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반응형

나의 결심과 각오

본문: 사 6:8, 에 4:16

휴 애런슨 18세의 젊은 나이에 고향 스웨덴을 떠나서 혼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누구 한 사람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고 일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가지고 있던 돈도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서 무작정 서부로 가는 기차 화물칸에 올라탔으나 그만 열차 승무원에게 발각되어 실컷 얻어맞고 열차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매맞은 몸으로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도 처량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저 강물에 몸을 던져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불현듯 그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는 그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인생길에서 얼마나 힘있게 뛰어보았는가?’

그는 그 자리에서 두 주먹을 쥐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지나온 모든 과거를 흘러가는 강물 위에 떠내려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힘있게 뛰어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30년 후, 휴 애런슨은 몬테나 주의 영광스러운 주지사로 선출되었습니다.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내일을 바라보면서 힘차게 달리시기 바랍니다. 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그들은 낙심하지 말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쉬지 않고 전진하는 인생이 됩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마음먹고 결단하는데 따라 성공 실패가 좌우되고 그 노력의 여하에 따라 자신의 운명도 좋게 혹은 나쁘게 결정되는 것입니다.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물리학자 퀴리는 결혼한 뒤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필사의 연구 끝에 라듐을 발견했습니다. 전 세계는 그들의 놀라운 발견에 찬탄을 보냈습니다.사실 당시 퀴리 부부는 심각한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돈을 벌기 원한다면 단번에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당시 천연 라듐의 값은 1g에 15만 달러나 됐는데 라듐을 생산하는 방법을 그들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허를 내서 억만장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공개를 해서 세상에 유익을 줄 것인가? 그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특허를 내면 자신들은 돈방석에 앉겠지만 공개하게 되면 그 꿈은 사라지고 대신 수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며칠간의 고민 끝에 마침내 결정을 내렸습니다.

“라듐은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가 먼저 발견한 것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을 모든 인류의 소유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청지기 정신이 그들 부부를 단순한 과학자가 아닌 인류의 가슴을 비추는 별이 되게 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과 영광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이것은 투철한 신앙과 민족정신으로 일제에 항거하다가 마침내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란 마지막 말을 남긴, 비록 몸은 온갖 고문으로 찢겨졌지만 얼굴에는 천국의 소망으로 밝은 웃음을 머금은 채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의 한 부분으로서 일사각오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 줍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우상숭배와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분은 없다는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게 합시다.

인생은 선택과 결단으로 이루어집니다. 선택해도 결단하지 못하면 선택한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결단에는 용기와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결단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그런 까닭에 결단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인생의 승리는 결단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새뮤얼 존슨은 “결단력이 없다면 실행할 수 없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다. 결단력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을 거둔다. 모든 성공은 이 진리를 토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습관적으로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우유부단한 사람은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요동하는 물결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고 어떤 일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유부단한 사람은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사람입니다(약 1:6∼8).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우유부단을 정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단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결단한다는 것은 뜻을 정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한 인생을 살았습니다(단 1:8). 그는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비록 그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고 해도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결단한다는 것은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믿음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산다는 것은 모험하는 인생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을 향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히 11:8).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말씀을 좇아간 것입니다. 그 결단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결단한다는 것은 초점을 맞춘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곧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방향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방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성취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징병제도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원한 사람에게 사명을 맡기며 그를 활용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그로부터 자손만대까지를 보장하십니다. 지금도 한국교회 역시 추수할 곡식은 너무 많지만 추수할 일꾼이 적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실천하는 봉사, 헌신정신은 아주 희박하다는 것이 교회현실입니다. 개인주의 실리주의가 팽배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즉 삼위의 하나님께서 일할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사야는 이미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맑고 깨끗한 영의 주도권에 잡혀있던 이사야는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하지만 반응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유는 영이 맑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에 바로 반응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자원하여 어디든지 가겠다는 결단입니다.

 결단의 선지자 이사야는 웃시야 왕 말년부터 유다의 다섯 왕을 거치면서 무려 60여년 동안이나 충실하게 선지자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이사야의 결단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들을 수 있는 영적 청각을 회복하여 주님의 음성에 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내 이웃과 일가와 친척을 구하라는 명령에, 작은 일에, 난처한 일에도 이사야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의 결단이 헌신으로 혹은 순교에까지 이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결단과 결심에서 일어납니다.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그의 인생에서 단호한 결단을 내린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변호사였던 간디가 인종차별과 영국의 지배를 거부하는 단호한 결단을 내렸을 때, 대영제국으로부터 인도를 해방시켰으며 비폭력의 위대한 힘을 증명하고 마하트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셨을 때 오직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초점을 맞춘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초점을 맞춘 삶,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기도를 하며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인류구원을 위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의 기도를 마치시고 드디어 십자가를 지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이 일어나고 성령이 강림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결단한다는 것은 사명을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했습니다(행 20:24).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결단합니다. 행동합니다. 부디 준비만 하지 말고 결단하십시오. 공부만 하지 말고 결단하십시오. 기도만 하지 말고 결단하십시오. 과감하게 결단하고 과감하게 행동하십시오.

모세는 호렙산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석에서 결단을 내리고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우리가 올바르고 진정한 결단을 내리는 순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모든 성공은 작은 결단들이 모여서 일어난 결과입니다. 실패는 결단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고, 그 안에서 그것을 즐기면서 살아간 결과입니다.

결단은 한 순간에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도구입니다. 새로운 결단을 내리는 순간, 새로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가치체계가 확실하고 인생의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에 의사결정이 빠릅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결단은 느리게 하면서도 그 결단을 바꿀 때는 너무 빨라서 우왕좌왕합니다. 목표를 성취하기 전까지 돌이키지 말고 한번 내린 결단은 이를 악물고 버티고 지켜야 합니다. 한번 결단을 내리는 순간 우리 인생이 영원히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단은 즐거운 것입니다.

신앙인은 본문의 에스더처럼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에스더는 사촌오빠 모르드개의 역할로 파사국의 왕비가 됩니다. 그러나 가문의 영광도 잠시 뿐 온 민족적 멸망의 먹구름이 덮여 옵니다. 하만이라는 국무총리의 간계로 전국에 산재하고 있는 에스더의 동족을 몰살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 조서가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모르드개는 에스더 왕비에게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인지를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전하여 민족을 구할 방도를 구하라 합니다. 당시 왕의 부름을 받지 않고 왕에게 나가는 것은 왕국의 법도를 어기는 일로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오빠 모르드개에게 모든 동족들을 모으고 "3일동안 금식하라, 나도 시녀와 같이 금식하고 왕궁의 법도를 어기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왕앞에 나가겠다고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 결단은 바로 동족을 위해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후 에스더는 민족을 위하여 기꺼히 자신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지겠다는 결단입니다. 결과는 완전히 역전되어 간악한 무리들은 처형되고 풍전등화와 같았던 유다인은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런 결단은 생사를 초월한 삶의 고결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철저한 신앙적 자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자신과 민족의 위기를 극복했다는 사실로 큰 교훈이 됩니다.

1905년 알버트 슈바이처가 30세 되던 해에 한 잡지에서 이런 글을 보게 됩니다. “콩고 지방에서 선교사를 부르고 있음. 누구든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응답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자임.”

그는 20살 되던 해, 부활절이 지난 다음날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30세까지는 학문과 나를 위해서 살고 30세 이후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지. 예수님이 30세까지 사적으로 살고 30세 넘어서 공적으로 사신 것처럼 나도 30세까지는 이렇게 살아야지’하고 30세까지는 철학박사, 음악박사,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유명한 교수로서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가 30세 되던 해, 이 부르심을 입고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6년 동안 공부를 한 후에 콩고 지방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백인의 묘지라고 불리는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의 부르심을 입고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인류의 박애자, 성자로 역사에 길이 남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하는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존경하고 있는 마더 테레사는 1946년 9월 10일 마더 테레사는 다르질릉이라는 곳에 기차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에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테레사야, 캘커타로 가라. 그곳은 많은 거지들과 문둥병자들이 거리에서 나서 거리에서 살다가 거리에서 죽는단다 너는 그곳에 가서 그들에게 살아서는 잠자리를 주고 죽어서는 무덤을 주어라.” 그는 이것을 “부르심 중의 부르심”이라는 하는 그의 생애 소명으로 받습니다.

그는 이 음성을 듣고 기도하고 고민하다가 2년 후 1948년 8월 8일에 수도원을 떠납니다. 수도사로서 입은 복장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수녀복을 입고 캘커타로 갔습니다. 가면서 그는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오늘밤 나는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할지 모르고 떠납니다. 내일 아침 나는 어디에서 잠을 자야 자야 할지 모르고 떠납니다. 내일 아침 나는 어디에서 먹어야 될지 모르고 떠납니다. 나는 이 한 벌 옷이 해어지면 무슨 옷을 입을지 모르고 떠납니다. 주께서 떠나라 하시기에 나는 떠나오니, 주여 내 생애를 책임져 주시옵소서.”

그는 드디어 캘커타에 가서 연약한 여자의 몸, 오척 단신 작은 체구로 다만 주의 부르심을 입고 그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드디어 그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하며 눈물을 자아내는 위대한 생애를 실현한 여인으로서 그의 생애를 마칠 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음성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음성은 어떤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들려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다 자기 가정을 떠나고, 직장을 떠나서 선교사로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할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직장과 사업체와 가정과 일터에서 이런 삶을 살면 됩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이곳에 보냈다. 내가 너를 통해서 내 일을 하기를 원하노라.”

이제 우리는 내가 어느 곳에 가든지 주님께서 대신 보내심으로 살고,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우리는 내가 선 자리에서 비록 나약한 인간이요 죄인 중에 죄인이요, 아무것도 세상에 내 놓을 만한 것이 없는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분명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다. 주님의 뜻이다. 나는 분명히 이 곳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곳에 들어가든지 “주께서 나를 선교사로 보내셔서 여기 살고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먹고 결심하는데 따라 성공 실패가 결정되고 운명도 좋게 혹은 나쁘게 결정되는 것입니다.

룻기 1장 15-18절에 보면 위대한 결단, 복된 결심을 하였던 한 여인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이었고 과부였습니다. 가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이방 여인 시어머니, 남편도 없는 시어머니, 돈도 없는 시어머니를 죽어도 따라가겠다고 하면서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이다”라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심을 하게 되기까지는 시어머니 나오미가 착한 행실로도 본을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서 육신의 슬픔과 고난도 능히 이길 수 있는 심령의 평안을 체험했기 때문인 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남편도 죽고, 시아버지도 죽고 돈 한 푼도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가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러한 위대한 결심을 했기 때문에 결국은 큰 축복을 받고 후에 다윗왕의 증조할머니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적인 굳은 결심을 바로 할 때 우리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축복이 함께 하며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위대한 결심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1. 회개의 결심입니다.

지금까지의 죄와 잘못을 발견해서 철저히 회개하고 고치려는 결심입니다. 더러운 그릇에 좋은 것을 담아 줄 부모가 없는 것 같이 회개하는 일이 없이 하나님께서 참된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추악한 생각, 더러운 행실을 고치지 않고는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도 맺을 수 없고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55:7절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회개란 지식적으로는 죄를 깨달아 아는 것이요, 감정적으로는 죄를 슬퍼하고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며, 의지적으로는 버리기로 결심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묵은 것들을 정리하고 성령의 밝은 조명을 받아서 죄를 철저히 끊고 회개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시편139장 23-24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시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 하소서”리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게 회개하고, 솔직하게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지 못할 죄란 없습니다.

요한일서1장 7절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일본에 어느 여전도사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전도사님이 되기 전 어느 큰 부자의 첩으로 살았는데 이분이 예수를 믿고서 자신의 삶이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 즉시 남자하고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남자한테 말했더니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안되길래 굳은 각오로 남자가 없을 때 면도칼로 한쪽 귀를 싹둑 잘라 버렸습니다. 남자가 집에 돌아와 보니 여자가 피투성이로 된 모습을 보고 왜 그랬느냐고 묻길래 이 분은 그 이유를 말하고 만약에 이래도 안 헤어지면 한쪽 귀마저 잘라 버리겠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헤어지자고 했답니다. 그래서 이 분은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여전도사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증기 기관차가 다니던 때입니다. 한번은 기관차를 발동을 걸려고 하는데 엔진에도 이상이 없고 물도 이상이 없는데 도무지 안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검사를 해 보았더니 물을 집어넣는 파이프에 뱀이 따라 들어가서 막혀서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죄가 가로막힐 때 해결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리할 것은 정리해야 합니다.

2. 성경 말씀을 읽기로 한 결심입니다.

무디 선생은 말하기를 ‘성경이 죄로부터 지켜 주든지 죄가 성경으로부터 당신을 지켜 주든지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읽고 묵상하는 생활을 하지 않고는 죄를 이기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결심하기를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119:15-16절)라고 했습니다. 또한 다윗은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복된 사람이 되고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고 교회에 와서는 설교 말씀을 귀를 기울이기로 결심해야 될 줄 압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신문은 한자도 빼놓지 않고 보는데 성경 말씀은 전혀 읽지 않고 있다가 주일날이나 되어 어느 구석에 처박혔던 성경에 앉은 먼지를 툭툭 털어 가지고 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배우나 가수들의 이름은 잘도 외우는데 성경의 12제자 이름도 모르고 몇 년씩이나 믿는 이도 있습니다. 매일 음식을 먹듯이 영혼의 양식을 섭취하도록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변화와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3. 기도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사요 선지자인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리라”(삼상12:23절)고 한 것을 보면 어떤 시련과 고통이 와도 절대로 기도는 쉬지 않기로 결심한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멸망 직전에 있던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하고 영적으로 큰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다윗도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이다”(시116:2절)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은 열어 놓고 기도하는 생활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그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생명을 위협 했지만 결코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라가 몇 번 바뀌어도 그의 위치는 변치 않고 끝까지 위대한 정치가, 신앙가, 선지자로 승리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영혼구원을 위해서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매일 첫 시간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하도록 결심해야 되겠습니다. 기도야 말로 승리의 비결이며, 부흥의 비결이며, 문제 해결의 비결이며, 축복의 비결입니다.

4. 전도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로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4절)고 말씀한 것을 보면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부터는 온 정열을 전도하는 일에만 쏟았던 것을 알 수 있고, 그는 또 “나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은 내 민족이 구원 받는 것이라”고 말했고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몇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가장 거룩하고 가장 고귀한 욕망은 구령의 열정입니다.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 이상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하고 많이 말하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기뻐하시는 뜻은 요한복음6장 40절에 밝히 나타나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도 예수님을 모른채 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가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는 사업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당 짓는 것도 왜 짓습니까?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이 영혼구원에 초점을 맞추길 바랍니다.

5. 십일조 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축복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결심치고 십일조의 결심보다 더 좋은 결심이 없는 줄로 압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아버지와 형님께 죄를 짓고 도망가다가 들판에서 첫날밤 돌베개를 베고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때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한 사닥다리가 하늘과 땅사이에 놓였는데 수다한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면서 결심하기를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당신을 위해 살겠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꼭 바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성실치 못했으나 후에 십일조를 잘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크게 축복해 주셔서 집을 떠날 때에는 개나리 봇짐하나 가지고 떠났으나 여러해 후에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거대한 부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십일조를 성실하게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그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를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생활을 할 때 반드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며 때가 되면 창고가 넘치도록 채워 주십니다. 십일조는 축복의 창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버는 돈은 언제 다 새어 나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말라기3: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성실하게 믿음으로 해본 사람은 다 체험합니다. 성실하게 십일조 생활을 해서 축복 받는 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6. 성수주일의 결심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일주일의 하루는 하나님의 날로 거룩하게 구별해 바치도록 법칙을 세웠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되 하루는 영혼을 위해서 안식하는 날로 세워서 이날을 거룩히 구별해 바칠 때에 영혼과 육신이 아울러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토요일로, 신약시대부터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을 주일 날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 날을 거룩히 구별해 바칠 때 하나님은 영육간에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주일은 내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입니다. 이날은 내 오락이나 육신을 위해서 쓰면 안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주님을 위한 날이어야 합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사58:13-14절)고 하였습니다. 주일을 잘 성수하여 축복받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