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1 - 오네시모 (변화된 사람)
오늘은 아주 극적으로 변화된 한 인물을 만나겠는데요. 변화되어도 아주 유익하게 변화된 사람을 만나봅니다. 오네시모란 이름 뜻이 유익한 자 그런 뜻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기 전에, 변화되기 전에는 아주 무익한 종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정말 그 이름대로 명실상부하게 유익한 자로 변화된 것이지요. 신약의 여러 서신들 중에서 가장 짧은 서신들 중의 하나인데요. 그러나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나오는 빌레몬서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 오네시모 얘기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아 가지고 노예 해방 운동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 작은 서신은 신약성경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바울이 공적으로 쓴 편지가 아니고, 그저 유일하게 보존된 사신, 즉 사적인 편지였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 말고도 많은 서신을 기록하여, 활용했을 것인데 다른 사적인 서신들은 다 없어지고, 이 편지만 사적인 서신중에서 요것만 보존되었습니다. 바울은 아마 이걸 기록할 때 이것이 성경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안 했을 거예요. 그러나 작은 편지이면서도 성경이 될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책이 이 오네시모가 나오는 빌레몬서였습니다.
이 편지는 시작이 다릅니다. 다른 일반적으로 바울이 쓴 다른 편지는 자신의 사도의 권위를 앞에 내세우는 그런 인사가 꼭 등장하는데요, 여기서는 뭐 빌레몬에게 사도 이야기를 뭐 내가 사도라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어서인지, 그런 말이 전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또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거나 명령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호소하듯이 청원하듯이 그런 자세로 쓰고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니라 오네시모라는 종의 일로 그렇게 글을 쓰는 것이지요. 이 서신의 발신자는 바울이고 수신자는 빌레몬입니다. 그러나 그 서신의 주인공은 역시 오네시모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 지방의 가정 교회를 지도하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있던 노예였던 것 같은데요, 주인의 금품을 얼마 도적질하여서 도망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틈바구니에 숨어서 자신을 숨겨 살기 좋은 그런 큰 도시로 간 것이지요. 로마로 갔다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을 만난 것이지요. 어떻게 예수를 영접했는지 그 설명이 없습니다만 어떻든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의 삶은 변화되어서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유익한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정말 그를 곁에 두고 싶은 생각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주인은 빌레몬이기 때문에 돌려보낸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를 받아들이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받아 들이냐 하는 것이 이제 큰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사회제도에서는 노예는 주인의 도구에 불과했어요. 주인이 노예를 소유하게 된 후로는 그 노예의 생명이 주인의 손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노예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일 수도 있습니다. 유익이 전혀 없는 노예는 주인의 명령 그 한마디에 그냥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만 하지요. 그러한 죽음이 있을 때는 재판의 절차가 필요 없습니다. 주인이 그저 죽이려고 하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그런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바울이 자기 자신의 일로 이러한 부탁을 하는 일을 본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예수의 일로 나이가 많아서 지금 감옥에 갇힌 자가 되어서 갇힌 중에 낳은 아들, 낳은 아들 하는 말은 다시 말하면 전도해서 예수 믿게 된, 변화된 그 오네시모를 위하여 부탁의 편지를 쓰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이 편지에서 여기 편지에서 몇 가지를 들어서 받아 달라는 그런 부탁을 합니다.
첫째 오네시모가 전에는 정말 무익한 종이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서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 하는 사실을 들어서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영광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익한 사람을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데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기독교의 영광이라고 봅니다.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고, 속된 사람을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나운 사람을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 교만한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 야만족이나 해적들이 변화되어서 신사가 되는 것, 여기 인제 기독교의 영광이 있다고 봅니다. 창녀를 변화시켜서 성녀를 만들고, 세리를 변화시켜서 사도를 만들고, 깡패가 변화되어서 목사가 되는, 선교사가 되는, 약하고 병든 사람을 강건한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거기에 기독교의 영광이 있다고 봅니다. 오네시모란 이름의 뜻은 유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바울을 만나기 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야말로 이름뿐이었고, 그는 아주 무익한 아주 못된 종이었습니다. 그가 바울을 만나고 그리고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정말 이름처럼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 바울이 낳은 아들이 되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제자들을 마치 아들같이 여기고 있는데요, 고린도 인들을 향해서도 같은 말을 한 번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4절에서 16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쓴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구원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 교인들을 전도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을 수 있지만 아비는 많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복음을 가지고 너희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해서 예수 믿게 해 가지고 양육하는 그 초신 자들을 바울은 자기 아들들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바울의 아들을 빌레몬이 만약에 영접한다면 바울을 영접하듯이 해야 한단 말이지요. 이건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영접 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듯이 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바울이 낳은 아들이라면 빌레몬은 자기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오네시모는 옛날 도망한 노예, 도적질한 노예가 아니고, 바울의 아들로,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죠.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옛 사람으로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듭났다고 해서 사람에게 빚진 것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 다는 것이죠. 오히려 그 옛 사람에게 빚진 것을 청산함으로서, 정말 온전히 거듭난 새 사람이 된다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청산을 함으로서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오네시모의 빚을 갚을 것을 실제로 다루고 있으면서 이 빚진 것을 오네시모가 갚지 못하면 내가 갚겠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변상 없는 용서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도 그냥 용서된 게 아니고 그리스도가 그 피로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함으로서 용서된 것이지 그냥 죄를 그냥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빚을 졌을 때 그것은 구약시대 속권죄를 드리듯이 반드시 변상을 하고도 가서 잘못을 대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값없이 그저 베풀어 주시는 용서를 내가 누구에게 베풀 수는 있지만 그것을 내가 어디 누구에게 빚졌을 때 그것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기독교에서 가르침은 죄는 누군가가 댓가가 지불된 후, 대신 지불된 어떤 지불이 있어야만 완전한 용서가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울 자신의 죄를 담당해 주신 것처럼 바울은 오네시모의 죄를 자신이 담당하려고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그리고 영접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그리스도께서 오네시모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오네시모가 노예이면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받아 달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모든 사람이 형제가 되고 더 나아가서 한 몸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할 때는 우리 모두가 믿는 사람이 다 한 몸이 되는 것이지요.
기독교의 영광은 한 사람의 인격적인 변화와, 아울러 관계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딸을 임금님이 아내로 맞이해버리면 어찌됩니까? 황후가 되어 버려 가지고 나도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될 만큼 그렇게 변화된 관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내 딸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중전 마마가 되어서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오네시모는 그리스도께서 형제로 하나님께서 자녀로 받아 들였기 때문에, 빌레몬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됐다고. 그런 사실을 지금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 윤리의 기초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빌레몬이 오네시모에 대하여 끝까지 육신적인 관계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빌레몬서의 비밀과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링컨이 자유하고 노예가 같이 공존할 수 없다, 그러면서 노예 해방 운동을 일으켰다 그럽니다. 물론 이러한 관계를 죄를 지었던 오네시모가 주장하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할 수 있는 부탁이지 명령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들어서 편지를 쓰는 바울은 빌레몬에게 저를 네게로 돌려보낸다 하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돌려보낸다는 용어는 법률적인 용어로서 나는 이 사건을 너에게 넘긴다, 맡긴다, 끈이 넘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은 이 사건을 자기 양심의 법정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앞에서 판결 할 책임을 지게 된 것입니다.
네번째 바울은 오네시모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 일이 오히려 선을 이루어서 영원히 함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떠난 것이 아니냐? 그래서 오히려 더 잘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믿는 진리 중의 하나지요. 탕자가 집에 있었다면 항상 집 나갈 생각만 하고 기회만 엿 보고 있었을텐데, 아예 그냥 나갔기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해 가지고 돌아와서 변화돼 가지고 영원히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는 아들로 변화된 것입니다.
사람이 어려서부터 성실 일변도로 살아갈 수 있다면야 제일 좋겠지요, 바람을 피울라면 아예 올 바람을 피우고 돌아와서 마음잡고 일하는 것이 더 좋겠지요. 이 책은 기독교 윤리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종이라도 주 안에서는 한 형제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예전에 무익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보여주고 있고요, 오네시모의 빚진 것을 바울이 갚아 주겠다는 것에서 우리는 구속의 도리를 깨닫게 됩니다. 주인집으로 돌아간 오네시모가 그 후 어떠한 자세로 일했을까 하는 것은 우리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지요.
이 편지 역시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소아시아 골로새에서 도망하여 로마까지 갔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인도로 바울을 만나게 됐고, 바울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서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주인에게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 진리를 다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네시모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면 어떤 면에서는 인류 역사 전체처럼 압축된 이야기가 담고 있지요. 주인을 떠난 오네시모 하나님을 떠난 인간, 그리고 아주 무익하고 또 나쁜 사람이었던 이 오네시모가 예수님 만나 가지고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는 모습은 우리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다가 하나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어떤 의미가 거기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잠시 주인의 곁을 떠난 것은 깨닫고 돌아가서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지요. 이것은 복음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주인의 제물을 훔쳐서 달아나는 것은 악한 일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악을 선한 기회로 바꾸어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이 아름다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서는 빌레몬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바울의 이야기라든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 어떤 교리같이 안 보이는데요, 한 사람 이야기 속에 그 교리가 아주 명료하고 기독교의 어떤 진수를 담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거죠. 이 빌레몬서 즉 오네시모가 나오는 이 짤막한 편지를 바울의 연락책이었던 두기고가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두기고는 오네시모를 데리고 빌레몬을 찾아 갔겠지요. 그리고 자리에서 바울의 안부와 함께 이 편지를 전했을 것입니다.
빌레몬은 그 자리에서 바울의 간곡한 편지를 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감옥 생활과 거기서 오네시모를 유익한 사람으로 만들어 돌려보낸 일이며 거기에 담긴 복음의 진리를 뜨거운 마음으로 아마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두기고의 등 뒤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있었겠지요. 그때에 빌레몬의 압비아와 그의 아들 아키포가 거기 함께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바울은 빌레몬 자신이 부탁한 것 이상으로 오네시모에게 해 줄 것을 기대하고 또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처에 대하여 오네시모는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주인 빌레몬에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 믿음이란 바울의 중보를 인하여 주인 되었던 그 빌레몬이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 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이죠. 그러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려는 믿음과 맥을 같이하는 그런 믿음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종들이 같은 신앙을 가진 주인에게 주 안에서 형제라 이런 사실을 마치 무슨 큰 권리나 되는 것처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인에게 경솔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바울이 디모데전서에 그 기록한 걸 보면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노예들을 위해서는 그 주인들에게는 정말 형제처럼 받아달라고 하지만 또 종들에게는 믿는 사람이니까 뭐 다 우리 형제라 못하게 그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 5절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의 상전이 계심을 알 지어다
바울이 한 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노예들에게는 주인을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처럼 하라 하고 있고, 그 주인들에게는 노예를 부리는 사람들에게는 만일 그 노예가 예수를 믿었으면 노예에서 떼어 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처럼 대하라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윤리가 되겠습니다.
바울이 만약 노예 해방운동 같은 걸 한답시고 이걸 진리라고 무모하게 떠들어 됐다면 그 많은 노예들을 단속하느라고 법령은 더 엄해 졌을 것이고, 노예 해방은 고사하고 노예들만 죽을 고생을 하고 말았을 거예요.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바울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종들은 종으로서의 자기 임무를 다하되, 주께 하듯 하고 반대로 그 노예들을 부리는 사람들은 내 노예다, 내 재산이다, 나의 도구에 불구하다 그리 하지 말고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어쩌다 입장이 어려워져서 노예의 신분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즉 주 안에서 형제라 그런 마음으로 노예를 대하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성도의 삶은 섬기는 삶이어야 한다면 종이 되어서 주인을 잘 섬김으로서 주인을 감동시키는 것이 자신의 그 자유로 가는 척경이 되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의 주인이 주님을 알게 되어서 같이 믿게만 되면 비록 그 더딜지라도 말이죠,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떳떳하고 완전한 길이 되겠습니다.
지금 로마에는 노예가 없습니다. 아니 전 세계적으로 노예제도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오네시모의 회개와 빌레몬의 용서와 바울의 교훈과 중보, 또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지요. 온 세상에 지금 노예제도는 이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힘으로서 주인의 금품을 도망쳤던 그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만나서 변화시키게 되었고, 그 오네시모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노예제도가 없어져 가게 된 것이지요. 어떤 학자들이 이야기는 그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다시 바울을 섬길 수 있도록 로마로 돌려보냈다는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런 말을 했거든요. 내 곁에 두어서 너를 대신해서 나를 섬기고자 하나 그렇게 하면 억지가 되는 것이고, 내가 일단 저를 너에게 돌려보내니깐 형제를 받아 주듯이, 나를 동무라 알찐대 나를 받아주는 것처럼 받아 달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에 이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바울을 잘 섬기도록 이렇게 돌려보냈다고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후에 오네시모는 바울을 모시고 또 배워서 훌륭한 주의 일꾼이 되었고, 마침내 후일에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의 서신들을 수집하기 시작해 가지고 오늘날 바울 서신들이 오네시모의 손길에 의해서 다 수집되었다 그런 전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학설이 근거가 있는 것은 그로부터 한 50여년이 지난 후에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잇나티우스가 로마로 소환돼 가면서 서머나 에서 편지를 쓸 때에 에베소 교회 감독되는 오네시모에게 편지를 쓴다 하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 서신에서 잇나티우스는 에베소의 감독을 위대한 감독으로 존경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노예 출신의 감독이 당시 세계 교회 선교적 중심 교회, 다시 말하면 에베소 교회는 세계 교회의 중심이었으니까요, 그런 교회의 감독이 되어 가지고 로마 판도 내의 모든 지역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그 노예들을 잘 지도했기 때문에 그 모든 노예들이 오네시모처럼 변화돼 가지고 진실과 성실로 순종해서 그 주인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마침내 그 로마가 기독교화가 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보는 시각도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위에서 무슨 그 권력자라든지, 왕이나 이런 사람들이 나를 따라 믿으라고 억압해 가지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은 사람들의, 그 노예들의 정직하고, 성실하고, 겸손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그 순종을 가지고 주인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로마의 고관대작들 다 변화시켰다는 그러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오네시모 이야기로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정말 그 주인의 집에서 재산을 도적질해서 도망 간 것은 불행스러운 일이지요. 그러나 로마에 가서 바울을 만난 것은 천만다행이고요, 바울을 만나서 예수를 믿어 가지고 이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돌아 가면 맞아 죽을 수 있으니까 로마에서 살아 버려라 이렇게 지도하지 않고 바울이 정말 성실하게 네가 정말 완전하게 용서 받으려면 네가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 진정 회개다, 입술로만 회개가 아니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은 네 주인에게 돌아가서 다시 충성을 다 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다 그렇게 지도를 했기 때문에 오네시모가 돌아가서 자기 주인 빌레몬에게 정말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용서를 받아 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얘기가 우리가 봐서는 성경이 될 것 같지가 않는데, 가만히 생각할수록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단 말이지요. 집을 나간 그 주인의 집에서 도적질해 가지고 도망친 그 모습은 꼭 하나님을 등진 우리 인간의 모습과 같고요, 이를 위해서 그 오네시모가 빚진 것이 있으면 내가 갚겠다고 나서는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또 볼 수 있습니다. 중보자 혹은 대속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용서하는 빌레몬에게서 정말 하나님의 넓은 용서를 또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 이 짤막한 이야기, 오네시모 이야기는 길이는 짧지만 그 삶의 변화된 이야기는 아마 일평생을 두고 간증할 수 있는, 수많은 노예들을 감동시켰을 것이고, 또 수많은 그 노예들을 변화시켜서 역사의 흐름을 바꿔놨다고 할 수 있겠고, 전에도 말씀 드렸든 대로, 이 편지 이 감동적인 이야기가 미국의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서 미국에서 노예 해방이 된 것은 역사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한 사람의 이야기지만 기독교 진리가 여기서 아주 명료하게 유리알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오네시모 이야기를 우리가 들으면서 참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모습이라든지, 변화되는 과정이 뭐 그 길 말고도 변화되는 과정이 있겠지만 그 오네시모의 그 변화된 과정은 아주 극적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멀리 도망갔습니까? 에베소에서 그 로마까지 말이죠. 에베소라는 것은 지금 현재 터키 땅인데 거기서 그 먼 길을 가 가지고 어떻게 그 넓은 로마 시내에서 바울을 딱 만났는지, 정말 하나님의 역사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고 예수를 믿어 가지고 다시 돌아와서 변화된 삶을 삶으로서 그 아름다운 이야기는 온 세계 노예들에게 오네시모 이야기 빌레몬서는 노예의 복음이다, 뭐 노예를 위한 복음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복음이란 것은 그냥 값없이 용서가 아니고 누군가가 정말 대가를 지불하는 그런 아픔을 통해서 용서가 되고, 또 사람이 변화 되고, 그리고 무익한 사람이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거기에 바로 기독교 진리의 영광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방송을 듣는 우리 모든 청취자들도 무익한 사람에서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