 정도의 거리를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허용거리 산출의 표본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본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관계성을 보지 못한 절대적으로 잘못된 해석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역사 속에 나타나시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규범화시켜서 보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본체이신 사랑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늘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관계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3. 항상 성결해야 합니다.


[해석]

본문 5절에 요단강 도하를 앞두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결’의식을 명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성결의 구체적인 행위로 의복을 빤다든가(참조, 출19:10,출19:14), 옷을 갈아 입는다든가(참조, 창35:2), 또는 여인을 멀리하는 것(참조, 출35:2)등과 같은 외부적 성결 행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역사적인 요단강 도하가 바로 내일 앞으로 다가 왔기에, 실제로 그와 같은 외부적 성결 행위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결 명령은 심령의 성결, 곧 영적 성결의 자세를 삼가 가다듬으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성결을 요구하신 것은 언약궤와 관련이 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서는 백성들의 성결이 반드시 선행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성결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요단강 도하의 기적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영육간에 깨끗할 때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시지만, 불결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 전체게 흐르는 큰 진리이기 때문입니다(참조, 출19:22,삼상16:5). 따라서 요단강 도하라는 큰 사건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성결이 요구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은 어떤 것보다도 우리 자신을 깨끗게 하는 일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너무나도 발달된 물질문명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일에서 서두르기도 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는데 엉뚱하게도 물질이나 권력의 힘에 의지하곤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마음에 성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땐 더욱이 마음의 성결이 중요합니다. 성결의 중요성을 깨달아 늘 하나님과 함께할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일꾼의 자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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