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중략)…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누가복음 9장 28∼36절

 

죄의 결과로 우리에게 온 문제 해결코자

주님 십자가 사랑 가지고 고난의 길 선택해

우리가 성령님과 승리하는 삶 살 수 있어


 시간과 공간 안에 사는 존재는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고,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이별하여 산다는 것도 대단히 고통스러운 것인데 영원히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경계선을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어떠한 종교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종교의 창시자들조차 죽음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주님은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무덤에서 나왔기 때문에 무덤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1. 아담과 하와의 태어남과 죽음


 원래 사람은 죽음과 관계없이 태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모습대로 지으셨을 때 그들은 죽음이 뭔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는 존재로 지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에게 범죄한 결과로 그들은 죽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겠다는 것이고, 선악을 판단한다는 것은 자기 주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선악의 분별을 우리 자신이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 결과로 창세기 3장 17∼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심판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로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 형이 아우를 쳐죽이는 첫 번째 죽음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창세기 4장 8절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고 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신 것에 화가 나서 들에서 동생을 쳐 죽인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 최초의 죽음이요, 최초의 첫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의 유전으로 태어나 죄 없는 사람도, 죽음을 피할 사람도 한사람도 없게 된 것입니다.

 

 2. 죄로 인해 세상에 들어온 죽음


 성경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18장 4절에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고 했는데, 이 죽음이란 것은 영이 없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다는 것은 교제가 끊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졌다,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었으니 영적인 세계와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거듭나야 되겠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고 하신 것입니다. 죽은 영혼이 예수님을 통해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영이 살아나야 하늘나라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이 죽으니 자연적으로 육체도 따라서 죽게 되었고, 인간에게 주신 온 지구상의 모든 것 역시 저주받아 죽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1∼22절은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과의 화목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몸 찢기고 피 흘려 화목제가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계신데 그 아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분노가 사라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휘장이 찢어져 예수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죄의 사함을 받고 그 결과 하나님과 화해함을 받았다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운 보석 같은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10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우리는 죽음의 저 건너편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여 ‘아멘’하며 입술로 고백하면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역 3년 반 동안에 굉장한 갈등 속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루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높은 산위에 올라가서 주님이 기도하시는데 주님 얼굴에 찬란한 영광의 빛이 비치고 몸이 햇빛처럼 희어지더니 천년전에 세상을 떠난 모세와 수백년 전에 떠났던 엘리야가 옛날 모습을 가지고 그 변화산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할 것을 말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 같은 것은 능히 쉽게 지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 잔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사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세 번 다 하나님이 거부하시니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든지 그 십자가를 거부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살고 우리들은 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갈등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이 변화산에서의 사건이 어찌 보면 마지막 선택의 기회였을 것입니다. 변화산상에서 시간과 공간이 정지했고, 모세와 엘리야가 옛날 그 모습으로 나타나서 예수님께 보고를 합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기고 피 흘려 죽으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포기하고 싶거든 지금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에는 포기할 기회조차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대화하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들이 너무 겁을 먹고 들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까지는 못 알아들었지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실 것을 이야기 했다는 사실을 통해 제가 그 본문을 읽을 때 변화산상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회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4. 예수님의 산 아래의 삶과 산 위의 삶


 예수님께서는 그냥 그 자리에서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 위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계시고 하늘나라가 임하여 있지만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이 산 아래서 죄와 병과 마귀, 죽음과 고통속에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28∼31절에는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고통당하고 죽을 것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권세도 있고, 포기할 권세도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그 고통을 받아들여서 그 결과 인류를 구원할 것을 결정 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상에서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결정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 때문에 마귀의 종이 되어 엄청나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잔을 마시지 아니하고 엘리야와 모세를 데리고 눈 깜박할 사이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인류에 대한 사랑이 진정 컸기에 주님은 우리를 버리고 떠나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산 위에 있을 동안에 산 아래에서는 여전히 마귀들이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습니다.(눅 9:37∼43) 만약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하고 그들 손을 잡고 아버지께로 갔었으면 산 아래 귀신 들린 어린 아이같이 고통 당하는 수많은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인류에게 희망을 주고 자유와 해방을 주기 위해서 산 아래를 택하고, 산 위를 택하지 않았습니다. 산 위를 택해서 그대로 갔다면 오늘 우리에게 부활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산 위에서 천국으로 올라가시지 아니하시고, 영혼이 잘못되고 범사가 허덕이고 병들어서 죽어가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세계로 내려오셔서 이들을 위해서 죽음 당할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5. 산 위로 불러올리신 하나님


 그래서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건데 원하시면 언제든 하늘나라로 건너 올 수 있도록 허락하는 메시지를 모세와 엘리야가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죽음에 쌓여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영혼이 거듭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단지 그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우리가 유한한 육체속에 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육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치명적인 타격을 갖다 주지 못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이 주어졌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사망아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괴롭히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선포하며 사망을 제쳐 놓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원하시면 언제든지 하늘나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사랑하사 끝까지 산 아래서 고통당하는 이들과 같이 생활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며, 고쳐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요일 4:9∼1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만들기를 원하시고, 행복을 주어 이 고난 많은 세상에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것인데, 4∼6절을 보면 그 짧은 구절에 ‘우리’라는 말이 무려 아홉 번이나 사용해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 당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냥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신 2000년전부터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림받은 자도 아니고 혼자 고난 받은 자도 아닌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우리와 인생을 함께 살기 위해서 성령으로 와 계십니다. 그 예수님은 법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이 분명한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서서 마귀를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마귀에게 대적하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권을 주장하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진리를 알고도 그 속에 살지 않습니다. 진리를 포기하고, 고통 중에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지불한 구원은 합법적인 것입니다. 죄 사함 받는 것도 합법적이고, 병 고침 받는 것도 합법적이고, 저주에서 해방 받는 것도 합법적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바라보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끝에는 십자가의 무서운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산 위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사 산 아래 삶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산 아래 내려가지 말고, 이곳에서 살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여기 초막 셋을 지어서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그곳에서 살자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 위에 있을 것을 거부했습니다. 산 위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산 아래 인생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산 아래 인생을 버리고 산 위에서 살겠으며 천국에 살겠느냐. 산 아래로 내려가자!” 산 아래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손잡고, 비록 피를 흘리면서 서로 고슴도치처럼 찔리고 찔러도 함께 같이 살자 하시며 산 아래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산 아래 동네에서 고통당하는 우리와 짐을 같이 짊어지기 위해서 지금 이 가운데 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을 들여다보니 아담의 원죄로부터 시작해 모든 인류의 죄가 감당해야 할 그 죄가 그 잔에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추악하고 더럽고 상상을 초월한 죄악이 가득 담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그 잔을 마시라고 하니 기가 막히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 잔을 마시지 않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음에도 아버지 하나님의 대답이 없자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하며, 결국 그 잔을 마시고 일어나 골고다로 향해 죽음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우리 죄악의 잔을 마신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의 생명과 함께 영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15장 20∼22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간을 최고 걸작품으로 만드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죄의 종이 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아들, 성령께서 불퇴전의 헌신으로써 생명을 바쳐 죄인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님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고통을 함께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 박사는 ‘하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때 오히려 예수님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부림칠 때 아버지는 사랑으로 아들 위에 포개져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부림 쳤을 것입니다. 아버지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셨고, 예수님도 고통 당하셨고, 성령님도 함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떠나지도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만들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포이에오’인데, ‘시’를 뜻하는 영어 단어 포엠(poem)이 이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아름다운 한편의 시를 짓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함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신 사랑을 기억하며, 늘 우리 문제를 해결하시는 성령님과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좋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변화산 상에서 앞으로 다가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보시면서도 기꺼이 산 아래 고통당하는 우리들을 향해 그 발걸음을 옮기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며, 주님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우리를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주님과 늘 동행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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