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창4:1-7, 롬 12:1-2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목회지로 섬겼던 곳은 경기도의 한 농촌교회였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40년쯤 되었으며 마을이 그리 크지 않아서 작은 규모로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던 중 잊지 못할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느 여름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농촌교회는 보통 여름철이면 밤 9시나 돼야 성도들이 일을 마치기 때문에 그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날 따라 예배시간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크지 않았어도 열댓 명 이상은 모여 늘 예배드리곤 했는데 그 날은 한번도 빠지지 않던 몇 분의 권사님들 마저 볼 수 없었습니다.

 

결국 5분쯤 더 기다리다가 단 한 명의 신도만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묵도를 하고 찬송을 하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의 회중인 성도가 대표기도를 하고 나는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한 사람을 놓고 설교를 해보았습니다. 예배당 마루에 한 사람, 강대상 위에 한 사람, 설교를 계속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둘이 전부라는 사실에 웃음도 나고 성도가 없다는 생각에 가슴도 아프고 그렇게 설교를 시작한지 채 5분이 못되어 목이 메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설교하다가 한 사람의 청중 앞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계속 설교를 해야 할지, 그리고 이렇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젊은 목회자로서 패기가 꺾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예배는 그렇게 끝까지 드려졌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나는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많은 것을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목회자에게 성도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준 시간이었고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심을 더욱 깊게 가르쳐준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아픔이 있었지만 “두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리라”는 하나님을 말씀을 체험할 수 있었던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예배를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서투르고 보잘 것 없는 젊은 목회자가 단 둘이 드렸던 예배에 임재하신 하나님 그분을 기대하며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worthship(가치가 있는 것이란 뜻)’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구약의 예배는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아벨의 예배(첫 새끼와 기름의 번제)와 가인의 예배(땅의 소산의 소제)에서 시작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 때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말씀한 것으로 보아 제물을 바치는 제사(예배)를 드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세 때에 와서 이 예배는 여러 가지의 형태로 변화되었습니다.

 

구약의 예배는 레위기에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위 5대 제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레위기 1장에는 번제, 2장에는 소제, 3장에는 화목제, 4장에는 속죄제, 5장에는 속건제가 나옵니다. 번제는 헌신과 순종을 말하고 소제는 봉사를 의미하고 화목제는 평안을 뜻하고 속죄제는 대속을 의미하고 속죄제는 만족을 말합니다. 이 5대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온전히 드리라’는 데 있습니다.

 

신약의 예배는 구약의 예배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특징되고 있습니다. 신약의 예배는 영적 복음서인 요한복음에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4장 23∼24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그러면 참된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영어로 예배를 ‘worship service’ 혹은 그냥 ‘service’라고 부르는데 그 말속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즉, 예배는 생활과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자기 어머니 화장대 위에 청구서 비슷한 글을 하나 적어놓았습니다. 엄마 없을 때 동생 돌봐준 값 500원 방 청소한 값 500원 아빠 구두 닦아 준 값 500원 엄마 심부름 한 값 500원 산수시험 100점 맞은 것 1000원 합해서 3000원 그리고 밑에 쓰기를 내일까지 꼭 주시기 바랍니다. 이 아이가 학교에 갔다 돌아오니 아이 책상 위에 어머니의 편지가 놓여있었습니다. 아들아 너를 내 뱃속에 넣고 열 달 동안 고생한 것 공짜 7년 동안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것 공짜 네가 아팠을 때 너를 업고 어두운 밤길을 달려가 응급실에 데리고 간 것 공짜 네가 공 차다가 뒷집 유리창을 깨뜨려 물어준 것 공짜 앞으로 너에게 들어갈 학비 모두 공짜 그리고 밑에 쓰기를 아들아 나는 너에게 청구할 것이 하나도 없다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셨습니까? 이 초등학교 1학년 아들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는 아니하셨습니까? 하나님 제가 오늘 다른 곳에 갈 수도 있는데 특별히 하나님을 생각해서 눈이 많이 내렸지만 이렇게 예배드리려 나왔습니다. 무슨 복을 주시겠습니까? 저는 다른 성도들 보다 일찍 나와 찬양연습을 하고, 찬양을 하는데 저에게는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저는 십일조를 열심히 드렸는데 무슨 복을 주시겠습니까? 저는 눈이 많이 쌓인 오늘 새벽에도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어떤 복으로 저에게 채워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요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너에게 생명 주고 건강 준 것 공짜 너에게 한평생 마실 공기 주고 마실 물 준 것 공짜 너의 죄를 다 용서해준 것 공짜 사랑하는 나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해서 너를 내 자녀로 택하여 구원 한 것 공짜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예배드릴 마음이 생기는 때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이요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것임을 내 마음속 깊이 깨달을 때입니다. 그때부터 찬송이 나오고 그때부터 감사가 나옵니다. 내게 주어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될 때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와 감사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요셉 케이보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주의 통치하에 있을 때 아주 유명했던 인물입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공산주의를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어릴 때 그는 주일 아침이면 3시간동안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갑니다. 교회에 가서 2시간30분 동안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마치면 공원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에 다시 2시간30분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다시 갑니다. 그리고 3시간 걸려서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힘을 쏟아야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1주일에 예배 한번 드리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일입니다. 한번의 예배를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예배를 드리러 가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즐겨해야 합니다. 예배하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예배하러 가는 것은 그 자체가 가치입니다.

 

"생명의 삶"에 나온 글입니다.

러시아에서 한 교회의 주일 아침 예배 설교를 부탁 받았습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나뿐 아니라 여러 명이었습니다. 예배는 거의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뒤 그 교회 목사님과 잠깐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배가 긴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교인들의 열의에 더욱 놀랐습니다. 3시간 내내 그들은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지루한 기색도 없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도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운을 떼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요, 예배가 한 시간이 넘으면 여기저기서 시계가 삑삑거립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게 허용되지 않았고, 발각되면 모두 감옥에 들어갔지요. 지금 이런 일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 질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저 행복한 겁니다. 그리고 어떤 앞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매주일이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겁니다.”

 

그동안 나는 예배를 너무 건성으로, 느긋하게, 습관적으로 드렸던 게 아닌가? 이 사람들은 예배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초를 당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다시 감내할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갈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죽을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한평생 살면서 예배만큼 귀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도 예배가 이토록 큰 의미와 중요성을 갖고 있는 가요?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워털루 전쟁에서 참패하여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당신 평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한참 눈을 감고 회상을 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전투가 치열하던 어떤 주일이었죠. 그때 나는 졸병이었지만 아침에 철모를 벗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린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가 내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지금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처럼 유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여야 합니다. 아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순간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순간입니다. 예배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최고의 행복이요, 가치요,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예배를 회복하고 존중히 여기십시오.

 

본문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

 

로마서의 구조를 살펴보면 1장부터 11장까지는 무엇을 믿느냐 믿음에 대한 말씀이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장 1절 2절은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는 첫 부분으로 총론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예배를 생활의 가장 중심부에 두고 살아야합니다. 예배가 최우선이 되어야 하고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성도는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중심으로 하여 1주일동안의 모든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여행 중에도 주일에는 꼭 돌아와 예배를 드리고 부득이 돌아올 수 없으면 어디에서든지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예배를 중심으로 사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예배는 드리되 그것이 생활의 첫째는 아니라는 생각으로 사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등산가자고 하면 산으로 가고 낚시하러 가자하면 낚시터로 가고 비가 오고 눈이 내려 갈 데가 없으면 예배드리기 위해 옵니다. 이런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그 생애 중에서 첫 번째 우선순위가 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만사를 제하고 예배는 꼭 드려야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예배에 의해서만 살 수 있습니다. 예배에 몇 주일 빠지게 되면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를 의심하게 되고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예배가 없는 성도는 영적으로 죽은 성도입니다. 영적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가족이 함께 예배시간마다 꼭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예배가 중심입니다. 예배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예배가 최우선임을 명심 또 명심해야합니다.

 

1절에 영적예배라고 했습니다. 헬라어로는 합리적 또는 영적이라는 뜻입니다. 외면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영적예배이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우선해야 하기 때문에 합리적 예배입니다. 이와 같이 예배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교육도 하고 봉사도 하지만 예배 없는 봉사 예배 없는 교육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배 없는 봉사는 위선을 초래합니다. 모든 것의 핵심은 예배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합니다. 예배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 2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드리는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지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그 발에 입 맞추며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귀담아 듣고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시 한번 새롭게 다짐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구약에서 예배는 곧 제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양을 잡아 바치는 희생입니다. 신약에서는 구속하신 은혜를 찬양하는 잔치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섬기고 찬양하며 섬기고 기뻐하며 섬기고 말씀을 순종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입니다.

 

신학자 몰트만은 “예배를 메시야적 잔치”라고 정의했습니다. 찬송은 아주 귀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오직 찬송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새롭게 한다는 말은 질적인 새로움을 말합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이 예상 밖으로 길어져 희생자가 많아지자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동족끼리 싸워서 하루에도 수백 명씩 젊은이들이 죽어갑니다. 마음이 괴로운 링컨은 집무실에서 하나님 앞에 두세 시간씩 엎드려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대통령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본 장관들도 문밖에서 기도하다가 대통령이 문을 열고 나올 때에 장관들이 송구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우리도 문밖에서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대통령이 깜짝 놀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 달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나는 지금 내가 하나님 편에 섰는가가 걱정하고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그것을 걱정하고 있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중 일세 참으로 귀한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예배 전에 가졌던 마음 즉 소원이 많습니다. 건강도 물질도 명예도 지위도 그러나 그것은 예배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소원 성취하겠다는 마음은 예배드리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알 수 있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이것이 예배드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나의 의견과 마음의 소원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 바치는 제사행위였습니다. 제사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사 우리는 이미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만나실 때에는 제사를 통하여 만나고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제사를 통하여 나아갑니다. 제사 드릴 때 첫째 제물이 온전해야 합니다. 흠이 있어서는 안되고 부분을 드려서도 안되고 전체를 드려야하고 건강한 것을 드려야 하고 최상의 것을 드려야합니다. 우리 생애의 일부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생을 모두 드려야하고 전체를 드리는 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둘째 제물은 깨끗하고 정성이 담겨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올 때에는 의복에서 마음까지 다 깨끗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올 때 자세가 분명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양이 문제가 아니고 질이 문제입니다. 구약에 보면 부유한 사람은 소를 제물로 드리고 좀 못한 사람은 양을 드리고 그보다 못한 사람은 양의 새끼를 드리고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렸습니다. 자기의 수준에 맞게 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이 드린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이 드린 제사는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한 일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가인의 제사는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어떤 학자는 가인은 성격이 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제사의 차이는 아벨은 피 흘리는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피는 생명이므로 피를 흘렸다는 것은 생명을 죽였다는 것이고 피를 드렸다는 것은 생명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신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벨은 제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죄를 범한 자기 생명을 죽여 바치는 마음으로 짐승을 죽여 바쳤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가 더 나은 제사이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제사에 대한 평가 기준은 제물의 성격과 많고 적음에 앞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믿음에 있습니다.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고 가인은 믿음이 없이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레위기 10장 1절 2절에 보면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하나님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하나님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하나님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예배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예배에 달려있습니다.

 

로마서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이교도의 사원과 예배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이교도인 팜프스와 예수를 믿는 키루스가 사원과 예배당에 가는데 팜프스는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제물을 바칠 짐승을 가지고 가고 예수 믿는 키루스는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예배당에 갑니다. 팜프스가 키루스에게 묻기를 야, 너는 예배드리러 가면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느냐 나는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예배드리러 간다. 그런데 너의 손에는 왜 아무것도 없느냐 그러자 예수 믿는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다른 어떤 제물이 아니라 바로 가장 귀한 나 자신이다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물질이 아니고 짐승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거룩하게 살아있는 채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집사가 퀘이커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다들 기도만 하고 있고 예배가 시작되지 않아 옆에 있는 교인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예배를 시작합니까? 그 교인이 당신이 예배당을 나가는 순간부터 예배가 시작됩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성도는 공장 작업대가 예배실이고 마트를 운영하는 교인은 마트의 계산대가 예배실이고, 사무 보는 사람은 사무실이 예배실이고, 부엌에서 일하는 주부는 부엌의 조리대가 예배실이고, 의사는 진료실이 예배실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그 자리 내가 일하고 있는 그 자리 내가 만지고 있는 그 물건 그것들이 삶의 자리가 예배를 드리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는 말은 구체적인 생활을 말하고 우리의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생활을 가리킵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할 것 없이 전체를 다 모아서 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한 것은 늘 감사하고 늘 찬송하고 늘 새롭게 헌신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죽어지는 시간이고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 안에서 생명을 다시 찾는 시간입니다. 생명의 약속을 재확인 받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살아가는 삶이 예배입니다.

 

곽선희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부흥회가 끝나는 시간에 어느 집사님의 부인이 이불을 들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 집사님은 교회에서는 천사 같은데 집에만 오면 사람이 달라지니 아예 교회에서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불을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생활과 교회 밖에서의 생활이 일치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활 전체로 기도해야합니다. 생활 자체가 다 기도이어야 영적 예배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합리적 예배자로 살아야합니다.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별 할 수 있어야합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할 때 그 사랑하는 사람의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면 우선 그 사람의 식성이나 성향이나 취향도 다 알아야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자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장 2절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헬라원문으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엉뚱하게도 열심히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을 더 많이 합니다. 선한 일을 할 때도 정말 누구를 더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는지 구별이 안될 때가 많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나 불쌍한 사람을 도울 때 내 기분을 위해서 즉 즐기기 위해서 하는 도덕적 향락주의에 빠지는 위험도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본문 2절에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을 영어성경에는 유행을 따라가지 말라고 했고 변화를 받으라는 말은 다른 방향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헬라원문의 뜻을 본받지 말라는 말은 형식을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말이나 행동이나 모든 면에 있어서 이 세대에 대해서는 항상 역설적으로 살아야합니다. 열심히 유행을 따르다 보면 자연히 문제가 생기게 되고 신앙생활에 유혹을 받기가 쉽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관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있으므로 오직 예배드리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항상 찬송과 감사만이 있을 뿐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나의 주 하나님, 온전한 예배에 어울리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고, 예배에 성공한 삶을 살게 하소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더 깊은 헌신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게 하소서. 예배가 진정 나의 기쁨과 의미가 되게 하시고 늘 결단과 새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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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상군 2017.01.05 06:51

    목사님 설교말씀 잘 보았습니다. 종종 들려서 말씀보고 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