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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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에베소서 2장 4절-7절

제    목 :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세계 제1차 대전 때 벨리에서 어떤 청년이 전쟁터에 나아갔는데 그날부터 어머니는 기도하기 시작하셨다. 전쟁을 끝이 났으나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기다리다 못해 병이 드셨고 위독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조각가를 불러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조각해 달라고 부탁하여 완성된 작품을 대문에 놓고는 그만 세상을 떠나셨다. 이것이 어머니께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하물며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1-3절에서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의 우리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그 모습은 전혀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와 허물로 이미 '죽은' 존재였고 스스로 살아날 가망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곧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되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어버린 우리를 그리스도를 살리실 때 함께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풍성하신 긍휼을 가지셨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이란 주어진 환경을 극복할 힘이 없어 힘에 부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향해 가지는 동정심, 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극히 사악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불우한 사람을 만나면 연민의 정을 느끼며 크고 작은 도움을 베풉니다. 이러한 마음은 때로 원수에 대해서도 일어나며 극악한 범죄자에 대해서도 일어납니다. 모든 인간에게 이러한 마음이 있기에 비록 타락한 세상이지만 자체 정화 작용이 일어나며 각박한 세상을 순화시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긍휼한 마음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한 자비한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인간의 극단적인 이기심과 교만한 마음은 이러한 긍휼함에도 숨어 있어서 자기의 유익에 크게 손상이 간다든지 자존심이나 우월 의식이 침해를 당하게 되면 단호히 긍휼한 마음을 내버립니다. 긍휼한 마음은 마음의 여유의 폭과 비례하며, 재정적인 능력 등에 크게 좌우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이러한 인간의 자비와 크게 다릅니다.


  하나님은 긍휼에 풍성하십니다. 그의 품은 한이 없이 넓어서 세리도, 창녀도, 살인강도도 용납하시며 일흔 번씩 일곱 번을 범죄한 자도 사유하십니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지니라, 마 18:22). 예수께서는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도 용서하셨습니다. 이러한 무한한 그리스도의 자비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자도 없을 것입니다. 바울조차도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자로 쓰임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2. 사랑에 기인한 동기를 가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인간의 긍휼한 마음의 동기에는 순수한 일면과 함께 매우 불순하고 온당치 못한 면도 있습니다. 곧 그것은 불우한 이웃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느끼는 우월 의식입니다. 눈앞에 있는 불우한 사람보다 자신이 낫다는 우월 의식이 여유를 가져다주고 여유 있는 마음이 동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긍휼한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무의식 층에 숨어 있는 우월 의식의 표출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일반적으로 지대한 불이익을 초래할 때는 긍휼한 마음을 거둬들인다는 사실은 그것이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서 표출된 것이기보다는 우월 의식에서 표출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의 동기는 인간의 그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인간을 고귀한 인격으로 보고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긍휼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인간들을 사랑하셨고, 인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까지 참고 기다리십니다.


   3. 허물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긍휼이 연민의 정으로 끝날 때 그것은 값싼 동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걸인에게 동전 한 닢을 적선했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긍휼을 베풀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동전 한 닢'이 걸인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삶에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도움은 긍휼이 될 수 없습니다. 삶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그 사람이 온전한 한 인격체로서 당당히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참으로 긍휼을 베풀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긍휼은 이러한 종류의 긍휼입니다. 그의 긍휼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새롭게 태어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은 자들은 과거의 죄와 허물을 벗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납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 삭개오, 바울 등은 예수를 통해 변화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남으로 인생의 질적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죄의 사유가 있었고, 예수께서 생을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존재했습니다. 완전한 긍휼이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살린 것입니다. 인간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긍휼의 차이는 이처럼 결과에서도 명백합니다. 인간의 긍휼은 삶에 있어서 미미한 변화를 가져오지만 그리스도의 긍휼은 전폭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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