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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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때문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한복음 7장 37∼38절

 

예수님 때문에 용서받아 자녀된 우리

이웃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 사랑하고

새로운 자화상과 희망 품고 살아가야

 

인생의 절박한 문제에 부딪히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되어 아름답게 변화되는 이야기가 바로 복음입니다.


 제가 한참 부흥회 다닐 때 목포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헌금위원 집사님이 헌금통을 들고 오는데 보니 열손가락이 다 없어 놀랐습니다. 사고로 그렇게 되었나 싶었는데, 나중에 예배를 마치고 그 집사님이 목사님 사무실에 와 사연을 이야기 하는데 이 분은 도박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도박을 좋아하고 온 집안을 못살게 하니 형제들이 모여서 그를 묶고 다시 도박 못하게 작두에 그 손을 밀어 넣어 잘라버렸답니다. 손가락 열 개를 다 잘라버리면 도박을 안하겠지 했는데 아물기도 전에 붕대를 감은 채 또 도박하러 갔더랍니다. 하루는 자기 부인이 돈을 빌려오지 않는다고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자 부인이 산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부인을 끝까지 쫓아 바위 낭떠러지로 데리고 가서 돈을 빌려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답니다. 그러자 부인이 “나는 죽어도 좋아 그러나 당신이 문제야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늘나라에 가지만 당신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기에 슬퍼. 지옥이 그렇게 쉽다고 하지 마라. 열 손가락을 작두에 잘릴 때 기분 좋았느냐? 지옥은 천 배, 만 배 더하는 고통이 계속하는 곳이야” 그리고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죽겠어”라고 하며, “하나님 아버지여, 이 사람에게 하나님 뜻이 있어 부부의 인연을 맺어서 같이 살아왔는데 이렇게 완악하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죄를 짓고 살다가 죽으면 지옥가지 않겠습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오니 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내가 죽더라도 이 영혼을 기억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더랍니다. 그 기도를 들은 이 분이 마음이 울컥해 통곡을 하며 울었더랍니다. 그리고 나서 “내 가슴에 감동이 되고 내 슬픔이 다가왔다. 내가 졌다. 나도 예수 믿겠다”라고 하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집사가 되고,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분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무서운 죄인을 변화시키셔서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내가 여러 번 참고 용서했지만, 더 이상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 번만 용서하면 된다고 말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일곱 번 용서한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칭찬해 주실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흔들면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 줘야 한다”라고 답해주셨습니다. 계산하면 어떻게 됩니까? ‘70×7’이니까, 490번을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끝없이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용서와 화해의 사람을 꼽는다면 요셉일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17살에 종으로 팔려서 애굽에 내려가서 험난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고달픈 노예생활을 오래 해야 했고, 또 억울한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기근을 피해 식량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온 형들을 만났을 때, 기꺼이 그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죽을 죄를 지었으니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하는 형들의 고백에 요셉도 울고, 형제들도 울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형들과 형들의 자식들의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먼저 애굽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며 형제들을 위로했습니다. 주를 믿는 사람의 생애속에 나타나는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요셉은 알고 믿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 생애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면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을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1.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화목케 하셔서 다시 하나님 품에 안기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담당해서 십자가에 몸 찢기고 피 흘려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피가 부르짖는 곳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가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1∼7절에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계산을 할 수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2. 예수님 때문에 이웃과 화해할 수 있게 됨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이웃과도 화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해 주셨는데 왜 우리 남편과 아내와 부모와 형제와 이웃과 화해하지 못하겠습니까? 에베소서 4장 32절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힘들지만 주님이 하셨듯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우리들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 속에 들어와서 사람과 화해만 할 뿐 아니라 땅과 하늘에 있는 만물과도 화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독일의 신학자인 몰트만 박사가 튀빙겐대학교 종교학 교수로 있을 때 저를 상당히 비평했습니다. 제가 독일을 중심으로 해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서구 일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다니자 그는 “저 미개한 한국 청년이 와서 뭐를 한다고 돌아다니느냐? 내가 다시 입을 못 열게 만들겠다”하며 나에게 도전장을 보내 왔습니다. “당신의 신학에 대해서 나는 별로 좋게 생각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한국에 나갈테니 한국의 유명한 신문사를 동원해서 참석을 시키고 토론을 하자. 당신이 그날 이후로 입을 열어서 우리 유럽에 와서 설교 못하게 할테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나는 이제는 끝났구나. 세계적인 신학자하고 내가 상대해서 어떻게 이기겠느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원래 공부도 많이 못한 촌놈인데 공부를 많이 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못났으니 못난 그대로 이 사람과 대화하고, 토론을 하게 하옵소서’ 그분이 한국에 와서 63빌딩에서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해서 신문기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저와 토론을 시작했는데 왜 그렇게 입이 떨리는지 보고 있던 신문기자들이 “조 목사님 다투지 말고 어지간하면 손들어 버리십시오. 이 사람 너무나 유명한 사람인데 우리 한국의 저명한 신학자라도 이길 수 없습니다”하며 저를 동정했습니다. 몰트만 교수가 저에게 “조용기 목사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지요”라고 답했더니 “하나님의 아들인 것 봤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써 모든 사람을 용서해 준다고 하는데 무엇으로 그렇게 증거하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들도 구원하고, 땅에 있는 개미새끼 한 마리까지도 구원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는데 세상은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세상이니 사람만의 세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온 인생들을 다 구원할 뿐 아니라 천하에 있는 벌레 한 마리도 다 사랑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뭐라고 말해도 모든 인생들이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고 벌레 한 마리도 무조건 죽이는 것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해도 당신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랑하고 구원해 주십니다”라고 답하자 몰트만 교수 얼굴이 갑자기 달라지더니 “더 말해보세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 많이 말할 것도 없고 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그대로 우리가 우리 동족만 사랑하지 말고 당신과 같은 독일 사람도 사랑하고 한국 사람도 사랑하고 세계 모든 민족을 다 사랑하고, 그 다음에 동물들도 사랑하고 나무들도 사랑하고 온 세계를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함께 합시다. 사랑보다 더 위대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오늘 나를 미워해도 사랑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몰트만 교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껴안고서 “토론할 것 없다. 당신이 맞았다. 한국에 이렇게 훌륭한 신학자가 있는지 몰랐다. 우리 맛있게 점심이나 먹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독일로 돌아가서 쓰는 책마다 ‘아시아에 훌륭한 신학자가 있는데 그 이름이 조용기다. 왜냐하면 그처럼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을 내가 보통 사람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하면서 해마다 한국에 오면 저를 찾아와 안부라도 묻고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책에 하도 제 이름을 적어서 유럽과 미국의 신학자들에게 제가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얻은 화해는 지구와 자연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만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산천초목도 다 사랑하게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자화상을 갖게 됨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자화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죄와 허물의 종인 자화상, 고통과 괴로운 병을 가지고 있는 자화상, 가난과 절망의 저주의 포로가 된 자화상, 죽음과 무(無)의 공포로 떨고 있는 자화상, 지옥의 공포에서 괴로워하는 자화상과 같은 이 모든 자화상을 예수의 사랑 속에서 쫓아내 버리고, 하나님 사랑의 아들 나라의 백성이 된 새로운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인 되었던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대하면 율법에서 의롭다함을 입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십계명 앞에 서더라도 십계명을 이겨나갈 사람 누가 있습니까?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마라.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이런 십계명 앞에 우리를 세워 놓으면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십계명 이외에도 하지 말라는 계명이 성경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율법으로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우리가 당당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고, 다시 산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장사지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했으므로 우리는 의롭다함을 입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화상속에 죄인의 자화상은 사라지고 의로운 자화상으로 빛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만 사함 받은 것이 아니라 허물도 사함을 받아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허물진 인생을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요, 허물은 이 세상에서 나쁜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보면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허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16절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힘으로 거룩하게 될 도리가 없습니다. 거룩함이 무엇인지 의미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모든 허물을 다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그 허물을 사하시고 거룩한 모습을 옷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심신이 치료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요사이 마음도 병들고, 육체도 병들고, 생활도 병들어 이 세상이 병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 병을 다 이길 수 있습니까? 이사야 53장 5절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사는 분이지 자신을 위해서 사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되어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분위기와 똑같은 환경 속에서 우리의 잘못을 대신 청산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청산 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죄가 없고, 죄로 인한 질병도 없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축복과 형통도 우리 주 예수님 안에서 얻게 된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늘 우리가 부르는 것과 같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일반 사람들도 종교는 영혼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걸음 더 나가서 범사에 잘되고,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주님께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냥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항상 모든 것에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 3절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고난을 받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난이 다가 올찌라도 예수님을 의지하면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결국은 그 모든 고난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17살에 애굽에 팔려갔기 때문에 결국은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간구한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범사에 주님을 모시면 잘되면 좋고, 안되면 좋게 될 것이니 좋고,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과 형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알고 항상 감사하며 살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영생 천국시민이 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헌법에 의해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자유권, 평등권, 참정권, 청구권, 사회권을 보장 받듯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누구든지 똑같이 다섯 가지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중복음 즉, 중생의 복음, 성령충만의 복음, 신유의 복음, 축복의 복음, 재림의 복음입니다. 이 오중복음을 누릴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밑에서 오중복음을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좀 더 배짱 있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님 때문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됨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희망찬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생각을 통하여, 꿈을 통하여, 믿음을 통하여, 말을 통하여 새로운 내일을 앙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4∼6절에 보면 “또 야훼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학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있으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좋은 일은 좋아서 좋고, 나쁜 일은 좋아지게 될 것이니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좋으신 하나님을 모시고 이 세상에서 살다가 천국에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같이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주신 대자연과 화해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또한 새로운 자화상을 가지고 하나님 자녀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주의 자녀들이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주신 은혜 감사하며 승리의 삶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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