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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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높이고 자랑하지 말라

본문: 고전3: 21- 23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월남 이상재 선생이 YMCA 총무로 있을 때 신흥우와 함께 강연 차 지방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주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신흥우가 먼저 등단하여 월남 선생을 소개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미 돌아가신 명사들만 존경하고, 숭상하고, 찬양할 것이 아니라 현재 생존해있는 위인을 더 존경하고 아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여기 앉아 계신 월남 선생 같은 분이 바로 그러한 인물입니다’ 강연회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이상재 선생은 화가 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궁금해진 신흥우가 ‘선생님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라고 묻자 월남 선생은 ‘예끼, 이 사람. 사람을 앉혀놓고 죽인단 말인가’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위대한 인물은 죽은 후에나 만들어지고 받들어지는 법인데 뒤에다 앉혀놓은 채 위인이라 떠들어댔으니 자신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신흥우는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종교도 정치도 학문도 사람을 숭배하거나 높이고 떠받드는 것은 공동체와 역사를 위해 불행한 일입니다. 인간을 바로 알고, 바로 보고 바로 평가하는 풍토가 자리 잡아야 합니다.

사람을 높이거나 사람을 자랑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늘날 신앙의 단체인 교회라 하면서 자기네 목사와 자기네 교주를 높이는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 중에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이는 우리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여기에서 벗어난 신앙행위는 탈선된 믿음이며, 위험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예수님을 믿되 성경에 기록된 나사렛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중보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도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마23: 8- 10)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마27: 51) 이는 더 이상 제사장이 필요 없게 됨을 뜻합니다. 우리 성도는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벧전2:9),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1:12, 롬8:16, 17) 자녀가 아버지를 만나는데 중개인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신부요, 친구입니다.(사62:5, 마15: 1- 10, 요15:13, 14, 사41:8)) 신부가 신랑을 만나는데 중개인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개인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마리아나 교황이나 성직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우상화하고 높이고 의지하지 마십시오. 무릇 부모, 자식, 친구나 성직자, 이웃이나 형제나 심지어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사람을 의지하고 믿으면 언젠가 실망하고 넘어집니다.(렘9:4, 렘17:5, 미7:5)

 

한국 교회 목사님들이 자주 하는 농담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한 분이 천국에 도착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이 목사님을 보자마자 너무 열렬히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변의 평신도들이 예수님께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세상에서도 목사님들이 제일 대접을 많이 받았는데 천국에서까지도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며 환영하십니까? 너무하십니다.”

이런 항의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니다. 너희들이 참으로 오해하였구나. 목사를 차별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하도 오지 않다가

아주 오랜만에 왔길래 너무 반가워서 내가 이렇게 환영하는 것이란다”라고 하셨답니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목사를 너무 바라보거나 높여서도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향하여 나의 교회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된 주인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특히 한국의 정치인과 삯꾼 목자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쉽습니다. 작은 재물이나 말 한마디로 오랜 친구사이가 우정이 깨지고 떠납니다. 믿었던 사람이 배신하고 속이고 변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귀인(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시146:3)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29:25)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의 가장 큰 문제인 분열과 조직화의 원인은 대부분 사람을 높이는 데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분열도 성도들이 당시에 현존하던 사도들을 높이는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도행전 당시에 제자들 가운데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교황 같은 존재가 없었습니다.)

신약성경을 읽을 때 당시의 제자들 가운데는 왕 같은 존재가 없었습니다. 천주교는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라고 하지만 베드로는 당시에 절대로 오늘날과 같은 교황의 지위를 갖지 않았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이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신 것을 그 근거로 삼지만,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에서 열린 할례에 관한 사도와 장로들의 회의에서는 야고보가 의장처럼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 집에 가서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고 함께 먹은 기록이 있습니다. 11장에서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은 베드로를 힐난하며 이방인과 함께 먹은 것을 추궁하듯이 물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일을 자세히 설명하고 그들의 동의와 받아들임을 얻어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볼 때 결코 베드로는 당시 믿는 이들 가운데 왕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2장에는 베드로가 바울에 의해 책망을 받은 일이 적혀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에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신약의 복음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떠합니까? 바울 또한 사도행전 15장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이방인 가운데 행한 역사를 간증했고 야고보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당시에 전혀 유명한 자가 아니었고 그의 사도직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사도 직분을 항상 스스로 천거해야 했습니다(갈 1:1, 11-24, 2:6-9, 고전 9:1-2, 고후 11:18-23 참조). 그러므로 당시의 사도들 가운데에나 믿는 이들 가운데에는 교황같이 높은 존재가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이시며 인도자이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이방인 가운데는 대인(大人)이 있어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지만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는 크고자 하지 말고 도리어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막10:44).

초대 교회 당시에는 승천하신 그리스도만을 높였으며 서로 문제가 있을 때에는 사도들 가운데에도 권면과 책망이 있었습니다(행 21:19-26, 갈 2:11-14 참조).

교회가 천주교로 변질된 가장 큰 원인은 교회사(敎會史)에서 볼 때 사람을 높인 결과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장로보다 감독이 높은 위치에 있다고 보았고 선지자나 교사의 직분까지 감독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감독의 권위를 높이기에 힘썼습니다.

또한 키프리안(Cyprian A.D. 195-258)이라는 교부는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며 감독들은 사도들의 후계자이고 교회의 통일은 감독단의 통일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가운데 로마 교회의 감독이 다른 교회의 감독보다 가장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려 했습니다. 그 뒤에도 많은 사건과 일들이 일어나고 결국 로마가 영적 세계의 중심지로서 자리잡게 되고 로마의 감독은 감독 중의 감독(the Bishop of Bishops)의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로마의 교권을 강화하기 위해 선교사들을 파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레고리 1세(GregoryⅠ)는 어거스틴(Augustian)을 영국에 보내어 영국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자 로마 감독의 통치에 들어오게 했습니다. 선교사들이 가는 곳마다 그들의 개종자로 하여금 로마 감독에게 속하도록 하면서 로마 감독의 영향력을 신장시켜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이 높여지자 그레고리 1세에게는 교황이라는 이름이 주어지고 교황은 절대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교황은 교회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고 그의 음성은 곧 하나님의 음성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의 말은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배워야지 교회의 실패를 또다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사람을 높이는 인간의 근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8장 5- 2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사무엘에게 요청합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생수이신 예수님을 가까이 두고도 허탄한 것들을 좇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소경된 인도자들이 있습니다.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인도자들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15:14)

지금 우리 사회의 눈 먼 사람은 누구입니까? 권력에 눈먼 사람, 탐욕에 눈먼 사람, 돈에 눈먼 사람,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자신을 지도자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오늘날 한 치 앞도 못보는 상태에서 남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하나님만을 높이지 않고 사람을 높인 결과는 교회의 조직화와 분열에 대해 문을 열어줄 뿐 유익이 하나도 없고 주님과 교회에게 큰 해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 집사제도를 두게 된 것은 사도들이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기 위해서였습니다.(행6: 4)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당회장이라는 이름하에 담임목사가 교회의 재정, 인사, 예배 등 모든 일에 관여하는 독재자의 위치의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주님 외에 절대적인 지위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벧전5:3). 그리고 젊은 자들에게는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했습니다(벧전5:5). 그런 다음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는 주님 외에 절대적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의 ‘서로’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젊은 자는 물론 장로들에게 순복해야 하지만 장로들도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젊은 자나 장로들이나 모두 유일한 권위이신 그리스도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5장에는 병든 자를 위한 기도가 있습니다. 병든 자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을 위해 기름을 바르며 기도해달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병든 자는 아마 죄로 인해 병들었을 것이며, 그 죄는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힌 죄일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의 권위를 훼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야고보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서로’라고 말한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 땅에는 그리스도를 대표하여 죄의 자백을 받을 수 있는 권위자가 없습니다. 물론 젊은 자가 잘못해서 죄를 범하고 병에 걸릴 수 있지만 죄를 자백하는 데 있어서는 젊은 자뿐 아니라 장로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교회 안에는 주님 외에 절대적인 경배를 받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틀릴 수 있고 약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바울이나 베드로가 약점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만일 오늘 우리가 그들에게 ‘당신에게는 약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맨 먼저 바울이 우리에게 답해줄 것입니다. ‘내겐 약함이 많다. 나는 이런 여러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 (고후 11:16-23).

그는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우리가 약한 것같이 욕되게 말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가 과연 어떤 사람같이 신령하며 약점이 조금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베드로에게도 진리를 지킴에 있어서 실수가 있었습니다(갈 2:11 -12).

우리는 다만 우리같이 형편없는 죄인을 심판과 멸망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있는 사람을 신격화하고 그가 거룩하고 무흠하다고 여겨 주 예수님과 동격으로 높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아들과 같은 동역자에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다 죄인이고 하나님의 붙잡아주심과 은혜가 없으면 어떤 사람도 길거리에 있는 창기와 죄인과 다를 바 없이 죄 가운데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높여야 한다면 형편없는 죄인인 우리를 이러한 큰 죄악과 심판과 형벌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따르는 사람만큼은 다른 사람과 달라서 뛰어나고 완전하다고 믿고 높이는 데서 분열과 편견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인간은 말할 것 없이 다 죄인이고 연약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 단체 가운데 사람이 높여질 때 육체적인 일꾼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도 높여진 사람 주위에 몰려들게 됩니다. 사람을 높이는 일 자체가 어두움의 일이고 육체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나 자기의 말을 들어주고 칭찬의 말을 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육체적으로 열심인 사람들은 그러한 인도자의 약점을 파고들어 충성을 다 하여 그러한 인도자에게 신임을 얻게 됩니다. 또한 인도자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수행하기 위해 어쨌든 그와 마음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므로 그런 육체적인 일꾼들을 용이하게 사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반 사회에서나 국가 권력 안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유감스럽게도 심지어 그리스도인 단체 안에도 이러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단체든 그때가 부패의 시작입니다. 잠언에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는 다고 말했습니다(잠 28:12). 교회 안에도 사람이 높여져 육체적인 일꾼들이 득세하면 경건하고 생명의 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숨게 됩니다. 교회가 참된 하나님의 사도와 선지자를 영접하고 사랑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눈이 어두워질 때 참된 하나님의 종들을 버리고 육체적인 일꾼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잠 28:4).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고 의지하여야지 믿을 수 없는 인생을 높이고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사2:22) 공동체가 인본주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공동체의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로마서 3:10)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십시오. 당시 의인이었던 노아도 포도나무 아래서 취하여 벌거벗고 자다가 자기 아들을 저주하였고(창9:21- 25),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자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창20:1- 3),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기다리지 않고 하갈을 첩으로 맞아 이스마엘을 낳지 않았습니까? 성군 다윗은 어떠합니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충신 우리아를 죽게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닭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한 사실 등을 통하여 이 세상에는 온전한 사람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하되 인간을 높이고 추앙하지 맙시다, 사람은 누구나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 한 곳으로 치중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한 인간 중심으로 뭉치면 안됩니다. 담임목사에게 당회장, 교회학교 교장, 이사장 등의 직책과 인사권, 재정권을 맡기면 안됩니다. 목사는 초대교회 사도처럼 오직 말씀전하고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하게 해야 합니다.(사도행전 6: 4)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고’(시118:8)

사람은 신뢰할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유명목사들이 은퇴할 때 추태를 종종 보지 않습니까? 보이는 담임목사 중심의 공동체는 예수님 중심,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정성진 목사의 말처럼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 그래서 갈릴리 공동체는 담임목사나 대표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공동체의 대표요 지도자이시고 모두가 형제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배울 때는 한 목사만의 설교를 고집하지 않고, 교계의 여러 존경할 만한 목사의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않을 것입니다.(마23:3) 소경되고, 어리석고 연약한 인간의 말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청종합시다.

한국교회가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합니다. 루터가 교황중심의 캐톨릭을 성경말씀의 중심으로 개혁하였듯이 한국교회가 담임목사 중심의 교회를 예수님 중심으로 진정으로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섬기는 교회로 바뀌도록 해야 합니다.

갈릴리 공동체는 기존교회처럼 담임목사 중심(인간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며 서로를 섬기는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의와 평강과 희락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 확산에 이바지 할 것입니다. 갈릴리 공동체의 후원과 기도를 부탁합니다.

여러분은 아직까지 어떤 자랑을 해 오셨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는 그 무엇을 자랑한 것입니까? 자랑할 학벌이 있습니까? 비록 서울대학교를 나왔다고 해도 그 일이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돈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벌게 하시고 보존하게 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들을 여러분에게 주시기고 하시고 누리게도 하시며 풍성히 쓰게도 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자랑은 헛된 것입니다.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내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내 인생의 반려자이신 하나님만 의뢰하고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고 주 안에서 새롭게 된 나와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여 참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사람을 높이거나, 자랑하지 말고, 세상의 허탄한 것들을 의지하고 자랑하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주의 뜻을 따라 이웃들에게 주님 안에서 자랑하고 주의 사랑을 전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람을 높이고 자랑하고, 세상의 허탄한 것들을 자랑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앞으로는 주님만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경배하고 주님만을 자랑하기 원합니다. 세상의 재물과 가족과 재능보다 하나님을 높이게 하시며 어떠한 유혹에도 굽히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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