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가난한 자의 축복


1976년은 중국 전체가 먹을 것이 없어서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때입니다. 중국 당산시에는 인구 70만명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 지진이 일어나서 24만2천명이 죽었습니다. 가히 저주라할 만한 대 재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었던 일본대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그 참화 속에서 훔치는 사람도 없었고 남을 해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위험을 무릎쓰고 위기에 처한 남의 생명과 재물을 구하러 서로 불속에 뛰어들었으며 자신이 먹기에도 부족한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더라는 것입니다. 강제된 행위가 아니라 자유의사에 의한 행위라는데서 외국인 목격자들은 경악을 했습니다.

 

같은 해 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미국 뉴욕시에서 12시간의 정전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신문, 방송에서는 그 상태를 '연옥'이라고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전등이 꺼져서 자신의 얼굴이 타인에 의해서 식별되지 않게 되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들은 남의 재산을 파괴하고 약탈하고 방화하고 강간을하고 서로 찌르고 죽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최첨단 시스템이나 제도를 자랑합니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봅니다. 어느 편이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정말 어느 쪽이 무시당해야 할 사람들입니까?

 

인생에서 가난은 고통스럽고 한이 맺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헐벗고 굶주리는 것이 고통스럽고, 또 가진 자들에게 무시당할 때는 한이 맺힙니다. 그러나 가난을 원망하지 않고 천국을 소망한다면, 오히려 복이 됩니다.

신앙은 부요한 것보다 가난한 것이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난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천국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부요한 자들과는 다릅니다. 부요한 자들은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세상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 가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가난한 자의 복음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라 하는 거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는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배설하고 즐기는데, 나사로는 병이 들어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얻어먹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다가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는데, 거지는 천국에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고,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사로가 세상에서는 거지로 살았지만 내세에 천국을 간 것입니다. 이 비유는 가난한 자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거지로 산다고 내세에까지 거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에서 거지로 살았기 때문에 천국에 갔는지 모릅니다.

본문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자에 대해서 호감을 갖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고 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하다고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설자리가 없는데, 하나님이 사랑을 베푸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세상에는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심을 말합니다. 5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 먹고살기가 힘든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삶의 여유가 없기에 인생이 척박하고, 또 가진 자들에게 무시당하기가 일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야고보는 두 가지 축복을 말하는데, 하나는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다른 하나는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십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믿음에는 부요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세상적으로 소망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믿음으로 소망을 가지고 살수밖에 없습니다. 믿음 마저 없다면 하루하루 살기가 힘이 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6.25 전쟁을 마쳤을 때, 당시 외국의 언론들은 이제 한국은 소망이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으면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는 고통받는 국민들에게 예수 믿고 천국 가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소망이 없는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은 것입니다. 그 복음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가난과 아픔을 극복하고 일어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어려우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시며, 큰 관심과 애정을 가지셨습니다. 누가복음 6:20절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하셨습니다.

또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최초의 설교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눅 4:18)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할 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대개의 경우,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많이 받아 드렸습니다. 그만큼 복음이 절실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가난한 자라고 다 복음을 받아 드리고, 신앙이 훌륭하고, 하나님의 택한 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 다.

 

여기에 대해서 야고보도 ‘가난한 자’ 앞에 관사를 붙여, 그들이 특정 부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 전부가 아니고, 복음을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믿음이 아무리 귀해도 받아 드려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다고 특혜를 받고 부자라고 배척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공평하지만 가난한 자와 부자를 놓고 볼 때,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가 더 복음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부요해지는 복을 받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복음 보다 돈에 대한 애착을 갖고, 세상을 사랑하다가 허망하게 인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자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농사가 잘 되어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리라’.

 

물질이 풍성하고 모든 것이 다 예비 되었다고 생각하니 든든했던 것입니다. 또 그는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생명을 잃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1)고 했습니다. 물질은 부요하지만 믿음이 부요하지 못하면, 이렇게 허망하게 인생을 마치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부요는 믿음의 부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물질이 없어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소망하고 산다면, 그것이 복입니다. 우리는 물질보다 믿음의 부요를 더 사모하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좋고 귀한 것이 있어도 그것이 헛된 것임을 알고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늘 깨어서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고, 교회를 섬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택하셔서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현실적으로는 어렵고 힘들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가난하다고 영원히 가난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부요함으로 최고의 가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상속자입니다. 세상 것을 상속받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부자들이 돈 좀 있다고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장차 엄청난 축복이 예비되어 있는데 돈이 없다고 어떻게 무시합니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에 부요함이 있으면, 그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1: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믿음에 부요한 자에게 면류관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가난해도 믿음에 부요만 있으면 영광을 얻고,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결코 물질적인 가난을 한탄하고 부자들을 부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자가 못 누리는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영원한 나라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교만한지, 가난한 자들의 축복을 모르고 물질이 없다는 이유로 그들을 무시합니다.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 없는 자들은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고보서의 수신자들 가운데 그런 자들이 있었습니다. 6절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여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가난한 자를 괄시한 행동을 지적합니다. 괄시하다라는 말은 ‘모욕을 주다’ 또는 ‘무례하게 대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이것은 2절과 3절에 언급된 행동을 말합니다. 그들은 교회에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 차별을 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좋은 자리에 앉히고, 가난한 자는 무시했던 것입니다.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에서는 어디나 있는 일입니다. 돈이 있으면 존경을 받고 돈이 없으면 무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돈이 없는 것이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유전 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돈이 있으면 죄가 아니고, 돈이 없으면 죄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돈 없는 것도 서러운데, 무시당하고 없는 죄까지 뒤집어쓴다고 하면 억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더 분통이 터지는 것은 교회에까지 와서 이런 차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믿음만 있으면 사랑과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설사 돈이 없어도 믿음으로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중요한 자리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고, 또 앞서서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적인 논리에 놀아나 가난한 자들을 소외시키면 안됩니다.

사람을 차별하면, 아주 악한 행동으로 하나님을 노여웁게 하는 일입니다. 잠언 17:5절에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무시하면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부자들의 악행을 언급하며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여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부자는 당시의 모든 기득권 계층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을 남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채권과 채무의 관계를 맺고 있을 때 가난한 자들을 더욱 무례하게 대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돈이 없어 부자들에게 빚을 고리로 얻어 쓰다 보니 감당하지 못하고 법정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한 것입니다. 얼마나 악한 자들입니까?

그런데 어쩌다 이들이 교회에 오면 교회가 외모로 판단하여 존경을 했습니다. 큰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교회에 돈 있는 자들이 오는 것이 무슨 큰 일입니까? 왜 그들이 돈 있다는 이유로 영광을 받아야 합니까? 그만큼 교회가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멸시하고 차별을 했습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지적하며 이런 악행은 가난한 자들에게는 큰 상처를 주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교회에 와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영광을 누리고 행복을 느끼는데, 부자들이 훼방을 한 것입니다.

7절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부자들은 교회까지 들어 와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한 것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종교적인 박해를 가한 것이나 똑같습니다. 가난하여 세상에서 위로 받지 못하고 교회에 왔는데, 부자들이 교회까지 와서 횡포를 부린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상처가 크겠습니까? 교회를 세상 판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본래 부자는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이 풍요롭기에 그것으로 만족하고 복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마 당시에 부자들도 새로운 기독교를 받아 드리기가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왔어도 호기심이고 대접을 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것은 애당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이런 자들을 높이니,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욕한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부자들은 복음을 받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부자가 복음을 거부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거기서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롭게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와서 괴롭히니까 바울이 그 귀신을 쫓아 버립니다.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알고 분노합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를 고발을 하여 감옥에 갇히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받으면 이익이 없고, 모든 것이 무너지기에 거부하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부자라는 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는 것입니다. 기득권 때문에 그 벽을 허물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어려운 데, 십자가까지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복음을 어떻게 받아 드립니까? 그래서 역사 속에서 복음이 전해지는 현장마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야고보가 부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했다고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러한 자들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좋은 자리를 내주었으니 얼마나 추한 일입니까? 결코 신앙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야고보의 이야기대로 그것이 옳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물질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무시하면 안됩니다.

돈 있다고 존경하고 돈 없다고 무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코 가난하다고 학대하고 무시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가난을 한스럽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더 믿음에 부요자가 되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합니다. 돈이 없는 것은 불편할 뿐이지, 신앙 생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믿음에 부요 임을 알고 날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곧 넘어질 듯 약한 나를 붙드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부족함이 없게 날마다 채워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으며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요하여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이 그러셨듯이 세상의 헛된 욕망을 포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현실이 어렵고 곤란하더라도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을 주소서. 비천과 궁핍한 가운데서도 자족함을 배우게 하시고, 범사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에 힘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2부: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가난해도 비굴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난은 미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태가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가난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인격과 마음과 영혼은 무조건 옹호해야 하지만 가난 자체를 무조건 옹호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가난에는 나태로 인한 가난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피상적으로 가난을 부(富)보다 도덕적, 윤리적 가치가 높은 것처럼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을 추구할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가난이 추구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잠언 14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는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가난한 자는 멀리하고 부자는 가까이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가난하기 때문에 언제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호감을 가지고 대합니다. 왜냐하면 자립하려는 의지가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자립하려는 의지에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립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타인의 마음을 이끌게 됩니다. 반면에 타인 의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떠나게 합니다. 왜냐하면 타인 의존적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비굴함이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향을 이해하며 경제적 약자들은 최선을 다해 가난을 탈피하는 길을 찾고 그 길로 들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우정의 탑과 애정의 탑은 서로가 동등한 처지에서 쌓아질 때라야 가장 견고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잠언 기록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곧 허탄한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 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

하나님을 팽개친 부는 하등의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한 부는 절대적으로 멀리해야 합니다. 반면에 가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상황과 목적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가난을 멀리하려는 모습도 내 인생의 중요한 소명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며칠간 굶으면 빵을 도둑질하려는 불의한 욕구가 생길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흘 굶으면 도둑놈 심보가 생긴다." 때로 가난은 사람을 정상의 길에서 이탈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때로 가난은 양심을 좀 먹고, 진실의 기운을 꺾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생존을 위해 사람을 비굴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가난하면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불의에 타협할 수밖에 없고 독재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습니까?

가난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이유는 가난이 우리의 육신에 배고픔의 고통을 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난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더 큰 이유는 사람을 비굴한 길로 이끌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무 오래 가난한 생활에 찌들게 되면 비굴함이 몸에 배인 비굴한 인격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 아래 떳떳한 자유인의 삶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을 따라 사는 자연인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달리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주어진 가난에 위축되지 말고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비굴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가난할지라도 바르게 살려는 좋은 의미의 오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을 탈피하려는 실제적인 노력을 통해서 땀의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구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는 약자일지라도 영혼의 약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묵상 및 토의:

0 나는 현재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0 내 마음이 가난합니까? 부합니까?

0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행복에 관하여 이야기 해보세요.

0 내 생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1): 가난한 부부 외식


가난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의 실직, 빈 쌀독...

설상가상 아이가 생겨 배는 만삭으로 불러왔습니다. 당장 저녁끼니도 문제였지만 새벽마다 인력시장으로 나가는 남편에게 차려줄 아침거리조차 없는게 서러워 아내는 그만 부엌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버렸습니다.

"흑흑 훌쩍.."

아내가 우는 이유를 모를리 없는 남편은 아내에게 다가가 그 서러운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울지마..."

"당신 갈비 먹고 싶다고 했지? 우리 외식하러 갈까?"

외식할 돈이 있을리 없었지만 아내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남편의 밝은 목소리가 좋아서 그냥 피식 웃고 따라 나섰습니다.

남편이 갈비를 먹자며 아내를 데려간 곳은 백화점 식품매장이었습니다. 식품매장 시식코너에서 인심 후하기로 소문난 아주머니가 부부를 발견했습니다. 빈카트, 만삭의 배...파리한 입술 아주머니는 한눈에 부부의 처지를 눈치챘습니다.

"새댁 이리와서 이것좀 먹어봐요. 임신하면 입맛이 까다로워진다니까..." "여보 먹어봐." "어때?" "음..잘 모르겠어"

다른 시식코너의 직원들도 임신한 아내의 입맛을 돋궈줄 뭔가를 찾으로 나온 부부처럼 보였던지 자꾸만 맛 볼것을 권했습니다. 부부는 이렇게 넓은 매장을 돌며 이것저것 시식용 음식들을 맛봤습니다.

"오늘 외식 어땠어?" "좋았어." 그리고 돌아가는 부부의 장바구니엔 달랑 다섯개들이 라면 묶음이 들어있었습니다. 가진것으로 잣대를 재는것이아닌 진실한 사랑이 넘치는 공간이 있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위인이나 장군도 가정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시작되었고, 그 가정은 또한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출발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하는 소중한 공간

그 공간을 소중히 간직하세요. 힘든 시기일수록 사랑이 더욱 필요합니다.


* 예화(2): 가난해서 얻은 것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다. 그래서 즐기기 전에 먼저 고생하는 것을 배웠다."

이 말은 마키아벨리가 말년에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한 말이다. 마키아벨리의 아버지는 법률고문이었지만 수입이 형편없었던 모양이다. 마키아벨리는 그때 익힌 ‘고생의 힘’으로 말년에 관직을 잃고 옥살이를 할 때 《군주론》이라는 불후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신이 공평하다고 믿는다. 우리가 고난에 빠졌을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그 힘든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비로소 사물 하나 하나가 아름답고 귀하게 보이고, 마음에 힘이 붙는 경험을 하지 않는가.

노르웨이의 작가로서 192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바 있는 함순(Hamsun, Knut)의 소년시대와 청년시대는 행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린 날부터 그는 고난의 생활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채석공등으로 일하다가, 도미하여서는 시카고시의 전차 차장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의 생활은 그에게 많은 체험을 가지게 하여, 드디어 그로 하여금 소설 <굶주림 Sult, 1890>을 쓰게하고, 이것을 발표함으로써 드디어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리게 했다. 그에게 가난이란 과거가 없었던들 그가 노벨상을 탈수 없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들 평론가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토지의 성장> 이라는 작품에 의해 노벨문학상을 탔다. 그러고 볼 때 가난은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닌 것이다. 유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두고, 분투하여 극복하도록 하자.


* 예화(3): 가난해야 좋은 신자인가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물질적인 부를 죄악시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신자는 가난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필요를 뼈저리게 느끼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과연 물질이 죄악일까요? 물질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그 물질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은 가난과 저주가 없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생명을 얻되 넘치도록 얻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아브라함처럼 풍요로운 삶을 살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물질의 풍요를 누리게 되면 세속적으로 변질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사람들은 물질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물질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신앙상태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4. 찬송: (316장) 목마른 자들아


1.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힘쓰고 애씀이 없을지라도 이 샘에 오면 다 마시겠네

2.이 샘에 나는 물 강같이 흘러 온 천하 만국에 다 통하네 빈부나 귀천이 분별이 없이 다 와서 쉬고 또 마시겠네

3.신기한 샘물을 마신자마다 목 다시 갈하지 아니하고 속에서 솟아나 생수가 되어 영원히 솟아 늘 풍성하리

4.이 샘의 이름은 생명의 샘물 저 수정빛 같이 늘 맑도다 어린양 보좌가 근원이 되어 생명수 샘이 늘 그치쟎네


5. 가난에 관한 성경말씀:

0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2:16)

0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후9:9)

0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

0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14:31)

0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느니라(잠29:7)

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2:10)

0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북이 있는 자니라(잠14:21)

0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잠22:9)

0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0 사람의 재물이 그 생명을 속할 수는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잠13:8)

0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시82:3)

0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6)

0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7)

0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고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욥5:16)


6. 금언

0 가난 보다 더 나은 교육은 없다.(콘스휠드)

0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명예라고는 셍각지 말라(탈무드)

0 가난은 불행한 것이 아니다. 가장 불행한 것은 자기 재산 이상의 것을 바라는 그 것이다.(세네카)

0 가난은 죄악이 아니다.(죠지 허버트)

0 가난이 있는 곳에 신들이 존재할 것이다.

0 가난한 자의 생애는 죄악이다.(바빌로니아 율법서)

0 가난(빈곤)은 절제의 어머니이다.

0 가난은 수치가 아니라 쓰라린 것(독일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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