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반응형

헌신에 관한 예화 모음



무릎 헌신

 

중국의 구이저우성 지역에 양푸소 학교라는 곳이 있습니다. 지역에서도 좀 외딴 곳이라 학교라고는 이곳 한 곳 뿐이고 교사도 한 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명밖에 없는 교사인 루융캉 씨가 희귀한 병에 걸려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무릎으로만 생활해야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시간 서서 수업을 하는 교사일은 당연히 무리였기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양푸소 학교에 루융캉 씨 대신 부임하려는 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교사가 없다면 학교를 폐교시킬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지역의 학부모들도 오히려 잘 되었다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루융캉 씨는 이대로라면 교육받지 못한 아이들의 미래가 암울해질 것이라며 자신이 계속해서 교사직을 맡을 테니 폐교를 취소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온 동네를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학부모들을 만나 제발 학교에 보내달라고 사정을 하며 설득을 했습니다.

루융캉 씨의 노력을 본 학부모들은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30년이 지난 지금 양푸소 학교는 취학률도 매우 놓고 학업성취도도 뛰어난 현대식 건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지역에 하나 뿐인 학교와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져준 고마운 교사를 걷게 해주기 위해 꾸준히 모금을 했고 이들의 노력 덕에 루융캉 씨는 14차례의 수술을 받으며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일어나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사 한 명의 눈물겨운 노력이 한 지역의 교육을 지키고 아이들의 교육을 지켰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내어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헌신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헌신하십시오.


주님! 희생이 없다면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소서!

비전과 사랑을 위해 헌신할 각오를 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원주에서 차로 두어 시간 벗어난 시골에서 첫 목회를 할 때였다. 볼일이 있어 택시를 타고 원주 시장에 갔다. 시장을 둘러보던 중 한구석에서 물건값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사람들이 있어 시선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우리 교회에 다니는 원귀숙 집사님이 가게 주인과 나물값을 두고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산에 가서 뜯은 나물을 상인에게 넘기려고 하는데 서로 가격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200원을 더 달라고 조르는 집사님과 못 주겠다고 우기는 상인이 서로 밀릴 태세가 아니었다.


집사님이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주인과 실랑이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 내 돈을 주면서 끝내려고 하는데 마음속에서 강한 음성이 들렸다. “이 나물은 주일 내내 산을 돌아다니며 고생해서 뜯은 것이다. 또 버스값을 아끼려고 시내까지 걸어와 주인과 어렵게 흥정을 하며 팔아 돈을 마련했다. 이처럼 피 같은 돈을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렸는데 이 헌금으로 쉽게 택시를 타고 다니는 목회자가 그까짓 200원 가지고 싸우지 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돌아오면서 다시는 성도들의 손으로 드린 피 섞인 헌신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김상현 목사(인천 부광교회) <국민일보/겨자씨>



헌신(獻身)

 

사후 각막기증을 서약했다. 시신을 다 기증하고 싶었지만 분명 남편이 반대할 것 같았다. 그래도 각막기증은 그리 반대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예측은 빗나갔다.

“아니, 상의도 없이 각막기증을 했어요?”

“그런 것을 상의하고 해요. 오늘 목사님 말씀 듣지 않았어요. 죽으면 다 썩어질 육신인데 나 죽은 후 한 명이라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살면 얼마나 좋아요.”

“예수님 말씀하였어요.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요.”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아요. 어떻게 모든 선을 남모르게 할 수 있어요. 당신이 아무리 남모르게 선행을 한다고 해도 다 알려져요.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어요.”

남편은 어려운 사람을 보고는 못 견디는 성품이었다. 영화 <쉰들러리스트>를 보고 돌아 온 날 세상 사람을 더 돕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눈물 흘리던 남편이었다. 몇 차례 부도를 맞았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당신 장기기증본부에 매달 50만원씩 기증하고 있는 거 알고 있어요.”

“뭐라고요. 당신이 어떻게...”

남편은 시치미를 뗐다. 어린 시절 남편은 어렵게 공부를 하였다. 교육비가 없어 교육대학에 들어갔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 진학반과 비진학반으로 나누었다. 비진학반 아이들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도시로 나갔다. 남편과 나는 당시 시골 교회에서 봉사했다. 나는 반주를 하고 남편은 지휘를 하였다. 남편은 남 몰래 매년 가난하여 진학하지 못하는 교회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중학교에 보내었다. 목사님이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같은 학교에 근무하면서 남편과 결혼하였다. 결혼하여 2남 1녀의 가장이 되니 남편은 그 일을 할 수 없어 괴로워했다.


결국 남편은 교사를 사임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농장을 하였다. 나는 반대했다.

“여보, 꿈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다 길을 만들어 주어요. 나 혼자 잘 살자고 하는 것 아니잖아. 나 돈 많이 벌어 배우지 못한 아이들 가르치고 싶어.”

사업은 실패했다. 남편은 좌절하지 않고 서울에 올라가 반도체 사업에 뛰어 들었다. 두 차례 실패하여 가재도구에 차압 딱지가 붙었다. 그래도 남편은 꿈을 접지 않았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해. 하나님 반드시 이 일을 이루게 해 주실 거야."

남편은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남편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그 어려움 속에서 아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잘 자라주었다. 큰 아들이 의대 교수가 되었고, 작은 아들은 내과 전문의가 되었다. 딸은 법대를 나와 변호사가 되어 목사인 남편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사업은 번창하였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남편은 사업의 목적이 분명했다. 그 사업을 통해 어려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장학재단을 만들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항상 남편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자는 주의였다. 언론에 한 번도 보도되지 않았다. 인터뷰를 요청하면 매번 거절하였다. 아내인 나에게도 누구를 어떻게 돕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선하게 살던 남편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의식을 잃었다. 뇌사판정이 내려졌다. 장기 기증본부 직원이 찾아 왔다.

“회장님께서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후 각막기증 서약을 했습니다.”

내가 각막기증을 했을 때 역정을 내셨던 분이신데 이미 나보다 먼저 장기기증을 해 놓으신 것이다. 의사인 큰 아들이 말했다.

“ 어머니, 0.1%의 파동은 소생 가능성이 아니라 심장의 자동박동에 의한 진동입니다. 아버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버지는 늘 저에게 손해보고 불편하더라도 자신보다 더 절실한 사람을 돕는 의사가 되라고 했습니다. 사회와 교회에 봉사하며 은혜를 나누라고 했습니다. 지금 아버지의 뜻은 장기기증을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딸은 반대했다.

“오빠, 0.1%의 가능성만 있어도 산소호흡기를 떼어내서는 안 돼.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리셨는데, 마지막까지 포기하면 안돼. 작은 오빠도 의사잖아 말해 봐!”

“네 심정은 이해한다만 의학적으론 형님 말이 맞다. 지금 시기를 놓치면 아버지 뜻을 이루어드리지 못해. 뇌사해도 시간이 경과되면 폐와 심장 기증은 불가능하고 다른 장기도 손상되면 기증할 수 없게 돼.”

의사인 아들들은 남의 일 이야기 하듯 차분하게 말했다. “야, 오빠들 생각도 그렇고, 나도 아버지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오늘 온 식구가 함께 기도하자. 이런 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거 알고 있잖아. 아버지가 어려울 때마다 늘 그랬잖아. 우리 기도하고 결정하자.”

딸의 계속적인 반대로 산소호흡기를 떼지 못했다. 그런데 딸의 태도가 변했다.

“어머니, 어제 밤 아버지가 꿈에 나타났어요.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너 뭐하고 있느냐! 육신의 장막에 미련 두지 말라. 나는 내 몸을 새 생명에게 나눠주고 떠나겠다.’라고 하시며 환하게 웃었어요.”

가족은 모두 동의했고 간, 신장, 각막, 췌장, 피부 등에 대한 적출 수술이 이루어졌다. 남편은 다섯 환자의 생명을 살리고 여러 화상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세상을 떠났다.


천국환송예배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다. 남편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삶을 살았는데 왜 이렇게 조문객이 많은 지 알 수 없었다. 이 이사가 찾아왔다.

“사모님, 제가 장학금을 담당했습니다. 제가 연락을 했습니다. 회장님을 통해 공부한 학생 중 박사가 된 사람만 해도 백 명이 넘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가 회장님께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도리인 것 같아 알렸습니다. 회장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헌신을 알려 주신 분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콩트집 하늘 바누기



헌신의 힘

 

얼마 전 조선일보에 「"교회 100개 짓는 그 날까지" 꿈 이뤄가는 '꿈같은 인생'」 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주인공은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대의그룹 채의숭(68) 회장었습니다.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생 시절 고향에서 교회 재건축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보령에 하나밖에 없던 우리 교회를 다시 짓는 데 당시엔 교인들이 몇 년씩 걸려 돌 하나, 벽돌 한 장씩 모아서 지었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신앙생활을 하던 저로서는 어린 마음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자 보람 있는 일이 교회 짓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교회 100개 건축'의 꿈을 꾸게 되었답니다. 그 꿈과 더불어 두 가지 꿈을 더 목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박사가 돼 대학교수가 되는 것과 큰 회사 사장되는 것'이었답니다. 가난한 농촌 가정의 6남매 중 장남으로서 쉽지 않은 목표였지만 1984년 경제학박사가 되고 그 해 대우아메리카의 사장에 오르고 2001년엔 겸임교수가 됨으로써 첫 번째, 두 번째 꿈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꿈인 '교회 100개 건축' 실현은 1990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985년 창업한 후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스리랑카에 교회 짓기를 주도했답니다. 무려 5번이나 현지 주민들이 철거하는 반대 속에 1992년 완공된 교회가 모태가 돼 지금은 현지에 15개 교회로 확산되었답니다. 화양감리교회 장로인 채 장로는 "그 후 17년 동안 설과 추석연휴를 국내에서 보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교회건물이 필요한 해외 현지를 답사하거나 완공된 교회의 봉헌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비교적 장기간 시간을 낼 수 있는 연휴를 반납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국내외에 45개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때로는 수해와 화재로 공장이 폐허가 되기도 했고, 납품하던 대우그룹의 부도로 휘청할 때도 있었고 1997년엔 뇌출혈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사업이 완전히 망할 위기에서도 적금을 깨 추수감사절 헌금으로 바치며" "매번 위기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교회건축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사연을 모아 '주께 하듯 하라'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모든 좋은 일에는 반드시 어느 누군가 헌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거름이 있기에 아름다운 꽃이 필수 있고 큰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교회나 기독교 병원, 기독교 기관, 학교 등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볼 땐 보이지 않지만

속에 들어가보면 누군가의 헌신에 의해 이루어진 산물입니다.


전북 지역에서 기독교적 정신으로 사람들을 치유해 주는 전주 예수병원은 잉골드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남장로교 여선교사인 마티 잉골드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편안한 생활 버리고 1897년 7월 고향을 떠나 조선 땅에 와서 예수님의 심장으로 질병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1898년 11월 3일 진료소를 개원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일을 하고 있는 YMCA는 현흥택 장군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언더우드는 건물을 세우기 위해 땅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언더우드는 미국 기독교 신자들이 YMCA를 위해서 3만달러를 기부하였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대한의 젊은이를 위하여 그 땅을 팔라고 요청하였답니다. 이야기를 들은 현 장군은 미국 사람이 우리 젊은이를 위하여 그런 일을 하였다면 자신도 최소한의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땅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하였는데 당시 시가로 미화 2,000달러였다고 합니다. 그때 조선 사람의 하루 임금이 15센트에서 20센트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거금이었답니다.


한국에서 세계적인 병원이 된 세브란스는 한 신실한 신앙인이었던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지배인이던 헌신적인 기독교 사업가 세브란스의 1만달러의 헌금으로 세워졌습니다.


57센트의 기적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 미국 필라델피아 시의 외진 곳에 조그만 한 교회가 세워져 어른 중심으로 주일 예배가 드려졌답니다. 아이들은 좁은 예배실로 인해 번호표를 주어 "자리가 비면 순서대로 부르겠다"고 약속하고 집으로 돌려 보냈답니다. 교회의 연락을 손꼽아 기다리던 한 소녀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질병으로 죽고 말았답니다. 죽은 아이의 베개 밑에는 목사님께 쓴 편지 한 장과 57센트의 돈이 있었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에 가고 싶었으나 예배실이 너무 좁아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아이입니다. 제가 먹고 싶은 것 사 먹지 않고 모은 돈을 드리니 이 돈으로 큰 예배당을 지어 모든 어린이들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목사님은 이 편지를 장례식에 모인 모든 교인 앞에서 눈물로 읽었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아이의 무덤 앞에서 꼭꼭 감춰둔 그들의 돈주머니를 열기 시작했답니다. 그 후 큰 교회와 멋진 교육관을 지어 입당예배를 드렸답니다. 57센트의 기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답니다. 가난으로 치료받지 못해 죽은 소녀를 위한 '선한 사마리아 병원'이 세워져, 그 병원은 주위 극빈자들에게 무료로 치료를 해줬답니다. 죽음 앞에서 친구들을 기억하며 쓴 한 장의 진실된 편지와 57센트의 헌금은 큰 기적의 역사를 이뤄 저 유명한 템플 교회의 초석이 되었으며 템플 대학교 설립의 원동력이 되었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섬기는 언어/김필곤 목사



아프리카 선교는 헌신이 아닙니다

 

1813년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리빙스턴은 10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17세 때 강력한 소명을 받고 의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중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고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모팻을 만난 후 그의 딸과 결혼하여 1840년 아프리카로 떠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30여 년이 지났습니다.

1871년 그의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는 소식을 접한 영국 왕실과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은퇴를 종용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은둔해 버렸고, 이에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탐험가 스탠리를 동원하여 그를 찾게 했습니다.

리빙스턴을 만난 스탠리는 은퇴 후 좋은 조건에서 살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는 영국 왕실의 전언을 전하며 “30년 동안 헌신하셨으니 이제 그만 헌신의 삶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갑시다”라고 권하자, 리빙스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는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보잘 것 없는 보답입니다. 차라리 이것은 특권이며 영광스러운 내일을 기대하는 희망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닙니다.”

리빙스턴의 자신의 헌신을 주님에게 ‘해 주는’ 것이 아닌 ‘드리는’ 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헌신을, 주님께 좋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마음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주님, 받기 위함이 아닌 받은 것에 감사하는 신앙을 주소서.

인생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